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안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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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광부들의 파업
3. 사고 당시
4. 사고 이후


1. 개요[편집]


Italian hall disaster

1913년 12월 24일 미국 미시간주 칼루멧의 코퍼 카운티에서 있었던 압사 사고.


2. 광부들의 파업[편집]


미시간주 칼루멧의 코퍼(copper) 카운티는 이름 그대로 구리 광산이 있었고, 이 때문에 광부들도 많았다. 이에 광산을 관리하던 회사 Calumet and Hecula는 광부들에게 집, 도서관, 교회, 마켓,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 등을 지어줬다. 회사 덕에 지역 경제도 활성화 됐고, 회사에 애사심을 갖고 출근하는 광부들도 많아졌다.

이렇게만 보면 좋은 정책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정책 덕에 회사는 광부들의 의식주를 모두 관리하게 됐다. 더군다나 이러한 혜택은 오로지 광산에서 일을 하는 광부들에게만 주어졌기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면 집과 학교를 모두 잃게 됐다. 때문에 광부들은 억지로라도 그 광산에서만 일을 해야 했다. 더군다나 회사 측에서도 이러한 점을 잘 알았기에, 일부러 광부들 3명이서 해야 하는 드릴 작업을 1명에게만 시키는 등 위험한 일을 강제로 하게 했다. 더군다나 만약 광부들 끼리 싸움이 붙거나, 술에 너무 취하거나, 회사 생각에 부도덕적인 행동을 하면 그 자리서 해고당했다. 이는 퇴근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회사의 정책 때문에 광부들은 회사에 계속 머무르려는 사람들, 회사에 맞서 파업을 개시하려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파업이 거세질 조짐을 보이자 아예 주 방위군까지 개입해 일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도 했다.

파업은 5개월간 계속되었고, 파업에 참여한 이들의 돈이 다 떨어져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사기가 점점 떨어지자, 노조 측에선 이탈리안홀이라는 큰 홀을 대여해, 휴식터와 음식, 오락거리등을 제공했다.


3. 사고 당시[편집]


1913년 12월 24일, 평상시 처럼 광부와 가족들은 이탈리안 홀에 모여있었다. 안에 약 600여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갑자기 누군가가 크게 "불이야" 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화재가 난 줄 알고 대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탈리안 홀은 한번에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기 쉽지 않은 구조였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창문에서 뛰어내렸고, 중앙 계단을 향해 달려나갔다. 그렇게 좁은 중앙 계단에 사람들이 순식간에 수백명이 모였고 사람들은 좁은 계단 사이에 끼었다. 결국 사람 위에 사람이 쌓이는 지경에 이르러 73명이 압사했다. 사망자 중 59명은 어린이었다.

정작 당시 진짜 화재가 일어났는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불이 실제로 있었다 주장하고, 다른 곳에선 불은 없었고 파업 반대파에서 파업을 방해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불이야!" 를 외친 사람의 몸에 반 노조 협회 뱃지를 달고 있는 걸 봤다는 주장도 있었다.


4. 사고 이후[편집]


시신들은 인근 마을회관에 안치되었다가 나중에 관을 주문한 뒤에야 묻힐 수 있었다.

12월 27일, 한 핀란드 신문에선 이 사건을 살인사건이라 적었다가 체포되는 일이 있었다.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이 사건에 대한 분노는 엄청났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장례식을 치루면서 파업에 참여한 광부들의 사기는 뚝 떨어졌다. 파업은 다음 해 4월에 끝났고, 광부들은 노조에 가입하면서 받은 카드를 사장 앞에서 찢은 다음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시신은 칼루멧 카운티에서 2마일 가량 떨어진 레이크 뷰 공동묘지에 묻혔다.

사고로 처벌받은 이는 없었다.

이탈리안 홀은 1984년에 아치형 정문만 남긴 채 철거됐고, 주변을 추모공원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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