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훈(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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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勳
? ~ 1590년(선조 23) 8월 20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고려 왕조에 제사를 지냈다. 본관은 개성(開城)[1], 자는 대이(大而) 또는 충원(忠元).


2. 생애[편집]


왕순손(王順遜)과 청주 한씨 한승건(韓承乾)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승의랑(承義郞:정6품 문신의 품계) 내의원 습독관(內醫院習讀官)을 역임했다.[2]

이 밖에 관련 기록은 노년기인 16세기 후반에 편중됐다.

왕훈은 왕적 사후 숭의전 봉사손으로 전주 왕씨왕희가 선택된 것을 억울하게 여겨 1588년(선조 21) 임금에게 호소한다. 왕희의 개성 왕씨 행세는 당시 50년 가까이 됐는데, 왕훈이 노인이 돼서야 이 문제를 지적한 것은 본관 조작이 그제서야 발각됐기 때문일 것이다.[3]

왕희가 파직되고 이듬해에 왕훈은 봉사자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4] 선조는 백발이 된 왕훈이 노망이 들지 않았을까 우려해 승정원에서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하게 했는데, 왕훈은 상대와 어긋나는 것 없이 말해 봉사자로 선택됐다. 왕훈은 조선시대에 개성 왕씨의 정파로 인정됐으며, 손자 왕곤 등 그의 직계 후손들은 고종 시기 또는 그 이후까지 11대 이상이 숭의전에서 제사를 주관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연천군의 복원된 숭의전에서 개성왕씨중앙종친회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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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양군파-부사공파 18세.[2] 차남 왕중경(王重慶)이 1584년(선조 17) 별시 무과에 병과 7위로 급제했는데, 당시 무과방목에 보인다.[3] 왕희는 영녕공의 후손을 자처했다. 그러나 영녕공의 후손은 조선 건국 후 모두 성씨를 바꾸었으므로, 왕희가 같은 일족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4] 당시 봉사자 후보로 지명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왕희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