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자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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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남북조시대 남진의 인물로 자는 흥세(興世).
2. 생애[편집]
오군(吳郡) 오현(吳縣) 출신으로 524년에 태어났다. 양나라 시기에 동궁직후(東宮直後)로 등용되었다가,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향에서 무리를 모아 후경에 항거하고자 했다. 당시 오군 태수였던 장표(張彪)가 육자륭을 장수로 등용하였고, 장표가 회계군(會稽郡)으로 부임하자 육자륭은 장표를 따라 회계군으로 갔다.
이후 진천이 장표를 토벌할 때 장표의 부하였던 심태(沈泰), 오보진(吳寶眞), 신진(申縉) 등은 모두 진천에게 항복하였지만 육자륭은 진천에게 대항하다가 병력이 다하자 결국 진천에게 항복하였다. 진천은 육자륭을 의롭게 여겨 자신의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게 해주었고, 진천의 밑에서 중병참군(中兵參軍)이 되었다. 육자륭은 뒤에 시풍현령(始豐縣令)과 영흥현령(永興縣令)을 역임하였다.
559년, 무제가 죽고 진천이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인 문제이며, 육자륭은 진천이 즉위한 뒤에 숙위를 맡았다. 육자륭은 왕림(王琳)이 반란을 일으키자 후안도(侯安都)에게 종군하였고 왕림이 평정된 뒤에 좌중랑장(左中郎將)으로 제수되었다. 560년, 익양현자(益陽縣子)로 책봉되고 식읍 300호를 받았으며, 고당군(高唐郡) 태수로 전출되었다. 561년, 명위장군(明威將軍), 여릉(廬陵) 태수로 제수되었다.
주적(周迪)이 임천군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킬 때 동창현(東昌縣)에서 수행사(脩行師)라는 인물이 주적의 반란에 응하여 육자륭을 공격하였다. 육자륭은 성 밖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성문을 닫아 수행사를 방심시켰다. 육자륭의 계략에 걸려들어 패배한 수행사는 육자륭에게 항복을 청하였고, 육자륭은 수행사를 수도로 압송한다.
563년, 주적이 진보응과 연합하여 다시 임천으로 출병하자, 육자륭은 장소달에게 종군하여 주적을 토벌한다. 주적이 패주하자 육자륭은 동흥령을 넘어서 진보응을 토벌하였고, 건안군(建安郡)에 당도한 뒤에는 건안군의 감리를 맡는다. 진보응이 건안의 호숫가에서 저항하자, 육자륭은 장소달과 함께 군대를 이끌었는데 도중에 장소달이 불리해지자 육자륭은 장소달을 구원하여 진보응을 토벌한다. 육자륭은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가절(假節)도독무주제군사(都督武州諸軍事)로 승진하였으며, 장군은 예전과 같이 받았고 조양현백(朝陽縣伯)으로 책봉된다.
폐제 진백종이 즉위한 뒤 지무장군(智武將軍)으로 진호되고 원외산기상시가 더해졌으며 나머지 직무는 종전과 같이 맡았다. 화교(華皎)가 상주(湘州)를 점거하고 배반할 때 화교는 한때 자신의 부하였던 육자륭을 초유했다. 하지만 육자륭은 화교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화교가 군대를 보내 육자륭을 공격하자 화교의 공격을 모두 격퇴한다. 화교가 영주에서 패배하자 육자륭은 화교를 추격하여 화교의 반란을 진압했고 지절, 통직산기상시, 도독무주제군사로 제수되었으며, 작위가 후로 올라간다.
이후 육자륭은 도독형신우3주제군사(都督荊信祐三州諸軍事), 선위장군(宣毅將軍), 형주 자사로 옮기고 지절과 산기상시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형주를 새로 설치하고 공안에 치소를 설치하면서 육자륭은 성곽을 수선하고 정치에 힘을 쏟아 백성들이 육자륭을 칭송했다. 육자륭은 569년에 운휘장군(雲麾將軍)으로 진호되었고 이듬해인 570년에 사망하여 산기상시로 추증되고 위(威)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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