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C. 스테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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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상원 문장.svg 미국 연방 상원의원 (미시시피 주 클래스 1)
제74~80대
시어도어 G. 빌보

제80~100대
존 C. 스테니스
[1]

제101~110대
트렌트 로트



미합중국 상원 임시의장
존 코넬리어스 스테니스
John Cornelius Stennis


파일:John C. Stennis.jpg

출생
1901년 8월 3일
미국 미시시피 주 켐퍼
사망
1995년 4월 23일 (향년 93세)
미국 미시시피 주 잭슨
재임기간
미국 상원 임시의장
1987년 1월 3일 ~ 1989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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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햄튼 호웰 스테니스
어머니 마거릿 코넬리아 애덤스 스테니스
배우자
코이 하인스 스테니스
자녀
슬하 2명
학력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B.A.)
버지니아 대학교 (법학 / LL.B.)
종교
개신교
소속 정당

의원 선수
7 (상원)
의원 대수
80, 81, 82,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상원)
약력
미시시피 주 하원의원 (1928~1932)
미시시피 주 검사 (1932~1937)
미시시피 주 16번 사법구역 판사 (1937~1947)
미국 상원의원 (미시시피 클래스 1 / 1947~1989)
미국 상원 규칙위원장 (1965~1975)
미국 상원 군사위원장 (1969~1981)
미국 상원 세출위원장 (1987~1989)
미국 상원 임시의장 (1987~1989)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여담


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 미시시피주의 연방 상원의원을 재임했으며, 현재까지 미시시피 주가 배출한 마지막 민주당 소속 상원의원이다.[1]

같은 미시시피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제임스 이스트랜드와 함께 극우 인종주의자로 악명이 높았으며, 앤드루 잭슨의 창당 이래 150년 이상 유지되었던 민주당의 인종주의를 대표한 사실상의 마지막 정치인이다. 존 C. 스테니스의 사후 민주당 내에서 노골적으로 인종주의를 표방하는 경향은 사라진다.[2]


2. 생애[편집]


미시시피 주에서 중산층의 아들로 태어나, 미시시피 주립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버지니아 대학교의 로스쿨에 진학해 법학 박사(LL.B.) 학위를 받았다. 로스쿨 재학 도중 민주당에 입당해 미시시피 주 하원의원(주의원)에 출마,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1932년 학위를 받고 검사로 재직하게 되면서 주의원 직을 내려놓는다. 검사로는 1937년까지 재직하였다.

미시시피 주의 검사로 재직하면서 여러 인종주의적 행보를 보여 지탄을 받았다. 특히 고문으로 얻은 자백을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라는 판결을 내린 브라운 대 미시시피(Brown v. Mississippi) 판결이 이 사람의 작품이다. 세명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자백을 위해 구타를 동반한 고문을 받았고, 존 C. 스테니스가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였고 이들이 고문을 당한 사실을 명백하게 알았음에도 고문을 통한 자백을 정당한 증거로 처리하여 격분한 고문 피해자들이 연방 대법원에 소를 청구한 것이다. 이렇듯 스테니스는 흑인들을 괴롭힌 전형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으나 오히려 인종주의적인 시각이 팽배했던 미시시피에서는 그것이 정치 경력에 도움이 되었는데, 몇년 안가 판사로 자리를 옮긴다.

1947년, 시어도어 G. 빌보 상원의원[3]이 노환으로 사망하자, 스테니스는 공석이 된 미시시피 주 상원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재보궐 선거에 출마한다. 이 당시에는 미시시피에서 민주당의 당세가 너무 강력해서, 민주당의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너무 경쟁이 치열해서 공천 후보자를 정하지 못하고 민주당의 후보 5명이 모두 출마해버린 상황이었다. 이중 스테니스는 26.88%를 얻어 당선된다. 참고로, 이 선거에서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이 아니었던 공화당 후보는 623표, 0.32%(...)를 얻으며 처절하게 낙선한다.

존 C. 스테니스는 1947년 당선되자마자 민권법의 옹호자였던 해리 S. 트루먼과 강경하게 대치했으며, 1948년 대선에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민주당 후보로 출마시켜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64년 연방 민권법을 저지하기 위한 필리버스터에 동참한 것은 물론 1960년대의 거의 모든 민권 법안에 반대하면서 같은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제임스 이스트랜드와 함께 가장 강력한 인종분리의 지지자였다. 다만, 이스트랜드보다는 인종주의적 색체가 덜하였으며[4] 대신 외교 문제에서 초강경 매파적인 시각이 두드러졌다.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핵확산 방지 조약에 반대했으며, 린든 B. 존슨의 베트남 전쟁 정책도 비판했는데, 이유는 존슨이 베트남에 대해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테니스는 북베트남을 폭격기로 쓸어버려야한다고 주장했고 리처드 닉슨의 캄보디아 폭격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스테니스는 북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더 강경하게 나아가서 베트콩과 공산주의자들을 정의의 폭탄으로 굴복시켜야한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상원 내에서 반전좌파 진영을 이끌었던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은 그런 스테니스에게 "그렇게 캄보디아가 좋으면 직접 입대해서 정글 속에서 총들고 싸우라"라고 쏘아 붙이기도 했다. 당연히 스테니스는 맥거번에게 보란듯이 1972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을 지지한다.

스테니스는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군사 외교 관련 분야에 꾸준히 관심을 드러냈으며, 헨리 M. 잭슨과 같은 민주당 매파 의원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이 때문에 스테니스를 네오콘의 아버지 격으로 보는 평가도 있다. 특히, 오랜 기간동안 상원 군사위원장으로 있었던 경험 때문에 군수 관련 분야에서 활약했는데, 이 공로로 스테니스의 사후 니미츠급 항공모함에 그의 이름이 붙는다.[5]

1976년 선거에서는 제임스 이스트랜드와 함께 같은 남부 민주당원이자 당내 보수파인 지미 카터를 지지한다.[6]그러나 국방 문제에서 카터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었으며, 1980년대에는 레이건 행정부의 여러 국방 정책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인종주의적인 시각은 여전해서 1983년 마틴 루터킹의 날 제정 당시 이를 반대한 가장 대표적인 상원의원 중 하나였다.

1980년대에 들어 스테니스의 건강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1984년, 암으로 급기야 한쪽 다리를 잘라내야했고 남은 평생 동안 휠체어 신세가 된다. 제100대 미국 의회는 그의 마지막 임기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스테니스는 미국 상원의 최고 원로로 대우받았으며, 상원임시의장과 세출위원장을 역임한다. 1989년, 스테니스는 42년의 의정 활동을 마치고 퇴임했는데, 이 기록은 여전히 미국 역대 상원의원 최장기 재임 기간 top 10 안에 들어간다고 한다.

1995년, 상원의원에서 은퇴한지 6년만에 9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7
미국 상원의원 특별선거
미시시피


52,068 (26.88%)
당선 (1위)
초선[7]
1952
미국 상원의원 선거
191,380 (89.35%)
재선
1958
미국 상원의원 선거
61,039 (100.00%)
3선[단독출마]
1964
미국 상원의원 선거
343,364 (100.00%)
4선[단독출마]
1970
미국 상원의원 선거
286,622 (88.40%)
5선
1976
미국 상원의원 선거
554,433 (100.00%)
6선[단독출마]
1982
미국 상원의원 선거
414,099 (61.20%)
7선

4. 여담[편집]


  • 조 바이든이 젊은 의원이었던 시절, 같은 남부민주당원으로서 스테니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스테니스는 바이든을 좋게 봐주었는지 의원 직을 은퇴하면서 자신의 사무실을 바이든에게 물려줬는데 이를 빌미로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바이든을 비판하기도 한다.
  • 니미츠급 항공모함 CVN-74 USS 존 C. 스테니스 함이 이 사람의 이름을 땄다. 그래서 명명 당시에도 스테니스의 인종차별주의적 행동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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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시시피주는 딥사우스 5개 주(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 중 가장 보수 색체가 강한 주이다. 그나마 흑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어 매 선거마다 민주당이 30%대 후반~40%대 초반의 지지율을 얻곤 하지만, 조지아나 노스캐롤라이나 등 여타 남부 주와 달리 민주당의 표심을 견인할 대도시가 없으며, 미시시피강 델타 유역 흑인의 수 역시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이변이 없는 한 스테니스는 오랜 기간동안 미시시피의 마지막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2] 물론 로버트 버드 등 인종주의에 동참한 경력이 있는 정치인들이 스테니스 사후에 활동한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은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거나 아니면 공화당으로 당적을 이동했다. 반면 스테니스와 이스트랜드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인종주의적 태도를 정당화하였다.[3]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치인으로 자주 꼽히는 인물로, 스테니스보다 한술 더 뜬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KKK단의 단원이었던 것은 물론이며, 프랑스나 미국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들어봤을 인종 대교체이론(열등한 흑인/무슬림이 높은 출산율을 바탕으로 백인을 몰아내고 서구 국가를 잡종화한다는 음모론)이 이 사람이 처음 주장한 것이다.[4] 그나마 흑인 문제에서 주로 목소리를 높인 스테니스와 달리 이스트랜드는 흑인 인종차별 뿐 아니라 동양인 인종차별, 반유대주의에도 동조해서 같은 남부 민주당원들도 혀를 내둘렀다.[5] 그의 인종주의적 행보 때문에 스테니스 함의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이 있다.[6] 1960년 존 F. 케네디 지지 이후 정말 오랜만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했다. 그 덕인지 미시시피 주는 간발의 차로 카터가 승리했다.[7] 전직 의원 시어도어 G. 빌보 작고[단독출마] A B 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