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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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子成)
본관
장흥 임씨(長興 任氏)[1]
출생
1898년 9월 9일
전라남도 광양군 월포면 구송리
(現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송금리 송현마을 540-3번지)
사망
1959년 11월 5일[2] (향년 61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543호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98년 9월 9일 전라남도 광양군 월포면 구송리(現 광양시 진월면 송금리 송현마을 540-3번지)에서 아버지 임동현(任東鉉, 1861 ~ 1901. 11. 11)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뒤로부터 줄곧 조선이 일제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유감스럽게 여기고 늘 조선의 독립을 바라며 서경식(徐璟植) 등과 교유하며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공감했고, 1919년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광양군에서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사상을 고취하고자 했다.

1919년 4월 14일 고향 진월면 송금리의 한문 서당에서 학생 여러 명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한지를 이용해 태극기 2개를 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 진월면 월길리의 서당에 가서 여러 학생들에게 앞서 제작한 태극기를 보여주며 이튿날인 15일에 진월면 선소리 무적섬에서 있을 진월면, 진상면 등 2개 면의 시회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를텐데, 학생들이 그곳에 와서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친 뒤 경상남도 하동군에서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상황을 견학해야 한다며 같이 동행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하동군 곳곳에서는 조선독립만세를 크게 외침에도 불구하고 우리 광양군 내에서는 만세를 부르는 자가 없음은 필경 광양군 내에 신념이 굳은 자가 없기 때문이고, 이후 하동군민이 건너올 경우는 거절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만세시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참여를 독려했다.

이튿날인 4월 15일 월길리 서당 학생 정순제(鄭淳悌) 등 6명을 인솔해 진월면 선소리 무적섬에서 열린 시회(詩會)에 참여해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려 했으나, 첩자의 밀고로 인해 기밀이 누설되었고 결국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8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시회를 이용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에 계속 종사했다고 하며, 8.15 광복 후에는 광양군·하동군 지역의 독립운동가로서 무질서하던 민심을 수습하는 데에 공적을 세웠다. 1959년 11월 5일 별세했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광양시 진월면 송금리 송현마을에 안장되었다가 2007년 9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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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공파-백담공파-선전공파 25세 태(泰) 항렬.[2] 장흥임씨대동보 권2 516쪽에는 1949년 2월 19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