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륭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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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립
3. 독립운동가의 거점
4. 와해
5. 여담



1. 개요[편집]


怡隆洋行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조지 루이스 쇼가 세운 무역회사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사무소가 이곳에 설치되어 독립운동 자금 수합처가 되기도 했다.


2. 설립[편집]


1900년 한국의 금광에서 회계로 일했던 조지 쇼는 채산성이 맞지 않아 1907년 청나라 봉천성 봉황청(鳳凰廳) 안동현(安東縣)으로 옮겨서 무역회사인 이륭양행을 설립한다. 조지 쇼는 아버지의 고향인 아일랜드가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고 1919년에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벌였기에,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의 항일운동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조지 쇼는 자회사인 이륭양행을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고, 백범 김구가 상해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것도 이륭양행을 통해서였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의친왕의 망명 시도도 이륭양행을 통해서 시도되었다.


3. 독립운동가의 거점[편집]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륭양행의 2층에 교통국 지부를 두었다. 이를 통해 이륭양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줄 역할은 물론 독립운동가의 거점으로 역할을 하였다.

독립운동가 김산의 기록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위험할 때는 단둥에 있는 조지의 집에서 숨었으며, 이륭양행을 통해 의열단 거사에 쓸 폭탄 200여개를 조선으로 반입하는 선적 과정 자체를 조지 쇼가 직접 상하이에서 감독했다는 등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4. 와해[편집]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이륭양행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일제는 괴뢰국인 만주국과의 합작으로 이륭양행을 파산으로 내몰기 위해 대안기선공사라는 어용 선박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로 인해 대안기선공사와 경쟁을 벌이게 된 이륭양행은 점차 경영난에 봉착하였고, 결국 조지 쇼는 1935년 이륭양행을 대안기선공사에 매도하면서 이륭양행은 와해된다.


5. 여담[편집]


독립운동가 김산은 조지 쇼를 두고 그는 아일랜드인 테러리스트인데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했다(...)고 썼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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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여기서 쓴 테러리스트라는 표현은 김산의 진술을 미국의 작가 님 웨일스(Nym Wales)가 번역하면서 차용한 것으로, 전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번역에는 일관되게 독립운동가들도 한국인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하기 때문. 엄밀히 말하면 번역을 거쳤으므로 김산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렇게 말한 것은 아닌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