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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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푸아트
عثمان فواد
Şehzade Osman Fuad

출생
1895년 2월 25일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츠라안 궁전
사망
1973년 5월 19일 (향년 78세)
프랑스 니스
재임기간
오스만오을루의 수장
1954년 6월 4일 ~ 1973년 5월 19일
아버지
메흐메트 셀라헤딘 황자[1]

1. 개요
2. 생애
2.1. 경력
2.1.1. 초기 경력 및 교육
2.1.2. 아프리카 군단 총사령관
2.1.3. 후년 경력
2.2. 개인 생활
2.3. 말년
2.4. 사망
3. 여담



1. 개요[편집]


오스만오을루의 39대 수장. 아흐메트 니하트의 이복동생이다.


2. 생애[편집]


1895년 2월 25일 츠라안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술탄 무라트 5세와 레프타르딜 카든의 아들 셰흐자데 메흐메트 셀라헤딘이며, 어머니는 잘레퍼 하넴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츠라안 궁전에서 보냈다. 이 궁전은 1876년 폐위된 그의 할아버지 술탄 무라트의 강제 거주지로 사용되었고, 그의 형인 압뒬하미트 2세에 의해 대체되었다.전 술탄에게 부과된 제한은 그의 가족 전체로 확대되었고, 190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해제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푸아트는 아버지의 별장인 페네롤루에서 몇 년간 살다가 츠라안 궁전으로 돌아와 술탄 무라트의 세 번째 부인 샤얀 카딘과 함께 살았다.

2.1. 경력[편집]



2.1.1. 초기 경력 및 교육[편집]


파일:Şehzade_Selaheddin_and_his_sons.jpg 1906년에 모습.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오스만 푸아트이다. 가운데는 메흐메트 셀라헤딘 황자이고 가장 왼쪽은 아흐메트 니하트이다.

1911년, 그는 이탈리아-튀르키예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리비아로 갔다. 그는 사이렌크 작전에 참가하여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만났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오스만 군사 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여기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3개월 동안 칼스배드 온천에 갔다. 그는 또한 유럽을 여행했다. 191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같은 해 중위로 승진했고, 1916년 대위로 진급했다.

1914년 오스만 푸아트는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아들 세흐자드 압둘라힘 하이리와 함께 포츠담 사관학교에 보내졌고, 그 곳에서 세흐자데 셀림 쉴레이만의 아들 세흐자드 파루크가 초대되었다. 카이저는 포츠담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갈리시아 전선, 시나이 전선, 트리폴리 전선에서 시나이 전선의 사고로 부상을 입은 이들 4명의 황자를 후사르 연대에 편입시켰다.

1916년 7월 29일, 그는 술탄 메흐메트 5세의 부관으로 임명되었고, 마이예이-세니예 기병대대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1917년 1월 4일 오스만 푸아트는 압두라힘과 함께 사기 진작을 위해 군대를 방문했다. 두 어린 왕자는 러시아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갈리치아로 파견된 제15군단을 방문했다.

1917년 4월 22일, 그는 제3군의 제2캅카스 기병 사단에 배속되었다. 1917년 4월 29일, 그는 요르단의 제6군과 제3기병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17년 9월, 오스만 푸아트는 불가리아의 왕비 쾨스트리츠의 엘레오노레 로이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불가리아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그는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빌헬름과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 외젠을 만났다. 1917년 10월 24일, 그는 오스트리아의 카를 1세에게 오스만 가문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빈으로 갔다.

2.1.2. 아프리카 군단 총사령관[편집]


파일:Osman_Fuad_Efendi_-_Berlin.jpg
1915년 베를린에서의 모습.

1918년 4월, 그는 아프리카 군단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이탈리아에 대항하는 지역 저항을 조직하기 위해 그를 독일 잠수함과 함께 트리폴리타니아에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의 군사력이 아니라, 정부가 이 임명을 통해 왕조에 대한 지방의 충성심을 동원하려는 시도였다. 엔베르 파샤는 젊은 왕자의 지휘 경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측근 중 한 명인 나프즈 베이 중령을 오스만 푸아트의 참모장으로 임명하는 데 신경을 썼다. 왕자의 도착은 리비아에서 이탈리아의 점령에 저항하는 지역 부족 지도자들의 충성심에 강화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현지 상황을 보기 위해 튀니지-리비아 국경을 시찰하는 등 군사적인 임무를 더 많이 수행했다. 반면에 이탈리아군은 이 새로운 발전에 만족하지 못했고 트리폴리타니아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오스만 푸아트는 이러한 공격에 군사적으로 대응하고, 지역 족장들 간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킴으로써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고 시도했지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오스만 제국이 무드로스 조약에 서명했을 때, 왕자는 여전히 트리폴리타니아에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프랑스군이 그를 이스탄불로 직접 보내주기를 바라며 프랑스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튀니지-리비아 국경에서 왕자를 맞이했을 때, 그들은 그를 이탈리아인들에게 인도했고, 그는 1919년 9월 이스탄불로 돌아오기 전까지 3개월 동안 이스키아 섬에서 왕자를 포로로 잡혔다.

2.1.3. 후년 경력[편집]


1919년 10월 7일 이스탄불로 돌아온 그는 11월 11일 소령 계급과 함께 이스탄불 중부 사령부에 임명되었다.


2.2. 개인 생활[편집]


오스만 푸아트의 유일한 아내는 네빌레 케리메 하님이었다. 그녀는 1898년 3월 15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이집트 왕자 압바스 힐미 파샤의 딸이었다. 그들은 1920년 2월 2일 츠라안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 한 명은 미래의 튀르키예 대통령인 이뇌뉘를 만났다. 그녀의 여동생 네빌레 에미네 하님은 술탄 압뒬하미트 2세의 아들 셰흐자데 압뒬라힘 하이리와 결혼했다. 그들은 아이가 없었다. 그들은 1932년에 이혼했다. 1971년 3월 28일 사망했다.


2.3. 말년[편집]


1921년 앙카라 운동이 이스탄불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자, 그는 아내와 함께 로마로 갔다. 1922년 3월 28일, 그는 해외에 있는 왕조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귀국하라는 경고를 받았고, 이후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그러나 1922년 11월 술탄 메흐메트 6세가 망명하자 오스만 푸아트는 다시 로마로 갔다. 1924년 3월 카를로비바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참전 용사이자 친구였던 무스타파 케말 파샤로부터 군용 택배를 통해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매우 유감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 예외를 둘 수 없고 너는 망명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이 법은 황실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오스만 푸아드는 무타르 파샤 워싱턴 주재 튀르키예 대사를 통해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원한다면 아나톨리아로 오겠다"는 답변을 보냈다 그는 답장을 받은 적이 없다.

1954년 6월 4일 형 아흐메트 니하트가 사망하자 오스만 푸아트는 오스만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형과는 달리, 오스만 푸아트는 극도로 현대적인 생활 방식을 택했고, 그의 즐거움을 좋아하고 삶에 대한 자연스러운 사랑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젊은 오스만 제국의 왕자로서, 그는 인기가 많았고 사랑을 많이 받았고, 이스탄불의 오픈탑 메르세데스에서 항상 흠잡을 데 없는 옷차림으로 운전하는 것이 종종 목격되었다.

그는 용맹하고 충성스러우며 관대했으며, 외모도 훌륭하고 숙련된 마부였다. 그는 조국에 대한 그의 용기와 봉사로 수여되는 많은 메달과 훈장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그의 제복을 입을 때 그의 가슴을 덮었다. 그의 가족의 다른 모든 구성원들처럼, 그는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

1970년, 그는 휘리예트 신문의 기자 도안 울루츠와 인터뷰를 가졌다. 당시 오스만 푸아트는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로얄 브르타뉴 호텔 6호실에 살고 있었다. 이 방에는 침대와 금이 간 세면대, 의자 두 개만 있었다. 황실 가족들이 망명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그의 묘사는 사실적이었고,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트리폴리의 오스만 군 사령관을 지낸 오스만 푸아트 장군이 언젠가 파리의 3류 호텔에서 요금을 지불할 여유가 없어 쫓겨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조상들이 싸우고 지배했던 그 땅,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쓰라린 달콤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우리가 그렇게 대우받아야 하는 것이 옳은가? 오스만 가족이 외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고국에서 먼 나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우리 중 일부는 가난과 빈곤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우리 중 몇몇은 "아, 튀르키예!"라고 속삭이며 죽었다! 튀르키예!" 우리의 마지막 숨결과 함께.

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은 외국 학교에 가서 터키어를 배우지 않고 자라는데, 마치 그들이 외국인인 것처럼 우리의 역사나 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당신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당신의 신문에 나의 사진을 인쇄하라는 것입니다. 그 아래에 '오스만 푸아트'라고 써라 – 그 이상은 안 된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나를 기억할 것이다."



2.4. 사망[편집]


푸아트는 1973년 5월 22일 프랑스 니스에서 사망했고 파리의 보비니 묘지에 묻혔다.

3. 여담[편집]


1911년부터 1913년까지 그는 페네르바흐체 SK의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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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라트 5세의 장남. 생몰: 1861년~1915년 5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