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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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기타
3.1. 주요 성과
3.2. 종가장


1. 개요[편집]


種諤, 1027~1083
북송의 명장. 서하 방면에서 활약했다. 자는 자정(字定), 하남 낙양 출신. 충세형의 아들이자 충사도의 아버지로, 아버지인 충세형, 아들인 충사도, 충사중과 함께 충가장[1]의 일원. 충악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2]

2. 생애[편집]


1027년 출생으로, 아버지 충세형의 그늘 하에서 좌장거부사(左藏庫副使)로 여러 차례 승진했다. 훗날 연주(지금의 산시 옌안) 수장 육선의 추천으로 청간성[3]을 지키게 했다.
당시 서하 부락들 일부가 북송에 귀부했는데, 육선은 이들이 말썽을 일으킬까봐 귀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종악의 요청으로 귀부를 받아들였다. 서하인이 와서 영장을 요구하자, 육선이 종악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하가 영을 돌려받으려면 경문[4]

으로 교환해야 합니다.

서하인은 그제서야 사람을 구하는 것을 멈추었다.

1067년 외명산 부락이 북송 수주 경내에 있었는데, 외명산의 동생 외명이산은 이미 송나라로 귀순하였고, 그의 수하 이문희는 뇌물을 받고 항복하겠다고 하였으나, 외명산은 이를 몰랐다.

그는 즉시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조정에서는 전운사인 설향으로 하여금 종악을 의뢰하여 이들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는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부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앞으로 나아가 외명산의 족장을 포위하였고 수주를 수복하였다.

종악이 수주 고지에 성을 쌓으려 하자, 육선은 조서를 받지 않고 출전했다는 이유로 그를 소환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이끌고 먼 곳에 주둔하면서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있었고, 적군은 4만 명의 인마를 모아 성벽을 끼고 진을 치고 있었다. 종악이 이를 기다리자 외명산이 새로 귀순한 백여 명을 거느리고 도전했고 충악 군대가 그 뒤를 따라 북을 치며 전진헌 뒤 진사에 도착하여 요충지를 차지하고 부장인 연달(燕達)과 유보(劉甫)를 좌우 선봉으로 하여 스스로 중군을 거느린 후 성루를 닫고 노약자들을 모두 성에 올려놓는 등 적들을 속였다. 그 뒤 삼군이 20리를 추격하고 많은 적을 사로잡아 참살한 후 숙주에 성을 쌓았다. 육선은 종악이 멋대로 군을 움직였다는 이유로 그를 치죄하려 하나 오히려 그가 좌천되었다. 그러나 종악도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그도 좌천된다. 그러나 신종에 의해 옛 작위가 회복되고, 부연검사로 임명된다.

1071년에는 라올 북부에서 서하군을 대패시켰다.
이어 한강은 라올에 성을 쌓고 횡산(橫山)을 노려 종악으로 하여금 2만 명을 거느리고 무정천(無定川)으로 출병하고,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모두 종악의 지휘를 받게 하여 하동군을 은주(銀州)로 파견하여 종악과 합류하게 했다. 그러나 축성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조정은 라올성을 포기했다. 그로 인해 이 일로 처벌을 받고 여주단련부사로 좌천돼 담주에 안치되고, 4월에는 다시 하주별가로 좌천되고 단주로 자리를 옮겼다가 화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한강이 재상이 되자 복직되었고, 이때 강족들이 조주 등으로 쳐들어오자 이헌[5]과 함께 이를 물리친다. 1078년 3월 동상각문사·문주자사·경주지주로 승진한 뒤 종연부총관이 된다.

1081년 서하에 내분이 발생하자 신종이 그를 경략무마부사로 임명했고, 장수들은 모두 그에게 속했다. 그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주둔했고, 신종은 종악으로 하여금 왕중정에게 복종하도록 했다. 당시 서하군은 하주에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종악은 본로와 경성 지역의 일곱 군대를 이끌고 미지를 공격하여 사흘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서하군 8만이 증원되자 무정천에서 그들을 막아내고 복병이 출격하여 서하군을 대패시켰다. 승전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신종은 크게 기뻐하여 군신들이 축하하였고, 신종은 환관을 파견하여 상을 주고 왕중정을 해임하였다. 그러나 폭설 및 군량 부족 문제로 인해, 9만 명 중 3만여 명이 살아돌아왔다.

그 뒤 천 명을 남겨 미지를 지키게 하고 은, 석, 하 세 주를 주둔시켰으나 서하군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영무(靈武)에서 군대를 합류시켜야 한다는 조서를 받았으나, 먼 길을 돌아 군을 향하지 않아 군사를 굶주리게 했고, 이에 따라 곡물 운반을 명분으로 이적사 이직의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결국 마가평에 주둔하고 있을 때 유귀인이 패주하자 조정은 철수를 명령했음에도 오히려 승진한다.

그의 황산 점령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아 아들 충박을 보내 그의 계책을 상주시켰다. 신종은 충박(種朴)을 불러 상황을 묻고 충박[6]을 각문지후(閣門知侯)로 승진시켰다. 조정은 황산에 가서 성을 쌓으려고 서희(徐熙)와 이순(李舜)으로 하여금 이를 지원하게 하나, 종악은 성을 쌓는 걸 은주, 유주, 그 다음에는 하주 이 세 곳으로 한 뒤 염주성을 쌓아야 서하의 소굴까지 바로 내려다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서희심괄[7]은 그의 간언을 무시한 채 은주를 이전하고 영락성을 축조함으로써 충악에게 연주를 지키도록 주청하였다.

1083년 영락성이 서하군에게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8] 이를 관망하였고, 그럼에도 신종은 이를 방치하였으며 서하군의 내습을 우려하여 충악을 연주지주로 임명하였다. 얼마 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 기타[편집]



3.1. 주요 성과[편집]


1067년 서하의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켰고, 수주를 탈환하여 그 곳에 성을 쌓았다.

1071년 라올에서 서하군을 대패시킨 데 이어, 1076년 청당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환관 이헌과 함께 진압한다.

1081년 무정천에서 서하군을 대패시킨 뒤, 미지성의 수장을 항복시킨다.

3.2. 종가장[편집]


종악의 아버지인 종세형[9]과 종악을 비롯한 그의 아들들인 충사도, 충사중은 북송 시기 명장으로 활약한다.

여기서 충사도는 북송의 항금명장 중 하나이다. 동관 휘하에서 연경을 공략하나 패하고[10][11], 동관에게 차라리 요나라와 연합하자고 간하나 묵살당하고 만다.[12] 나중에 정강의 변 시기 금나라가 송군을 공격할 때, 서하와의 국경을 지키던 송군을 소환하라고 청했으나 조정에 의해 묵살당하고, 이후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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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세형을 필두로 하였으며 서하와의 전투에서 활약한다. 그 중 아들 충사도는 이후 금과의 전쟁에서 활약. 충사도 사후 충씨는 몰락한다.[2] 충악의 성씨인 种은 씨 종, 어릴 충 이 두 가지의 뜻과 음이 있다.[3] 충악의 아버지 충세형이 수축하였고, 서하를 억제할 수 있었다.[4] 서하로 망명한 송나라 사람을 의미[5] 이후 이헌은 1081년 서하를 공격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난주를 수복하나 다른 장수들 간 단합이 되지 않아 서하를 다섯 개의 진로로 나누어 공격하였던 것은 결국 대패하고 만다.[6] 충박은 이후 1099년 희하 회전에서 호종회의 출병 독촉에 나가 싸우다가, 서하군의 매복에 걸려 전사하고 말았다.[7] 북송 시기 과학자[8] 서희는 서하군에게 패사한다.[9] 청간성을 쌓아 서하를 억제했고, 그가 성을 지키는 동안 강족들의 마음을 얻었는데, 그가 죽고 강족들은 이에 진심으로 슬퍼했다.[10] 이때 연운 16주의 한인들은 북송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했다. 거란족의 요나라는 망해가는 상황이었는데도, 연운 16주의 통치는 안정적이었다고 한다.[11] 동관이 이끄는 군대가 야율순, 소간이 이끄는 북요 정권에 패한 뒤 연경 사람들과 소간은 북송 사람들을 무시했다고 한다.[12] 금나라의 야심을 간파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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