오성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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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성묵.jpg
성명
오성묵(吳成默)
이명
오자강(吳自强)
생몰
1886년 ~ 1938년
출생지
함경북도 명천군
사망지
소련 하바롭스크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오성묵은 1886년생이며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이다. 그는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하여 길림 도립중학교를 졸업한 후 북간도에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에 종사했다. 1913년 간민회(墾民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15년 중국 당국의 박해를 피하여 러시아 극동 연해주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로 이주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 및 중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징집되어 우랄 지방 페름스크 벌목장에서 일했다. 이때 김알렉산드라를 만난 그는 그녀의 영향을 받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

1917년 10월 혁명 직후, 오성묵은 하바롭스크로 이주해 1918년 4월 한인사회당 결성에 참여하였고, 1919년 초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19년 3월 오성묵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반일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조선어·중국어·러시아어·영어로 된 선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1919년 4월 오성묵은 하바롭스크 청년회장으로서 전로청년결사단(全露靑年決死團)을 조직했다.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사회당 의사원(議事員), 4월에는 재무부원(財務部員)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10월 한인공산당위원회(韓人共産黨委員會)에서 번역원(飜譯員)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 치타지방에서 선인내지선전원(鮮人內地宣傳員) 감독(監督)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 기념식을 주도하였고, 동년 3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린 고려공산당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선전부(宣傳部)를 맡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9년 1월 소련공산당 극동국 및 쏘비에뜨 집행위원회 한글 기관지 <선봉>의 사장으로 발탁되었다.

1937년 하바롭스크 극동국립출판사 조선부장으로 재임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을 단행하던 중인 1938년경 처형되었다. 1956년 12월 8일 투르께스탄군관구 군법회의에서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오성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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