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바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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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미디아 동부 3대 군주
ⵢⵓⴱⴰ ⴰⵎⵣⵡⴰⵔⵓ | 유바 1세
파일:유바 1세.jpg
제호
한국어
유바 1세
베르베르어
ⵢⵓⴱⴰ ⴰⵎⵣⵡⴰⵔⵓ
라틴어
Juba I
가족
히엠프살 2세(아버지)
유바 2세(아들)
생몰 년도
기원전 85년 ~ 기원전 46년
재위 기간
기원전 60년 이전 ~기원전 46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누미디아 동부의 3대 군주. 카이사르의 내전옵티마테스파와 손을 잡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으나 탑수스 전투에서 패한 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자결했다. 아라비오와 함께 누미디아의 마지막 군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누미디아 동부 초대 군주 히엠프살 2세의 아들이다. 기원전 82년, 아버지의 정권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숙청을 피해 아프리카로 달아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손잡은 히아르바스에 의해 전복되었다. 기원전 81년, 술라가 파견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로미티우스의 반란군을 제압하고 히아르바스를 붙잡아 처형한 뒤 히엠프살 2세를 복위시켰다. 그는 이때부터 폼페이우스의 동맹자가 되었다.

기원전 64년, 그는 아버지의 사절로서 로마를 처음 방문했다. 그가 맡은 임무는 농지법의 시행으로 누미디아가 피해를 입는 걸 막는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가 누미디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도 농지법 시행을 결사 반대한 덕분에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다. 기원전 62년, 그는 누미디아인 마시니사를 부패 혐의로 고발했다. 이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법정에서 마시니사를 변호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며 모욕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강경한 반 카이사르파가 되었다. 여기에 옵티마테스파였다가 카이사르파로 전향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기원전 50년 호민관을 맡으면서 누미디아를 로마에 편입시키자고 주장하자,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쿠리오 역시 적대했다.

그는 기원전 60년 이전에 아버지 히엠프살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기꺼이 폼페이우스의 편에 섰다. 기원전 49년 8월, 카이사르는 쿠리오를 아프리카로 보내 옵티마테스파를 축출하게 했다. 쿠리오는 우티카 전투에서 아프리카 총독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를 격파했다. 이후 쿠리오가 우티카를 포위하여 굶겨죽이려 하자, 우티카 시민들은 항복하려 했다. 이에 바루스는 유바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올 테니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던 중 유바 왕이 정말로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쿠리오는 포위를 풀고 카스트라 코르넬리아로 이동한 뒤 시칠리아에 주둔한 2개 군단에게 합류를 명령했다.

그러던 중 한 누미디아인으로부터 "유바 왕이 이웃 국가 마우레타니아의 침략에 대처하고자 본군을 이끌고 돌아갔고, 사부라가 이끄는 몇 안 되는 군대 만이 우티카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쿠리오는 이들을 물리치기로 마음먹고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사실 이 누미디아인은 유바가 쿠리오를 유인하기 위해 보낸 밀정이었다. 쿠리오는 바그라다스 평원에서 목격한 사부라의 누미디아 분견대가 전부라고 확신하고 그들을 곧바로 공격했다가, 유바의 추가 병력이 당도하는 바람에 포위섬멸당했다.(바그라다스 전투) 이리하여 쿠리오를 끝장낸 뒤, 그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카이사르군을 붙잡은 뒤 몇몇 원로원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적병들을 처형했다. 이후 발칸 반도에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승리 소식을 알렸다. 이에 카이사르와 로마의 원로원은 그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했다.

기원전 47년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 상륙하자, 그는 옵티마테스파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독자적인 지휘권을 인정해주고 아프리카에 있는 로마 영토의 일부를 자신에게 넘겨주면 그를 돕겠다고 밝혔다. 메텔루스의 동의를 받은 그는 군대를 총동원해 스키피오가 있는 우티카로 이동했지만, 마우레타니아 왕국 군주 보쿠스 2세의 용병대장 푸블리우스 시티우스가 왕의 명령을 받들어 누미디아로 쳐들어가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사로잡은 시민들을 모두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자, 30마리의 코끼리만 스키피오에게 보낸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당시 스키피오에게 전력상 절대적으로 열세했던 카이사르는 그가 돌아간 틈을 타 추가 병력을 규합해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 후 사부라에게 누미디아 수비를 맡긴 그는 3개 군단과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고 스키피오와 합세했다. 카이사르 역시 제9 군단과 제10 군단을 맞이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력에서 열세였던 카이사르는 우티카 공략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갔으며, 스키피오는 그를 추격했다. 이후 제타 마을 주변에서 양군은 대치했으나, 스키피오는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는 걸 기피했다. 카이사르는 추가 병력을 규합하는 동시에 스키피오에게 회전을 제의했으나 그가 끝까지 거절하자 강제로 싸우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도시인 탑수스를 포위했고, 스키피오는 탑수스를 상실하면 북아프리카의 원로원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할 것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카이사르와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그와 스키피오 연합군은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맞붙었다. 이 전투는 카이사르의 완승으로 끝났고, 그는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누미디아의 도시 자마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받아주지 않자, 누미디아 왕실 영지 중 한 곳으로 피신했다. 두 사람은 카이사르의 자비를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살을 결심했다. 자살 방식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르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와 페트레이우스는 저녁 식사 때 서로를 죽였다고 한다. 익명의 작가가 기술한 <아프리카 전쟁기>에 따르면, 그들은 결투를 벌여서 페트레이우스가 그를 죽인 뒤 단검으로 목을 찌르려 했지만 실패하자 하인을 시켜 자신을 죽이게 했다고 한다.

그 후 카이사르는 자신을 도와준 시티우스에게 키르타 일대를 영지로 삼게 하고, 나머지 누미디아 영역을 아프리카 베르타 속주로 삼고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를 초대 총독으로 세웠다. 그의 아들 유바 2세는 로마로 끌려가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 전리품 취급받은 뒤 카이사르의 가족에 의해 길려지면서 역사와 지리 분야에 깊은 관심을 품고 열심히 연구해 나중에는 저명한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다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명목상 누미디아 왕으로 봉해졌다가 기원전 25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결혼한 후 마우레타니아 왕으로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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