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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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진
Jang Ae Jin


파일:응급구조사 장애진.jpg

출생
1997년 6월 10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가족
아버지 장동원, 어머니 김순덕[1]
학력
단원중학교 (졸업)
단원고등학교 (졸업)
동남보건대학교 (응급구조과 / 학사)
직업
응급구조사, 사회활동가
1. 개요
2. 생애
2.1.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
3. 대중매체
3.1. TV
3.2. 라디오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응급구조사이자 사회활동가. 2014년 발생했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의 생존자로, 응급구조사로 일하며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진상규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세월호 생존학생들로 구성된 모임인 '메모리아' 의 대표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997년 6월 10일 경기도 안산시에서 태어난 장애진은 외동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한 평범한 아이였다. 학창시절의 꿈은 유치원 교사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유아교육과에 들어가 교사에 되려고 계획했었다고 한다. 단원고등학교를 다니며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2014년 4월 15일, 애진은 배편을 이용해 제주도로 떠나는 3박 4일 일정의 수학여행에 참가하게 된다. 애진과 중학교 때부터 붙어다니던 절친한 친구가 있었는데,[2] 수학여행 직전 피구를 하다가 손가락을 다쳤다. 부상 때문에 수학여행에 갈까 망설일 때, 아버지 장동원 씨는 학창시절에 한번밖에 없는 추억인데 꼭 같이 가라고 권했고 결국 그 친구 역시 애진과 함께 수학여행을 따라가게 된다.

다음 날인 2014년 4월 16일 오전, 맹골수도를 지나던 세월호는 급속도로 침몰하기 시작한다. 2학년 1반이던 애진은 SP1 호실에 있었는데, 애진 역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구명조끼를 착용한 상태로 방송에 따라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배가 급속도로 침몰하며 컨테이너가 배 밖으로 떨어지고 캐비넷이 부서지자, 애진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배가 기울었다며 울먹인다. 그러자 아버지인 장동원 씨는 딸에게 빨리 배 밖으로 나오라며 여러차례 소리쳤고,[3] 애진은 방에서 뛰어나와 기울어져 있는 복도 끝 비상구로 올라가서 겨우겨우 탈출에 성공했다. 그렇게 애진은 세월호에서 탈출했지만, 안내방송을 믿은 상당수의 학생들이 배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애진의 오랜 절친이었던 친구 역시 결국 희생되고 말았다.

세월호에서 생존한 이후, 기적적으로 목숨은 구했지만 삶은 이전과 달라져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애진은 안산으로 돌아와 한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2개월 정도 연수원에서 학교수업을 병행하며 심리치료를 받았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체중이 무려 12kg나 빠질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딸을 입원시킨 뒤 진도에 내려가 나머지 상황을 살피던 아버지는 애진이 연수원에서 나오자 합동분향소로 조문을 갔다. 그 때 애진이 "아빠 진상규명 활동 계속 할거지?" 라는 질문을 했고,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유가족 및 생존자 가족들과 함께 가족협의회를 만들어 진상규명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장 씨는 직장까지 그만뒀다.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남은 뒤, 애진의 꿈은 교사에서 응급구조사로 바뀌었다. 세월호 안에서 제대로 구조받지 못한 친구들이 생각났고, 또 침몰 현장에서 활동하던 응급대원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2016년 2월 단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월 동남보건대학교 응급구조과에 입학해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땄다. 응급구조사 실습을 나갔을 때, 심정지 상태로 들어온 환자들을 보면 마치 세상을 떠난 자신들의 친구들이 생각나 많이 괴로웠다고 한다. 2019년 졸업 뒤 현재는 경기도의 한 응급실에서 응급구조사로 일하고 있다.


2.1.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편집]


시간이 지날수록 그만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저도 그만하고 싶어요. 항상 진상규명을 위해 힘들고 무서웠던 기억을 꺼내야만 하는데 누가 하고 싶겠나요?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않은 것은 사고가 아니에요. 유가족들의 여한이 남지 않도록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규명해주세요.

2022년 4월 16일, 세월호 8주기 추도식에서 읽은 추도사 中


세월호 생존학생들 중에서도 진상규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인물이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장애진의 부친 장동원 씨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세월호 가족협의회에서 진상규명 팀장을 맡고 있으며 사고 초기부터 활동을 함께했다. 당시 장동원 씨는 생존자 부모로서 유가족들과 활동 내용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는데, 초반에는 유가족들과 생존자 부모들의 입장차이가 달라 조율하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9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월호 가족협의회에서 활동하며,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호소하고 국가에 진상규명 완료를 요구하고 있다.

어머니 김순덕 씨 역시 세월호 가족들로 이뤄진 가족극단 '노란리본' 에서 배우로 활동중이다. 극단 내에서 유일하게 생존자 부모인데, 처음에는 이 때문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우리 아이만 살아왔다는 안도감만 느낄 수 없다는 생각에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 '노란리본' 은 2016년부터 정기공연을 시작하여 <장기자랑>, <이웃에 살고 이웃에 울고>, <그와 그녀의 옷장>, <기억여행> 등 다양한 작품들을 올리며 200회 이상의 순회공연을 가졌다. 2019년 공연에서는 애진이 직접 공연장을 찾는 등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중이다.

2016년 12월 EBS 다큐 출연을 시작으로, 2017년 1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집회에서 발언대에 올라 추모연설을 했고 이 후에도 각종 방송과 언론 인터뷰에 출연하며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알리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세월호 생존학생들로 구성된 모임 '메모리아' 의 대표도 맡아, 세월호 관련 행사에서 노란리본 등 각종 추모물품들을 보급하고 이를 알리는 활동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알리는 대외활동을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생존자이기에, 언론이나 방송에서 세월호와 관련된 내용을 보면 장애진이 인터뷰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2019년 한겨레 인터뷰에 따르면, 인터뷰를 그만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렇게라도 진실을 계속 알려야한다는 생각에 기자들이 찾아줄 때 모두 응해준다고 했다. #

애진은 항상 자신이 구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탈출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세월호 참사의 본질과도 같다. 애진을 포함한 상당수의 학생들은 가만히 있으라로 대표되는 잘못된 지시가 담긴 안내방송을 그대로 믿고 선내에서 구조를 기다렸고,[4] 그 결과 많은 학생들이 배 밖으로 탈출하지 못하고 선체와 함께 최후를 맞았다. 또한 승객들의 구조를 지시해야 할 선장과 선원은 가장 먼저 배에서 탈출해버렸고, 구조하러 온 해경 역시 이미 탈출한 인원들만 구조했을 뿐 선내 진입을 시도하지 않아 잘못된 방송을 믿고 선내에서 위기에 처해있던 승객들은 구조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 마땅히 이루어졌어야 할 구조 메뉴얼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한 결과가 바로 세월호 참사가 낳은 엄청난 희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장과 선원 등 배를 운영한 직접적인 책임자들만 처벌됐고, 정작 구조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은 해경이나 정부 인사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애진과 세월호 유족들이 요구하고 있는 진상규명은, 단순히 형사처벌만이 목적이 아닌 당시 왜 구조 메뉴얼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그 원인에 따라 현재 이 시점에서 가동되고 있는 구조 메뉴얼에 문제가 있다면 전면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이 목표다. 구조 메뉴얼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아무리 대형사고가 터져도 사망자 수를 훨씬 줄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애진은 진상규명과 슬픔은 그 기간이 없다고 얘기한다. 또한 이런 참사의 희생자는 누구나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자신도 세월호 참사가 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러한 사고에 휘말릴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어떠한 대형참사 등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기억해야 이런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3. 대중매체[편집]




3.1. TV[편집]


날짜
방송사
방송명
비고
2016년
12월 13일
파일:EBS 로고.svg
다큐프레임 감정시대 5부 - 세월호 참사, 살아남은 자의 슬픔
게스트
2017년
4월 11일
파일:SBS Plus 로고.svg
내 말 좀 들어줘
게스트
4월 16일
파일:딩고 로고.png
수고했어, 오늘도
게스트, with 선미
12월 29일
파일:MBC 로고.svg
MBC 스페셜
게스트
2018년
4월 13일
파일:KBS 1TV 로고.svg
시사기획 창 - 침묵의 세월
게스트, 나레이션
4월 16일
파일:MBC 로고.svg
MBC 뉴스투데이 - 마봉춘이 간다
게스트
4월 17일
파일:SBS 로고.svg
오! 클릭
게스트
2020년
4월 13일
파일:연합뉴스 로고.svg
연통TV
게스트
2021년
4월 16일
파일:MBC 로고.svg
열여덟의 기억, 스물다섯의 약속
게스트, with 선미
2022년
11월 4일
파일:KBS 1TV 로고.svg
사사건건 플러스
게스트
2023년
4월 16일
파일:MBC 로고.svg
MBC 뉴스데스크 - 현장 36.5
게스트


3.2. 라디오[편집]


날짜
방송사
방송명
비고
2018년
4월 13일
파일:기독교방송 로고.svg
김현정의 뉴스쇼
게스트
2019년
4월 16일
파일:KBS 1Radio 로고.svg
특집 다큐멘터리 - 다섯번째 봄, 첫번째 수학여행
나레이션


4. 여담[편집]


  • 세월호 참사의 생존 학생들은 본인은 트라우마가 덜한 편이라고 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약을 복용하고 있진 않다고. 그러나 참사 직후에는 체중이 12kg나 빠질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현재도 사고 당시의 기억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고 한다.

  • 2019년 사망한 응급의학과 전문의 윤한덕 씨의 빈소에 조문했고, 2022년 발생한 이태원 참사 때도 직접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하였다.

  • 가장 친했던 친구는 2반 김민지 학생과 10반 김민정 학생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절친이었고, 침몰 전날에는 로비에서 림보까지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세월호를 탈출할 당시 다른 반이었던 애진은 둘의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구조되어 서거차도롤 옮겨진 뒤에야 두 사람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았다. 딱 한번 꿈에 나온적이 있는데, "어디 있었어?" 라는 질문에 민지 양은 그저 미소만 보이고 사라졌다고 한다. #

  • 손목에 타투가 하나 있다. 노란 리본 타투와 함께 리본 안에는 20140416이 세겨져 있다. # 팔찌 같은 건 나중에 낡거나 잃어버릴 수 있기에,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에서 세겼다고 한다.

  • 자신의 아빠에게 무척 감사한다고 밝혔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월호 참사 당일 객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에게 빨리 구명조끼를 입고 나오라며 소리쳤던 게 바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SBS Plus에서 방송된 <내 말 좀 들어줘>에 출연했을 때 이 일화를 언급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 가장 후회하는 건 탈출했을 당시 같은 복도에 있던 친구들에게 같이 나가자고 말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너무 크게 후회에 남아서 꿈에도 종종 나올 정도로 애진을 괴롭혔다.

  • 2017년 3월 세월호가 인양된 뒤, 직접 내부에 들어가 상태를 확인했다. 참사 전날 같이 놀던 로비에 들어갔을 때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 원더걸스선미와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2017년 딩고 인터뷰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 때 선미는 애진을 위한 선물까지 주며 애정을 보였다. 선미는 이 자리에서 너를 만난 것 자체가 기쁘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부터 4년 뒤인 2021년, MBC 특집 다큐 때 고마운 사람을 찾아가 선물을 주는 자리가 마련됐는데 이 때도 장애진은 선미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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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동딸이다.[2] 얼마나 친했는지 아버지인 장동원 씨를 '큰아버지' 라고 불렀다고 한다.[3] 처음에는 안내방송을 들은 딸이 "방송에서 기다리래..." 라고 탈출을 망설이자, 크고 단호한 목소리로 나가라고 12차례나 말했다고 한다.[4] 애진 역시 배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 장동원 씨가 배 밖으로 나가라고 필사적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애진 역시 구조되지 못하고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