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파울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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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율리우스 파울루스 프루덴티스시무스
(Julius Paulus Prudentissimus)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근위대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의 근위대장, 법학자.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와 함께 세베루스 왕조를 대표하는 법학자 3대장 중 한 명으로, 그의 저작을 묶어서 편찬한《형법》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생애[편집]


푸닉인[1] 또는 파타비움[2]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출신지 및 가계는 기록이 미비해서 불확실하다. 그는 일찍이 법학에 뜻을 두고, 당대의 저명한 법학자 퀸투스 케르비디우스 스카이볼라의 제자가 되었다. 이때 같은 스승을 둔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와 친분을 맺었다. 205년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가 반역 혐의로 살해된 뒤, 파피니아누스가 새 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울피아누스와 함께 파피니아누스 오디토리움 위원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돼 로마 관보에 이름을 올렸다.

카라칼라가 새 황제에 즉위한 뒤, 파피니아누스가 카라칼라와 게타의 갈등을 중재하다가 게타를 죽인 뒤 자신을 변호하라는 카라칼라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잔혹하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에 연루되지 않았고, 울피아누스와 함께 율리아 돔나의 행정 관리를 도왔다. 엘라가발루스 즉위 후, 율리아 마이사의 주도로 219년 그의 딸 율리아 코르넬리아 파울라와 엘라가발루스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220년 초 파울라와 이혼하고 베스타 여세자 아퀼리아 세베라와 결혼하였고, 파울루스를 이탈리아에서 추방했다. 222년 3월 12일 엘라가발루스가 어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총신 히에로클레스와 함께 근위대에게 피살된 뒤, 율리아 마이사의 부름을 받고 로마에 복귀하여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고문관에 가담하였다.

224년 또는 228년 즈음에 근위대장을 역임하던 울피아누스가 근위대에게 피살된 뒤, 율리아 마마이아에 의해 신임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다만 235년 알렉산다르 세베루스가 모군티아쿰 병영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황제로 추대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을 무렵에는 근위대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르디아누스 3세로부터 프루덴티스시무스라는 명예 직함을 수여받았지만,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파울루스는 법학과 관련하여 여러 저작을 출판했다. 피렌체에서 발견된 목록표에는 로마 법학에 관한 24권의 장편, 47권의 단편 작품이 파울루스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저작은 대부분 실전했지만, 다른 저자들의 저서에 인용되어 있다. 황제의 칙령에 대한 논평을 80편이나 집필했는데, 주로 고전적인 결의법[3] 사례를 수집하고, 이를 비판하면서 올바른 법 적용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외에도 다양한 법률 간행물을 저술했는데, 그 숫자는 총 319개에 달한다.

후대 법학자들은 이 광범위한 저작을 하나로 묶어서《형법》으로 집대성해, 로마 형법의 근간으로 삼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발렌티니아누스 3세 시대인 426년에 반포한 로마법에서 권위있는 법학자 5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편찬한《로마법 대전》의 형법 부분에는 그의 저서에 적힌 내용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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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르타고인의 후손[2] 오늘날의 이탈리아 파도바[3] 변론으로 도덕적, 법률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