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도 진상품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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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도민들이 진상품때문에 겪은 고난을 정리한 페이지.

1. 소개
2. 주요 특산품
3. 대동법? 여긴 그런거 없다



1. 소개[편집]


제주도는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육지에서 나지 않는 진귀한 특산품들이 여러가지 있었다. 이런 특산품은 당연히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은 제주도는 왕조시대 당시에도 살기가 수월하지 않은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생활 자체가 디스커버리 채널 생존 프로그램 수준 난이도로 인생이 극한직업이다. 일단, 제주도는 화산섬이란 특성상 기본적으로 농사가 매우 힘든 지역이다.화산재 때문에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이 절대적으로 적었을 뿐만 아니라 파종 전에도 밭을 여러번 갈아야 했고, 파종 이후에는 소와 말을 끌고가 여러번 밟아주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을 경우 싹이 나다가 말라죽어 버렸다. 문제는 그러고도 충분한 수확을 얻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현대에 이르러 별다른 자원이 없는 제주의 주력산업 가운데 하나로 농업이 자리잡은 것은 말 그대로 현대기술의 승리 그 자체다. 돈은 별로 안된다만 당장 먹고 살 수 있는게 어디야?그러니 농업만으로는 식량확보가 불가능해 어업 혹은 목축업을 겸해야만 필요한 식량을 마련할 수 있었다. 평년에도 이 모양인데 가뭄이라도 들면? 제주특별자치도 산업 항목에 사냥이 들어가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농사 짓고도 동시에 사냥이든 뭐든 안하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제주도에서 특유의 전통 무속 신앙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이유 중 하나로 이 열악한 환경을 꼽기도 할 정도였다. 이처럼, 극도로 살기 어려운 환경에서 제주도 사람들이 의지할 곳은 신앙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 주요 특산품[편집]



조선시대의 제주도에서 중요 진상품들은 대표적으로 (馬), 감귤, 전복, 흑우, 흑돼지, 참, 사슴, 은갈치, 표고버섯, 당근 등이 있었는데...허생전을 보면 말총을 뜯기도 한다


  • 제주도에서 사육은 삼별초를 토벌한 몽골군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온화한 기후라서 말을 키우기에 이상적인 지역이라는것을 깨닫고 말 목장을 만든 것이 시작되었다. 원래 제주 중산간 지역에 초원의 면적이 그다지 넓지 않고 숲이 우거져 있었는데 일부러 초원으로 만든 것이다. 방법은 다들 예상하다시피 부리야![1]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더욱 더 엄격하게 제주도의 말 생산을 관리했다. 심지어는 고려최영은 원명 교체기 당시 제주도에서 반기를 든 몽골 출신 목동이라 쓰고 아마추어 몽골기병이라고 읽는 자들의 조랑말 부대를 격파했다. 이 것이 목호의 난이다. 그런데 몽골기병은 원래 대부분 조랑말 타고 다닌게 함정



  • 세종대왕 때 제주도를 10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말 목장을 설치해 말을 기르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기른 말들은 제주목사가 직접 관리 감독해서 임금이 탈 말(어승마)로 분류한 뒤 한양까지 배로 운반시켰다. 문제는 말을 키우는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먹기는 엄청나게 처먹지, 곡식도 먹여야지, 엄청나게 예민하지, 성깔은 또 엄청 더럽지, 뻑하면 다치지, 풀어뒀다 데리러 가면 멀리서도 주인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죽어라 도망가지(...)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제주도민들은 행여나 말이 탈이 나서 진상품이 되지 못하거나 죽어버릴 경우에는 자비로 새 말을 채워넣어야 했다. 말 한마리 값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제주도민들 사이에는 말 한마리 잘못되면 을 팔아야 된다고 할 정도로 고역은 심각했다. 전국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말을 생산했다고 하지만 요구량은 항상 그보다 많아서 종마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일부러 말의 한 쪽 눈을 멀게 해서 진상 대상에서 빼낸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연산군 시절에는 연산군이 말고기가 정력에 좋다면서 말고기 상납을 지나치게 요구해서 등골이 휠 정도였다고 한다.



  • 감귤도 제주에서만 나는 귀한 특산품이라 왕실의 집중적인 요구 품목이었다. 어느 정도로 귀했냐면 귤이 진상되면 황감제(黃柑製)라 해서 성균관에서 과거시험을 볼 정도로 귀했다. 조선시대에는 저장 수송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탓에 제주도에서 올려보내도 썩어버리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댓잎을 까는 등 어떻게든 하나라도 건져내보려고 애를 써야 했고, 양을 맞추기 위해서는 정해진 양보다 더 많이 올려보내야 정해진 양을 건질 수 있었다. 감귤 또한 제주목사가 직접 관리했다. 그래서 항상 귤을 더 보내라고 난리였지만 귤나무는 약하고 예민한 편이며, 접붙이기로 증식한다.



  • 전복은 바다에서 나는 것이니 당연히 해녀들이 캐올 수 밖에 없었는데 정한 양을 맞추기 위해서는 여러번 바다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원래는 남자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을 했지만, 농사, 말 키우기, 사냥 등등 매우 고된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자들이 대신 물질을 한 것이다. 또한, 미역 같은 해조류는 가을에 자라기 시작해 초여름에 바위에서 떨어져나가 죽어버리니 채취하려면 늦어도 초봄까진 채취를 마쳐야 한다. 즉, 제일 추울때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 원래 전복은 포작이라 하여 남자가 채취하고, 여자들은 해조류를 채취했는데 할당량이 너무 많아 견디지 못하고 포작이 전부 도주해버리자 해녀에게 할당량을 떠넘겼다. 생계를 위해 물질하다 세금폭탄 맞은 꼴. 해녀만 있고 해남이 없는 이유다. 게다가 당시에는 저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일일이 전복을 다듬어서 말리는 작업도 해야 했다. 세종 시대에 제주 목사를 지낸 기건(奇虔)은 해녀들이 이런 고생을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그 뒤로는 전복을 입에 대지 않았을 정도.



  • 흑우제주에서만 나는 특별한 검은 소로한반도 전역에서 볼 수 있었던 우리 소였지만, 일제 강점기때 일본이 흑우는 일본소, 황우는 조선소라는 인식을 심어서 농민들이 사육을 기피하다 지금은 극소수만이 남아있다.당연히 와규는 기원이 한반도이다. 특히 제주 흑우가 맛이 좋았다고 한다. 제사용으로 올려졌는데 육질이 매우 좋아서 임금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카더라. 정조 8년에 제주에 기근이 들자 다른 진상품을 미루되 흑우, 말, 감귤은 계속 진상하라는 기록이 있다.



  • 사슴 또한 녹용, 사슴가죽, 꼬리 등 수요가 많아 한 번에 수 십 마리씩 일 년에 수 백 마리를 사냥해야 했다. 문제는 한라산은 눈이 많이 내리고 늦게 녹는지라 사냥이 가능한 시기가 농번기 밖에 없었다는 것.



  •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 표고버섯도 제주도 특산품이었다. 표고 역시 할당량이 꽤 많아 왕실에 진상되는 표고의 절반 이상이 제주산이었다 하는데 한라산은 현대에도 등반로의 대대적인 정비 이전엔 조난 혹은 추락사고가 꽤나 흔했던 곳이다. 안개 때문에 헤메다 절벽에서 추락이 전형적 패턴. 훈련하다 순직한 특전사 대원도 있다.[2][3] 현대에도 이 모양인데 과거에는?



3. 대동법? 여긴 그런거 없다[편집]


공납의 폐해가 심각해서 그걸 대체하기 위해 대동법을 만들었으나, 제주도는 대동법 시행 예외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제주도는 특성상 쌀이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대동미를 낼 수가 없었거니와 바다의 장벽 등 제주도 특산물이 쉽게 얻어지는 물건이 아니라서 제주도민들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공납에 허리가 휘어야 했다. 다른 지역은 세제가 전세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제주는 반대로 지세가 공납에 통합되는 경향을 보였다.

공납을 위한 물건을 만들고 관리하고 바치는데도 허리가 휘는데 거기에 육지에서 온 관리들은 제주도민들을 털어먹을 궁리만 했고, 험한 제주의 환경 때문에 생활도 힘들었던지라 제주도는 말 그대로 고난의 섬이나 다름이 없었다. 가뭄이 자주 드는 지역이라 그 때마다 인구가 줄고 유민이 발생했는데 공물은 줄지 않아서 다시 유민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아예 선박건조를 금지해서 타 지역으로의 이주 자체를 막아버렸다. 그 결과 어선도 만들지 못해 뗏목 타고 고기잡으러 나갔다가 빠져죽는 경우가 빈번해진 건 덤.(바다 날씨는 매우 변화무쌍 하다) 이런 역사 때문에 제주도민들의 성향은 육지에서 온 사람들을 불신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한다. 신구간이 이 때문에 생겼다고도 본다 뭍에서 오면 다 털어먹을 궁리만 했으니깐 영화로도 나온 이재수의 난이 괜히 제주도에서 벌어진 게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상품을 바쳐야 할 임금님이 사라져버린 현대사회에서 제주도산의 특산품들은 전국적으로 제주도를 대표하는 명품으로 인정받는 국내최고급의 특산품이 되었다. 하긴, 왕이 선택해서 직접 먹었던 음식들이 당연히 최고급품이 아닐리가 있겠는가? 물론, 감귤은 이제 남해안에서도 기르고, 초콜릿은 조선시대 진상품이 아니었지만.[4] 게다가 지금의 감귤과 조선시대 때 진상되던 것과는 좀 다르다.


[1] 전세계 초원 지역마다 연초에 초원에 불을 놓아 오래된 풀을 태워 새싹이 나도록 하는 풍습이 있는데 제주에선 '방애'라고 불렀다. 현재는 들불축제라고 관광상품으로 잘 써먹고 있다. 처음 축제가 계획될 단계에서 인근 주민들은 다들 부정적이었는데 고작 그거 조금 태워서 볼게 뭐 있다고?라는게 그 이유. 참고로 목장으로도 못쓰기 때문에 버려져 가시덤불이 우거진 땅이 곶자왈이다.[2] 한라산 등반코스 중간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보게되면 잠깐 묵념이라도 하자.[3] '검은 베레모여 편안히 잠드소서'라고 쓰여 있는데 정확히는 훈련 하다가 순직한게 아니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경호하려고 출동했다가 헬기가 추락해 순직한 것이다.[4] 초콜릿은 원래 남아메리카 자생식물이고 우리나라에는 구한말때 처음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