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보하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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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나 데미르스포르
Adana Demirspor Kulübü A.Ş.

파일:윈스턴_보하르더.jpg

이름
윈스턴 보하르더
Winston Bogarde

본명
윈스턴 로이드 보하르더
Winston Lloyd Bogarde
출생
1970년 10월 22일 (53세)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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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수리남|

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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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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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8cm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SV SVV (1988~1991)
SBV 엑셀시오르 (1990 / 임대)
스파르타 로테르담 (1991~1994)
AFC 아약스 (1994~1997)
AC 밀란 (1997)
FC 바르셀로나 (1998~2000)
첼시 FC (2000~2004)
지도자
FC 폴렌담 (2008~2009 / U-18 )
AFC 아약스 (2015~2017 / 유스 코치 )
AFC 아약스 U-21 (2017~2020 / 수석 코치 )
AFC 아약스 U-21 (2017 / 감독 대행 )
AFC 아약스 (2020~2022 / 수석 코치 )
아다나 데미르스포르 (2023~ / 수석 코치 )
국가대표
20경기 (네덜란드 / 1995~2000)
가족
조카 다닐료 두키
조카 멜라이로 보하르더
조카 라마어 보하르더


1. 개요
2. 클럽 경력
2.1. 네덜란드 리그 시절
3. 국가대표 경력
4. 지도자 경력



1. 개요[편집]


네덜란드의 축구인. 현재 아다나 데미르스포르에서 수석 코치를 맡고 있다.

현역 시절 AFC 아약스 챔피언스 리그 우승 멤버였으며 네덜란드 국가대표로도 활약했던 수비수 출신이다.


2. 클럽 경력[편집]



2.1. 네덜란드 리그 시절[편집]


중소 구단인 SV SVV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첫 포지션은 윙어였으며 1991년 에레디비시스파르타 로테르담에 이적한 뒤 우리가 알고있는 주 포지션인 센터백으로 포지션 변경을 했다.

하지만 윙어 출신의 발재간은 그에게 하나의 무기가 되었고, 포지션 변경 후 센터백임에도 불구하고 어마무시한 득점력을 보이며 팀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993-94 시즌에는 아예 시즌 10골을 돌파하며 팀의 인터토토컵 진출에 한 몫을 하기도 했다.

이후 1994년 리그 최강 AFC 아약스에 입단하며 빅클럽에 입성한다. 이적 첫 해는 벤치 자원에 머물렀고, 구단의 가장 전설적인 업적 중 하나인 94-95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또한 벤치에서 지켜봐야 했다. 그래도 1995-96시즌부터 팀의 핵심 수비수로 올라서며 준수한 경기력과 여전한 득점력을 과시했다.[1] 득점력 있는 중앙수비수는 매력적인 자원이었기 때문에 유럽 빅리그의 관심을 받게 된다.

2.2. AC 밀란[편집]


1997-98 시즌 그는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의 명문 AC 밀란에 입단한다. 그러나 시즌 초 주전자리를 얻는데 실패하며 단 3경기 출장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 바로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대회가 있었기 때문에 대회 엔트리 진입을 위해서 그는 타 구단 임대이적을 도모하게 되고 당시 루이 판할 감독이 이끌던 FC 바르셀로나로 임대를 떠난다.

2.3. FC 바르셀로나[편집]


1998년 1월 바르셀로나에 합류하자마자 그는 판할 감독의 중용을 받고 잔여 시즌 19경기를 모두 뛰었다. 또한 코파 델 레이 결승 2차전에서도 출전하며 바르셀로나의 우승을 이끌었고, 리그 또한 바르셀로나가 제패하며 시즌 더블을 완성하는데 공헌했다.

결국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다음해 바르셀로나 완전이적에 성공했고, 1998-99 시즌을 준비했지만 리그 첫 경기에서 시즌 아웃을 당할 만큼 큰 부상을 입고 통으로 시즌을 날렸다. 이후 1999-00 시즌 복귀에 성공해 21경기 2골로 반등에 성공했지만 이 시즌마저 잔부상에 시달리며 30경기도 소화하지 못해 내구성에 큰 의심이 가는 상황이었다. 결국 바르셀로나는 그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FA로 풀어주게 된다.

2.4. 첼시 FC[편집]



첼시 FC 팬들에게 보하르더는 금지어나 다름없을 정도로 기억이 좋지 않은 선수다. 2000-01 시즌 FA 계약으로 영입해 이적료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국가대표 선수에 부상경력이 있어도 득점력을 갖춘 장신 센터백이라는 매력적인 선수였기 때문에 주급 4만 파운드라는 당시로써는 거금을 들여 영입한 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단의 기대와는 달리 첼시에서의 4년 계약동안 보하르더가 소화한 경기는 단 11경기로, 심지어 2001년부터 프리미어리그 경기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시작부터 불운했다. 그를 데려온 잔루카 비알리 감독이 보하르더 영입 1주일만에 경질되고 후임으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이 구단 지휘봉을 잡았다. 시즌 초반 선발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교체와 선발을 오가며 뛰고 있었지만 라니에리 감독 체제 이후 점점 후보로 대기하는 빈도수가 잦아졌다. 결국 박싱데이에 열린 입스위치 타운 FC와의 경기에서 교체출전한 것이 그의 마지막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밀란과 바르셀로나를 거치며 몸이 유리몸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잦은 부상과 회복을 반복했고, 심지어 그는 선수단에서 고액 주급자 순위권이었다. 2002-03 시즌 리그컵에서 겨우 복귀전을 치렀으나 그것뿐이었다. 첼시는 그를 처분하려 갖은 노력을 했고, 심지어 그를 2군도 아니라 유소년 팀 훈련장에 배정하는 등 선수에게 굴욕을 선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계약 해지를 바랐다. 하지만 경기에 뛸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니던 보하르더는 끝까지 계약 해지를 거부한 채 주급을 꼬박꼬박 받았고, 2004년 6월 계약이 종료된 후 팀을 떠났다.

보하르더의 행동은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결국 돈이고 누군가 수백만의 돈을 제시했다면 가져가는게 맞다. 이렇게 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그 매우 운좋은 사람 중 한 명인 것이다. 프리미어 리그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이적이 되겠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저 발언을 들은 첼시 팬들은 매우 분노하였고 저런 행적으로 인해 아무리 다른 축구팀 팬들이 안드리 셰우첸코를 첼시 최악의 7번이라 얘기해도 셰우첸코가 첼시에서 먹튀였던 건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첼시 FC 역사상 최악의 7번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가 이 선수 때문이다. 첼시 FC/등번호 저주 항목에서 7번의 저주 항목의 다른 선수들의 설명만 봐도 다른 첼시 7번의 저주의 피해자들도 보하르더보다는 나은 편이다.[2] 심지어 축구 팬들에게 유명한 게임인 풋볼매니저 시리즈에서도 첼시 FC가 싫어하는 인물로 당연히 등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첼시를 떠난 그는 1년 동안 무적 신분이었지만 새로운 팀을 찾는 데 실패했고, 2005년 11월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아약스에서 주전으로 올라선 뒤 거스 히딩크 감독이 그를 처음 대표팀에 소집했다. UEFA 유로 1996에선 주전 센터백으로 활약했으나, 2년 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소속 팀에서의 입지가 흔들리기도 해서 아르투르 누만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고 백업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조별리그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선발 기회를 얻어 출전하는 등 대회 2경기를 소화했다. 또한 8강전 주전 수비수인 누만이 부상으로 아웃되며 다음 브라질과의 4강전 출전을 준비했으나 그 역시 부상으로 쓰러지며 필립 코퀴가 땜빵 센터백을 봐야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2017년 여름 친정팀 AFC 아약스의 유소년 코칭스태프로 합류해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2020년 에릭 텐하흐 체제의 1군팀 코칭스태프로 올라갔고, 수석코치직까지 지냈다.

그러나 아약스에서 보드진들과 갈등이 있었고, 결국 21-22시즌 끝으로 아약스를 떠났다.

이후 파트릭 클라위버르트가 감독으로 있는 아다나 데미르스포르에 수석 코치로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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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시즌을 벤치 자원으로 시작했음에도 아약스에서의 3년동안 중앙수비수로서는 많은 골인 6골을 득점했다.[2] 무투의 경우에는 코카인 복용 문제로 출장정지를 먹었고 그 다음 시즌에는 구단과의 상의도 없이 유벤투스 FC와 계약을 맺는 등 멘탈 문제가 컸지만 그래도 최소한 27경기 6골을 기록하기는 했으며 마니시의 경우에는 6개월 임대에 불과했고 마니시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포지션 경쟁자들이 너무 세서 8경기만 출전하여 경기를 얼마 뛰지 못한 케이스인지라 보하르더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둘에게 굴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