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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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정상정(鄭相正)

선중(善中), 석정(石亭)
본관
연일 정씨
생몰
1878년 10월 10일 ~ 1920년 9월 29일
출생지
경상도 하동도호부 마전면 지소동
(현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1]
사망지
진주형무소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정상정은 1878년 10월 10일 경상도 하동도호부 마전면 지소동(현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마을의 이종인(李宗仁)·박영묵·정의용(鄭宜鎔) 등 33인과 더불어 일신단(一身 )을 조직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정상정은 이들과 함께 4월 6일의 주교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신단 동지인 정재기에게 하동읍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재기가 도중에 체포되어 일제는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게 되었다.

1919년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주교리 장터에 천여 명의 장꾼이 모였다. 이에 영묵이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가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신단원 및 장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조선인 경찰 박도준(朴道俊)과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제지하자, 시위군중은 그들의 총검을 탈취하는 한편 모자와 제복을 벗기고 구타하였다.

그러나 응원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행사로 시위대열은 해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 헌병 20명과 경찰 10명이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성천리 지소부락(紙所部落)에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치자, 그는 미리 부녀자와 아이들을 동리 뒤의 삼봉산으로 대피시킨 뒤, 박용묵·이종인·정의용과 함께 주동자임을 자처하며 체포되었다. 이후 1919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 1920년 9월 29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상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연일 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정의용·정재기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