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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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호
쾌중(快中) / 물헌(勿軒)
본관
평택 임씨[1]
출생
1869년 5월 19일
전라도 옥구현 서면 대사리 남산 아래
(現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2]
사망
1936년 9월 8일 (향년 67세)
상훈
건국포장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69년 5월 19일 전라도 옥구현 서면 대사리 남산 아래(現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광월마을)에서 아버지 임용래(林榕來, 1809. 5. 30 ~ 1877. 7. 4)와 어머니 나주 나씨(1806 ~ 1880. 8. 3)[3]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4] 이후 1882년 형 임병찬과 함께 임병찬의 둘째 부인 여산 송씨(1848. 12. 27 ~ 1909. 7. 29)[5]의 고향인 태인현 산내일변면 영동(現 전라북도 정읍시 산내면 두월리 영골)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고, 1893년 임병찬과 함께 태인현 산내일변면 종성리(現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로 재차 이주해 본적을 옮겼다. 이후 정읍군(現 정읍시) 옹동면 매정리로 이주했다.

1906년 6월 4일 형 임병찬이 스승인 최익현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군 고현내면 원촌리(現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무성서원에서 의병대를 창설하자, 이에 입대해 참모(參謀)에 임명되었다. 최익현 의병진은 당초 전주군을 점거하고자 했으나, 수적으로 불리한 탓에 우선 태인군 군내면 읍내를 장악해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고, 정읍군순창군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끝에 이들을 격퇴한 뒤 고을을 장악했다. 이어 6월 8일 곡성군을 점령했다.

그러나 옥과군에서 관군에 패배해 순창군으로 다시 돌아갔으며, 6월 10일 순창군에서 순창군수 이건용(李建鎔)이 일본군과 내통했다는 첩보를 들어 그를 체포한 뒤 처형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로 목숨을 살려주고, 선봉장으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 그 뒤 이건용은 순창군 관아로 돌아가 주둔하기를 청해 허락을 얻고는 그 길로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韓鎭昌)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6월 19일 광주군·전주군·남원군에 주둔한 대한제국군 진위대 병사들과 함께 최익현이 주둔해 있던 순창군을 포위했다. 최익현은 6월 9일에 이미 고종의병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진 사실을 알았고, 또한 맞서싸워야 할 상대가 대한제국군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제의 침략문제를 두고 일으킨 의병이 동족과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해 전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진위대는 이를 기회로 삼아 더욱 힘써 싸웠고[6], 이 와중에 소모장(召募將) 겸 중군장(中軍將)·서기(書記)로 있던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는 등 의병진이 격파되고 말았다. 이에 최익현은 의병진을 해산했고, 이때 피신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독립운동의 방도를 모색하던 중 1919년 3.1 운동 이후 경기도 경성부에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이 조직되자 그해 음력 7월 장조카 임응철과 종손자(從孫子) 임수명이 이에 입단하여 곧 임응철은 전라도 특파원 및 전라도 단장에 임명되었고, 임수명은 전라북도 익산군 이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음력 8월 16일 임응철의 집에 가서 임응철로부터 조선민족대동단이 조직되었다는 것을 듣고 입단 권유를 받아 조선민족대동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임응철에게서 조선독립에 관한 「국민해혹(國民解惑)」이라는 문서를 건네 받은 뒤 전주군에 있는 단원 이병호(李炳祜)의 집에 가서 일전에 임응철이 이병호에게 맡겨 둔 「대동단 규칙」을 받아 오학근(吳學根)의 집에 갖고 가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후 전주군에 있는 이병호의 집에 가서 이병호로부터 「대동단 규칙」 및 수신자가 오학근으로 찍혀 있는 소개장을 받고는 같은 달 정읍군 산외면 상두리 진계마을 오학근(吳學根)의 집에 갔다. 그러나 오학근이 그 날 집에 없었던 관계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뒤 음력 8월 말에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김세장(金世長)의 집에 묵었을 때 김세장에게 먼저 「국민해혹」이라는 문서를 보여주고, 김세장이 이를 보고 관심을 보이며 대동단에서 하는 일에 대해 묻자 「대동단 규칙」을 보여주며 대동단 입단을 권유했다.

그러나 1920년 초 조선민족대동단의 실체가 발각되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0년 2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사기,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하였으나 1920년 4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고,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36년 9월 8일 별세했다.

199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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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원부원군파(平原府院君派)-옥구공파(沃溝公派) 21세 병(炳) 항렬.[2] 수형인명부에 '전북 옥구군 구읍면 남산리'가 출생지로 기재돼 있다.[3] 나도순(羅道淳)의 딸이다.[4]임병찬은 아버지 임용래의 둘째 부인 개성 왕씨(1810. 5. 27 ~ 1862. 9. 14) 왕학묵(王學默)의 딸 소생이다.[5] 송상희(宋祥喜)의 딸이다.[6]매천야록》 제5권에 따르면, 당초 조정에서는 전라남도 및 전라북도 지방의 진위대로 하여금 순창군을 포위하게 했는데, 전라남도 관찰사 이도재광주군에 주둔하고 있던 진위대에 순창군 경내에 주둔만 시키도록 하고 교전할 경우에는 승리를 거두더라도 참형에 처하겠다고 미리 칙령을 내려 둔 상태였기에 광주군의 진위대는 최익현 의병진과 교전하지 않았다. 남원군의 진위대는 출발할 때 아전 양한규(梁漢奎)가 의병들과 교전하지 못하도록 타일러 두어 탄환이 들어 있지 않은 빈 포를 발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주군의 진위대장 김 모는 적극적으로 싸웠다고 한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