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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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흥양 이씨[1]
출생
1871년 5월 8일
전라도 무주현 풍남면 철목리
(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2]
사망
1910년 4월 18일[3]
전라북도 무주군 풍동면 문평리 흑석산 계곡
(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문평마을)
묘소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서당골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71년 5월 8일 전라도 무주현 풍남면 철목리(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서 아버지 이시봉(李時鳳, 1849년생)과 어머니 김해 김씨(? ~ ?. 3. 8) 김달형(金達亨)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의병장 문태수 의진에 입대하여 아장(亞將)에 선임되었다. 그 뒤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남도 함양군·안의군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데에 일조했으며, 같은 해 2월 18일 6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그 선봉장이 되어서 무주 주재소를 습격했다.

이듬해인 1909년 박춘실 의진과 연합하여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덕유산 일대를 점령했는데, 그해 5월 8일 오후 4시에 남원경찰서 소속 켄마(間馬) 상등병 등 5명과 장수 주재소 일본인 순사 2명과 교전 끝에 13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였으며, 그해 8월 중순에는 문태수 휘하에서 충청북도 영동군·청산군·옥천군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 30일 3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옥천군 이남일소면 강청리(현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이원역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일본인 3명을 납치하기도 했다.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전라북도 금산군, 충청북도 영동군·청산군·옥천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다가 1910년 4월 18일 밤 무주군 풍동면 문평리(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문평마을) 흑석산(黑石山) 계곡에서 소수의 의병과 함께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교전 도중 전사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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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무주파 26세 종(鍾) 항렬.[2] #[3] 흥양이씨족보 1권 73쪽에는 1908년 4월 17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