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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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봉진.jpg
출생
1886년 3월 30일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사망
1956년 9월 2일
서울특별시
종교
개신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유봉진은 1886년3월 30일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 진위대 출신이었으며, 강화도 길직교회 신도로서 신앙 생활을 수행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가담한 뒤 강화도로 돌아온 황도문으로부터 시위 소식을 접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입수했다. 이후 그는 3월 8일 길직교회 목사 이진형과 함께 시위를 벌일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강화도의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회합을 가졌고, 바다 건너 주문도까지 건너가 주민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전파했다. 3월 16일, 그는 주문도 예수교회당 신도 120명 앞에서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될 것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 지 모른다. 천국에서 만나자."고 외치면서 '유봉진 독립결사대'라고 쓴 윗옷을 보였다. 이후 자신에게 동참하는 자는 손을 들라고 하자, 모든 이들이 앞다둬 손을 들었다.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 장터에는 1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운집하였다. 그는 예정시간보다 약간 늦어, 백마(白馬)를 타고 달려와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장터에 있는 종루(鍾樓)에 올라가 종을 마구 치며 시위군중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이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강화 경찰서에서 염이선(廉履善) 등 4명의 조선인 순사보가 출동하여 제지하자,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며 구타하였다.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군청으로 가서, 군수 이봉종(李鳳鍾)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고, 만일 불응하면 군청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는 다시 시위군중을 향교로 인솔하여, 장터에서 체포된 유희철과 조기신(趙基信)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경찰서 앞에서 시위하자고 제의하고, 오후 5시경 경찰서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경찰서 건물을 파괴한다고 협박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과 장터에서 칼을 뽑아들고 진압하려 했던 조선인 순사보 김덕찬(金德贊)을 내보내라고 외쳐댔다.

이후 당국의 수사를 피해 마니산으로 숨어서 조선총독부에 조선을 반환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으며, 이완용에게 친일행위에 대한 경고장을 발송했다. 또한 수첩에 연락용 암호를 만들면서 만세 시위를 재개하려 했지만, 결국 체포되었다. 이후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9월 만기 출소한 그는 북도면 시도에서 사립 신창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몇년 후 강화군으로 돌아와서 하도면 내리에 있는 폐교를 노산학원으로 개교하여 2년 동안 근무했다. 이후 강화군에서 교육활동을 수행했고, 한의사 자격증을 따낸 뒤 한의사로서도 활동했다.

8.15 광복 후, 유봉진은 1947년 4월 29일 돈 100원을 이승만에게 성금으로 내놓아 이승만의 비서 이기붕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승만에게 '헌책상달'(獻策上達)을 보내 민심안정을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권하기도 했다.

이는 이 글에서 치솟는 물가를 바로잡기 위한 방안을 건의하고 독립건국을 위해 건국비를 각 도·부·군에 지시, 징수하자고 했다. 특히 해산된 강화군대를 회복시키고 각 도·부·군에 경찰협조기관 경호단을 조직할 것을 권했다. 또 중학교가 없는 각 도·부·군에 중학교를 설치해 청소년 양성에 지장이 없도록 하자고 했다. 또한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 한국을 잘 다스려줄 것을 부탁했다.

그 후 6.25 전쟁이 끝난 뒤 서울로 이사갔으나 1956년 9월 2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유봉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