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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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대 학장 및 총장
3. 연혁표
4. 대학 설립 추진
4.1. 도립 제주대학이사회의 결성
4.2. 제주대학원
4.3. 제주초급대학의 탄생
5. 대학 설립과 발전
5.1. 도립 제주초급대학(1952 ~ 1954)
5.2. 도립 제주대학(1955 ~ 1961)
5.3. 국립 제주대학(1962 ~ 1981)
5.4. 국립 제주대학교(1982 ~)
6. 제주교육대학교(현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



1. 개요[편집]


제주대학교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현 제주대학교의 모체는 1951년 제주도의 교육계 인사와 학자들이 설립한 제주대학원으로, 도립 제주초급대학 - 도립 제주대학 - 국립 제주대학 - 국립 제주대학교의 과정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공식적인 개교일은 제주초급대학으로써 개교한 1952년 5월 27일로 정하고 있다.
제주대학교 사십년사 참고

2. 역대 학장 및 총장[편집]



파일:제주대학교 총장 최승만.gif

초대 최승만 학장서리
  • 최승만 학장서리 (1951~1953)
  • 길성운 학장서리 (1953~1956)
  • 박종만 (1956~1957)
  • 안상학 (1957~1958)
  • 조현하 (1958~1960)
  • 오응삼 학장서리 (1960~1961)
  • 문종철 (1961~1967)
  • 김계용 (1968~1975)
  • 변시민 (1976~1979)
  • 현평효 (1980~1985)
  • 김두희 (1985~1989)
  • 김형옥 (1989~1993)
  • 고장권 (1993~1997)
  • 조문부 (1997~2001)
  • 부만근 (2001~2005)
  • 안영화 총장대행 (2005)
  • 고충석 (2005~2009)
  • 최치규 총장대행 (2009~2010)
  • 허향진 (2010~2018)
  • 송석언 (2018~2022)
  • 김일환 (2022~)

3. 연혁표[편집]


파일:제주대학교 로고.svg 제주대학교의 연혁


설립 초 ~ 1960년대
1952년 05월 27일 도립 제주 초급대학 설립 개교
1955년 04월 06일 도립 4년제 대학('제주대학')으로 승격
1962년 03월 01일 국립대학으로 이관
1964년 03월 01일 이농학부 캠퍼스 서귀포로 신축이전
1970년대
1977년 08월 08일 아라캠퍼스 신축공사 착공
1978년 12월 30일 대학원 및 교육대학원 설치 인가
1979년 12월 15일 서귀포 농.수산학부 아라캠퍼스 이전
1980년대
1980년 02월 28일 아라캠퍼스 통합이설 완료
1982년 03월 01일 종합대학 승격(5개 단과대학, 39개학과)
1984년 03월 06일 사범대학 부속학교(중.고)개교
1988년 03월 01일 사회과학대학, 법정대학, 경상대학으로 분리 설치
1990년대
1990년 03월 01일 경영대학원 개원
1991년 03월 01일 행정대학원 개원
1997년 03월 01일 산업대학원 개원
1998년 03월 01일 의과대학 개교 (1995년 10월 4일 의예과 설치인가)
2000년대
2001년 11월 01일 제주대학교병원 개원
2008년 02월 04일 법학전문대학원 예비인가
2008년 03월 01일 제주대학교와 제주교육대학 통합출범
2008년 03월 01일 의학전문대학원개원, 수의과대학신설
2010년대
2017년 3월 1일 미래융합대학 신설
2020년대
2020년 3월 1일 약학대학 신설

4. 대학 설립 추진[편집]



4.1. 도립 제주대학이사회의 결성[편집]


전쟁피난민이 남쪽으로 홍수처럼 밀려들던 1951년 2월, 당시 문교부[1]는 피난지 부산에서 ‘전시하 교육특별조치요강’을 제정, 발표하고, 부산과 제주도에 대학을 임시 운영한다고 했다. 이 조치에 따라 국제대학의 전신인 한국대학 제주분교가 설치되어 법학과와 영문학과가 개설되었다. 교육 대상은 피난민과 제주출신의 대학지망생들로, 강의는 야간에 실시되었다. 피난 와 있던 역사학자 조의설, 한글학자 장지영, 최근학, 시인 박목월, 방치화 등이 교수로 참여했다.

그러나 8월, 수도 서울이 수복되고 한국대학이 그쪽으로 옮겨가 버리자, 지역유지들은 대학의 필요성을 느끼고 9월부터 제주대학 설립 추진에 나섰다. 그들은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시설과 운영의 재정적 토대가 될 자산을 담당할 주체가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그래서 제주향교재단이 주체가 되어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방안, 삼성재단에서 설립해야 한다는 방안, 두 재단이 합동하여 설립해야 한다는 방안 등 세가지를 놓고 논의하게 되었는데, 대학을 설립하기는 재단의 재정 형편에 비해 너무나 막대한 경비가 들어가는지라 제주도와 합의에서 도립으로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그런 다음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최승만을 이사장으로 하는 도립 제주대학이사회를 결성하고 제주향교재단과 삼성재단에 자산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일은 꽤 잘 풀려서 제주향교재단이 1951년 10월 5일에 이사회를 소집하여 도립 제주대학후원회에 지가증권의 보상금 전액을 기부하고 그 보상금으로 기업체를 경영, 수익금 중 100분의 50을 대학의 유지를 위하여 납부하기로 결정했고, 삼성재단도 같은 달 10일 임시총회를 개최해 자신들의 재산인 토지에서 문교부가 발행하는 보상금 전액을 도립 제주대학후원회에 기부하기로 했다. 이로써 후원회는 대학 설립에 필요한 기본자산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문교부의 인가를 받아 제주대학원이 설립되었다.

4.2. 제주대학원[편집]


사실 제주대학원은 제주대학교의 모체일 뿐이고 공식적인 전신은 아니다. 제주대학원은 제주초급대학이 설립인가를 받자 1년 후 폐교[2]되었다. 현 제주대학교의 시작은 제주초급대학부터이다. 그러나 제주대학원이 대학 설립을 소망하는 제주도민들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하였고, 사실상 제주초급대학의 설립에 정초적 역할을 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제주대학원을 제주대학교의 근본으로 보는 것이다.

제주대학원의 강의는 옛 제주향교 명륜당에서 이루어졌는데, 야간 2년 과정이었으며 개설 당시 학생이 문과 35명, 법과 50명 등 총 85명이었다. 운영진은 명예원장에 최승만[3], 원장에 문병선이었고 사무부에 강석범, 교수부는 현평호가 맡았다. 한편 강사진은 장지영, 홍승국, 김면오, 황성희, 곽복산, 계용묵, 최근학, 문병선, 현평호, 강석범, 차광석, 방지화, 문태오, 이일빈, 김영국, 김경일, 김권한, 김계용, 오병학, 옥동형, 문창욱 등이었는데 당시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육지에서 피난 온 대학교수와 저명인사도 상당수 출강하기도 했다.

4.3. 제주초급대학의 탄생[편집]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교육열이 높았으며 광복 이후에도 육지부에 비해서 중등학교가 높은 비율로 설립되어 있으나 대학이 없기 때문에 고교를 졸업하는 영재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이들이 고등교육을 받으려면 육지부 소재 대학으로 진학해야 하는데 대부분 도민들의 경제형편상 도저히 그럴만한 사정이 못된다. 따라서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민주원칙에 입각하여 이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는 한편, 제주도의 특유한 천연자원의 개발과 문화향상을 기하기 위해서는 대학이 설치돼야 한다.

도립 제주대학 설립인가 신청서

한편 제주대학후원회는 1952년 3월 15일에 문교부에 도립 제주대학 설립인가 신청서와 '도립 제주대학후원회 설립을 위한 기부행위'에 대한 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문교부는 후원회의 명칭에 들어간 '도립'을 '재단법인'으로 바꾸고 '기부행위'의 내용도 일부 변경한 뒤 허가를 내주었다.

명칭이 바뀐 '재단법인 제주대학후원회 설립을 위한 기부행위'는 제주대학의 유지운영에 관한 지원을 목적으로 하며 그 사업으로 학교시설의 유지, 개선 및 확충에 관한 사업, 교원의 학술연구 지원에 관한 사업, 학교 부족경비의 조달에 관한 사업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한편 재단의 자산은 기본자산과 임시자산으로 구분하였는데, 기본자산은 제주향교재단과 삼성재단이 출연한 지가증권으로 하며 임시자산은 기본자산의 운영으로 얻어지는 수익과 기부금 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기본자산의 운영방법은 이사회가 결정하며 임시자산은 대학의 운영비 지원과 재단의 사무비용에 충당되도록하여 재단설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나중에라도 기부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재단에는 이사 9명과 감사 3명을 두었는데 이 후원회는 후에 제주초급대학이 설립된 후 시설비와 운영비 확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된다. 이사는 제주향교재단과 삼성재단, 제주대학에서 각 3인씩, 감사는 각 1인씩 선출하며 이사장은 이사 중에서 뽑도록 규정했지만 제주도지사가 계속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52년 5월, 문교부 고시 제423호로 축산과, 법과, 국문과, 영문과 등 4개 학과로 제주초급대학 설립을 인가받았다.

5. 대학 설립과 발전[편집]



5.1. 도립 제주초급대학(1952 ~ 1954)[편집]



파일:제주초급대학 당시 교사.jpg

제주초급대학 교사


파일:도립 제주초급대학 졸업증서.jpg

도립 제주초급대학 졸업증서

제주대학후원회는 1952년 3월 도립 제주대학 설립 인가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고 같은 해 5월 문교부 고시 제423호로 축산과, 법과, 국문과, 영문과 등 4개 학과로 제주초급대학 설립을 인가받았다. 이로써 대학 설립을 열망하는 도민의 염원이 실현되었고, 제주도에도 도민들의 고등교육을 담당하게 될 대학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도립 제주초급대학의 개교는 50년대 교육시설 확충과 관련하여 문교부가 주도하였던 1도 1교의 국공립대학 설립추진 계획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의 설립을 위해 결성되었던 후원회의 기본자산이 제주향교재단과 삼성시조 제사재단의 출연으로 확보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 역시도 제주도 고등교육의 전통승계와 관련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제주초급대학이 설립을 인가받음에 따라 1952년 6월 1일 최승만 제주도지사가 임시로 학장사무취급을 받아 전임교원 8명과 사무직원 2명을 발령하는 등 열심히 개교를 준비하였다.

2년제 도립 제주초급대학은 축산과 80명, 법과 120명, 국문과 80명, 영문과 80명 체제였다. 이중 신입생의 모집정원은 4개 학과를 모두 합쳐 130명이었지만, 처음 신입생 모집에 착수하자 전형결과 정원 미달로 58명만이 합격하였다. 대학 설립인가가 학기 도중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영문학과 지원생은 10명 미만이어서, 이를 국문학과로 통합시켜버렸다. 이는 대학설립의 인가조건 제2를 적용한 것으로 지정학과의 지원자가 10명에 미달될 경우에는 모집을 중지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한편 제주향교의 향교 구내 건물에서 1952년 8월 8일 드디어 역사적인 개교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개교식은 김세원 제주지방법원장 등 제주도내의 각급 기관장과 지방유지, 학부형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학장사무취급자인 최승만 도지사는 '제주초급대학의 개교는 제주도에도 대학이 있어야 한다는 도민들의 정성과 노력의 결집으로 실현된 것이다. 자기의 교사가 없어 비록 남의 건물을 빌려서 출발하고는 있지만 머지않아 현대식 교사를 건축하여 타 대학에 손색 없는 시설을 갖춤으로써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하는 기초를 다져나가야 한다고 본다. 교직원과 학생 모두는 사명감을 가지고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도민들도 본 대학이 도립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대학이므로 아껴주고 적극적인 원조를 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치사를 했다.

또한 길성운 제주도총무국장과 김석호 제주신보사장의 축사도 있었다.

제주초급대학의 강의는 개교 뒷날인 8월 9일부터 시작되었다. 개교 당시의 대학시설은 제주향교의 적선당을 사무실로 사용하였고 그 앞의 조그만 건물에 강의실 3개가 마련되어 국문학과, 법학과, 축산학과가 1개씩 이용하였다. 제주향교의 건물을 교사로 사용하기 위한 승락은 대학 설립인가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기 이전인 1952년 3월 7일에 이미 받아 두었는데 제주향교측의 승락서에 따르면 목조건물 5동에 연건평 235평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초창기라고는 하지만 고작 연건평 235평을 가지고 대학을 운영한다는 것은 매우 처참한 일이었고 의욕만 강했지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문교부의 설립인가서의 내용 중 제 4에 '현재 정한 교지, 교사는 적당치 못하므로 조속히 신 위치를 선정하여 교사 및 부속건물 등의 신축과 실험실습 및 부속 농장 계획을 확립하고 위치 변경 인가 절차를 완료하도록 할 것'이라고 특기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파일:1954년 제주초급대학 강의실.jpg

제주초급대학 강의실 모습

이렇듯 제주초급대학은 초창기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캠퍼스가 없어서 1952년 제주향교, 1953년 옛 제주농고 운동장의 판잣집을 임시 강의실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제주대학 4년제 승격 추진위원회 등이 나서서 다각적인 노력과 도민들의 성원으로 자체 소유의 용담캠퍼스를 확보하게 되었고, 2년여간의 임시교사 생활을 끝내고 용담캠퍼스로 이전할 수 있었다.

과거 제주대학원과 마찬가지로 당시 한국 전쟁을 피해 제주도로 피난 온 육지의 대학교수와 저명인사가 상당수 강사로 활동했다.[4]

한편 1954년 11월, 4년제 국립대학 승격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면서 국문학과, 영문학과, 법학과, 상학과는 야간부도 설치해 줄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몇 해 동안 설립 추진을 포기해왔다가 야간 초급대학 과정인 배성의숙이 설립되었다. 당시는 제주초급대학이 초창기로 제주도내의 대학입학 학생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배성의숙이 정규 야간대학으로 인가를 받게 되면 학생자원이 두 학교로 분산되므로 본 대학도 영세성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955년 4월 6일, 아쉽게도 요청했던 4년제 국립은 아니지만 4년제 도립 대학으로 승격하게되었으며 농학과, 상학과를 신설하고 축산과를 수의축산과로 개편했다. 현재 제주대학교는 당시 2년제 초급대학의 설립과 마찬가지로 4년제 승격을 위해서 도민들이 보낸 성원은 제주도 교육의 독특한 주체력으로써 조선조 이래의 값진 교육전통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5.2. 도립 제주대학(1955 ~ 1961)[편집]



파일:도립 제주대학 본관.jpg

도립 제주대학 본관


파일:도립 제주대학 제 1회 졸업식.jpg

도립 제주대학 승격 후 제 1회 졸업식

제주도는 원래 도립 제주초급대학이 4년제로 승격된다고해도, 재정 문제 때문에 시설투자는 고사하고 기초 교육시설조차 변변치 못한 상태가 지속되어, 정상적인 운영이 곤란하다는 판단 아래 국립 이관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5] 결국 대통령으로부터 국립 이관에 대한 유시를 얻어내기는 했지만 당시 국가재정 역시 녹록치 못했던터라 국무회의에서 부결되어 결국 4년제 도립대학으로 남게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교수 시설 등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교육여건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제주도에도 고등교육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한편 야간 초급대학과정으로 존재하던 배성의숙이 시설 기준 등 제반 조건이 별로 좋지가 않았는지 정규 야간대학으로 인가받을 가능성이 희박함이 거의 확실해지자, 제주대학은 1957년 5월 20일 초급대학과정의 임시 2부를 설치해 줄 것을 문교부에 신청하였다. 그 내용은 야간부에 법학과, 문학과, 정경과 등 3개 학과를 두고 정원을 300명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 배성의숙도 인가 기간이 끝나게 되어 의숙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이 갈 곳이 없어져버렸는데, 이에 따라 배성의숙 설립자 강경옥이 제주대학과 협의하여 제주대학의 4년제 임시 2부를 설립한뒤 자격이 있는 학생을 선정해 흡수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제주대학은 문교부의 인가도 받기 전인 7월 10일자로 배성의숙의 학생을 흡수하여 이를 문교부에 보고하였고, 8월 2일에는 법학과, 상학과, 국문학과 등 3개 학과를 두고 모집정원은 각 확과당 30명씩 총 90명으로 하는 임시 2부의 설치 인가를 신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반에 문교부는 쉽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여러차례 건의문과 설치 인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에야 1958년 2월 19일 임시 2부에 대한 설치를 인가받을 수 있었다.

당시 도립 제주초급대학에서 도립 제주대학으로, 그러니까 4년제 도립대학으로 승격은 되었으나 도 재정이 매우 부족하여 교육시설이 기준령에 크게 미달된 상황이었다. 초급대학때는 없었던 부속도서관과 부속농장 등이 설치되었고 어학실습실도 부속기관이 되었지만 역시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그다지 활성화를 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대학의 발전을 위한 국립 이관의 필요성을 계속 절감했지만 수년 동안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국립 전환을 추진하자는 논의가 더욱 구체적으로 제기되기도하였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에서야 특수한 지역적 사정과 지방대학을 통한 지역개발이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국가재건최고회의의 결정으로 1962년 3월 1일 정식으로 국립 이관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도립 제주대학은 임시 2부가 폐지되고 학과별 정원이 축소되는 고초를 겪었다.

5.3. 국립 제주대학(1962 ~ 1981)[편집]



파일:1962년 제주대학교 본관.jpg

1962년 제주대학 본관

그렇게 1962년 국립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당시 공립대학은 설립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가능한 국립대학으로 흡수한다는 국공립대학 정비원칙에 의한 것이었다. 이때문에 국립 이관 후 학부제를 실시하였고, 법문학부와 이농학부에 국문학과, 영문학과, 법학과, 상학과, 축산학과, 가정학과 밑 2년제 병설교육과 등 8개 학과를 두고 국가재정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농학부를 서귀포의 새로운 캠퍼스로 이전한 것도 이때 이루어졌다.

국립 이관을 계기로 발전을 보기 시작한 제주대학은 본격적으로 제주지역의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확충하고 제공하게 되었으며 문화 기능의 분산과 지방문화의 창달에도 기여하게 되었다. 지역실정에 부응할 수 있는 여러 학과가 증설되기도 하였고 연구소도 설립되었는데 제주도문제연구소 같은 것은 지역사회 조사연구에 큰 도움을 주었다.

파일:1967년 제주대학교 캠퍼스.jpg

1967년 제주대학 캠퍼스

그러나 지방소재 단과대학이면서 캠퍼스가 제주시와 서귀포 두 지역에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시, 도에 소재한 국립대학들에 비해 성장과 발전이 더디었다. 당시 제주대학은 규모는 종합대학 규모였지만 학과는 20개에 불과한 단과대학이었다. 또한 다른 시, 도에서는 사립은 물론 국립 종합대학교가 있는 반면, 유독 제주도에만 국, 사립을 막론하고 종합대학이 없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종합대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대학은 물론 도민사회 일각에서 움트기 시작했고, 1968년 종합대학교 승격을 건의하였으나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답변을 들었다.

한편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방대학의 육성이라는 정부시책에 따라1971년 6월 제주대학발전계획위원회를 결성하여 산하에 교육 및 기구조직분과위원회와 시설분과위원회를 두고 대학장기발전 계획수립에 필요한 제자원에 대한 조사결과에 따라 대학발전 7개년이 계획되었다. 이때 대학의 통합 이설에 관한 건의도 제출되었으며 이를 기점으로 하여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인 검토가 진행됨에 따라 통합 이설 추진기구도 나오고 캠퍼스 통합 이설 계획이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2년부터 본격적으로 캠퍼스 통합이설 검토가 시작되면서 73년 정부차원에서 2차에 걸쳐 본대학의 현황과 캠퍼스 통합의 필요성 여부에 대한 현지조사가 실시되어 1974년 캠퍼스 통합 이설을 위한 토지매입이 승인됨에 따라 1975년 캠퍼스 이전을 하기위한 토지를 구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76년 이설 부지의 정지공사가 착공되어 77년부터 통합 이설을 위한 신축공사가 시행되었다.[6] 이렇듯 제주대가 아주 열심히 캠퍼스를 통합 이설하기위해 노력한 것으로보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교육인력 양성보급을 위해 교육시설의 확충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파일:공사중인 아라캠퍼스.jpg

신축중인 아라캠퍼스

그렇게 아라동에 새 캠퍼스가 착공에 들어가자, 종합대학교 승격 문제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도민들도 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역 언론들도 기사와 논설을 통해 승격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였다.

5.4. 국립 제주대학교(1982 ~)[편집]



파일:제주대학교 종합대학 승격.jpg

종합대학 승격 당시 기념사진
196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종합대학 승격 노력은 아라캠퍼스로 캠퍼스를 이전한 1982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종합대학으로 개편되면서 사슴을 상징동물로 선정하였고, 휘장도 방패 위에 책과 펜을 그려넣고 월계수 잎이 방패를 감싸는 형상으로 새로 만드는 등 제주대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파일:전경과 대치중인 제주대학생.jpg

1987년 제주대 진입로에서 전경과 대치중인 제주대생


파일:제주대학교 4.3 진상규명 촉구 시위.jpg

1989년 제주대 총학 4.3 진상규명 촉구시위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와 그 열기가 한창이던 1980년대에는 제주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제주도의 민주화 운동의 주역은 제주대생들이었다.

80년대 후반에 들어 대학의 자율화가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는데 바로 이러한 민주화 추세에 부응하여 비롯된 것으로 1988년을 고비로 교수들의 학사관리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대폭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총장을 뽑을 때 학내 사람들의 의견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던 관례를 과감하게 탈피하고 전체 교수들의 의견수렴을 먼저 결정해야하는 조건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그간의 폭발적인 양적 성장으로 인해 질적 조건의 상대적으로 낮아져서 교육의 수월성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90년대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 과학기술에 따른 여러가지 사회문화적 변화는 양적 성장에 치우쳤던 기존의 교육체제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는데, 특히 교육의 수월성 추구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92년 <제주대학교 종합발전계획>을 계획하였으며 대학의 이념과 목표, 교육 내용과 방법, 학생정원과 학과증설, 학사 관리, 연구활동 및 지원체제, 특성화 분야의 육성, 학생자치활동 및 복지, 교원과 지원, 행정조직과 지원 부속기관, 행정 및 재정 제도등 10가지 사안별로 발전 전략을 구체화하였다.

파일:제주대학교 의예과 신설.gif

의예과 신설식

그렇게 1996년에는 의예과를 설치한뒤 1998년에는 의과대학을 설치하였고, 이후 이명박 정부의 뜻에 따라 2008년 과거 1968년에 다시 분리되었던 제주 교육 대학교를 다시 통합해 교육대학으로 개편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수의과대학을 신설,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개원하고 2017년 미래융합대학, 2020년 약학대학까지 신설하며 현재의 제주대학교에 이르게 된다.

6. 제주교육대학교(현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편집]



파일:제주사범학교 졸업식.jpg

1960년 제주사범학교 당시 제 7회 졸업생 일동 사진

광복 직후 제주도초등교사전라남도의 도서지역 초등교원을 주로 양성하던 목포사범학교[7]에서 양성되었다. 제주도가 독립 도가 되고 도내 초등교원 양성기관의 필요에 따라, 1946년 7월 20일 3개월 과정의 제주도임시초등교원강습소를 설치했다.

1946년 11월 10일 1년 과정의 제주도초등교원양성소로 개편되었고, 1951년 11월 7일에 양성소의 수업연한이 3년으로 연장되었다. 입소자는 소정의 교육과정과 교육실습을 거쳤고, 수료자는 검정시험을 통해 제주도 지역 초등교사로 임용되었다.

1953년 4월 1일 제주도립 공립사범학교로 개편되어 제주도립사범학교가 개교했다. 1954년 강습과를 특설해 무자격 현직 초등교원에 대한 보수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1956년 7월 14일 공립에서 국립으로 이관되어 제주사범학교가 되었다. 초등교원을 초급대학 수준에서 양성하는 법 제정에 따라 전국의 사범학교들이 2년제 교육대학으로 승격·개편됨에 따라 1962년 2월 27일 제주대학 병설 교육과(2년제)로 개편되어 설치되었다. 이후 1968년 10월 26일 제주교육대학으로 개편해 독립 설치됐다.

1984년 3월 1일 교육대학이 2년제에서 4년제로 승격·개편되었고, 1993년 국립학교설치령 개정에 따라 제주교육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했다.

2008년 3월 1일 제주교육대학교가 다시 제주대학교에 통폐합되었다. 이에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에 자리잡은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으로 개편되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행정적으로만 합쳐졌지, 학생들이 체감하는 달라진 점은 아무 것도 없었다. 차라리 교대생들의 캠퍼스 라이프를 위해 아라캠퍼스로 옮기는게 좋아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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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의 대한민국 교육부[2] 1953년 3월 31일[3] 당시 제주도지사[4] 대표적으로 제주대학원 시절부터 강사로 활동하며 제주대학교 교가를 작곡하기도 한 독립운동가 장지영 선생이 있다.[5] 당시 제주도의 재정은 충분하지 않았다.[6] 현재의 아라캠퍼스가 바로 이것.[7] 현재의 목포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