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화(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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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감독

파일:이종화 축구인.jpg
이름
이종화
李鍾和 / Lee Jong-Hwa
출생
1963년 7월 20일
경상남도 통영시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인천대학교 (1982~1985)
현대 호랑이 (1986~1991)
일화 천마/천안 일화 천마 (1991~1996)
감독
중동고등학교 (1997~1998)
태성고등학교 (2000~2011)
국가대표
2경기 (대한민국 / 1994)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1994 FIFA 월드컵 미국 대회에 출전했던 국가대표 수비수 출신이다.

프로 데뷔 직후 3년 가까운 공백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거듭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2. 클럽 경력[편집]


국가대표 선수를 여럿 배출한 통영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 중동중학교로 진학하며 서울로 향했다. 이후 중동고에 진학했으나 다시 고향 근처 마산의 창신공고로 전학을 갔고, 여기서 처음으로 중앙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꾸며 축구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수비수로의 포변 이후 청소년 대표에 뽑히는 등 국가대표급 유망주가 되었고, 고졸 선수로써 국민은행 까치 축구단 훈련도 받는 등 바로 실업행을 고려했으나, 이내 마음을 바꿔 인천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인천대 3학년에 현대 호랑이와 계약을 하고 조기에 프로로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1986년 프로 첫 시즌 초반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좋지 못한 모습만 보인 끝에 후보로 밀렸고, 그 충격에 이종화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빵집 경영을 하며 2년여를 살았다. 하지만 그를 아까워한 고향 선배이자 축구인 김호현대 호랑이 새 감독으로 부임하며 그를 찾았고, 1988년 그는 다시 선수단에 합류하며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다시 프로 선수로 돌아간 이종화는 리그 35경기에 나서며 주전을 꿰찼다. 공격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세트피스에서의 골 감각도 좋아서 복귀 시즌 4골이나 득점하는 등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시기부터 이종화는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며 멀티 플레이어로 거듭난다. 특히 이전의 예측형 수비에서 벗어나 파이터형 수비수로 플레이스타일을 완전히 바꿨다.

1991시즌 현대에서 주전 경쟁에서 밀리자 그는 과감히 이적을 선택하고 일화 천마로 둥지를 옮겼다. 박종환 감독이 구애를 보내 영입한 것으로, 일화 합류 직후부터 일화의 주전 수비수로 뛰며 후반기 15경기 1골을 기록했다. 이후 일화의 신의손, 신태용, 안익수 등 쟁쟁한 멤버들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일화 왕조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고, 그는 그 황금 멤버의 중심에서 K리그 3연패를 달성하는 핵심 멤버가 되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선수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컨디션이 안좋으면 비기겠다 수준으로 생각하고 뛰었다고 하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고. 1992년과 1993년엔 2년 연속으로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도 선정되었다.

이후 1996년 한 시즌을 주장으로써 더 치르고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K리그 통산 191경기 9골 3도움을 기록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일화 왕조의 멤버로써 한창 활약했으나 이전까지 성인 국가대표와는 1도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첫 국가대표팀 전임감독에 오른 김호의 부름으로 1994년 3월,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월드컵 본선을 3달 남기고 뽑힌 것이어서 일종의 본선으로 가는 최종 테스트 성격이 강한 평가전이었고, 미국과의 평가전에서 비록 퇴장을 당했으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6월 에콰도르와의 최종 평가전을 치르고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려 미국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다.

평가전 동안 주축 수비수 홍명보의 백업으로써 주로 경기에 뛰었고, 본선에선 그 홍명보가 2골을 넣는 등 대활약하며 이종화에게 출전 기회가 돌아가지 않아 아쉽게 월드컵 경기는 뛰지 못했다.[1] 그렇게 그는 짧은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한다.

4. 은퇴 이후[편집]


선수 생활 은퇴 직후 1997년부터 자신이 다녔던 중동고등학교 감독으로 2년간 활동했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다고 하며 1999년부터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축구 유학을 떠났다. 클루브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구단에서 지도 연수를 받았다고 한다.[2]

귀국 후 2000년부터 2011년까지 오랜 기간동안 태성고등학교 감독을 맡아 여러차례 우승을 하며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2012년부터는 통영으로 돌아가 감독직 대신 지역 축구 발전을 위한 여러 일에 힘쓰고 있다.

5. 여담[편집]


  • 1991년 프로 경기에서 잠시 골키퍼를 맡은 적이 있다. 당시 일화의 골키퍼였던 루마니아 출신 마르첼 러저레아누가 경기 중 퇴장을 당해 남은 7분의 경기동안 그가 골키퍼 장갑을 낀 것이다. 다행히도 이 7분동안 이종화 골키퍼는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 사건은 K리그 역사상 첫 필드플레이어가 골키퍼 장갑을 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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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종화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웠던 경기는 볼리비아전이었다고 한다. 당시 경기 전날 허정무 코치가 경기 뛸 준비를 해놓으라고 했지만, 경기 내내 끝끝내 골이 터지지 않아 그는 투입되지 않았다. 아마 선제골을 뒤늦게라도 넣었다면 그가 지키기를 위해 투입됐을 가능성이 크다.[2]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자유로움 속에 엄격함이 있는 현지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하며. 자신도 선수들에게 자유를 많이 주는 편으로 지도 스타일을 가져간다고 한다. 하지만 책임은 꼭 묻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