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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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Third Macedonian War
시기
기원전 171년 ~ 기원전 168년
장소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일리리아 왕국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external/ee1a27b17c61783105214ae23aa9a8dfb1c64f11225c4405656e1addaf25b2c0.png 페르가몬 왕국
파일:akaian_league_mon_256.png 아카이아 동맹
파일:aitolian_league_mon_256.png 아이톨리아 동맹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마케도니아 왕국
파일:오드뤼사이 왕국 상징.png 오드뤼사이 왕국
파일:external/dxzx499bp2l73.cloudfront.net/mon_256.png 일리리아 왕국
에페이로스 연맹
아카이아, 아이톨리아 연맹 내 반 로마 세력
아타마니아 부족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파일:external/ee1a27b17c61783105214ae23aa9a8dfb1c64f11225c4405656e1addaf25b2c0.png 에우메네스 2세
파일:attachment/mon_256_2.png 페르세우스
파일:external/dxzx499bp2l73.cloudfront.net/mon_256.png 겐티오스
결과
마케도니아 왕국일리리아 왕국의 멸망, 로마의 발칸 반도 지배력 강화

1. 개요
2. 배경
3. 경과
3.1. 기원전 171년
3.2. 기원전 170년
3.3. 기원전 169년
3.4. 기원전 168년
4. 이후
5. 주요 전투 목록



1. 개요[편집]


기원전 171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로마 공화국-페르가몬 왕국 연합과 마케도니아 왕국-일리리아 왕국-오드뤼사이 왕국-에페이로스 연맹 및 로마에게 반감을 품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맞붙은 전쟁이다. 로마 공화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마케도니아 왕국, 일리리아 왕국, 에페이로스 연맹을 정복하고 발칸 반도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2. 배경[편집]


기원전 197년 로마를 상대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필리포스 5세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참패한 뒤 더이상 로마에 대적할 수 없다고 여긴 후, 템페 회담에서 로마군 사령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요구사항에 따라 150년 동안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았던 테살리아를 비롯한 여러 영토를 포기하고, 로마에 종속했다. 그후 둘째 아들인 데메트리오스를 로마에 볼모로 보내고 로마에 순종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은 지난날 한니발 바르카와 손잡고 자국을 공격하려 든 전력이 있고, 아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싸운 필리포스 5세를 믿지 못해 마케도니아에 여러 차례 막대한 공물 헌납을 요구했으며, 데메트리오스를 로마화시킨 뒤 마케도니아로 돌려보내서 차기 국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이에 맏아들이었던 페르세우스가 반발했고, 마케도니아 궁정은 데메트리오스가 이끄는 친 로마파와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반 로마파로 양분되었다.

기원전 180년, 플라미니누스가 데메트리오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데메트리오스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 편지는 페르세우스가 조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페르세우스는 이 편지를 도중에 빼돌린 뒤 아버지 필리포스 5세에게 보여주면서 데메트리오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고, 필리포스 5세는 이에 따라 데메트리오스를 독살했다. 그러나 차남을 처형한 충격과 로마가 이 일을 가지고 어떻게 나올 지 근심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기원전 179년에 사망했다. 페르세우스는 왕위에 오른 직후 안티고노스 3세의 아들 안티고노스를 처형해 왕위경쟁자를 미연에 제거했다. 그는 즉시 로마에 대표단을 파견해 자신을 인정하고, 기원전 196년에 맺었던 조약을 갱신하자고 요청했는데, 로마 원로원은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필리포스 5세는 과거 북방의 적인 다르다니아인을 견제하기 위해 켈트족게르만족의 혼합 집단이었던 바스타르네(Bastarnae)족과 동맹을 맺은 바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동맹을 강화하기로 하고, 바스타르네족의 공주와 결혼했다. 이후 바스타르네족이 다르다니아인을 공격하자, 다르다니아인은 로마 원로원에 사절단을 보내 마케도니아가 바스타르네를 부추겨서 자신들을 공격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페르세우스는 즉시 사절을 보내 바스타르네의 다르다니아 침공은 자신이 조장한 게 아니라고 부인했다. 원로원은 일단 지켜보기로 하면서도 페르세우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트라키아 부족인 사페아족이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하여 암피폴리스에 도착했다. 그들은 암피폴리스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으나, 페르세우스의 통치 기간 내내 마케도니아의 골칫거리로 남았다.

페르세우스는 빚을 갚지 못해 각지를 유랑하는 자들과 죄수들에 대한 사면령을 공표하여 민심을 모으고자 했고, 델포이 신전에 다수의 대표단을 보냈으며, 아이톨리아 동맹과 화해해 그리스 도시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또한 테살리아와 아이톨리아에서 무거운 빚에 시달리는 이들을 부추겨 친로마적인 과두정에 대항하게 했다. 테살리아의 각 도시국가 정부들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로마에 개입을 요청했지만, 원로원은 관여하지 않았다.

기원전 174년, 페르세우스는 돌로프족을 상대로 원정을 단행한 뒤 델포이 신전에 들러 신탁을 받았으며, 그리스인들에게 선왕 필리포스 5세때의 갈등을 잊고, 새로운 우호관계를 맺자고 요청했다. 이에 아카이아 동맹을 제외한 대다수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긍정적인 답변을 보냈다. 한편 에우메네스 2세가 통치하는 페르가몬 왕국이 갈수록 강력해지자, 페르세우스는 기원전 177년 셀레우코스 제국에 접근하여 셀레우코스 4세의 딸 라오디케와 결혼했고, 누이인 아파마를 페르가몬 왕국의 경쟁자였던 비티니아 왕국프루시아스 2세와 결혼시켰다. 여기에 로도스인들에게 접근하여 10,000명의 용병을 새로 징집해, 마케도니아군을 강화했다.

로마 원로원은 마케도니아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로도스, 그리고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친선 및 동맹 관계를 수립하는 걸 우려했다. 이에 따라 사절을 보내 페르세우스에게 다시 경고하려 했지만, 페르세우스가 사절을 만나주지 않아서 실패했다. 기원전 173년 테살리아의 도시국가 정부들이 다시 한번 페르세우스의 팽창정책에 대해 우려를 제기하자, 로마는 사절을 파견해 테살리아에서의 빚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이오티아 동맹과 연합을 체결한 후, 델포이와 델로스 섬에서 동맹조약을 발표했다.

로마 원로원 내부에서는 반마케도니아파가 궐기해 무력으로 마케도니아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많은 의원들은 마케도니아가 로마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데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가 로마에 방문하여 페르세우스를 위험 인물로 묘사하며 개입을 촉구하면서, 원로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들은 로마의 친밀한 동맹인 페르가몬 왕국의 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에우메네스 2세가 귀국하던 중 페르세우스가 보낸 암살단의 습격을 받고 겨우 목숨을 건지자, 원로원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보고,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단행하기로 헀다.


3. 경과[편집]



3.1. 기원전 171년[편집]


비록 전쟁을 결의했지만 전쟁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원로원은 기원전 172년, 사절단을 페르세우스에게 파견하여 평화를 논의하도록 했다. 페르세우스는 협상에 성실히 임했고 휴전협약이 맺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기원전 17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2개 군단병과 비슷한 숫자의 동맹군, 에우메네스 2세가 제공한 페르가몬 군인 및 함대를 이끌고 일리리아 해안에 상륙한 뒤 페르세우스에게 선전포고문을 발송했다. 이에 페르세우스는 빠르게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40,000명의 보병과 4,000명의 기병을 소집했으며, 오드뤼사이 왕국의 국왕 코티스에게도 지원군을 받아냈다. 그후 로마에 넘어간 테살리아 북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크라수스는 일리리아 해안에서 산간 지대를 거쳐 테살리아로 행진했다. 양측은 테살리아의 칼리니코스에서 조우했고, 각자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대치했다. 페르세우스는 숙영지를 건설하고 하루 동안 푹 쉰 뒤 테살리아 남부의 페라이를 습격해 농경지를 약탈함으로써 로마군이 숙영지에서 나와 전투를 벌이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로마군이 나오지 않자 분견대를 로마 진영 인근에 접근시켰다. 로마군은 경무장 부대를 파견해 이들과 교전하면서도 여전히 숙영지에 가만히 있었다.

그후 페르세우스는 며칠 동안 똑같은 시각에 들판으로 나와서 회전을 요구했고, 크라수스가 받아들이지 않자 돌아가길 반복했다. 그러다가 로마 기병대가 말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들판에 풀어놓은 아침에 느닥없이 기병과 경보병대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크라수스는 급히 기병대를 소집하여 이들을 저지하도록 했다. 이때 마케도니아군에 소속된 투석병과 투창병 400명은 페르세우스의 지시에 따라 로마군을 향해 원거리 무기를 던지며 도발했다.

그후 오드뤼사이의 코티스가 보내준 트라키아 기병대가 좌익에서 이탈리아 기병대를 향해 돌격했고, 페르세우스는 중앙과 우익의 크레타 경보병대와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와 그리스 기병대 및 경보병대를 공격했다. 트라키아 기병들의 압도적인 전투력과 승마술을 당해내지 못한 이탈리아 기병대는 혼란에 빠진 끝에 얼마 못버티고 패주했으며, 로마 및 그리스 부대 역시 갑작스러운 마케도니아군의 공격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퇴각했다.

이때 예비군으로 남아있었던 테살리아 기병대가 에우메네스 2세의 페르가몬 군대와 함께 전투 대형을 결성하고, 도주하는 로마 및 이탈리아 기병대를 엄호해 그들이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했다. 이후 경보병대까지 구하기 위해 전진하자, 페르세우스는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진영에 대기중이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투입시키려고 했다. 이때 크레타인 사령관 에우안다르가 진언했다.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나중의 일을 생각하시어 굳이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마십시오."


페르세우스는 그 말에 따라 군대를 숙영지로 되돌리기로 했다. 이날 로마군은 기병 200명과 경보병 2,000명을 상실했는데, 그중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마케도니아군의 손실은 기병 20명, 보병 40명에 불과했다.(칼리니코스 전투) 크라수스는 수로를 지키기 위해 반대편 강둑으로 숙영지를 옮기자는 에우메네스 2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음날 페르세우스는 전투를 벌이기 위해 평원에 나왔지만 로마 - 페르가몬 연합군의 진영이 옮겨진 것을 보고 자신이 사전에 적이 이동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해 야습을 가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크라수스는 패배의 원인이 전투 초반에 제대로 싸우지 않고 붕괴된 아이톨리아 부대에 있다고 여기며 가장 먼저 도망친 것으로 간주된 아이톨리아 장교 5명을 체포해 로마로 압송했다. 반면 예비군으로서 전선을 형성해 아군을 지켜준 테살리아인들에게는 큰 보상을 해줬다. 페르세우스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크라수스는 로마에 항복하는 것이 아닌 한 협상을 논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페르세우스는 막대한 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해 협상에 임하도록 유도해봤지만 크라수스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이에 페르세우스는 시큐리움으로 철수한 뒤 로마군의 동태를 살폈다.

로마군 장병들이 자기들의 곡식을 수확한 뒤, 남는 짚을 진영 앞에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야간에 습격을 가해서 그 짚에 불을 지른다면 로마군의 숙영지를 불태워서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야간 기습이 도중에 발각되자 철수했고, 로마인들은 이를 추격해 마케도니아 병사 수십 명을 사살하거나 사로잡았다. 그후 로마군은 더 많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 라리사 남동쪽의 크라논으로 이동했다. 페르세우스는 로마군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기병과 경보병대를 배치시켜서 적을 도발해봤지만, 로마군이 꿈쩍하지 않자 시큐리움으로 철수했다. 로마군이 뒤이어 팔라나로 이동한 뒤 곡식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다수의 병사를 사방에 보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때를 틈타 적을 습격하기로 했다.

페르세우스는 기병 1,000명과 트라키아 및 크레타 경보병 2,000명을 이끌고 로마군의 수송부대를 습격해 1,000대의 수레와 600명의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뒤이어 로마병 800명으로 구성된 분대를 공격했다. 이들은 언덕으로 올라가 방패벽을 세워서 원거리 무기를 막을 준비를 갖춘 후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로 했다. 마케도니아군은 언덕을 포위했지만 로마군의 방비가 강력해서 언덕을 올라가기 힘들자 새로 발명된 무기인 케스트로펜돈(κεστροσψνδόνη)을 활용해 적의 방진을 흐트러놓으려고 했다. 폴리비오스는 이 무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케스트로펜돈은 페르세우스의 전쟁 당시 새로운 발명품이었다. 다트의 길이는 2큐빗이었고, 튜브의 길이도 이와 같았다. 다트에는 길이가 한 뼘, 굵기가 손가락 한 뼘 정도 되는 나무 자루가 끼워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아주 짧은 날개 모양의 막대기 3개가 단단히 붙어 있었다. 다트가 발사되는 슬링의 끈은 길이가 같지 않았고, 그 사이의 고리에 삽입되어 쉽게 풀릴 수 있었다. 거기에는 끈이 팽팽하게 빙빙 돌면서 고정되어 있었지만, 끈이 풀리는 순간 끈 중 하나가 풀리자 고리에서 벗어나 물매에서 납탄처럼 발사되어 큰 힘으로 치니, 맞은 사람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 신무기의 공격을 받은 로마군은 많은 사상자를 입고 기력이 쇠약해졌으며, 페르세우스는 항복하라고 거듭 요구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크라수스는 누미디아 기병전투 코끼리를 포함한 경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서둘러 달려왔고, 로마 군단병들이 그 뒤를 따라왔다. 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 중보병대를 서둘러 소집했지만 그들이 제때에 팔랑크스 진형을 갖추기 전에 로마군이 공격을 가했다. 이에 마케도니아군은 퇴각했고,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보병 300명과 기병 24명, 적장 한 명을 사살하고 많은 중보병을 생포했다.(팔라나 전투)

그후 페르세우스는 테살리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진입하는 진군로가 지나가는 템페 계곡의 입구인 고누스에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한 뒤 마케도니아로 철수했다. 크라수스는 마케도니아군이 테살리아로 재차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누스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하자 말로나와 트리폴리스를 포함한 여러 마을을 점거하고 라리사로 귀환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170년 초, 그는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거둔 전공이 별로 없는 것을 만회하고자 보이오티아의 여러 도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수많은 이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함대 사령관이었던 가이우스 루크레티우스는 훨씬 더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여 그리스인들의 반감을 샀다.

페르세우스는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에우보이아의 오룸 섬에 정박한 로마 함대를 기습 공격해 전함 5척과 곡식을 실은 수송선 20척을 나포하고 나머지 배들을 침몰시킨 뒤 마케도니아로 귀환했다. 이렇듯 페르세우스가 로마를 상대로 선전하자, 로마군의 악행에 분노하고 있었던 그리스인들은 페르세우스를 자신들을 지킬 수호자로 여겼고, 그리스와 에페이로스의 많은 장정들이 마케도니아군에 가담했다.


3.2. 기원전 170년[편집]


기원전 170년, 지난해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마케도니아 국왕 페르세우스를 상대로 칼리니코스 전투에서 패배하는 등 변변치 않은 결과를 거두자, 당해 집정관이었던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그를 대신하기 위해 발칸 반도로 건너가서 크라수스의 임페리움을 회수했다. 만키누스는 에페이로스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들어가는 산길로 행군하기로 했다. 이때 마케도니아와 내통하고 있었던 에페이로스 동맹이 페르세우스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들이 안내해줄 테니 만키누스를 기습 공격하라고 조언했다. 페르세우스는 이에 따라 군대를 일으켰지만 행군이 지체되었고, 그 사이에 적의 음모를 눈치챈 만키누스는 보이오티아의 코른트 만 북쪽 해안에 위치한 안티키라로 방향을 돌렸다.

이후 테살리아로 행진한 뒤 마케도니아군과 교전하려고 했는데, 이에 관한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설명이 소실되었고, 다른 역사가들도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키누스는 군대를 정비하고, 마케도니아 남서부의 엘리메아를 통과한 뒤 비밀리에 테살리아를 지나가려 했지만, 페르세우스가 사전에 길목을 차단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숙영지로 철수했다. 이후 주민들을 약탈하는 군단병들을 처단하는 등 군기를 다잡는 한편, 사방에 사절을 보내 로마와의 동맹을 계속 유지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상황은 로마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로마군이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고전하는 것을 본 에페이로스 동맹은 대놓고 로마에 반기를 들고 마케도니아 편을 들었으며, 아이톨리아 동맹, 아카이아 동맹 등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겉으로는 로마와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병력 및 물자 지원을 차일피일 미뤘다. 또한 많은 그리스인들이 마케도니아군에 가담해 로마에 맞섰다. 여기에 일리리아 왕국의 국왕 겐티오스가 로마와의 관계를 끊고 페르세우스 편에 설려는 조짐을 보였다. 페르세우스는 겐티오스를 확실히 끌어들이기 위해 일리리아 북쪽의 다르다니아인들을 공격하여 10,000명을 주살했다.

원로원은 마케도니아의 공세로부터 일리리아를 지키기 위해 2,000명의 군인을 태운 8척의 수송선을 이사 섬으로 보냈고, 만키누스 역시 법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4,000명의 병력을 맡겨서 일리리아로 파견했다. 아피우스는 진군하면서 다양한 국적의 동맹군을 끌어들여 8,000명을 모은 뒤 에페이로스 부족인 다사레티아족의 영토에 있는 리크니도스에 진입했다. 그러던 중 일리리아 부족인 페네스타이인들이 자신들의 근거지인 우스카나를 넘겨주겠으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야밤에 1,000명의 병사에게 숙영지를 지키게 한 뒤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우스카나로 향했지만, 페네스타이인들로부터 인질을 받아내서 그들이 약속을 지키도록 보증하게 하지도 않았고, 정찰병도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행렬은 길고 불규칙하게 늘어졌으며, 어둠 속에서 행진하다보니 낙오된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우스카나에 도착했을 때, 수비대가 곧바로 출격해 많은 로마인을 살육했다. 클라우디우스는 병사들을 수습할 생각도 않고 리크니도스로 도주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를 따라 무사히 숙영지에 도착한 이는 1,000명 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우스카나 전투)


3.3. 기원전 169년[편집]


기원전 169년, 페르세우스는 스투베라에서 10,000명의 보병, 경보병 2,000명, 기병 500명을 데리고, 일리리아의 부족인 페네스타이의 거점이었던 우스카나로 진군했다. 우스카나에 주둔한 수비대는 끝까지 저항하려고 했지만, 마케도니아군이 포위하면서 식량이 바닥나자 소유물을 가지고 우스카나를 떠날 수 있는 조건하에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페르세우스는 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수비대가 항복하자 소유물을 압수하고, 수비대를 구금했으며, 우스카나 시 주민들을 스투베라로 끌고 가서 노예로 팔고, 크레타인 수비대를 우스카나에 주둔시켰다.(우스카나 전투)

그후 페르세우스는 드라우다쿰으로 진군해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뒤이어 11개의 요새를 점령하고, 1,500명의 로마인을 생포했다. 그러면서 겐티오스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겐티오스가 돈이 부족해서 군대를 일으킬 여력이 되지 않는다며 돈을 보내달라고 하자 일단 마케도니아로 귀환하기로 했다. 일리리아의 로마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코엘리우스는 페르세우스가 일리리아에서 활동하는 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해안 지대의 요새화된 도시에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가 페르세우스가 돌아가자 우스카나를 탈환하려고 했지만 격퇴되어 본거지로 돌아간 뒤, 로마에 충성을 유지한 도시들과 파르티니족으로부터 인질을 받기 위해 분견대를 파견했다. 한편 페르세우스는 에페이로스인과 손을 잡고 아이톨리아 동맹의 북쪽 경계에 위치한 요새인 스트라토스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애를 먹다가 겨울이 가까워지자 아페란티아로 철수했다.

얼마 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우스카나에서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에페이로스의 어느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가 파견한 마케도니아 분견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사람이 없는 산길을 통해 후퇴하다가 1,200명을 상실했다. 마케도니아 분견대는 그를 추격하면서 진군로의 주변을 약탈했다. 잇따른 실패에 좌절한 클라우디우스는 군대를 해안 요새에 주둔시킨 뒤 로마로 돌아갔다.

한편, 기원전 169년도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브룬디시움에서 친척이자 함대 사령관인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의 인솔하에 아카르나니아로 건너간 뒤 만키누스로부터 지휘권을 인계받은 후 산악길을 통해 마케도니아로 진군헀다. 그러던 중 어느 산길에서 마케도니아군과 우연히 마주쳤고, 이어진 전투에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페르세우스가 나팔 신호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바위와 협곡 사이에 끼어 있는 로마군 전체를 포획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페르세우스는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고, 만키누스는 산길을 강행 돌파한 뒤 마케도니아 계곡으로 내려갔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로마군이 자국의 영토 깊숙이 들어오자 페르세우스는 공황 상태에 빠져 함대를 불태우고, 보물들을 바다에 처넣으라는 명령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리푸스는 더 이상의 공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만키누스와 합류하기 위해 본대를 이끌고 올림푸스 지역을 통과해 마케도니아에 진입했으나 보급로가 수시로 끊기는 바람에 식량이 떨어져 버려서 테살리아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아카이아 동맹에서 파견된 사절단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제안받았지만 로마에는 동맹이 필요하지 않다며 거절했다. 그후 필리푸스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이렇듯 로마군이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발발 이래 3년 동안 고전하는 모습만 보이자, 일리리아 국왕 겐티오스는 페르세우스와 동맹을 맺기로 마음먹었다. 폴리비오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페르세우스는 플루라토스와 베로아의 아다이아오스를 겐티오스에게 사절로 보내어, 그가 로마인과 다르다니아인과의 전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에페이로스인과 일리리아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것을 알리도록 했다. (중략) 겐티오스는 즉시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그에게 지시에 포함된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겐티오스는 페르세우스와 우정을 나누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자원이 부족하여 돈을 받지 않고서는 로마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의 요청에 즉시 응하지 않는 까닭을 밝혔다. 아다이아오스와 그의 동료는 이 답변을 받고 마케도니아로 돌아왔다. 페르세우스는 스티베라에 이르러 전리품을 팔고 군대를 쉬게 하면서 사절단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사절단으로부터 겐티오스의 대답을 들은 그는 아다이아오스와 그의 경호원 중 한 명인 글라우키아스, 일리리아어를 익숙하게 구사하는 플루라토스를 재차 파견했다. 그들이 떠나자, 페르세우스는 그의 군대와 함께 떠나 히스카나로 진군했다.

사절단이 겐티우스를 재차 찾아왔지만, 페르세우스에게 별다른 지시를 받은 게 없었기 때문에 이렇다할 추가 제안을 하지 않았다. 겐티오스는 페르세우스와 합류하는 걸 고려할 수 있지만 돈이 필요하다며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페르세우스는 그들에게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히피아스를 보내 확실한 협정을 맺도록 했다. (중략) 히피아스는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와서 겐티오스가 300달란트와 적절한 보증인만 있으면 로마와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페르세우스는 겐티오스의 협력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그의 첫 친구 중 한 명인 판타우코스를 사절로 임명해 먼저 동맹 서약을 교환하도록 했다. 이후 겐티오스는 판타우코스가 지정한 인질을 즉시 보냈고, 판타우코스는 페르세우스가 서면으로 지명한 인질을 보냈다. 그후 판타우코스는 300달란트를 전달할 준비가 마련되자 즉시 출발하여 라베타이의 메테온에 도착하여 겐티오스를 만났고, 곧 겐티오스가 페르세우스와 함께 로마에 대적하도록 유도했다.


페르세우스는 여기에 더해 페르가몬 국왕 에우메네스 2세셀레우코스 제국안티오코스 4세에게 자신과 힘을 합쳐 로마를 무찌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두 왕은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전쟁 추이를 좀더 지켜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한편 비티니아 왕국로도스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페르세우스와 로마 사이의 평화협상을 중재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듬해에 전쟁을 끝내기로 결의했다.


3.4. 기원전 168년[편집]


로마인들은 대마케도니아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군사적인 역량이 뛰어나고, 매사에 신중한 인물을 집정관으로 세우기로 했다. 그 결과 집정관에 선출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는 델포이에 상륙한 뒤 마케도니아 남부로 진격하여 피에리아의 디온 근처에 진지를 세우고, 주변의 로마군을 모조리 끌어들여 보병 24,500명과 기병 4,500명 가량을 확보했다. 페르세우스는 이에 맞서 올림푸스 산 인근의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고지에 틀어박혀 로마군의 진로를 막았다.

이후 로마군의 정찰병들이 페레비아를 통과하는 우회로가 하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그곳은 매우 좁고 험난해서 자칫 마케도니아군의 급습을 받는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다들 그 길로 가기를 꺼렸는데,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고 있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처음으로 분견대를 이끌고 그 길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파울루스의 허가를 받은 그는 파울루스의 아들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와 함께 8,200명의 보병과 120명의 기병을 이끌고 우회로로 향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르세우스는 밀로에게 12,000명의 병력을 보내 로마군보다 먼저 길목을 장악하도록 했다. 이걸 본 스키피오는 강행 돌파하기로 작정했고, 양군은 산봉우리에서 격전을 치렀다. 그러던 중 로마군에 고용된 트라키아 용병대가 마케도니아군의 대열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자, 밀로의 군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이후 그의 분견대가 평야로 내려오자, 페르세우스는 마케도니아 평원으로 후퇴했다. 이에 파울루스는 페르세우스를 추격했고, 양군은 피드나 평원에서 대치했다.[1]

피드나 전투 당시 마케도니아군은 보병 40,000명과 기병 4,000명으로 로마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로마군이 자신들을 먼저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역시 기다리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한동안 대치하고 있을 때, 탈주한 로마군 병사 한 명이 노새에게 물을 먹이러 강가로 갔다가 노새가 도망쳤다. 이에 그 병사와 동료들이 노새를 도로 데려가려 했는데, 마케도니아인들이 이 노새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양측 병사들은 노새를 놓고 격돌하면서 동료들에게 원군을 요청했고, 점점 더 많은 병사가 강가로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마케도니아군 중보병들이 팔랑크스 대형을 형성한 뒤 강가로 진군하자, 로마군 병사들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당장 동료들을 구하러 가자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평지에서 팔랑크스와 정면 대결하면 승산이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섣불리 움직이려 하지 않았지만, 병사들의 요구가 갈수록 극렬해져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감돌자, 어쩔 수 없이 전군에 전투 대열을 갖추고 마케도니아군을 향해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양군은 강변의 평원에서 격돌했다. 로마군은 마케도니아 장병들이 내지른 사리사를 손으로 낚아채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로마군 장병들이 감히 돌진하려 하지 않자, 기수 한 명이 군기를 적진에 던졌다. 이에 눈이 뒤집힌 로마군 병사들은 앞다퉈 군기를 회수하러 달려들었다. 그러나 전열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돌격했기 때문에 얼마 안가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에 밀렸고, 결국 언덕 위를 향해 후퇴했다. 적군이 후퇴하자 기세가 오른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은 언덕을 향해 진격했다. 그 과정에서 팔랑크스 대형이 흐트러졌고,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이때를 틈타 군단병에게 그 틈을 파고들라고 명령했다.

로마군이 틈새를 파고들자 마케도니아군 보병 대열이 허물어졌고,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곧 패주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우수한 마케도니아 기병들은 전투 내내 별다른 지시를 받지 않아서 먼 후방에 멀뚱히 서 있다가 아군이 패주하는 모습을 보고 달아났다. 이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인 20,0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로마군의 피해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페르세우스는 기병대를 가까스로 수습한 뒤 수도 펠라에 도착하여 병사를 모으려 했지만, 마케도니아 도시들이 하나둘씩 로마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는 다시 암피폴리스에 가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의했으나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암피폴리스 주민들은 왕을 위해 싸우고 싶지 않으니 당장 떠나라고 요구했다. 페르세우스는 몇몇 추종자들 및 500명의 크레타 용병대와 함께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했다. 로마 함대가 곧 이 섬을 봉쇄하자, 페르세우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168년 7월 아들 알렉산드로스와 함께 항복했다.

페르세우스는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개선식에 자신을 동행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렇다면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라는 답변만 받았다. 그는 차마 목숨을 끊지 못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후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그리스를 돌며 에우보이아, 아테네, 코린토스, 아르고스, 스파르타 등 여러 폴리스의 권력을 친 로마파 인사들이 장악하도록했다. 이때 파울루스는 올림피아 신전을 방문해 피디아스가 세운 제우스 동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법무관 루키우스 아니키우스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아폴로니아로 건너간 뒤 일리리아 함대 80척을 격파하고, 로마의 동맹으로서 겐티오스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던 바시니아를 구원했다. 겐티오스는 스코드라로 피신한 뒤 15,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스코드라 성벽 아래에서 아니키우스와 클라우디우스의 로마군과 맞서 싸웠지만 현격한 전투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완패했다. 겐티오스는 도주를 시도했으나 끝내 추격병에게 사로잡혔다. 이리하여 일리리아 왕국은 로마에게 완전히 정복되었다.


4. 이후[편집]


기원전 167년, 로마 원로원이 파견한 10명의 레가투스들을 맞이한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그들과 함께 전후 마케도니아 관리 계획을 수립한 뒤 암피폴리스에서 발표했다. 이 <암피폴리스 선언>에 따르면, 마케도니아 왕국은 4개의 귀족 공화국(메리다)으로 분할되며,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없고, 세금의 절반을 로마에 내놓아야 하며, 각 공화국의 주민들은 다른 공화국에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다. 그후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 진영에 가담해 로마에 저항한 에페이로스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해 70개의 정착지를 파괴하고, 무려 150,000명에 달하는 에페이로스인을 노예로 삼았다.

기원전 167년 이탈리아 반도에 돌아온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로마에 귀환한 뒤 개선식을 신청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와 에페이로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 상당수를 재무부에 넘기고 병사들에겐 얼마 안 되는 몫만 나눠줬기에, 병사들은 그에게 악감정을 품고 그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이전에 페르세우스를 상대했고, 이후 원정군의 부관을 맡았던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이런 병사들을 회유해 그야말로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게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세르빌리우스 풀렉스 게미누스 등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원로원 의원들이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지지한 덕분에,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을 인정받고, 3일 동안 개선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167년 9월에 거행된 개선식은 로마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고 전해진다. 파울루스가 가져온 전리품은 실로 막대해, 일반 병사에게 100데나리온, 백부장에게 200데나리온, 기병에게 300데나리온씩 분배하고도 3,000만 데나리온이 남았다고 한다. 여기에 로마 정부는 매년 600,000데나리온을 마케도니아의 4개 공화국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원로원은 국고가 무척 풍요로워져서 로마인들에게 직접세를 걷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고 직접세 폐지를 공표했다. 그후 로마는 120년 동안 직접세를 걷지 않았다. 한편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와 일리리아 왕 겐티오스, 그리고 두 사람의 가족들은 전리품 취급을 받으며 로마 군중의 눈요기거리가 되었다. 페르세우스는 이후 알바 푸젠스의 감옥에 갇혀 지내다가 2년 후인 기원전 166년에 사망했다. 그렇지만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로마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여 도자기를 구워 팔다가, 라틴어를 배운 뒤 공증인이 되어 잘 살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국은 무너졌고, 마케도니아 일대는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어 로마 공화국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로마인들은 이제 마케도니아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여겼지만, 로마의 수탈을 견딜 수 없었던 마케도니아인들이 기원전 150년 페르세우스 왕의 아들을 사칭한 안드리스코스를 국왕으로 옹립하며 로마에 반기를 들면서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5. 주요 전투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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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피드나 전투 직전에 월식이 발생해 양측 병사들을 놀라게 했지만,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지시를 받은 트리부누스 밀리툼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루스가 병사들에게 월식이 자연 현상일 뿐 불길한 징조가 절대로 아니라고 설명해 안심시켰다고 한다. 리비우스 등 다른 기록에 따르면, 갈루스는 일식을 예측하고 군대에 미리 알려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