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히르 앗 다울라 이브라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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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고르와 인도 침공
2.3. 북인도 원정
3. 기타



1. 개요[편집]


페르시아어 ابراهیم غزنوی

재위 1059년 4월 ~ 1099년 8월 25일

가즈니 왕조의 9대 술탄. 정식 명칭은 술탄 아불 무자파르 자히르 앗-다울라 라디 앗딘 이브라힘 빈 마수드 빈 마흐무드 가즈나비(سلطان ابوالمظفر ظهیرالدوله رضی‌الدین ابراهیم بن مسعود بن محمود غزنوی)이다. 1041년 마수드 1세 사후 지속된 내전으로 약화되었던 가즈니 조를 정비하여 향후 한세기 이상 지역 강국으로 남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중흥 군주로 평가된다. 또한 과거의 적국 셀주크 제국과의 외교적, 문화적 교류로 아프간 지역의 안정과 번영을 이룩하였다.


2. 생애[편집]


마수드 1세[1]의 많은 아들들 중 하나로, 바르군드 성채에 유폐된 덕에 1052년 찬탈자 토그룰의 학살을 피한 소수의 왕공들 중 하나였다. 1053년 토그룰을 축출하고 등극한 형 파루크 자드는 이브라힘을 나이 성채에 감금했는데, 그의 사후 마지막 남은 가즈니 왕실 남성으로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가즈니에 입성하였다. (1059년 4월) 이브라힘은 지난 내전기에 파괴되었던 도시와 마을들을 재건하였고, 파루크 자드와 마찬가지로 사회 안정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2.1. 고르와 인도 침공[편집]


외정에 있어서는 가즈니 조의 군사적 역량을 주변국들에 표출하였다. 1060년 고르 귀족들의 요청으로 구르 왕조에 개입하여 그 군주 압바스를 폐하고 후자의 아들 무함마드를 옹립하며 속국에 대한 실력 행사를 하였다. 1063년과 1070년 사이에는 아들 마흐무드에게 4만 기병으로 구성된 가지 (전사) 부대를 주어 펀자브 동부의 도아바를 공격하게 하였다. 승장 마흐무드는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더 나아가 아그라카나우지를 일시 점령한 후 말와까지 함락하는 공을 세웠다. 하지만 연이은 승리로 마흐무드의 위상이 높아지자 부자 관계는 소원해졌고, 이브라힘은 그를 나이 성채에 감금하고 마수드를 인도 총독에 봉하였다. 가즈니 조는 이란과 호라산의 상실을 북인도의 재화를 통해 상쇄할 수 있었다.


2.2. vs 셀주크 제국[편집]


이브라힘은 당시 최강국이던 셀주크 제국과 맞서지 않으려 하였다. 양국의 우호를 위해 아들 마수드를 말리크 샤의 딸 가우하르 하툰과 결혼시켜 결혼 동맹을 맺을 정도였다. 다만 내부가 안정되고 연이어 원정이 성공하자 자신감이 축적된 그는 14년간 평화를 유지한 끝에 1073년 1월, 사칼칸드를 침공하였다. 가즈니 군대는 말리크 샤의 숙부 우스만 차그리 베그를 사로잡아 가즈니로 압송하는 등 초전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셀주크 아미르 귀뮈쉬테긴 빌게 베그와 아누쉬테긴 가르차이가 반격하여 가즈니 군대를 폐허가 된 사칼칸드에서 몰아내었다.


2.3. 북인도 원정[편집]


1079년 이브라힘은 친히 북인도로 진군하여 펀자브 동남부의 파크파탄 성채를 포위, 그해 8월에 점령하였다. 라호르의 군사령관 압둘 나잠 자리리르 샤이바니는 베나레스, 타네세르, 카나우지 등 힌두 도시들을 습격하였다. 이브라힘의 치세에 라호르는 그의 손자이자 총독 쉬르자드의 관장 하에 펀자브의 문화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이브라힘은 40년간의 치세 끝에 1099년 8월에 가즈니에서 사망하였고, (미래의) 마수드 3세 궁전 근처에 안장되었다.


3. 기타[편집]


종교적으로 신실했던 이브라힘은 매년 쿠란을 손수 필사하여 칼리파에게 보내곤 했다.

1078년 이브라힘은 기존 재상 아부 사흘 후잔디를 폐하고 압둘 하미드 쉬라지를 재상으로 선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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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려 40명의 아들, 36명의 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