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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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거란국[1] / 대요
大契丹國 / 大遼(dàliáo


파일:요나라 지도.png
간접 세력권까지 포함한 요나라의 최대 강역(연두색)
907년/916년[2] ~ 1125년
별칭
요조(遼朝(liáocháo)
위치
몽골 초원, 내몽골 자치구, 만주
수도
상경임황부(上京临潢府)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3]
국성
야율(耶律)[4]
주요 황제
태조 야율억
태종 야율덕광
성종 야율융서
천조제 야율연희
언어
거란어, 중세 중국어
문자
거란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도교, 유교
종족
거란족, 한족, 해족, 습족, 발해인, 여진족
통화
각종 통보(通寶), 원보(元寶)[5]
성립 이전
거란
오대십국시대
멸망 이후

서요
현재 국가
몽골, 중국, 러시아, 북한

1. 개요
2. 국호
3. 역사
3.1. 발흥
3.2. 전성기
3.3. 멸망과 후예 국가들
4. 중앙 행정 제도
4.1. 초기 행정 제도의 구축 과정
4.2. 중앙 행정 제도
4.2.1. 남면관제
4.2.2. 북면관제
4.2.3. 날발 제도
4.3. 관료 임용과 교육 제도
4.4. 법 제도
4.5. 군사 제도
5. 지방 행정
5.1. 정주민 지역의 지방 행정 제도
5.2. 유목민 지역의 지방 행정 제도
5.2.1. 두하주 & 알로타 & 궁장
5.2.2. 속국과 속부
5.2.2.1. 몽골인 통치
5.2.2.1.1. 오고 · 적렬부
5.2.2.1.2. 조복
6. 세금 제도
7. 경제
7.1. 농업 경제
7.1.1. 상경도와 중경도의 농업 경제
7.1.2. 서경도, 동경도, 남경도의 농업 경제
7.2. 유목 경제
7.2.1. 목축업
7.2.2. 어업&어로, 채집, 수렵
7.3. 상업
7.3.1. 대외 무역 및 속국과의 조공 무역
7.4. 광업 · 금속 공업
7.4.1. 금속 기술 발전
7.5. 공예업
7.5.1. 직조업
7.5.2. 도예 · 가죽 공예 · 목공예
8. 사회
9. 문화
10. 종교
10.1. 불교
11. 주요 인물
12. 참고 문헌
13. 한국사에서의 관계
14. 요나라가 등장하는 대중매체
15. 역대 황제 목록
16. 추존 황제
17. 요나라 계열 국가
17.1. 괴뢰국
17.1.1. 동란국
17.2. 잔존국
17.2.1. 북요(北遼)
17.2.1.1. 역대 황제
17.2.2. 서요(西遼)
17.3. 부흥 운동 국가
17.3.1. 동요(東遼)
17.3.2. 후요(後遼)
18. 사서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유목 민족인 거란의 왕조 중 하나. 영문으로는 '遼(, 본음은 료)'의 한어병음 표기를 따라 Liao Dynasty, 거란어로는 "훌지(호리지/胡里只. hulʤi)"라고 부른다.

218년간 존속하면서 거란 문자도 만들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송을 압박했다. 약체로 이름난 송군을 몰아붙인 게 큰 업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건국 초기의 송군은 고회덕(高懷德), 반미(潘美), 부언경(符彦卿), 양계업(楊繼業)과 같은 우수한 지휘관들과 통일 전쟁을 치른 수십만의 강군을 보유했다. 게다가 경제적이든 인구학적이든 송은 요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우위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제 공격을 가해 온 송군을 번번이 격퇴한 요의 군사력은 상당히 강력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심지어 금군에게 전국토를 유린당해 멸망이 다가온 상황에서 요의 패잔병들이 송군 수만을 격퇴하는 기적적인 전적을 세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군 역시 체급을 한참 앞서는데다 국경에 두터운 방어선을 세운 송을 멸망시킬만한 힘은 없었다.

개조는 야율아보기이며 황성(皇姓)은 야율(耶律)이다. 황성인 야율은 거란어로 '옐뤼'라고 발음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현대 중국어 발음 예뤼(Yélǜ)가 와전된 것이다. 거란 문자를 통해 재구성한 음가에 따르면 '야루드(ei.ra.u.ud)’[6]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7]

단명 왕조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218년이면 의외로 중국사에서 꽤 오래 존속한 왕조다. 진대 이후의 중국 왕조들과 비교하면 1위 청나라 296년, 2위 당나라 289년, 3위 명나라 276년 다음이다. 요의 뒤로는 전한 213년, 후한 195년,[8] 북송 167년, 남송 152년,[9] 북위 148년, 금나라 121년, 원나라 97년이 뒤따른다.


2. 국호[편집]


요 왕조는 2개의 국호를 사용했다. 최초의 국호인 ‘거란’은 종족명을 국호로 사용한 것으로서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제정했고 두번째 국호인 '요(대요)'는 946년(태종 회안 7년)에 처음 제정했다. 흔히 요라는 국호를 요하(遼河)에서 따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요산(遼山)에서 유래했다.

거란이라는 국호는 빈철(賓鐵)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중앙이나 중국, 시라무렌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 빈철설의 근거로는 완안 아골타(完顔 阿骨打)가 국호를 정할 때에 "요는 빈철의 강함을 취해 국호를 요라 정했다."는 금사의 기록과 원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왕반(王磐)이 거란이란 국호의 유래를 빈철이라고 답한 기록 등을 제시한다.[10] 빈철은 단련된 금속, 즉 강철을 의미하며 실제로 요는 광공업으로 유명하고 영토에 지하 자원이 매우 풍부했다.

요가 구축한 이중 지배 체제는 국호의 사용에도 영향을 미쳐서 한인과 발해인 같은 정주민을 대상으로는 요(遼)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유목민과 삼림 수렵 민족을 대상으로는 대거란(大契丹), 또는 합라거란(哈喇契丹)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합라거란은 거란어를 한자로 음차표기한 것으로서 거란어 원음은 카라키타이, 또는 카라키탄이다. 즉, 서요의 국호로 알려진 카라키타이는 서요나 흑거란(黑契丹)을 뜻하는 게 아니라 서요를 세운 요의 유민들이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 조정은 983년(요 성종 통화(統和) 원년)에 다시 대거란으로, 1066년(요 도종 함옹(咸雍) 2년)에 다시 대요로 변경하는 등, 여러 차례 국호를 개정했다. 그러나 국호를 개정하더라도 예전의 국호를 혼용하는 일이 많아서 대중앙 요 거란국, 거란 요국, 요 거란국, 대거란국 등이라 서술한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여요전쟁 문서에서처럼 요 왕조의 국호를 개정 시기별로 나누어서 거란이나 요로 따로 지칭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나, 2가지 국호를 지속적으로 혼용한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며 요 왕조가 유목민을 대상으로는 거란, 정주민을 대상으로는 요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니 개인의 편의에 맞춰 사용할 수도 있고 국호를 합쳐 요 거란국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본 문서에서는 대부분의 역사서, 중국사 서적, 요 왕조에 대해 다룬 중학교 역사 ➀,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 여러 논문에서 ‘요’로 지칭하기 때문에 ‘요’로 통일했다.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해 이름을 날린 요의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서 러시아와 그리스, 이란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중국키타이(Cathay. 캐세이)라고 부르고 있다.[11]. 몽골에서 중국을 가리키는 "햐따드(Хятад)"도 키타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리고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북중국을 키타이, 옛 남송의 영토였던 남중국은 만지(Mangi, Manzi, 蠻子)라고 기록했다. 마르코 폴로의 영향과 중국 지역에 대한 낮은 정보력 때문에 유럽인들은 상당 기간 동안 정복 왕조의 영향이 짙은 북중국과 중국 전통 문화가 강한 남중국을 서로 다른 지역으로 인식했다.


3. 역사[편집]



3.1. 발흥[편집]


거란(契丹)은 고막해(庫莫奚)와 함께 동호계(東胡系)의 선비족(鮮卑族) 일파인 우문부(宇文部)의 후예로서 연원을 따지면 위 · 진 남북조 시기부터 존재한 민족이다. 하지만, 거란은 민족의 규모가 크지 않고 느슨한 형태의 부족 연합 세력이던 탓에 유연(柔然)과 북위(北魏), 고구려(高句麗), 돌궐(突厥), 당나라 같은 주변 강대국들과의 전쟁에 휘말려 부족이 쪼개지고 복속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隋)의 공작으로 돌궐이 분열하자, 돌궐에 대한 종속을 그만두고 수에 입조해 예전에 살던 땅을 하사받은 다음, 고구려와 돌궐에 복속한 부족들을 다시 모아 연맹을 구성했다. 이때 세운 연맹은 대하씨(大賀氏)가 주도권을 쥐어서 대하씨 연맹이라고 부른다.

수가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쇠퇴하고 수 - 당 교체기의 혼란이 발생하자, 초원의 돌궐은 다시 세력을 확장하고 거란을 비롯한 유목민족들을 다시 복속시켰다. 다시 돌궐에 예속된 상태에서 돌리가한(突利可汗)이 폭정을 일삼자, 이에 위협을 느낀 거란은 (唐)에 귀순하여 보호를 요청하고, 당은 이를 받아들여 돌궐로부터 이들을 지켜주었다. 이후, 당은 거란에 기미제(羈縻制)를 적용하여 대하씨 연맹의 영토에 송막 도독부(松漠 都督府)를 세우고 각 부에는 주(州)를 설치한 뒤, 연맹 수장은 송막 도독(松漠 都督)으로, 부족장들은 각 주의 자사(刺史)로 임명했다. 당의 직접 지배를 받는 독립적인 부족들도 그 수가 무척 많다 보니 당 조정은 영주 도독부(營州 都督府)와 유주 도독부(幽州 都督府)를 설치해 이들을 관리했다.

구당서에 따르면, 대하씨 연맹은 총 8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는 200,000명, 병력은 43,000명이다. 각 부는 기본적으로 자치를 하고 독립적인 경제 활동을 하지만, 전쟁과 외교는 각 부의 합의나 연맹 수장의 명을 따랐다. 그러나 이 또한 수장이 전권을 행사하지는 못해서 연맹에 소속된 8부의 족장인 '대인'들이 다 함께 모여서 전쟁과 외교, 수장 선출과 파면과 같은 중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군사 업무는 번장(番長)이[12] 전담했다. 대하씨 일족 중에서 선출한 연맹의 수장은 일정한 임기 동안 외교, 전쟁을 담당하고 각 부의 관계를 중재했다. 원래 이러한 유목민 연맹의 수장은 부족장들이 능력 있는 자를 선출하는데, 대하씨 연맹은 수장을 대하씨 일족에서만 뽑았으니 선출제에서 세습제로 발전하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하씨 연맹 시기의 거란은 당의 통제에 놓여 있고 최전선에서 돌궐을 상대해야 했지만, 반대급부로 당의 보호를 받는 것은 물론 조공 무역을 통해 부를 누렸다. 연맹 수장과 각 부 대인들은 당 황제가 보내주는 많은 하사품과 관직, 국성(國性)을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통치의 정당성까지도 확보할 수 있어서 당과 우호 관계를 맺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를 위해 인질을 보내주거나 당의 군사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수장들은 당 황제가 부족의 통치에 대해 지적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거란 연맹이 당을 위해 군대를 파견한 사례로는 고 · 당 전쟁에 거란군이 참여해 당군과 함께 여러 차례 요동을 공격한 일이 있다.

그러나 당 - 거란 관계는 우호와 적대를 오가는 관계였다. 정관(貞觀) 시기까지 당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거란은 무주(武周)의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696년)에 영주 도독 조문홰(趙文翽)의 폭정에 분노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진노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의 이름을 이진멸(李盡滅), 손만참(孫萬斬)으로 개명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하려 했으나, 거란 반군은 측천무후의 조치에 대해 황장곡(黃麞谷)에서 수만의 주군(周軍)을 참살하는 것으로 답했다.[13]

거란 반군이 막북(漠北)과 요서(遼西)에서 자립하고 하북(河北)까지 휩쓸자, 진압에 어려움을 느낀 주는 급기야 17만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에 더해 돌궐까지[14] 끌어들여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동협석곡(東峽石谷)에서 손만영의 유인 전술에 걸려 2차 진압군은 궤멸하고 거란 반군은 유주(幽州)까지 진공했다. 이에 주는 재차 20만의 병력을 파병하고 묵철가한이 거란 반군의 후방을 습격해 남북으로 압박했다. 결국, 이해고(李楷固)와 낙무정(駱務整)이 항복하고 손만영은 도주 중에 호위병의 칼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남아 있던 거란의 잔존 세력은 돌궐에 항복했다가 714년(당 현종 개원(開元) 2년)에 이진충의 사촌 동생 이실활(李失活)이 부족을 이끌고 다시 당에 복속했다.

730년(개원 18년)에 거란 연맹의 실력자인 가돌우(可突于)가 이진충의 일족인 소고(邵固)를 죽이고 굴렬(屈列)을 가한으로 옹립하여 대하씨 연맹이 무너지고 요련씨(遙輦氏) 연맹이 들어섰다. 이 시기 거란은 반당파인 가돌우가 당과의 전쟁을 벌이고 내부적으로는 부족 대인들간의 권력 다툼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래서 가돌우가 죽고 요련 연맹의 두 번째 가한인 조오가한(阻午可汗)이 집권한 뒤부터 거란은 당에 귀순해 다시 국성을 받고 화번공주(和蕃公主)와 결혼했다. 평화를 회복한 뒤부터 조오가한은 부족의 재건에 주력했다. 점차 경제력이 회복되고 사회 분화가 촉진되었으며 초보적인 법 제도도 제정했다. 또한 수장의 권한이 강해지고 이리근도 군사 업무와 사법 업무를 겸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 시기에도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다소 복잡했다. 연맹은 당에 귀순하기 전에는 돌궐에 복속하고, 당에 귀순한 뒤에도 마냥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당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하북 3진의 절도사인 안록산(安祿山)이 거란과 그 동족인 해족을 계속 침략하자, 거란은 우호의 상징으로 결혼한 당의 화번공주를 주살하고 안록산을 박살낸 뒤, 위구르 제국에 합류했다.

산하 유목민 세력들을 강력하게 통제하던 위구르 제국이 쇠퇴하자, 거란은 당의 도움을 받아 위구르 제국에서 파견한 감독관들을 주살하고 다시 당에 사대했다. 위구르의 강력한 통제에서 벗어난 거란은 경제 성장과 세력 확장에 힘쓰고 체제 정비에 들어갔다. 돌궐과 위구르 제국은 멸망하고, 위구르를 무너뜨린 키르기즈는 예니세이로 돌아갔으며[15] 당과 발해(渤海)는 쇠퇴해 초원 지역에서 거란을 막을만한 세력이 없었던 덕분에 거란은 날로 강성해졌다. 거란 요련 연맹은 돌궐과 위구르,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정부의 기초를 세우고 연맹 수장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직조업, 수공업을 장려하고 곳곳에 마을과 유목도성(遊牧都城)을 세웠다.

이러한 국력 강화가 이뤄진 뒤, 5대 10국의 혼란기에 연맹 수장 자리에 오른 야율아보기는 상비군을 강화하고 자신의 직할령으로 한성(漢城)을 설치해 군사,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한인 망명자와 포로들이 다수 거주하는 한성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유목민들에게 귀중한 소금과 철을 다량 생산하였다. 이를 토대로 야율아보기는 여전히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동생 및 친척들과 골육상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거칠 것이 없어진 아보기는 왕조를 개창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옥좌에 앉은 그는 정복 전쟁을 개시해 경쟁 민족인 해족을 정벌하는 한편, 막북의 조복(阻卜),[16] 서방의 위구르까지 원정하여 이들 모두를 복속시켰다. 또한 중국으로도 진출하여 하북의 수십여개 주들을 점령하고 약탈했으나, 성공은 여기까지였다. 노용군 절도사(盧龍軍 節度使) 유인공(劉仁恭), 유수광(劉守光) 부자와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을 지닌 후당(後唐)의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勖)이 태조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인공 부자가 이끄는 노용군은 반측지지(反側之地)의 3대장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하여 요군은 유인공 부자의 모략에 걸려 패하거나, 도리어 노용군에게 요의 경내를 주기적으로 약탈하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노용군은 유목 경제와 기병 군단이 근본인 요의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침공해올 때마다 목초지를 불태워 버렸다. 또한 후당의 이존욱은 요군이 여러 차례 침공해 주력군이 패퇴당하자, 요 태조와 직접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존욱과의 일전에서 패배한 태조가 하늘을 향해 "하늘이 아직 나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하진 못하는구나!" 하고 외친 일화는 요의 하북 진출 시도가 대단히 어려웠음을 알려준다.

발해의 경우, 원래 요 왕조와 발해와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지만, 발해 선왕대를 기점으로 그 관계가 크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는 대대로 원수였다."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였으며 태조는 하북과 몽골로 진출하면서도 발해와는 치열하게 싸웠다. 요 왕조의 발해 공세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 태조는 대요 전선의 핵심인 요양을 함락해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상당 부분 부숴버렸으며 요양에 대대적인 사민 사업을 벌여 굳히기에 들어갔다.

924년, 발해가 요주를 급습해 자사를 죽이자, 크게 놀란 요 태조는 공격받은 직후부터 발해에 보복성 공세를 전개했다. 이후, 태조는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우회하여 부여부(扶餘府)를 급습해 수일만에 점령했다. 그리고 방어선이 뚫려 무주공산이 된 발해의 북부 지역을 질주해 상경성을 포위하고 수십 일만에 상경 용천부(上京 龍泉府)를 함락, 발해를 멸망시키고 동란국(東丹國)을 세웠다.


3.2. 전성기[편집]


발해를 정복하고 돌아오던 태조가 급사하자, 요 왕조는 정치 노선과 황위 계승 문제, 황권 도전 세력에 대한 진압 문제를 놓고 태자 야율배(耶律倍)와 황자 야율덕광(耶律德光) 사이의 계승 분쟁이 터졌다. 중앙집권화와 황권 강화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한인 관료들과 친하고 학문이 뛰어난 야율배보다는 군무에 관심이 많고 강인한 성품을 지닌 야율덕광이 황제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한 순흠황후(淳欽皇后)는 당시 동란왕(東丹王)으로 발해 지역을 통치하던 야율배 대신에 야율덕광을 옹립했다. 그리고 황권에 반발할 가능성이 큰 보수 세력, 야율덕광의 계승과 자신의 권력 장악에 저항하는 선황의 측근, 동란왕 지지 세력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관료와 지휘관들이 주살당하고, 야율배의 견제를 위해 동란국의 지위와 권한을 약화시킨 것이 독이 되어 점차 발해 고토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고 발해인들의 끈질긴 저항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발해 통치 문제로 고심하던 태종은 상경성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요서로 이주시킨다는 초강수를 써서 발해인들의 저항을 뿌리 뽑았다. 그러나, 그 대가로 태종은 발해 고토에 대한 지배력을 거의 다 포기해야 했다. 요는 성종대가 되어서야 요동의 발해 고토를 일부 장악하고 동만주와 북만주, 함경도 일대 여진족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요는 멸망하는 그 날까지 발해 고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물론, 동란국이 건재하던 시점에도 발해 유민들의 반란이 끊이질 않아 수 차례에 걸쳐 발해 저항 세력들을 철권으로 찍어 누르고 통치력을 재확인해야 했지만, 동란국을 매개로 발해 고토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하고 발해인들을 포섭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태조 사후의 황위 계승 분쟁과 태종의 섣부른 요동 포기는 아쉬움을 남긴다.[17]

골육상쟁을 벌이긴 했지만, 요태종은 황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으며 관제를 정비해 남 · 북면관제를 실시하고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그는 인민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이렇게 국력을 신장시켜 가던 중, 936년(후당 청태(淸泰) 3년, 요 태종 천현(天顯) 11년)에 후당이종가(李從珂)와 내전을 벌이고 있던 후진(後晉)의 석경당(石敬瑭)이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燕雲 十六州. 베이징 ~ 타이위안 인근의 중국 동북부 지방)와 30만 필의 세폐를 대가로 내어줄 테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군대를 일으켜 후당이종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석경당을 용상에 앉혔다. 원군 요청은 요 태종에게 영토와 돈은 물론이고 복수도 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기회였는데, 이종가가 자신의 형인 야율배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18]

석경당에게 받은 연운 16주의 경제력과 세폐를 이용해 국가를 발전시키던 요 태종은 석경당의 뒤를 이은 석중귀(石重貴)가 세폐를 거부하고 적대적으로 돌변하자, 진노하여 친정을 감행해 후진을 멸망시키고 개봉(開封)에 입성하여 중국 전체를 통치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들의 약탈, 강간, 살인을 용인하는 잘못된 점령지 정책 때문에 한인들이 저항하고 후진의 절도사들이 반격을 가해와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연운 16주로 퇴각했다.

요군이 자행한 학살과 파괴는 도를 넘는 것이었다. 태종은 한인을 사로잡으면 얼굴에 자형(刺刑)을 가해 살려준다는 글자를 새긴 다음에 풀어주고, 그의 사촌 동생인 마답(摩遝)은 더 잔인해서 한인을 붙잡으면 얼굴 가죽을 벗긴 뒤에 눈을 뽑고 팔을 부러뜨려 죽였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마답은 죽인 한인의 손과 발을 잘라다 집에 장신구처럼 걸어두었다. 또한 요군은 행군 중에 보이는 집은 모조리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으며, 전투를 벌일 때마다 강제로 끌고 온 주변 백성들을 선봉에 내세워 적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어 죽게 했다.[19]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으니 패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그나마 유지하던 연운 16주 이남의 일부 영토들도 얼마 못가 상실했다. 일시적으로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산서에서 자립한 유지원(劉知遠)이 어부지리를 얻어 개봉에 입성하고 후한(後漢)을 건국했다. 7년 뒤, 요는 후주(後周) 곽위(郭威)와 후한 잔존 세력 간의 분쟁에 개입해 후한의 계승자인 북한(北漢)을 위성국으로 삼는 것으로 손실을 조금이나마 메꿀 수 있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요 태종이 연운 16주로 퇴각할 때 "중국인을 다스리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고 탄식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20] 요사에서는 태종이 여양도(黎陽道)를 지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이번 원정에서 세 가지 잘못을 했다. 군사를 풀어 말 먹이와 곡식을 빼앗은 것이 첫 번째이고, 백성들의 사적인 재산을 빼앗은 것이 두 번째이고, 여러 절도사를 서둘러 진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그 세 번째이다."

그리고 태종은 황태자에게 전황을 얘기하면서 해결책도 함께 제시했다.

"하동(河東)은 아직 귀부하지 않고 서로(西路)의 추장들도 서로 무리지어 어디로 귀부할까를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오직 백관의 마음을 구하고, 군사들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세 가지 방법뿐이다."


이를 통해 요 태종이 개봉에서 돌아오면서 중국의 정치와 문화 전반을 파악하고 한인에 대한 통치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요는 이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정주민들에 대한 통치 방식을 개선하고 중앙집권화된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체제를 정비하기도 전에 태종이 급사하여 요의 정계는 긴장 상태에 빠졌다.

비극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동란왕 야율배는 오래도록 거란 귀족들의 동정을 받았고 정계에서는 동란왕 지지 세력과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순흠황후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이 상황에서 태종이 급사하고 본토에서 순흠황후가 세력을 확장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요의 귀족과 관료들은 19년 전에 태조가 붕어하고 수백명의 귀족과 관료, 장군들이 생매장당한 사건을 떠올렸다.

순흠황후가 황태후의 이름으로 대규모 숙청을 벌이고 3대에 걸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관료와 지휘관 다수, 동란왕 지지파의 잔존 세력, 가족들이 숙청당해 순흠황후에게 원한이 있는 귀족들이 힘을 합쳐 영강왕(永康王) 야율완(耶律阮)을 옹립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순흠황후는 막내 아들인 야율이호(耶律李胡)와 함께 거병해 맞섰다. 그러나, 이호는 형들과 달리 역량이 떨어지고 잔인무도해 인망이 없었던 데다가 순흠황후 역시 군부와 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 내전에서 패배하고 아보기의 능묘에 유폐당하는 신세가 된다.

할머니를 몰아내고 옥좌에 앉은 세종(世宗)은 정력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여러 가지 개혁과 체제 정비를 단행했다. 그러나, 오대 왕조들과의 전쟁에서 별 소득을 못 본 데다가 한화와 중앙집권화, 황권 강화 정책을 밀어붙여 보수파들의 커다란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세종은 상고산(祥古山)에서 제의를 진행하던 중, 태조의 조카인 야율찰할(耶律察割)과 야율분도(耶律盆都)에게 암살당했다. 이들의 반란은 이전부터 양자의 불온함을 감지하고 있던 척은(惕隱) 야율옥질(耶律屋質)이 급히 군사를 몰아오고 태종의 장남인 수안왕(壽安王) 야율경(耶律璟)이 합세해 진압했다. 수안왕은 각 부와 왕공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에 올랐으나, 그는 지나치게 잔혹하여 원한만 쌓고 성급하게 황권 강화를 밀어붙여 반대 세력만 불렸다. 결국, 목종(穆宗)은 반대파들의 결집을 눈치채지 못하고 사냥하던 중에 암살당하고 만다.

세종, 목종의 연이은 피살로 인해 요는 내부적으로 반란과 사회 혼란에 시달리고 외부적으로는 후주(後周)와의 전쟁에서 대패하는 등 내우외환에 빠졌다. 요는 954년(후주 세종 현덕(顯德) 원년, 요 목종 응력(應曆) 4년)에 북한(北漢)을 침공한 후주(後周)를 격퇴하고 호기롭게 역공을 걸었다가 고평(高平)에서 장령 조광윤(趙匡胤)의 분전으로 대패했다. 이후, 959년(후주 현덕 6년, 요 응력 10년)에는 후주 세종 시영(柴榮)이 공세를 가해와 연운 16주 중에 두 곳인 막주(莫州)와 영주(瀛州)를 빼앗겼다.

오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은 국초에는 요에 우호적이었지만, 태종대부터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2차에 걸친 북벌을 단행했다. 979년(송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 요 경종 보령(保寧) 11년)에 송(宋)의 침공을 받은 북한을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한 요는 백마령(白馬嶺. 지금의 산서성 양천시) 전투에서 대부분의 병력과 지휘관을 잃는 건국 이래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기세가 오른 송의 1차 북벌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연운 16주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남경까지 포위하는데 이른다. 이에 맞서 요는 침착하게 보급로 차단과 유인 전술을 사용해 송군을 지치게 만드는 한편, 주력군으로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북벌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심지어 고량하 전투(高梁河 戰鬪) 때는 수만의 송군을 익사시키고 목을 베었으며 송군 지휘관인 태종(太宗)이 당나귀가 끄는 마차에 타고 도망치게 만들 정도의 굴욕적인 참패를 안겼다. 송의 1차 북벌을 막아낸 요는 송의 군사력 약화를 노려 980 ~ 982년에 걸쳐 송을 침공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7년 뒤, 986년(송 태종 옹희(雍熙) 3년, 요 성종 통화(統和) 4년)에 송 태종은 2차 북벌을 개시했다. 2차 북벌은 1차 북벌보다 여건이 더 좋았다. 당시의 요는 한덕양(韓德讓)이 권세를 휘둘러 민심이 동요하고 황제(성종)의 나이가 어려 예지황후(睿智皇后)가 수렴청정하는 상황이었다. 첩보를 통해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태종은 성종이 봄 순행을 위해 북쪽으로 떠난 틈을 노려 3월에 대군을 동원하고 3로로 진격해 들어갔다.

송이 기습적으로 침공해 오자, 요 조정은 송이 자국의 내부 사정까지 훤히 파악하고 있단 사실에 크게 당황했으며 북벌군의 규모에 기겁했다. 이에 예지황후가 나서서 공황 상태에 빠진 조정을 진정시키고 침착하게 병력을 모아 반격할 태세를 갖췄다. 1차 북벌과 마찬가지로 초반에 승승장구하던 송군은 연운 16주의 핵심인 남경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요군의 지연전과 보급로 차단, 각개격파 전술에 휘말리는 바람에 참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송으로서는 뼈아픈 것이 2차에 걸친 북벌로 통일 전쟁을 수행한 고참병들과 양계업(楊繼業)을[21] 비롯한 유능한 지휘관들이 전사해 군사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송은 위축되고 역으로 요가 기세를 타고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999년부터 요군은 3차례의 침공을 가해 송의 방어 거점들을 무너뜨리고 포로와 물자를 일방적으로 약탈해갔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성종은 1004년에 친정을 결심하고 예지황후와 함께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성종이 이끄는 요군은 하북의 여러 성들을 함락하고 개봉이 보이는 전주까지 진격했으나, 원수 소달람(蕭達覽)이 전사하고 송 진종 또한 친정을 나와 송군의 사기가 오르는 바람에 도리어 위기에 빠졌다. 전세가 반전된 것을 느낀 성종은 안전한 퇴각과 원정의 성과를 확보하기 위해 진종전연의 맹을 맺고 물러났다.[22] 비트포겔[23]은 이 시기 거란과 송의 군사력을 '그 어느 쪽도 상대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 못하였던 세력 균형의 적대관계'로 묘사했다.

전연의 맹을 맺음으로써 중국 정복의 꿈은 완전히 버렸지만, 요는 송이 보내주는 막대한 세폐를 국가 발전에 투자하고 영토를 확장해서 동으로는 요동, 북으로는 바이칼 호, 서로는 천산 위구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그래서 요는 의외로 중앙아시아에서도 꽤 유명하며, 요가 멸망한 뒤에 서쪽으로 멀리 달아나서 세운 서요도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이름을 크게 떨쳤다. 또한 성종은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선정을 베풀어 인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이 시기의 요는 경제와 무역이 크게 성장해서 번영을 누렸다. 또한 전연의 맹은 외교적, 명분론적인 성과도 컸다. 기존까지 요는 중국 왕조로부터‘이민족’ 취급받았지만, 이제부터는 ‘북조(北朝)’로서 ‘남조(南朝)’인 송과 대등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 왕조는 거란족한족을 대상으로 인속이치(因俗而治)라 부르는 이중 통치 체제를 구축했다. 유목 민족의 땅은 유목민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연운 16주와 발해의 고토는 주현제를 적용해서 다스렸다. 독자적 문자를 만드는 등의 행위는 제국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정주민의 문물을 너무 받아들여 자신들이 한화(漢化)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이중 통치 정책의 흔적은 의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송사전 요 열전에 따르면 황제와 한인 관료들은 중국식 복장을 착용하지만, 황후와 거란인 관료들은 거란식 복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요대 벽화들을 보면 고려북송 관복과 비슷한 단령사모를 입은 관리들과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같은 그림에 함께 그려져 있다.[24] 어찌보면 이런 점에선 청나라보다 관대했던 셈.

물론 청과 달리 중국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채로 멸망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장 지도를 비교해 봐도 요의 영토에서 정주민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많지 않고, 중국 전역을 정복한 청과는 비교가 안 된다. 만약 청이 요처럼 1국 2체제로 유목민과 정주민을 나누어 통치하려 들었다면 정주민 영역의 비중이 너무 압도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 따라서 요가 한인과 거란인(유목민)을 분리하여 거란인의 한화를 막는 것만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데 비해 청은 단순히 만주인의 한화를 막는 것뿐 아니라 가능한 한인을 만주화 시키기까지 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최종적으로 요는 최초의 정복왕조로서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유목민과 정주민이라는 이질적인 집단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이중 통치 체제를 창조해 후대의 정복 왕조들에게 비전을 제시했다. 이것은 요 왕조가 이룬 커다란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3.3. 멸망과 후예 국가들[편집]


7대 흥종대부터 경제적으로는 번영하지만, 사회적 모순과 행정 제도의 문제점이 연달아 발생함과 동시에 소수 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종대에는 권신 야율을신(耶律乙辛)이 전횡을 일삼고 각지에서 반란이 터져 요는 통치력을 급격히 잃기 시작하고, 결국 9대 천조제 때 그간 쌓인 게 많던 여진족이 세운 협공을 받고 멸망했다.

금의 흥기와 송, 요의 쇠퇴에는 11세기 후반부터 발생한 기온 하강이 영향을 미쳤다는 학설이 있다. 기온 하강으로 농경과 목축이 힘들어지고 지속적인 자연재해가 발생해 정주민은 물론, 유목민들도 큰 타격을 입어 요의 국력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흥종대까지는 기온 상승 현상이 유지되고 있어서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었지만, 도종대부터 기온이 떨어져 기근과 가축 몰살, 자연재해로 유목민들이 고통받고 속부의 민심이 이반해 대규모 반란이 연이어 터졌다.

이러한 기온 하강 현상은 성종대에도 벌어졌지만, 통치 세력이 변화에 잘 대처하고 지속적으로 구휼과 감세 조치를 실시해 인민의 부담을 줄여준 덕분에 큰 국력 손실 없이 버텨낼 수 있었다. 그래서 성종대의 요는 기온 하강기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영토를 팽창하고 전성기를 누린 반면, 도종대의 요는 지배층의 부패, 통치 체제의 이완, 민족, 사회 모순의 첨예화 등으로 기온 하강을 버티지 못했다. 물론 도종도 지속적인 구휼과 감세 조치를 실시했지만, 상술한 요인들 때문에 큰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송 또한, 기온 하강으로 하북을 중심으로 자연 재해와 기근이 빈발해 수십만의 유민이 발생했다. 송 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으나, 북부 지역의 역량이 크게 떨어지고 사회적 혼란이 심화되는 것은 막지 못했다. 그래서 송이 금군의 공세에 쉽게 무너진 것도 이때의 기온 하강이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반면에 여진은 기온 하강에 따른 피해가 송, 요에 비해 심하지 않은 데다 북만주 일대의 여진인들이 추위를 피해 남하하여 여진 완안부를 비롯한 여러 부족에 합류하면서 역량이 강화되었다.

요를 무너뜨린 금은 요의 고토를 지배하고 인력과 물자를 충원하기 위해 도망치는 요의 유민들을 사로잡고 예전의 관료와 군인들을 기용해 통치력을 확보했다. 이후, 송 · 금 사이에 연운 16주를 둘러싼 분쟁이 전쟁으로 이어지자, 금은 요에 이어 송까지 무너뜨리고 회수 이북의 화북 지방을 차지했다.

금은 요의 핵심 부족인 요련 9장과 황족 4장, 국구 5장을 맹안 · 모극으로, 거란인들의 다수는 규군으로 편성해 서북면 지역의 방어를 맡겼다. 항복한 관료와 군인들은 기존의 지위를 보존해주고 그대로 기용했으며 요의 정치, 행정, 군사 제도를 흡수해 국가 발전에 활용했다. 요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제도로는 금의 5경제, 각종 관직의 명칭, 지방 행정, 군목 제도 등이 있으며 서북면 지방에는 요의 북면관제가 일부 잔존했다.

송과 금이 싸우는 동안, 금군을 피해 간신히 탈출한 잔존 세력과 유민들은 야율대석(耶律大石)의 지도 아래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옮겨가 서요를 세웠다. 서요를 세운 야율대석은 천산 위구르와 현지 투르크계 민족들의 도움을 받아 카라한 왕조를 복속시키는 한편, 사마르칸트에서 벌어진 카트완 전투에서 당대 중동의 초강대국이던 셀주크 투르크까지 패퇴시킴으로써 거대한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정도 성공에 만족하지 못한 야율대석은 여러 차례 원정군을 파견해 선조들의 고토를 수복하려 했다. 서요의 원정군은 종한(宗翰) 같은 거물을 상대로도 승리했을 정도로 기세가 높았으나, 결국 고토를 수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거란인들은 금의 지배에 순응하는 듯 했으나, 금 왕조와 거란인들과의 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금은 자신들을 잔혹하게 다룬 과거가 있는 거란인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고 거란인들도 자신들의 지배를 받던 여진인들이 이제 자기 머리 위에 앉아서 명령을 내리는 것을 불편해 했다. 그리고 초원 저 너머에 동포들이 세운 국가인 서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란인들이 금의 지배에 완전히 순응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해릉왕이 황권에 저항하는 여진 보수파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거란인들을 중용하여 일시적으로 거란인들의 신분 상승이 이뤄지는 듯 했으나, 통치에 방해가 된다고 야율씨들을 학살한 해릉왕의 폭정과 남송 정벌을 위해 거란 규군에 병력 동원령을 내린 것이 문제가 되어 거란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상술했듯이 거란 규군은 금의 서북면에서 서하와 초원 유목민들의 침공을 막아주고 있었는데, 만약 병력이 남송 국경으로 이동하게 되면 당연히 무방비해진 부족을 서하와 유목민들이 침공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규군들은 고향을 떠날 수가 없었고 이 문제로 금 조정과 갈등을 빚다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야율살팔을 중심으로 봉기한 거란 반군은 친척인 해인들까지 끌어들여 금의 북방을 휩쓸었고 해릉왕의 남정에 동원된 거란인 지휘관들은 남송에 투항해 길잡이 노릇을 했다.

독립을 꿈꾸던 거란 반군은 금 세종이 정국을 수습하고 남송과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기세가 꺾이고 결국 복산충의(僕散忠義)에게 진압당했다. 반란에 대한 징벌적 조치로서 금 조정은 거란 규군을 해산하고 거란인들을 분산시켜 맹안, 모극에 편입했다. 이러면서도 금은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거란인들과의 통혼을 장려하고 민족 융합을 꾀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했으나, 양자간의 불편한 감정과 서요의 존재, 거란인 관료와 군인의 임용 제한 강화, 거란 문자 사용 금지 등의 문제 때문에 유화책은 그렇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한편, 요의 지배를 받던 초원의 몽골 부족들은 요가 멸망한 뒤부터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투쟁을 벌였다. 100여 년이 지난 뒤, 몽골은 칭기즈 칸이 부족을 통합해 몽골 제국을 세우고 서요를 멸망시켰다. 서요가 망한 뒤에도 일부 유민들은 이란까지 도주해 다시 나라를 이어갔다. 이란, 즉 페르시아 남동부 케르만 주에 세웠던 거란인의 국가는 케르만 왕국 혹은 치얼만(중국어로 케르만/키르만을 가리킴) 왕조라고 부르며, 후서요(後西遼)라고도 표기한다. 이들은 나중에 몽골 제국에 흡수되었다.

금이 몽골 제국의 엄청난 공세로 망조가 들자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요동에 동요(東遼)를, 아예 멸망한 후에는 일부 거란인들이 만주에 후요(後遼, 대요수국)을 세우고 독립하려 했으나, 양측 모두 몽골 제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복속했다. 이 과정에서 거란의 일부 잔여 세력이 고려를 침공했으나, 고려와 몽골의 협공으로 진압당하고 생존자들은 양국에 흡수당했다. 고려의 양수척 중 일부가 이 시기에 고려에 유입된 거란인들의 후예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고려와 몽골은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며 고려로서는 불행하게도 몽골과의 외교 관계가 틀어져 장장 28년간의 대몽항쟁을 이어나가게 된다.

몽골 제국에 흡수된 거란 유민들은 몽골 제국의 관료나 전위 부대로 종사했다. 유목 문화에 익숙하면서도 행정과 한학에 능숙한 거란인들은 칭기즈칸의 치세부터 행정 관료나 군인으로 신뢰받았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란인들은 민족 정체성을 잃고 점차 몽골인이나 한인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현재는 중국의 다우르족이 몽골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정체성을 유지한 거란의 후예라 전해진다. 학자들이 거란인의 유골과 다우르족의 유전자를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해 본 결과, 실제로 유전자의 상당 부분이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다우르족은 거란인의 직계 후손이라기 보다는 몽골어족의 직계 후손에 가까워서 현 시점에서 거란인의 뒤를 이은 민족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현재까지도 몽골과 중국은 이 민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4. 중앙 행정 제도[편집]



4.1. 초기 행정 제도의 구축 과정[편집]


원래 요는 부족 연맹에서 출발해서 행정 제도라 할 것이 없었지만, 영토를 넓히고 다른 문명과 접촉해 국가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조금씩 제도를 갖춰 나갔다. 요의 행정 제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국가는 돌궐과 위구르, 중국 왕조들이 있다. 거란 연맹은 자신들을 지배한 돌궐과 위구르 제국으로부터 칙령과 인장, 기초적인 통치 제도를 흡수하고 관직 제도도 받아들였다. 돌궐과 위구르의 관직 제도는 요의 북면관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연맹 후기에 조성한 유목도성과 아보기가 경영에 주력한 한성도 돌궐과 위구르 제국 시기에 존재한 유목도성을 모방한 것이다.

야율아보기의 백부로서 모략을 써서 수장의 자리를 탈취한 야율석로(耶律釋魯)는 연맹에서 국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거란을 통치한 자이다. 석로는 법을 정비하고 초보적인 관제를 실시해 법질서를 세웠으며 상비군을 창설해서 연맹 수장의 권력을 강화했다. 야율석로의 뒤를 이은 야율아보기는 권력을 강화하고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려 하는 반대파를 숙청한 다음, 요를 건국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각 유목민 부족들을 재편성해 유력 부족들을 견제하고 유목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키우는 한편, 한인 유민과 연운 지역을 공격해 강제로 끌고 온 한인 포로, 투항자들을 곳곳에 이주시켜 주현제를 실시하고 이들로부터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웠다. 또한 관직과 관제를 정비하고 자신의 부족이면서 황권에 가장 강하게 저항하는 질랄부를 약화시켜 질랄부의 수장인 질랄이리근(迭剌夷離菫)을 북대왕(北大王)과 남대왕(南大王)으로 나누었다.

아보기의 뒤를 이은 요 태종 야율덕광은 석경당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후당군을 섬멸하고 그 대가로 연운 16주와 30만 필의 세공을 받았다. 이 덕에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력을 더 키울 수 있었지만, 연운 16주에 사는 엄청난 수의 한인들을 다스릴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요는 한인을 통치할 방법을 강구했다.

요가 석경당으로부터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곧바로 국력이 급성장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원래 연운 16주는 거란 기병들의 약탈에 자주 시달려 요에 대한 원한이 깊고 석경당이 요 태종에게 갑작스럽게 땅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요군이 연운 16주를 인수하러 오자, 그대로 민심이 폭발해 버렸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요의 통치를 거부하고 호족이나 군 사령관이 지역민들의 지지를 받아 독립, 군벌화해서 요에 저항했다. 그래서 요는 연운 16주를 인도받고도 상당 기간 동안 지역민들의 저항에 시달리고 통치력 확보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요는 연운 16주를 안정화하고 지역 민심을 우호적으로 변화시켜 16주의 풍부한 물자와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한인의 통치법을 적극적으로 배울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후, 요는 한인과 발해인을 비롯한 정주민 지식인들을 관료로 등용하고 당과 오대의 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요 태종은 통치 기구와 관제를 정비하고 북면관제와 남면관제를 시행했으며 거란어로 된 관직을 한어로 개칭한 다음,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관직의 격을 높였다.


4.2. 중앙 행정 제도[편집]


요 왕조는 정주민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발해와 연운 16주, 삼림 수렵민과 유목민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초원과 북만주 일대를 다스려야 해서 하나의 통치 방식만으로는 인민과 영토를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면관(南面官)과 북면관(北面官)이라는 이중 통치 기관을 세워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려 했다. 북면과 남면이란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관부가 각각 궁정의 남쪽과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먼저, 남면관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해서 조직한 관제이며 주현 · 세금 · 군마 · 한인과 발해인에 대한 민정을 담당한다. 북면관은 독자적으로 창안한 관제로서 행궁 · 부족 · 속국 · 군사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다. 그래서 금대의 시인 원호문(元好問)은 요 왕조의 정치에 대해서 "북아(北衙. 북면관)에서는 백성을 다스리지 않고, 남아(南衙. 남면관)에서는 병사를 주관하지 않는다." 는 평을 내렸다.


4.2.1. 남면관제[편집]


당제(唐制)를 모방하여 남면관에 3성 6부(三省 六部)를 구축하고 9시(寺)와 5감(監), 각종 국(局) · 대(臺) · 부(府) · 사(司) · 사(使) · 서(署) · 소(所) · 원(院) 등을 설치해서 정부와 궁정의 주요 업무를 처리했다.

남면관의 최고 권력 기관인 남추밀원(南樞密院)은 오대와 송의 제도인 추밀원을 모방해서 설립한 행정 기관으로서 남면관의 주요 부서들을 통제하고 국정을 운영했으며 재상들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의논했다. 그리고 남추밀원에 속한 이방(吏房) · 호방(戶房) · 병방(兵房) · 형방(刑房) · 청방(廳房)의 5방은 6부에서 추밀원으로 보내오는 각종 공문을 처리하고 6부의 업무를 감독했다. 또한 남면관의 재상들은 항상 추밀원의 직책을 겸임해서 추밀원에서 국정을 운영할 때는 주요 부처의 재상들이 모여 사안을 의논했다.[25]

다음으로 요의 3성 6부제는 당 후기에 일어난 관제 변화를 반영해서 문하성(門下省)이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중서성(中書省)의 업무와 상서성(尙書省)의 위상도 당 전기의 제도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원래 3성은 중서성이 조칙 작성과 법안, 정책 발의를 하고 문하성이 그것을 심의한 뒤, 상서성이 집행하고 주요 행정 업무를 처리한다. 그런데, 당 후기부터 황제권이 강화되어서 조칙과 정책에 대한 봉박권(封駁權)과 법안 심의권을 행사해 황제권을 견제하던 문하성이 무력화되고 중서성에 흡수된 것이다. 이러한 3성 6부제의 변화는 고려에도 영향을 주어서 고려는 당 전기의 3성 6부제를 수용한 발해와 달리, 문하성이 중서성에 흡수된 당 후기의 중서문하성 '2성 6부제'를 도입했다.

그래서 요의 중서성은 문하성의 업무도 함께 수행하고 송제를 받아들여 당 전기의 총리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 대신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와 부재상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두어 재상들의 행정권을 분할하고 권력 독점을 막았다. 평장사와 참지정사는 위계의 차이만 있을 뿐, 권한은 비슷하여 상호 견제가 잘 이루어졌다. 관리 감찰은 어사대(御史臺)가 맡고, 형벌 부과와 사법 업무는 대리사(大理寺)와 형부가 담당한다. 언론 활동은 당 · 송과 마찬가지로 좌 · 우 간원(諫院)에서 한다.

이렇듯, 남면관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만든 중국식 제도이나, 중국이나 발해와는 다른 독자성도 있다. 원래 추밀원과 3성은 당 · 송에서는 서로 문무 분리의 독립적인 기관이지만, 요에서는 추밀원의 직능을 분할해 원래 추밀원의 기능인 군사권은 북추밀원에 부여하고 남추밀원에는 3성을 소속시켜 추밀원이 3성을 통제하게 했다. 그리고 중서성은 조칙 작성과 법안 발의 업무 외에도 6품 이하의 한인 관료들을 임명하고 예부의 업무도 겸했다. 당 말기 ~ 송 초의 중서성이 고급 관료의 인사를 맡았던 반면, 요에서는 중서성이 하급 관료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26]

원래 6부를 통제하고 행정을 총괄해야 할 상서성은 그 권한과 직능이 대부분 남추밀원에 넘어가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이 점은 요에 영향을 미친 발해와도 차이가 나는 점인데, 발해에서는 상서성에 해당하는 정당성에서 모든 정령을 집행하고 행정을 총괄했다. 그리고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이 총리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고 선조성과 중대성의 수장인 좌상과 우상은 대내상의 하급자로서 그를 보좌했다. 중서령(중대성)과 문하시중(선조성)이 상서령(정당성)을 보좌하는 체제란 점에서 발해의 3성 6부제는 상서성 중심으로 작동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추밀원 중심의 정치 제도는 후대의 금, 원 왕조와도 차이가 있다. 금은 해릉왕대에 황권 강화를 위해 중서성과 문하성을 철폐하고 상서성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으며 원은 반대로 중서성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를 구축하고 추밀원도 중서에 속하게 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정복 왕조들의 행정 체제도 변화한 것이다.


4.2.2. 북면관제[편집]


고유 관제인 북면관은 최고 권력 기관인 북추밀원(北樞密院)과 북 · 남 이재상부(北 · 南 二宰相部)를 중심으로 한다. 연맹의 전통이 남아 있던 초기에는 국가 중대사를 의결하는 귀족 회의를 주도하던 재상부가 권력의 핵심이었으나, 점점 황제권이 강화되면서 그 위상을 잃기 시작해 최종적으로는 황제가 주관하는 신료 회의에 의결권을 비롯한 핵심적인 권력을 넘겨 주었다.

그러나, 권력을 상실한 뒤에도 재상부는 유목 민족의 민 · 군정을 총괄하고 국경의 방비를 맡는 중앙 행정 기관으로서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북부 재상부는 거란 오원부(五院部)와 오외부(乌隗部)를 비롯한 유목민 28부, 남부 재상부는 을실부(乙室部)와 저특부(楮特部), 해왕부(奚王部)가 포함된 16부를 관할한다.

다음으로 궁궐 의례를 맡은 북 · 남 선휘원(北 · 南 宣徽院), 연맹 시기부터 유목민에 대한 형벌과 사법을 담당한 이리필원(夷离畢院), 문서 작성과 관리를 맡은 대림아원(大林牙院), 행궁과 황족 관련 업무를 관리한 거란행궁도부서사(契丹行宮都部署院), 의례를 맡은 적렬마도사(敵烈麻都司), 황족의 정치 행위, 종교 행사를 관리한 대척은사(大惕隐司) 등이 있다. 요사에서는 북면관제를 중국의 6부제로 대입시킨다면, 북추밀이 병부, 북왕부와 남왕부가 호부, 이리필이 형부, 선휘원이 공부, 적렬마도가 예부에 해당하고 북부 재상과 남부 재상이 업무를 총괄한다고 평했다.

거란의 고유 관제이긴 하나, 북면관 역시 당제의 영향을 받아서 각 부의 관직은 중국 관직의 명칭을 모방하여 태사 · 태보, 사도 · 사공, 도감, 장군 등의 관직을 설치하고 북 · 남 재상부에는 당의 상서성이 좌 · 우 복야(僕射)를 둔 것처럼 각각 좌 · 우 재상을 두었다. 이는 모두 태종대에 이뤄진 한화 정책의 결과이다. 후진을 정벌해 중국 전체의 군주가 되려는 포부를 품은 태종은 국명을 거란에서 요로 개칭하고 관직 체제와 관명을 모두 한제로 개정했다. 다만, 이러한 한화 정책 이후에도 상온(詳穩)이나 척은(惕隐)을 비롯해 일부 관직들은 거란어 명칭을 계속 유지했다.

그리고 한제를 채택한 남면관에 9시, 5감과 각종 부서를 설치해 잡무를 담당하게 한 것처럼 북면관도 국(局), 원(院), 방(坊), 군목 등을 설치해서 각종 업무를 맡겼다. 이 중에서 방은 경제와 관련한 부서인데, 매를 관리하는 응방과 철생산을 맡는 철방, 무기를 생산하는 군기방 외에는 각 부서의 직능을 알 수가 없다.

남면관에 최고위 관직이며 명예직인 삼공이 있는 것처럼 북면관에도 원로와 공신을 우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우월부(大于越府)를 설치하고 공신이나 원로를 우월(于越)에 제수했다. 원래 우월은 연맹 시기에 칸 다음 가는 직책으로 아보기도 우월을 지낸 바 있는데, 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상실하고 권위만 남았다고 볼 수 있다. 우월은 큰 공을 세운 자에게만 제수하고 정말 특별히 공이 높은 이는 그 격을 높여 대우월(大于越)로 봉했다. 요나라 218년 역사에서 대우월로 봉해진 자는 야율갈로(耶律曷魯) · 야율옥질(耶律屋質) · 야율인선(耶律仁先) 3명밖에 없어서 이들을 일컬어 3우월이라 부른다.

북면관은 거란인과 여러 유목민, 삼림 수렵민족을 통제하고 군권도 행사하기 때문에 초기에는 황족, 외척들에게만 재상 선출권과 피선출권을 부여하고 한인들은 북면관으로 임용하지 않았다. 북재상부에는 종친인 황족 4장(帳)의 인사들을, 남재상부는 외척인 국구(國舅) 5장의 인사들을 선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다 점점 국가가 발전하고 조정에서 한인과 발해인들이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이 높아지자, 요 왕조는 한인과 발해인들이 북면관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용하고 남 · 북 재상에도 비황족 거란인과 한인, 발해인들을 기용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고위 귀족과 황족들이 장악한 재상부와 북면관의 주요 직책에 믿을만한 측근과 한인, 발해인들을 임명해 거란인 왕공대신들을 견제하려는 황제들의 의중도 작용했다.

다만, 최고 권력 기관이며 병부의 역할도 맡던 북추밀원의 주요 직책에는 한덕양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한인과 발해인을 기용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군권만큼은 거란인이 쥐고 있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한인과 발해인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대로 남추밀원에 거란인을 임명하는 일도 매우 드물었다.

일종의 일국양제라고 할 수 있는 제도를 운영한 덕분에 요는 정주민과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후대의 정복 왕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4.2.3. 날발 제도[편집]


날발(捺鉢)은 일종의 순행 제도로서 요의 황제들은 상경이나 중경에 상시 거주하지 않고, 관료와 황족들과 함께 지역을 순행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동하기 때문에 사시날발(四時捺鉢)이라고도 부르며 날발이란 단어는 한어로 행궁(行宮), 또는 행재(行在)라고 한다. 날발은 유목민 특유의 이동 생활과 목축, 어렵 활동을 국가 운영에 적응시킨 것으로서 전쟁과 외교와 같은 정치적인 상황 변화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초기의 날발은 순행 장소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상경 일대와 여러 지역을 불규칙적으로 오갔다. 다만, 원의 황제들이 겨울에 추울 때는 대도로, 여름에 더울 때는 상도로 이동한 것처럼, 날발도 겨울에는 남쪽으로, 여름에는 북쪽으로 올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후, 연운 16주를 확보해 남부 지역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송과의 전쟁이 잦아지자, 점점 더 남쪽으로 순행하기 시작했다. 전연의 맹을 맺고 평화가 찾아온 뒤부터 사회는 안정되고 국가 제도가 완비되었다. 이에 따라 순행 장소도 점점 고정되기 시작해 성종 후기부터 천조제의 시대까지 규칙적으로 정해진 곳을 방문했다.

황제의 행궁이 순행하는 것은 엄청난 규모의 집단이 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행궁에 소속된 인민과 군인, 황제를 호위하는 군대, 일부 황족, 중앙 정부에 소속된 북면관원 전체, 남면관 소속의 재상 일부와 실무 관료들이 황제를 수행했다.

황제는 여름과 겨울 날발에 최고 의결 기구인 북 · 남 신료 회의(北 · 南 臣僚 會議)를 소집해서 각종 사안을 처리하고 중대사를 의논했으며 회의에 모인 신료들과 함께 국정을 살폈다. 그리고 현령 이상의 문관과 모든 무관의 인사 이동도 모두 날발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수도의 관료들이 임명에 동의한 인사 명령도 행궁에서 황제가 결재를 해야 시행할 수 있었다.

요의 제도상, 현령 이하의 문관은 행궁의 처리가 필요 없고, 현령 이상의 문관도 관료들이 미리 인사권자의 결재를 득해놓을 수 있지마는 무관의 인사는 반드시 황제에게 소를 올려 결재를 받아야 했다. 이는 황제가 군부에 대해서 강한 통제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봄 순행 때는 황제가 직접 낚시와 사냥을 하는 두어연(頭魚宴)과 두아연(頭鵝宴)을 거행해 새해의 풍어와 풍렵을 기원했다. 그리고 황제가 봄 순행을 할 때는 사방 1천 리 안에 있는 속국의 왕과 속부의 장을 행궁으로 불러 황제를 배알하고 충성을 맹세할 것을 명했다. 그래서 봄 순행은 여러 속국과 속부를 위무하고 감시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름 순행 중에는 북 · 남 신료 회의를 소집해 국사를 논의하고 가을 순행을 떠난 뒤, 겨울이 될 때까지 수렵에 힘썼다. 수렵은 취미 생활일 뿐만 아니라 군사 훈련과 군인들에 대한 포상을 겸했기 때문에 황제가 마냥 유희에만 집중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일부 황제들은 국정은 팽개치고 사냥과 잔치에만 몰두해 문제가 되었다. 겨울에는 두 번째 북 · 남 신료 회의를 소집하고 국가에 중요한 정책을 추진했으며 송과 고려, 서하를 비롯한 각국의 사신들을 접견하고 수렵과 무예 연마에 힘썼다.

이러한 날발 제도는 유목민의 끊임없이 이동하는 삶을 반영한 것이면서 중요한 정치 활동이었다. 후대로 갈수록 정주화와 한화가 이루어졌지만, 날발 제도는 그대로 유지했으며 멸망하는 그날까지 국정 운영의 핵심으로 기능했다. 그래서 요의 정치 중심이 날발인지, 아니면 5경인지를 놓고 현재까지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4.3. 관료 임용과 교육 제도[편집]


초기에는 포로나 유민 신분으로 합류한 한인 지식인, 항복한 한인 관료, 일부러 억류시킨 한인 외교관과 그들의 자손, 천거나 수색을 통해 등용한 지식인들을 임용하는 방식으로 인재를 모았다. 그러나 영토가 늘어나고 인구가 많은 연운 16주를 차지한 뒤부터 이런 방식만으로는 필요한 행정 인력을 수급할 수가 없어서 태종대부터 연운 16주의 한인과 발해인들을 대상으로 과거제를 실시하고 관료들을 임용했다. 하지만, 초기의 과거제는 행정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실시하는 비정기 시험이고 합격자 정원도 고작 1 ~ 3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통치 체제가 성숙해진 경종대부터 과거 시험을 정례화하고 남경에 예부공원(禮部公院)을 세워 과거 시험을 주관케 했다. 성종은 당의 제도를 참고해서 시험 제도를 재정비하고 공거법(貢擧法)을 실시, 지방에서 추천한 인재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뤄 관료로 등용했으며 과거 시험 합격자의 등수를 가리는 전시(殿試)도 실시했다. 흥종은 송의 과거 제도를 도입해서 1년마다 치르던 과거제를 3년에 한 번씩 치르는 방식으로 바꾸었으며 합격 정원도 늘렸다.

문과는 사(詞)와 부(賦), 잡과는 법률을 시험 과목으로 정했으나, 흥종대부터 송의 제도를 참고해서 시부(詩賦)와 경의(經義)로 개정하고 과목별로 장원을 따로 뽑았다. 책론과 율을 중시한 송과는 달리 요는 사와 부를 중시하고 경(經)과 율(律)을 경시해서 율과를 통과한 진사는 숫자가 적었다. 이러한 송, 요 간의 학문 경향 차이는 금의 과거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금 초기에 과거제를 시행하려고 하니 송과 요의 옛 영토에 거주한 문인들이 평소에 배우고 중요시한 학문이 다 달라서 시험 과목 선정과 시험 운영이 어려웠다. 그래서 금은 송, 요의 고토에 각각 남선과 북선을 실시해서 인재를 따로 선발했다. 이 남 · 북선 제도는 해릉왕대에 폐지되고 하나의 과거 시험으로 일원화된다.

요 왕조의 과거 시험 과정은 송과 마찬가지로 향시 - 부시 - 성시로 구성되어 있고, 향시(鄕試)를 향천(鄕薦), 부시(府試)를 부해(府解), 성시(城試)를 급제(及第)라고 불렀다. 성시는 예부의 공원에서 주관하고 성적에 따라 갑 · 을 · 병으로 나누었다. 진사과에 합격한 관료는 주로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에 임용된 뒤, 점차 주요 관직으로 나아가 정치에 참여했다. 그리고 한인 의사 · 점술가 · 도축업자 · 노예 · 상인 출신 · 불효자 · 죄인 · 도망자는 응시 자격을 제한했다.

과거제는 전적으로 정주민 지식인을 등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제도라서 한인과 발해인에게만 응시 자격을 부여하고 거란인의 응시는 지나친 한화를 우려해서 엄격하게 제한했다. '한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흥종대에 야율포로호(耶律蒲魯虎)가 과거에 급제했다가 관리에게 들켜서 그의 아버지인 야율서잠(耶律庶箴)이 "자식이 과거를 치르게 내버려 두었다"는 이유로 채찍형 200대를 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식자층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거란계 문인들은 대부분 진사 출신이 아니었다.

이러한 응시 제한은 도종대에 완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종대에 실시한 과거 급제자 중에 백습인(白霫人) 출신[27] 진사로 정각(鄭恪)이란 인물이 등장하고 서요를 세운 야율대석(耶律大石)이 과거에 급제해서 한림원 승지가 된 사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과거제를 실시하긴 했지만, 요 왕조는 음서(蔭敍)와 천거제(薦擧制), 세선제(世選制)로 관료와 군인들을 선발하는 일이 더 많아서 과거제 출신 관료는 전체 관료의 20 ~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중에서도 북면관은 모든 관료를 천거와 세선, 음서,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방식으로 충원하고, 남면관만 과거제 출신을 임용했다. 무관의 경우에는 전공과 실적을 평가해 승진과 임용을 결정했다.

그러나 한인과 발해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받고 과거제 출신 관료들이 정치 · 경제 · 문화에서 활약한 것을 생각하면 과거제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도종과 천조제 시기에는 남추밀원과 중서성의 장관, 관료 대다수가 진사 출신이었고 과거제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의 역사가 더 길어졌다면 과거제의 위상과 관료 임용에서의 비중도 더욱 커졌을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게다가 당의 과거제 출신 관료는 전체 관료의 15%, 동 시기의 송도 40% ~ 50% 정도여서 요가 과거제를 시행, 발전시킨 당 · 송에 비해서 크게 밀린다고 볼 수도 없다. 정리하면, 과거 제도는 인재 선발과 피지배 계급의 참정권 확대와 같은 통치 기반의 확대, 문학과 교육의 성장 촉진, 중국 문화와 유학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음서제는 황족과 외척, 귀족 자제들에게 임관의 혜택을 주는 제도로서 한인과 발해인 명문가, 요에 사관한 정주민 지식인의 후손들도 음서의 혜택을 보았다. 천거제는 초기부터 실시한 제도로서 대신이나 측근이 추천하거나, 우수한 인재를 찾을 것을 명받은 지방관이 추천해오는 인재들을 관료로 충원했다. 때로는 구현령(求賢令)을 내려 인재를 찾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황제가 잠행 중에 직접 인재를 찾아 등용하기도 했다.

천거제는 여러 차례의 보완을 거쳐서 도종대에 현량과(賢良科)로 개혁했다. 현량과는 피추천인이 그동안 공부한 것을 만언서(萬言書)로 제출하면 시험관이 그것을 평가해 임용을 결정하는 제도이다. 도종 이전에는 단순히 인물의 평판과 추천인의 보증만 믿고 임용했지만, 이때부터 현량과라는 시험을 통해 인재 선발 과정의 공정성을 제고하고 무능력한 자가 손쉽게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방지했다.

세선제는 연맹 시기부터 존재한 선출 제도로서 귀족과 황족들을 대상으로 후보를 선정한 다음, 능력과 실적을 평가해 관직에 임용했다. 이밖에도 유목민들의 추대를 받거나 지방 세력, 권력자, 귀족들이 절도사 · 사도 · 상온 · 도감과 같은 주요 지방관직의 선출에 관여한 사례가 있기에 기본적으로 관직은 임명직이지만, 유목민 고유의 지도자 선출 방식이 잔존하고 권력층이 관료 임용에 개입한 것으로 파악된다.

과거제와 달리 음서, 천거, 세선은 기득권층의 권력 독점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요 왕조는 혈통보다는 능력과 실적에 비중을 두어서 공이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을 임용하고 성종대부터 송의 관료 심사 제도를 도입해 무능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인사를 배제했다.[28]

그러나, 이러한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세선제와 음서제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다. 세선제는 거란 황족과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으로 초기부터 지배 계급의 관직 독점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으며 음서 또한 고려에서처럼 기득권층의 권력 유지 도구로 쓰였다. 다행히 세선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비중이 줄어들고 말기에는 거의 소멸해 버렸다.

세선제는 소멸하는 과정을 밟지만, 도종 후기부터 심사 제도가 망가지고 권력층이 임용에 지나치게 개입하여 권력 독점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관직 세습과 매관매직이 이루어지고 지방관이 봉건 영주화하는 폐단이 발생했다. 또한 지배층의 부패와 사회 혼란으로 정부 재정이 악화되어 과거제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학교 교육도 저질화되었다. 조정은 이러한 현상을 막아내지 못했고 사회적 모순이 가중되었다.

이는 천거제의 장 · 단점이 드러나고 음서와 세선제의 악영향이 나라를 좀먹은 사례이다. 유능하고 실적 있는 관료와 군인, 숨겨진 인재들을 선발하고 무능력한 인사들을 배제하는 순기능이 작용하면서 권력층의 개입으로 관료와 군인 임용에서의 부정과 기득권의 권력 독점이 이뤄지는 역기능이 발생한 것이다.

교육 제도는 요 태조가 상경에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하나, 태조대에는 학문이 성숙하지 못해서 실질적인 교육과 학문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교육 제도의 시작은 태종이 남경에 태학을 설치하면서부터이며 성종이 5경의 주현에 학교를 설치하고 학생들을 후원하면서 지방에도 교육 제도를 이식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도종은 중경에 국자감을 설립하고 좨주(祭酒) · 사업(司業) · 감승(監丞) · 주부(主簿)를 임명해 인재를 양성했다. 국자감의 설립으로 유학 교육의 확산이 진전되어 관학과 사학의 설립이 촉진되었다. 또한 도종은 송의 제도를 모방하여 부, 주, 현마다 학교를 설치하고 박사와 조교를 임명해 지방 교육 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오경(五經)의 주해를 반포하고 지방 학교의 교재로 오경을 채택했다. 이는 당, 송을 모방해 충군, 애국을 강조하고 유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 시도였다. 학교에는 거란인 · 발해인 · 한인 · 해인들이 입학했으며 성종대에는 고려인 유학생이 거란어를 배우기도 했다.

또한 조정은 황족들을 위한 제왕문학관(諸王文學官)을 설치하고 이름난 유학자들을 초빙해 여러 과목을 개설하여 황족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원래 제왕문학관의 설립 목적은 핵심 통치 집단인 황족들이 무능하고 무식한 권귀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나, 요대 제왕문학관의 교육은 상당한 효과를 내어서 일부 황족들은 기초적인 수준의 지식을 갖춘 것을 넘어서서 높은 학식과 문예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사교육의 경우, 송에서 유행하던 서원이 요에도 영향을 미쳐서 요대 중기의 명신으로 유명한 형포박이 용수 서원을 설립하여 한인과 거란인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나, 요의 서원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사교육은 가정 교사, 유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세운 사학, 가정 교육이 주를 이뤘을 것으로 추정된다.


4.4. 법 제도[편집]


연맹 시기의 거란인들은 문자가 없어서 성문법 대신에 관습법과 불문법에 의거해서 판결을 내리고 질서를 유지했으나, 점점 사회가 발전하고 나라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의미의 법 제도를 만들 필요성을 느꼈다. 요 태조 야율아보기는 연맹 시절에도 여러 가지 법을 제정하고 건국 이후에는 돌여불(突呂不)에게 지시해 결옥법(決獄法)을 정비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태조는 꾸준히 제도의 개선을 추진해 관제와 형법을 정비하고 거란인과 여러 이족(夷族)들을 다스리는 법을 제정했다.

또한 태조는 재판에서 무고한 이들이 피해를 입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종원(鐘院)을 설치하여 민원을 받고 인민들이 원통한 사건을 황제에게 전달할 수 있게 했다. 종원은 말 그대로 종을 설치한 관청으로서, 인민이 종을 치면 관리가 사안을 듣고 황제에게 전했다. 종원은 목종이 없앴다가 경종이 등문고원(登聞鼓院)이란 이름으로 되살렸다.

요사 형법지에 따르면, 요 왕조는 당과 오대의 율령을 도입해 한인과 발해인들은 율령으로 다스리고 거란인과 해인, 기타 유목민 · 삼림 수렵 민족들은 '치거란급제이지법(治契丹及諸夷之法)'이라는 전용 법령에 근거해 다스렸다. 법 제도면에서도 인속이치의 원칙을 세워 민족마다 다르게 법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나 민족 간의 분쟁은 오로지 율령으로만 처리했다.

성종 초기에 섭정을 한 예지황후는 황제에게 법을 관대하게 적용할 것을 권하고 본인 스스로도 신중하게 판결을 내렸다. 모후의 영향을 받은 성종은 여러 차례 법령과 소송 제도를 개정하고 사법 기관을 정비했다. 또한 성종은 사건을 상세하게 살펴보고 신중하게 처리했으며, 관료들에게 판결을 지체하지 말고 인민을 가혹하게 다루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누명을 쓴 죄인들을 신속하게 석방하고 원통한 이들은 판결이 난 뒤에도 관청에 호소할 수 있게 조치했으며 수차에 걸쳐 각지에 체옥사를 파견해 밀린 재판의 처리와 사건 심의를 명했다.

일부 사건은 본인이 직접 재판을 심리하기도 했는데, 거란 오원부의 수장인 불노(佛奴)가 무구를 훼손한 부민을 장살(杖殺)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성종은 그야말로 격노해 불노에게 인민을 가혹하게 다스린 죄를 물어 관직을 삭탈했다. 이 사건이 신하들에게 큰 경고가 되었는지, 사건 이후로 관료들이 인민에게 함부로 중형을 가하거나 혹독하게 다루지 않았다.

거란인들이 법을 무시하고 소수민족들을 괴롭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성종은 거란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고 민족의 차별을 두지 않고 법을 적용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교적 윤리를 전파하고 민족 차별을 줄이기 위해 십악팔의(十惡八議)를 제정하여 거란인이든 한인이든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모조리 처벌했다. 성종이 개정하고 보완한 법 제도는 관대하고 간소했으며 법령 대부분이 민심에 잘 부합해서 인민들은 성종의 법 개정과 집행에 기뻐했다.

요 초기에는 형벌이 엄하고 가혹해 인민이 두려워하고 거란인과 귀족들에게만 관대하게 법을 적용해서 원망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경종과 성종이 즉위한 뒤부터 형벌을 관대히 하고 평등하게 법을 적용하여 각지의 감옥이 텅 비었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였으니 법 제도가 개선되고 법질서가 높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도 있었다. 형벌 적용이 관대해진 것은 좋았으나, 같은 죄를 범해도 다르게 처벌하는 일이 많아서 기득권층이나 관료들이 뇌물을 써서 처벌을 피하거나 그 수준을 낮추어서 법질서가 흔들렸다. 게다가 성종 말기부터 뇌물을 받거나 큰 죄를 진 관료, 부정부패나 큰 범죄를 저지른 귀족, 심지어는 외국에서 가져온 조공품을 훔친 자들까지도 사형을 면하거나 중죄를 피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반대로 역모에 연루된 자들은 가혹하게 다루었기에 법의 권위가 떨어지고 사회 풍조가 문란해졌다. 천조제 시기에 다시 형벌을 엄하게 적용했지만, 그 기준이 모호하고 주관적이라 민심만 잃을 뿐 질서를 회복하지 못하고 요의 쇠망만 앞당겼다.

요의 율령은 태종대에 당과 오대의 율령을 도입한 것이 시초이며 이후, 성종이 태평 연간에 송율을 도입하고 소덕과 야율서성에게 명해 율령을 개정했다. 허나, 기본적으로 송대 초기의 율령은 당률을 답습한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한인과 발해인들에게 적용하는 법은 당률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어서 흥종이 1036년(중희 5년)에 신정조제(新定條制)를 편찬해 이전의 법들을 개정하고 법령을 547개 조로 증보했다. 도종은 즉위 초에 중희조제(重熙條制)를 편찬하여 789개의 법조문을 제정하고, 이후에도 꾸준히 법을 개정하고 증보해 1070년(함옹 6년)에 함옹중수조제(咸雍重修條制)를 편찬하고 약 1천여 조의 법조문을 제정했다. 이 때 제정한 법전들은 유목민족의 전통과 율령을 조화시킨 것으로서 요의 법 제도에 한률의 영향이 강해지고 성종대의 기조가 이어져서 법적인 면에서 민족 차별을 없애려 한 특징이 드러난다.

그러나 함옹중수조제부터 법조문이 너무 번다하여 율관들도 이를 숙지하지 못하고 법을 어기는 인민의 수가 급증했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이 술수를 부려 인민을 괴롭히고 부정하게 이득을 편취하는 일까지 벌여지자, 도종이 명해 중수조제를 폐지하고 중희조제로 회귀했다.

재판은 항소심을 허용해 1심의 결과에 만족치 못하거나, 억울한 일이 있는 자는 어사대에 진소해 항소심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어사대에 사건을 재조사할 권한을 부여했다. 원통한 일이 있는 이들은 등문고원을 이용해 황제에게 직소했다. 조정에 올라온 사건은 원래 황제에게 아뢰고 중서성과 문하성의 낭관, 한림학사가 황명을 받아 심리했으나, 성종대부터 대리사에서 전담했다.

요의 형벌은 태형(笞刑) · 장형(杖刑) · 도형(徒刑) · 유형(流刑) · 사형(死刑)의 다섯 가지로 나뉜다. 사형은 선고와 집행을 할 때는 반드시 조정의 재가를 받아야 하며 강도죄에 한정해서는 도종대부터 각 지방, 관부에 처결할 권한을 주었다. 사형을 집행한 뒤에는 그 시신을 저자 거리에 3일간 놔두어 만민에게 경고했는데, 성종대부터 그 기간을 하루로 줄이고 유가족이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루는 것을 허용했다.

요는 교형(絞刑) · 참형(斬刑) · 능지형((陵遲刑) · 환형(轘刑) · 효형(梟刑) · 지해형(支解刑) · 요참형(腰斬刑) · 생예형(生瘞刑) · 투애형(投厓刑) · 사귀전형(射鬼箭刑) 등의 형벌을 집행했다. 요의 사형 방식은 당의 사형법과 수대 이전의 잔혹한 형벌, 거란의 형벌 방식이 섞여 있다. 환형은 거열, 지해형은 난도질, 생예는 생매장, 투애는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형벌이다. 이 중에서 교수, 참수, 투애, 생예, 사귀전은 연맹 시기부터 존재한 거란의 형벌이다.

사형 방식 중에 사귀전은 사형수를 나무나 기둥에 묶어놓고 화살을 수십 발 쏘아 죽이는 형벌로서 요에서는 황제가 친정을 나서면, 여러 황제의 사당에 제를 지내고 사귀전형을 집행했다. 이는 정벌을 나가는 방향에 기둥을 세우고 사형수 한 명을 묶은 뒤에 화살을 마구 쏘아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히게 해서 혹시나 전쟁 중에 생길지 모를 액운을 막는 제례였다. 사귀전형을 집행할 때 쓰는 화살은 명적(鳴鏑)을 쓰는데, 명적이 날라가며 내는 소리가 마치 귀신 우는 소리 같다고 해서 귀적(鬼鏑)이라고도 불렀다. 이밖에도 포락이나 철퇴로 장살하는 잔혹한 형벌들도 있었으나, 거의 다 목종대에만 시행하고 그 뒤로는 폐지했다.

귀양을 보내는 유형은 3등급으로 나눠 경중에 따라 국경 유배, 국외 추방, 만리타국에 사신으로 보내는 형벌을 집행했다.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왜 형벌인지 의아할 수 있는데, 바닷길이 험하고 풍토병으로 죽을 수도 있는 조선 통신사처럼 사신으로 보낸다는 핑계로 먼 변방까지 가게 해서 심하게 고생시키거나 죽게 만드는 형벌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무사히 돌아온 이들도 있었고, 경우에 따라선 돌아와서 다시 중용받기도 했다.

감옥에 가두는 도형도 3등급으로 분류해 18개월형 · 5년형 · 종신형을 선고하고, 곤장을 치는 장형은 50대 ~ 300대 이하를 가했다. 이외에 거세를 시키는 궁형(宮刑)과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경형(黥刑) 등의 형벌을 시행했다. 경형은 고대 중국에서 시행하던 형벌로 유명하지만, 거란 각 부족은 예전부터 족장이 죄를 지면 경형을 가했다는 기록이 있어 한율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한 관습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율의 영향을 받아 연좌제도 적용했다. 역적의 가족은 역모 사실을 몰랐어도 연좌하고 가족이 뇌물을 받았으나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관료와 귀족도 뇌물죄를 적용했다. 만약 귀족이 모반하면 그 가족을 관노, 또는 황제의 직할지인 오르두를 관리하는 저장호나 궁분호로 만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료들에게 노비로 주었다. 그리고 가산을 몰수하는 적몰법을 도입해 반역자의 재산을 국고나 오르두에 귀속시켰다. 업무를 잘못한 관료와 15살 이하, 70살 이상의 범죄자나 범죄에 연루된 자는 동전을 바쳐 속죄할 수 있게 했으며 그 비용은 장 1백 대당 1천 전이다.

절도죄의 경우, 요 왕조는 다른 왕조들보다 절도를 훨씬 더 엄하게 다루었다. 초범일지라도 절도한 돈이나 장물의 가치나 5관(貫)을 넘으면 사형에 처했다. 다만, 5관만 훔쳐도 사형에 처하는 것이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점차 처벌 기준을 완화해 10관, 25관, 최종적으로 50관 이상을 절도한 사건의 주범은 사형, 종범은 유배에 처하도록 조정했다.

성종 시기에는 절도범의 처벌에 경묵형(黥墨刑)을 추가했다. 절도 3범은 이마에, 4범은 얼굴에 죄명을 새기고 5년형에 처하고 5범은 사형을 선고했다. 흥종대부터는 처벌을 더욱 강화하여 절도 초범은 오른팔, 재범은 왼팔, 3범은 왼쪽 목, 4범은 오른쪽 목에 문신을 새기고 5범은 사형에 처했다.

노비들은 주인이 모반, 유배형이나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지른 경우가 아니면 주인을 고발하지 못하게 했으나, 노비가 도망을 치거나 주인의 재산을 훔쳐도 주인이 함부로 경면(黥面)하지 못하게 하고 목과 팔에만 경형을 허용했다. 또한 노비가 사죄(死罪)를 저질러도 주인이 함부로 죽이지 못하게 하고 관부에서 사안을 심리하게 했으니 노비의 인권도 어느 정도 존중해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형벌 도구로는 목검, 목봉, 사대(沙袋), 철골타(鐵骨打), 고문 도구로는 낙(烙), 편(鞭), 세장(細杖), 추장(麄杖) 등을 썼다. 목검과 사대, 철골타는 거란 고유의 형벌 도구로서 목검은 주로 중죄를 진 대신에게 관용을 베풀 때, 목봉은 대체로 중한 범죄를 관대히 처리할 때에 썼다. 목검과 목봉을 가할 때는 3등급으로 나누어 15 ~ 30대를 때렸다. 사대는 가죽으로 싼 모래 포대를 곤봉에 달은 것으로 장형 50대 이상을 선고받은 자에게 썼으며 사용 방식은 곤장형이었다. 철골타는 속이 비어 있는 팔각형의 철 뭉치를 곤봉에 매단 것인데, 철골타로 때리는 것은 5대 ~ 7대로 제한했다.

그러나 요의 법체계는 제도가 불완전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 1. 지나치게 복잡한 사법 체계
법조문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법관들조차 법을 완전히 숙지할 수가 없고, 법을 모르는 인민들이 영문도 모르고 죄인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탐관오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이용해 먹는 일이 빈번해, 도종 34년(대안 6년. 1089년)에 새로 제정한 법을 모두 폐지하고 중희조제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 2. 소수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거란인들의 범죄와 탈법 행위
성종이 민족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모두 동등하게 처벌하도록 했으나, 일부 거란인들은 한인에게 피해를 줘도 괜찮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일부러 한인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으며 같은 거란인들이 범죄자를 비호해주어 범죄자가 처벌을 가볍게 받거나 쉽게 풀려나는 폐단이 있었다.[29][30]
  • 3. 부정부패와 엄격하지 못한 법 집행
관리들이 뇌물을 받고 형벌을 가볍게 해주거나, 세력가들이 관료들에게 청탁을 해서 사건을 무마하는 폐단이 존재했으며 법 집행이 엄격하지 못해서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법 적용이 다르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나 거란인이 연루된 사건에 이러한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

정리하면, 이중 통치 체제를 창조한 요답게 법 체계도 이중으로 만들어 정주민과 유목민 각각에게 맞는 법을 제정하고 차별 없이 공정하게 인민을 통치하고 질서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법 제도가 기득권과 거란인에게 유리하고 평민과 소수민족들에게는 불리한 폐해가 있었다.


4.5. 군사 제도[편집]





요는 전민개병제를 실시해 15세부터 50세까지의 인민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군대는 어장친군(御帳親軍) · 궁위기군(宮衛騎軍) · 부족군(部族軍) · 오경향정(五京鄕丁) · 속국군(屬國軍)으로 편성했다. 군정권은 북추밀원이 행사하고 전쟁 준비, 작전 수립을 담당했다. 최고 군통수권자는 당연히 황제였으며 당제를 모방해 최고 군 통수 기관으로 천하병마원수부(天下兵馬元帥府)를 설치하고 황태자나 황자를 천하병마원수(天下兵馬元帥)로 임명했다. 병마원수부의 하위 기관으로는 도원수부(都元帥府)와 대원수부(大元帥府)가 있으며 두 기관은 천하병마원수부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병마원수부는 당제를 모방한 것으로서 당은 황태자를 천하병마원수로 임명해 군권을 장악했다. 이후, 당이 몰락하고 오대 국가들이 등장한 뒤부터 이 제도는 쇠퇴했으며 설령 시행하더라도 임시직으로 운용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정강의 변 직전에 흠종 황제가 황족 중에 유일하게 금군의 손아귀에서 빠져 있던 강왕 조구를 천하병마대원수로 임명한 일이다. 원래 강왕은 일개 황자에 불과했지만, 흠종의 임명 조서를 받은 뒤부터 병마대원수의 권위를 이용해 정강의 변으로 조정이란 머리가 잘려 혼란 상태에 빠져 있던 각 지방을 돌며 행정 체계를 복구하고 물자와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오대와 송과 달리 요가 이 제도를 되살려 황태자나 황자를 원수로 임명한 까닭은 군권을 장악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황태자가 군 경험을 쌓게 하고 그 기량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장자 계승제가 확립된 뒤부터는 기량을 시험한다는 목적이 퇴색되지만, 요는 황태자를 원수로 임명하는 전통을 유지했다.

각 지방에는 군을 지휘하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장군 · 상장군 · 장군 · 소장군, 도위와 같은 직책을 설치해 군권을 부여했다. 거란의 주요 유목민 부를 관장하는 대왕부들과 각 유목민 부들을 통제하는 절도사, 상온도 휘하 유목민들에 대한 군정권을 행사했다.

군 지휘는 도통(都統)과 부도통(部都統), 도감(都監) 등이 지휘하며 이들은 황제가 공신, 황족, 대신 중에서 임명했다. 이 중에서 도감은 감군(監軍)으로서 군의 관리, 감독을 맡고 사령관인 도통을 탄핵할 수도 있어서 권한이 막강했다.

병력을 동원하거나 조정에서 각 군에 군령을 내릴 때에는 금어부를 사용했다. 금어부는 부절(符節)의 일종으로 말 그대로 글자를 새긴 금제 물고기이다. 부절은 원래 중국에서 적군의 기만 전술에 걸려드는 것을 막고 역적들이 각 군 지휘관들을 속여 군대를 동원하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요에서는 금어부를 쪼개서 하나는 조정에, 나머지 하나는 각 군에 비치했다. 만약, 동원령이 내려지면 조정의 사자가 지참해 온 금어부와 부대에서 보관해 둔 금어부를 맞춰서 그 모양과 글자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했다. 여기서 맞으면 병력을 동원하고 틀리면 사자를 붙잡았다.

어장친군은 전국 각지의 부족군에서 선발한 요의 최정예 병력으로서 요 태조 야율아보기와 순흠황후가 구축한 피실군과 속산군에서 유래한다. 송의 금군과 마찬가지로 어장친군의 다수는 시위와 숙위를 맡고 일부는 5경과 국경에 주둔했다. 세종대에 전전도점검사(殿前都點檢司)를 설치하고 새로이 금군을 조직한 뒤부터는 그 성격이 변해서 시위와 숙위 업무를 금군에 넘겨주고 국경 수비와 전시 주력군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궁위기군은 여러 오르두에서 차출한 군대로서 황제들은 궁위기군을 후하게 대우해 충성심을 확보하고 좋은 무구와 군수물자를 지급했다. 그 대신,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고 그 중에서도 정예병인 자들을 선발했기 때문에 강군이라 할만 했다. 궁위기군은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각 오르두의 제할사가 병력을 모집해 전선에 투입했다. 제할사들이 격문을 띄우고 군사를 모집하면 주현과 부족에서 징병을 하지 않아도 10만의 기병을 모을 수 있어서 요는 병력 동원이 용이한 편이었다. 반대로 보병 중심인 송은 병력 동원과 이동 과정이 번잡하다보니 요의 기동력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금군은 세종대에 조직한 근위대로 당과 송의 제도를 모방해 공학(控鶴) · 우림(羽林) · 용호(龍虎) · 신무(神武) · 신책(神策) · 신위(神威)의 6군과 11위로 편성했다. 그 장관은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이며 금군의 주요 업무는 황궁에서 숙위와 시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유목민으로 구성한 부족군은 대수령 부족군(大首領 部族軍)과 중부족군(中部族軍)으로 나뉜다. 대수령 부족군은 왕공 대신들이 지원하는 사병들로서 그 수는 수백에서 수천을 헤아린다. 요사 병위지에는 왕공 대신들이 솔선수범해 국가를 위해 사병을 내놓았다고 칭송하지만, 요는 전시에 어장친군과 궁위기군, 금군을 주력으로 삼고 중부족군과 속국군으로 보조했기 때문에 수가 적은 왕공들의 사병은 중요성이 떨어졌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를 위해 싸우기 보다는 반란이나 황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에서 싸우는 일이 많았다.

중부족군은 남 · 북 재상부 소속의 부족들로 구성한 정규군이며 부족군은 평시에는 국경을 지키다가 전시가 되면 자비로 무장을 갖추고 전선으로 이동했다. 요의 유목민들은 모두 궁술과 기마술에 뛰어나고 평시에도 사냥을 많이 해서 전민개병이 가능해서 병력 동원이 용이했다.

각 부족군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오원부(五院部)와 육원부(六院部)는 남경에 주둔하면서 송의 침입을 대비하고, 오외부((烏隗部)는 동북에 주둔하면서 여진족의 침공을 방어했다. 돌여불부(突呂不部)와 저특부(楮特部) 등은 서북 지방에 주둔하면서 서북의 각 유목 민족들을, 날랄부(捏剌部)와 을실부(乙室部), 품부(品部) 등은 서남 지방에 주둔하면서 서하와 조복 등을 제어했다.

오경향정, 속칭 경주군(京州軍)은 5경과 각 주현에 주둔했다. 이들은 대부분 한인과 발해인이며 평시에는 도시를 수비하다가 전쟁이 나면 즉각 동원되었다. 경주군 중에서 우수한 자들은 금군으로 선발했다.

이외에도 각 부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한 사리군(舍利軍),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힌 유목민과 국경 지역의 부민들로 구성한 규군(乣軍), 군목군(群牧軍)을 조직했다. 사리군은 남부 지방의 방위를 담당하지만 전투력은 그저 그렇다는 평가를 받는다. 규군은 국경 방위를 맡으며 그 성격과 구성원의 특징이 현재까지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군목군은 요군에 군마를 조달하는 군목의 군대로서 군목 수비와 약탈 방지에 주력하고 전시에는 잘 동원하지 않았다.

해군도 존재했다. 유목민 출신이라 해군이 약할 것 같지마는, 요는 한인, 발해인으로부터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워서 상당한 규모의 함선을 건조할 능력을 키웠고 해운업도 상당히 발달했다. 심지어 흥종대에는 함대를 조직해 황하에서 송군을 상대로 수전을 걸어 승리한 적도 있어서 요의 해군을 과소평가하긴 어려울 것이다.

속국과 속부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으나, 전쟁이 나면 주력군인 궁위군과 5경의 군대만 동원하고 속국과 속부, 부족군을 동원하는 경우는 비교적 적었다. 평시의 요는 20만 ~ 30만의 병력을 유지했고 전성기에는 총병력이 164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64만의 수치는 동원 가능한 전체 장정의 숫자로 보인다.

해인, 발해인, 여진인, 복속한 실위인 등, 민족별로 구성한 부대도 운영했다. 이 부대들은 대체로 지휘관도 같은 민족 출신의 군인을 임명했다. 3차 여요 전쟁 때, 요군 소속으로 귀주에서 고려군과 맞서 싸운 발해 상온 고청명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렇듯 요군은 다민족 혼성군으로 조직되어 있지만, 주력은 유목민 기마 군단이고 군부와 고위층들은 '한인 금군'을 '거란 금군' 만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종이 정변을 일으킬 때에 한인과 발해인 금군의 지지를 받아낸 것이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친 바 있기에 한인 금군이 어장친군이나 거란계 금군에 미치지는 못해도 그 중요성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한인과 발해인들은 중요했다. 한인과 발해인들은 대부분 보병으로 편성되어 있고 거란인보다 정주화의 경향이 더 짙었던 해인들도 기병보다는 보병이 많아서 기동성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기병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하기가 힘든데다 발해인들은 전투력이 우수한 것으로 유명하고[31] 한인들은 위력적인 쇠뇌와 공성전에 필수적인 포차를 다루는데 능숙했다. 민족 감정이 있긴 했지만, 이러한 사실은 요의 수뇌부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후진의 석경당을 치기 전에 침공 계획을 논의하던 태종은 거란 기병대를 좌 · 우에 세우고 중앙에 발해인 보병대를 배치해서 진격한다면 적수가 없을 것이란 측근의 진언에 크게 감탄하고 지휘관들도 동의를 표했다.

남경 · 중경 · 서경에는 금군을 파견하고 각 주에는 절도사를 설치했다. 그리고 5경 전체에 군무를 전담하는 기관을 세웠다. 남경은 원수부를 설치해 번한병(蕃漢兵. 거란과 한인 혼성 군대)을 통솔하고 중경의 남·북 대왕부(南北 大王府), 해왕부(奚王府)에 군권을 부여했다.[32] 그리고 서경은 을실왕부(乙室王府), 동경은 도부서사(都府署司)와 통군사사(統軍使司), 상경은 상경총관부(上京總管府)와 상경성황사사(上京城隍使司)가 담당했다.

국경에는 특수 행정 단위로 로(路)를 설치하고 초토사(招討使)와 통군사(統軍使), 도부서사를 설치해서 지역을 방어했다. 울란바토르 인근에 위치한 진주(鎭州)에는 서북로 초토사(西北路 招討使)를 설치해 서북 지역의 각 유목 민족들을 제압하고, 현대 몽골의 동부 지역에는 오고 적렬 통군사(烏古 敵烈 統軍使)를 세워 몽골 오고부와 적렬부에 속한 유목민들을 통제했다. 서남 지역에는 풍주(내몽골 호화호특 인근)에 서남로 초토사((西南路 招討使)를 설치해서 서하 방면의 공격을 방어했다. 그리고 동북 지역은 태주에 동북로 통군사((東北路 統軍使), 황룡부(黃龍部)에 병마도부서사(兵馬都府署司)를 두어 동북 지방의 여진계 속국과 속부들을 통제했다. 국경 방위 업무 외에도 초토사는 항복한 병력과 흡수한 포로를 관리하는 직능도 수행했다.

군사적 특징에 대해 알아보자면, 요군은 정찰과 숙영을 중시했다. 원탐난자(遠探攔子)라 부르는 정찰병들을 세밀하게 보내어 이동 중에도 반경 10km 내외를 탐지하고 야간에도 정찰병들을 보내 야습을 방지했다. 만약 야간에 움직임이 있으면 사로잡고 그 규모가 크면 선봉대에 알려 협공했으며 만약 대군이 이동 중이라면 즉각 지휘관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만약에 적진을 탐지하면 적군의 허실을 주밀히 살폈다. 숙영 중에는 진영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적의 기습을 방지하고 이동할 때에도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일례로 요군은 이존욱과의 일전에서 대패했을 때에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진영을 정리하고 퇴각해 그 이존욱이 감탄할 정도였다.

또한 정보 전달을 중시해서 각 부대에 신속하게 명령을 전달하고 정보를 주고 받았다. 국경 지역의 군대는 국경 밖으로 나아가 외부 세력의 동향을 살피고 정보를 수집했다. 적대 세력의 침공을 막기 위해 순찰을 나가 국경 밖의 농지와 목초지를 불사르고 위험이 될만한 세력을 미리 공격하는 예방 전쟁도 수행했다.

전술적으로 기마 군단을 주력으로 삼는 요군은 기동전을 장기로 삼았다.[33] 요군은 기동력을 이용해 양동 작전을 펼쳐 조공으로 적의 국경 방위 군단을 틀어막고, 주력군으로 적의 약한 후방이나 거점, 중심 도시를 강타했으며 주요 방어선을 우회해 허를 찌르는 전략도 자주 구사했다. 발해의 요동 방어선을 무시하고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부여부를 급습, 순식간에 함락하고 상경을 포위한 일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1004년에 송을 침공할 때는 양동과 우회 전술을 함께 구사했다.

요 성종과 예지황후가 직접 친정한 요의 20만 대군은 송의 군사 요충지인 정주(定州)를 우회한 뒤, 병력을 나누어 주력군은 계속 진격하고 조공으로 관남에 속한 영주(瀛州)를 포위했다. 2달이 넘도록 영주를 함락하지 못하자, 요의 조공은 영주를 포기하고 주공과 합류해 송의 후방 거점들을 공략하고 전주(澶州)까지 진격했다. 전주에서 개봉까지는 300리(약 120km) 밖에 되지 않았고 황하가 얼어붙어 기마 군단이 며칠이면 개봉을 포위할 수 있었다.

이 가공할 기동력으로 요군은 송 조정에서 천도론까지 나올 만큼 송을 압박했다. 그러나 송 진종의 친정, 일부러 우회한 정주와 보주(保州)의 주둔군이 보급로 차단을 시도한 것, 원수 소달람의 전사와 같은 악재가 겹쳐 개봉을 함락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연의 맹을 맺어 30만 냥의 세폐를 확보하고 기존에는 이민족이라고 무시당하던 입장에서 송 황제와 요 황제는 동등하다는 명분상에서의 큰 이익을 받아내어 성과는 충실했다.

반대로 요군의 전략과 전술이 실패한 사례로는 여요 전쟁이 있다. 2차 여요 전쟁 당시, 요군은 쉽게 함락되지 않는 흥화진(興化鎭)을 우회해 통주(通州)에서 강조(康兆)가 이끄는 고려 주력군을 궤멸시키고 곽주(郭州)와 안주(安州), 고려 북방의 최중요 거점인 서경(西京)을 함락했다. 이어서 요군은 개경(開京)을 함락해 불바다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玄宗)은 나주(羅州)까지 도망가야 했다. 여기까지는 확실히 요군의 전략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요군은 전쟁 목표인 고려의 항복이나 현종의 포획을 달성하지 못하고 전쟁 기간 내내 흥화진의 양규(楊規)에게 시달렸다. 심지어 회군할 때에도 양규의 급습에 당해 피해가 상당했다.

3차 여요 전쟁의 요군은 피해가 누적되는 상황에서도 개경까지 진격했으나, 결국 개경을 함락하지 못하고 회군하다 귀주에서 대패했다. 그래서 요군의 기동전은 그 장 · 단이 뚜렷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요군이 이렇게 기동전을 중시한 것은 유목민 특유의 기질이 발현한 것이지만, 속전속결을 강요당한다는 점도 있었다.

요의 주력군인 유목민 기마병들은 상대적으로 한인과 고려인에 비해 추위에 강해서 겨울에는 추위에 떠는 정주민들을 몰아붙일 수 있지만, 더위에 취약해서 여름만 되면 맥을 못 추었다. 또한 봄부터는 강물이 녹고 강우량이 늘어나 기마 군단의 기동성이 떨어지고 활의 아교가 녹아 전투력도 감소했다. 그래서 요군의 군사 작전은 실질적으로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만 가능하고 그 이상을 넘어가기가 어려웠다.

실제로 요 태종이 개봉을 점령했을 당시에, 날씨가 더워지면서 요군의 전투력이 떨어졌고 태종 본인도 더위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요군은 막강한 기마 군단을 운용해 강국인 발해를 무너뜨리고 송과 고려를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장기적인 전쟁을 준비할 수 없다는 태생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요의 군부도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어서 여러 차례의 원정에서 그 약점을 극복하는 모습을[34] 보여주기도 했지만, 여요 전쟁에서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전투를 벌일 때에는 유목민 특유의 스웜 전술을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전투 초기에는 탐색전을 벌여 적의 특징을 파악하고 강점과 약점을 살펴 그에 맞게 대응했다. 2차 여요 전쟁 때, 통주 전투에서 강조는 계속 승리를 거두지만, 요 성종은 계속 패전해주면서 고려군의 특성을 파악하고 강조가 오만해진 틈을 타서 고려의 주력군을 박살내고 강조의 목을 베었다.

또다른 군사적 특징으로는 공성전을 벌일 때에 미리 사로잡은 포로들을 앞장세워 화살받이로 쓰고 후열에 군인들을 배치하는 것이 있다. 꽤나 잔혹하지만, 공성전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 후대의 몽골 제국도 이 전술을 사용했다. 요 – 후진 전쟁 때도 포로들을 앞장세워 성을 공략한 적이 있다. 조금 다른 식으로 포로를 활용한 사례로는 2차 여요 전쟁 중에 흥화진 성 앞에서 고려인 포로들을 참살한 일이 있다. 아마도 주둔군의 사기를 꺾기 위함으로 보이지만, 흥화진을 지휘하는 양규는 동요하지 않고 요군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여요 전쟁 이후, 요군은 2차에 걸친 서하와의 일전에서도 패배하지만, 그래도 그 기세를 유지했다. 허나, 도종대부터 군역을 담당하는 평민들이 파산하거나 군역을 기피하는 일이 많아서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인적 자원의 감소를 타개하기 위해서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용했다. 천조제 시기에는 군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기가 낮아 대군을 동원하고도 소수의 금군에게 대패했다. 요동이 무너진 뒤부터는 사태가 급해 부유층과 특권층까지 징집해 맞섰으나, 금군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나라가 멸망했다.

최종적으로 요의 병제를 정리하자면, 병역은 15세 ~ 50세에 부과하고 평시엔 20만 ~ 30만, 전성기의 전체 병력은 164만이었으며 나머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어장친군 - 황제를 호위하는 병력. 요의 최정예 군대.
  • 궁위기군 - 12궁 1부의 병력. 5경의 병력과 함께 요의 주력군.
  • 5경
    • 기본적으로 한인과 발해인, 거란인으로 구성한 군대가 주둔.
    • 금군 - 남경·중경·서경에 주둔.
    • 을실왕부 - 휘하 유목민 부의 군정권 행사. 서경의 군사 업무 담당.
    • 남·북대왕부 - 휘하 유목민 부의 군정권 행사. 중경의 군사 업무 담당.
    • 원수부 - 각지에 설치된 군정 기관. 남경의 군무 기관이기도 함. 번한병 통솔.
    • 동경 도부서사, 동경 통군사사 - 동경의 군무 기관.
    • 상경총관부, 상경성황사사 - 상경의 군무 기관.
  • 절도사 : 각 주와 부족의 군권 및 행정권 행사.

  • 부족군
    • 오원부, 육원부 - 남경에 주둔. 송의 침공 대비.
    • 오외부 - 동북 지방에 주둔. 여진족의 침공 방어.
    • 돌여불부, 저특부 등의 서북 지역 부 - 서북 지방에 주둔. 서북의 각 유목 민족 통제
    • 날랄부, 을실부, 품부 등의 서남 지역 부 - 서남 지방에 주둔. 서하와 조복 등을 통제.
    • 규군 - 국경 지역의 여러 유목민으로 구성. 국경 방어.
    • 사리군 - 귀족 자제로 구성. 각 부에 주둔. 요의 남부 지방 방어.

  • 국경 지역
    • 초토사, 통군사, 도부서사 - 지역 방위.
    • 서북로 초토사 - 진주에 주둔. 서북의 유목 민족 통제.
    • 서남로 초토사 - 풍주에 주둔. 서하 방면의 공격 방어.
    • 동북로 통군사, 병마도부서사 - 통군사는 태주, 도부서사는 황룡부에 위치. 동북 지방 속국과 속부를 통제


5. 지방 행정[편집]






요는 이원적인 지방 행정 제도를 구축해서 정주민은 주현제로 통치하고, 유목민은 부족제로 통치했다. 이는 요의 통치 전략인 인속이치(因俗而治)를 적용한 것으로서 각 민족의 풍습에 맞게 법률과 행정 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요 왕조는 피지배층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효과적으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다.


5.1. 정주민 지역의 지방 행정 제도[편집]


정주민 지역의 행정 제도는 당의 제도를 모방해 지방을 5도 · 5경 · 156 주군성 · 209현으로 편성했다. 그리고 중요한 지역에는 부를 설치하고 주는 상등주, 중등주, 하등주, 현은 상등현과 하등현으로 나누었다.

요는 지방 행정 제도를 구축할 때에 오대나 송보다는 당을 많이 모방해서 당제가 지방 행정 제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5경제와 부(府)의 설치, 자사 파견, 최고 행정 단위를 도(道)로 설정한 것, 주를 상 · 중 · 하, 현을 상 · 하로 편성한 것은 모두 당제를 모방한 것이다. 당의 경우에는 현도 상 · 중 · 하로 편성했으며 안, 사의 난 이전까지 전국을 15도로 편성했다.

최고 행정 단위인 도(道)는 각각 상경 · 중경 · 동경 · 서경 · 남경도가 있으며, 도의 하위 행정 단위로 부 · 주 · 군 · 성(府 · 州 · 郡 · 城)과 현(縣)이 있다.[35] 그리고 5경은 각각의 역할과 특징이 달랐다.

상경 임황부는 최초의 수도이며 거란인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여러 수도들 중에서도 가장 중시했다. 행정적으로 상경은 드넓은 상경도의 유목민들을 통제하고 요 전기의 수도로 기능했다. 경제적으로 상경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초가 풍부해서 농업과 목축업이 모두 활성화되어 있고 한인과 발해인의 대규모 이주로 지역 개발을 도모해 경제가 매우 발전했다. 또한 비단길에서 오는 재화가 모이는 곳으로 위구르인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에서 오는 상인들이 모여 진귀한 재화를 거래했다. 상경의 인구는 36,500호, 약 20만 명이다.

동경 요양부는 원래 태조가 고려, 발해와의 전쟁을 대비해 성곽을 쌓고 방어선을 구축한 곳으로 발해 멸망 이후에는 동란국의 수도가 되었다. 동란국이 해체된 뒤에도 요양은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아 동경으로 격상되었으며 요서 지방의 중심 도시로 기능했다. 군사적으로 동경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발해인과 여진인을 통제하고 고려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했다. 만약 고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 동경에서 총지휘를 하고 모든 원정군이 동경에서 출발했다. 경제적으로 동경은 바다와 가깝고 매우 풍요로워서 무역과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동경의 인구는 인구는 46,400호, 약 23만명이다.

서경 대동부는 원래 인구도 적고 경제 수준도 낮아서 중요성이 별로 없었으나, 점차 경제가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나 도시의 규모가 커졌다. 이후, 흥종대에 서하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서경으로 승격시켜 서하의 침공을 대비하고 서남 지역의 유목민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지리적으로 서경은 북쪽에 평원이 있어 유목민들은 쉽게 진입하지만, 남쪽은 오대산을 위시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남방의 송은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요는 고지대에 위치한 서경의 이점을 살려 송의 동향을 감시하고 만약에 있을 송군의 침공을 방비했다. 경제적으로 서경은 5경 중에서 경제적 중요도가 가장 떨어지지만, 그래도 연운 지역 서부의 경제 중심지로 기능했다.

남경 석진부는 원래 당대에는 유주였다. 유주는 한 대부터 유목 민족의 침입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당대에는 노용 절도사 유인공의 핵심 거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요 태종에게 바치면서 한인 왕조 입장에서 ‘남경’은 더 이상 유목민의 약탈을 방어하는 ‘북방의 요새’가 아니라 정복 왕조의 침공 기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남경은 물산이 풍부해서 요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중심지로 기능했다. 또한 송과 요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상업과 무역이 크게 번성했다. 군사적으로 남경은 송의 침공을 1차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 2차 북벌 중에 송군이 다른 지역들은 함락해도 남경은 무너뜨리지 못해서 연운 16주를 수복하지 못했으니 남경의 군사적 중요성은 상당히 높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남경의 인구는 약 30만이며 5경 중 인구가 가장 많다. 인구의 다수는 한인이지만, 거란, 해, 발해, 여진인들도 거주했다.

마지막으로 중경 대정부는 5경의 중심으로서 요 후기부터 상경을 대신해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경제 · 문화적 중요성이 높은 연운 16주와 정주민 지역을 통치하고 송과의 관계를 조율하기에는 상경이 너무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할만한 중심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종은 전연의 맹을 체결한 뒤에 중경을 세워 5경 전체를 총괄하는 정치 중심지로 만들었다.

행정적으로 중경은 요대 후기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였다. 또한 중경도는 거란인들과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누리는 해인들의 중심지여서 중경은 해인들을 통제하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도 맡았다. 경제적으로 중경은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농경에 적절해 농업이 발달했으며 송과의 거리도 가까워서 교류가 편리했다. 그래서 중경은 다른 수도들과 마찬가지로 정치 중심지이면서 지역의 경제 중심지이기도 했다. 중경의 도시 구조는 송의 개봉을 모방한 것으로서 성종은 많은 수의 한인 건축가, 기술자들을 모아 중경을 건설했다.

부는 수도에 소속된 도(道)의 행정을 총괄하는 경부(京府)와 지방의 번부(藩府)로 편성했다. 경부는 유수(留守)가 행정과 치안을 맡고 경순원(警巡院), 처치사(處置司)가 각각 사법과 징세를 담당한다. 수도의 장관이라는 위상 때문인지 5경의 유수는 주로 황족이나 대신들을 임명했다. 번부에는 지부사(知府事)를 임명했다. 대표적인 번부로는 동북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황룡부(黃龍府)와 중경과 남경 사이의 대도시인 흥중부(興中府)가 있다.

주는 자사주(刺史州)와 절도주(節度州)로 편성하고 등급에 따라 상등주, 중등주, 하등주로 나누었으며 특수한 주는 방어주(防禦州) - 단련주(團練州) - 관찰주(觀察州)로 구성했다. 각 주의 지방관으로는 자사 · 방어사 · 단련사 · 관찰사 · 절도사를 임명했다. 주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소속 관청을 감찰하는 녹사참군, 실무를 맡는 판관 등의 지방관원들은 행정 실무를 맡고 지방관을 보좌했다. 지방관의 위계는 절도사 → 관찰사 → 단련사 → 방어사 → 자사의 순서로 절도사가 가장 높다.

관찰주 하위의 주(단련주, 방어주, 자사주)들은 소속이 다양했다. 도나 부, 절도주의 소속으로 편성된 주도 있고, 중등주와 하등주의 경우에는 도의 직속 행정 단위가 아니라 상등주에 소속되기도 했다. 따라서 요의 지방 행정 구조는 매우 복잡하며 행정 단위별로 소속 관계와 지위가 매우 다양하다고 평할 수 있다.

중간 행정 단위인 군에는 군수(郡守)를 파견하고 최하위 행정 단위인 현에는 현령(縣令)과 현승(縣丞), 현위(縣尉), 주부(注簿)를 임명했다. 현도 주와 마찬가지로 상등현과 하등현으로 나누는데, 상등현은 주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마지막으로 현에 속한 마을들은 태종대에 마을의 유력자들을 촌장으로 임명한 전례가 있어서 부호나 장로, 호족, 인망 있는 자들이 마을을 지도했을 것으로 보인다.[36] 그리고 주현의 행정을 담당하는 지방관과 그 밑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서리는 대부분 한인이나 발해인이었다.

요는 광대한 지역에 산재한 도시와 요충지들을 연결하기 위해서 곳곳에 역참을 설치해 신속한 통신 체계를 유지했다. 역참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패자(牌子)를 발급했는데, 이러한 제도는 모두 몽골 제국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요 제국의 파발은 통상 500리, 긴급시에는 700리를 달렸다.

만약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경우, 요 왕조는 다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해 반란이 일어난 해당 행정 단위를 해체하거나 이전해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민들을 아예 분산시켜 여러 지역에 보내기도 했다.

정주민 중에서 가장 강제 이주를 많이 당한 민족은 발해인들이다. 발해인들의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린 요 왕조는 발해인들의 역량과 민족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인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곧바로 주민들을 다른 지역으로 보내거나 주민들을 여러 집단으로 쪼개서 각지에 분산 이주시켰다.

요 왕조 입장에서 강제 이주는 반란의 뿌리를 뽑고 통제력도 회복하는 한편, 인구가 부족한 지역도 개발하는 1석 3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강제 이주를 당하는 인민 입장에서는 모든 기반과 재산을 잃고 고향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겪어야 했으므로 강제 이주가 매우 가혹한 징벌이었다. 일례로 요 태종이 상경을 불사르고 발해인들을 요서로 이주시킬 때는 많은 수의 발해인들이 빈곤해져 부유층의 노비나 부곡이 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강제 이주 정책은 미래의 반란을 예방하는 데에는 적절했지만, 민심이 이반하고 소수 민족들의 원한을 양산하는 문제도 있었다.


5.2. 유목민 지역의 지방 행정 제도[편집]


요의 부족제는 일종의 중앙집권화로서 혈연으로 연결되고 부족장의 통치를 받는 '부족'을 정부가 임명한 관료의 통제를 받는 민 · 군정 일치의 '행정 단위'로 변화시킨 것이다. 태조 아보기의 시대부터 요 왕조는 분토정거(分土定居)를 단행해 부족을 재편성했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들의 혈연 관계는 약화되고 단결력이 떨어져서 조정에 대항할 힘을 잃기 시작했다. 또한 통제를 위해 각 유목민 부족의 토지를 할당해주고 자유로운 이동을 막았으며 원래 세습하거나 선출하는 부족장의 지위를 임명직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정주민들에게 구사한 강제 이주 정책을 유목민들에게도 적용했다. 요 조정은 반란을 일으킨 직할 부족이나 속부를 강제 이주시키거나 아예 해체해서 부족민들을 다른 부족에 편입시켰다. 속부의 경우에는 사로잡은 포로들로 새로운 직할 부족을 구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요 조정은 반항적인 유목민 부족들을 쉽게 통제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 왕조가 굳이 초원의 자유로운 유목민들을 통제하는 방식을 쓴 이유는 각 부족에 소속된 유목민들이 관료와 군인이 되어 정치와 행정을 이끌어 나가고 요의 군사력을 유지시켜 주는 핵심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요의 국력이 강해져서 인구가 늘어나고,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많은 유목민들이 부에 편입되어 요는 태종대에 부를 20개로, 성종대에 34개로 증설, 재편성했다. 부의 증설과 재편성은 황제의 통치력 강화 시도이면서 수많은 유목민들을 복속시킬 만큼 요의 세력이 강대해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통치력 강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질랄부(迭剌部)의 재편성이다. 야율씨가 소속된 부족이며 아보기의 친족인 질랄부는 아보기의 독재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연맹의 전통을 유지하려 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아보기는 질랄부를 오원부와 육원부(六院部)로 분리하고 자신의 조부 균덕실의 후손들을 맹부(孟父), 중부(仲父), 계부(季父)의 3방(房)으로 분할해 이들을 약체화시켰다. 이러한 친족 약화 작업이 진행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부터 옛 질랄부에 속하던 부족들은 황제의 친족으로서 그의 가장 강력한 우군이 되었으니 아보기의 정책이 효과를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요는 인구의 다소에 따라 유목민 부를 왕의 통치를 받는 대부족과 절도사의 통치를 받는 소부족으로 편성했다. 대부족은 삼공과 좌 · 우 재상, 절도사사(節度使司)와 상온사(詳穩司)를 설치하고 소부족은 부 단위로 절도사사, 상온사, 사도부(司徒部) 같은 지방 행정 기관을 두어 부를 관리했다. 대부족은 4대왕부로 오원부 · 육원부 · 을실부(乙室部)· 해왕부(奚王部)로 구성되어 있고 북대왕부가 오원부, 남대왕부가 육원부, 을실 대왕부가 을실부, 해왕부가 해인들을 통치했다. 북대왕부(北大王部)와 남대왕부(南大王部)는 군사 문단에 상술했듯이 중경의 군사 업무도 담당했다.

해인은 해왕부에서 전담하지 않고 해왕부 소속 6부, 남재상부의 7부, 소속 미상의 1부로 편성했다. 해인들은 초기부터 복속한 부족으로 요의 가혹한 통치에 반발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바 있으나, 요의 통치가 개선되고 해인을 거란인과 동격으로 대해줌에 따라 거란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소부족은 34개로 되어 있고 절도사가 통제했다.

부에는 하위 행정 단위를 설치해서 미리 - 석렬 - 부의 구조로 조직했다. 미리(彌里)는 부의 최하위 행정 단위로서 거란어로 작은 마을을 뜻한다. 미리의 장관은 갑살융(甲撒狨)이며 미리는 중국의 군현제로 따지면 향에 해당한다. 석렬(石烈)은 거란어로 마을(鄕, 향)을 뜻하며 군현제로 따지면 현에 해당한다. 석렬의 장관은 신곤(辛袞), 아서(牙書)이며 부마다 최소 2개, 많게는 14개의 석렬을 설치했다.[37] 부의 장관인 절도사는 행정 · 군사 · 사법권을, 사도가 민정, 판관은 사법, 상온이 또한 군사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지방의 모든 관원은 조정에서 임명했으나, 부민들의 추대를 받아 절도사가 되거나 유력자들이 절도사의 선출에 개입하고 절도사직을 세습한 사례가 있기에 기본적으로 주요 직책들은 임명직이지만, 예외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부족은 사회적 조직이기도 했다. 요는 유목민들에게 세금과 요역, 군역, 변경 수비 임무를 부과하는 한편, 각 부의 목초지 범위를 설정해주고[38] 부의 유목민들이 목축과 농업을 비롯한 각종 경제 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부의 장관은 일종의 경제 관료이기도 해서 부의 경제를 발달시키고 생산을 독려했으며 민생에 신경썼다. 그래서 상당수의 장관들이 경제 활동을 잘 이끌었다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고, 부민들의 추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는 다민족, 다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각 부에는 한인 포로, 발해인 같은 정주민과 해인 · 몽골 · 돌궐 · 여진인과 같은 비 거란계 유목민들도 함께 살았기 때문에 부는 민족간의 융합을 촉진하고 부에 소속된 소수 민족들의 정체성을 희석했다.


5.2.1. 두하주 & 알로타 & 궁장[편집]


요에는 두하주(頭下州)라는 행정 단위도 있다. 두하주는 국가의 통제를 받는 주현이 아니라 황족, 귀족들이 세운 개인 영지로서 포로로 잡아온 한인과 발해인, 해인을 비롯한 유목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유목도성이다. 규모가 작은 것은 두하군(頭下郡)이라 불렀으며 가장 규모가 큰 곳은 1만호, 평균적으로 수천 호가 거주했다. 두하주와 두하군은 영주가 직접 지배권을 행사하지는 않고 중앙에서 파견한 절도사들이 두하주의 부세를 징수한 후, 일부를 영주에게 지급하는 형태였다.[39]

초기부터 황제권을 강화하던 요 왕조가 두하주를 세운 것은 국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종의 봉건제를 도입해 지역 개발과 국경 방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의도는 적중하여 초원으로 끌려 온 정주민들은 새로운 땅에서 농사를 지어 목초지를 농경지로 바꾸고 황량한 초원에 상공업을 일으켰다. 요가 강성해지면서 두하주는 점점 그 숫자가 계속 늘어나, 연운 16주에 버금갈 정도의 인구를 자랑했다. 또한 두하주는 초원 지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하나의 교역 거점이 되어 무역과 상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두하주는 황족과 귀족을 비롯한 유목 귀족들의 권력 기반이 되어 이들에게 많은 부를 제공했다. 그러나, 두하주의 원래 목적(지역 개발, 방위)이 달성되었다고 판단한 황제들이 유목 귀족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온갖 명목을 붙여 두하주를 몰수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국가로 귀속되어 성종대에 완전히 사라졌다.

궁장(宮帳)은 황제들이 세운 궁(宮)과 황족과 외척들의 부족, 요련 연맹 8부에서 기원한 9개 부족들을 일컫는 횡장(橫帳)을 뜻한다. 먼저 황제는 귀족, 황족들이 두하주를 설치한 것처럼 알로타(斡魯朶)라는 직할령을 두었다. 알로타는 한어로는 행궁을 뜻하고 오르두라고도 부른다. 오르두에는 황제를 수행하는 행정 기관인 도부서사(都府署司)와 군대인 궁위기군(宮衛騎軍), 오르두에 소속된 저장호(著帳戶)와 궁분호가 있어서 황제들은 순행할 때마다 오르두에 머무르고 업무도 함께 처리했다.

도부서사의 장관은 도부서(都府署), 또는 궁사(宮使)라고 부르며 궁사는 오르두의 호구·재정·사법을 담당하고 궁위기군도 지휘했다. 요 왕조는 오르두에도 각 민족의 특성에 맞춰 통치한다는 인속이치의 원칙을 적용해 도부서사를 거란행궁도부서(契丹諸行宮都府署)와 한아행궁도부서(漢兒諸行宮都府署)로 분할하고 각자 오르두 소속의 유목민과 정주민의 통치를 전담케 했다.

황제가 순행 중일 때는 현 황제가 세운 오르두가 소금위(小禁圍)를, 다른 오르두에서 대금위(大禁圍)를 조직해 황제를 호위했다. 요의 황제들은 권력 기반을 다지고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기 위해 즉위하는대로 자신만의 오르두를 만들었고, 그래서 요에는 총 13곳의 오르두(12궁 1부)가 존재했다.

오르두의 전체 인구는 20만 4천호에 장정 4만명으로 그중에서 거란인이 8만 호, 번한호(여진, 발해, 한인)가 12만 4천호이다. 오르두에 속한 주현은 황제와 황후들이 사용하던 궁장의 유지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특별히 할당한 곳으로 황제의 개인 영지이나, 성종 이후로는 점차 조정에 귀속시켜 오르두 소속의 주현은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다음으로 황족과 외척, 요련 연맹 시기의 8부족을 재편성한 횡장(橫帳)은 총 3종류로 요련 연맹 8부가 기원인 요련 9장(遙輦九帳), 황족 4장(皇族四帳), 외척 가문인 소씨들로 구성한 국구 5장(國舅五帳)이 있다. 그중에서 황족 4장은 야율씨의 방계 일족인 횡장(橫帳),[40] 아보기의 선조 균덕실의 자손들이 수장을 맡는 맹부(孟父), 중부(仲父), 계부(季父)의 3방(房)으로 구성되어 있어 1장 3방이라고도 하며 여기에 속한 황족들을 일컬어 사장황족(四帳皇族)이라 부른다.

요련 9장과 황족 4장은 내부적으로 상곤사(詳袞司)와 상온사, 사리사(舍利司) 등의 부서가 정무와 군무를 담당하고 대척은사의 통제를 받았다. 후족(后族)인 국구 5장은 횡장과는 별도로 대국구사(大國舅司)에서 정무를 맡았다. 횡장과 유목민 부의 차이점은 횡장은 개인이 수장직을 세습하지만, 유목민 부는 수장이 임명직이란 점이다.


5.2.2. 속국과 속부[편집]


요에 복속한 유목민(속부)과 속국은 총 53개 부족과 60개 속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면관이 관장했다. 속부는 호적에 등재하지 않고 세금과 부역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대신, 공물을 바치고 군사적 지원을 해줄 의무를 부과받았다. 각 몽골 부족에 상온사나 절도사사를 설치하고 지역에 상위 행정 기관을 세워 통제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절도사들이 인민을 제대로 위무, 관리하지 못하고 불만만 양산해 반란이 빈번했으므로 원래 부족의 수장들에게 관직을 하사하고 자치권을 주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숙여진, 여진 오국부, 달노고, 올야, 철려, 실위, 당항의 부족들도 마찬가지로 자치권을 받고 요에 복종했다.

수장들이 받은 직책은 높게는 왕급이며 낮게는 부사급이다. 태사나 상온의 직책을 받은 이들도 있어 각 부족별로 그 지위가 상이하다고 볼 수 있으며 각 부족의 지배층들에게도 별도의 관직을 하사했다. 이들이 요 왕조로부터 받은 직책과 관인은 권력 기반이 되어주었다.

요 조정은 속국과 속부들과의 조공 무역을 진행해 조공품을 받고 그 대가로 하사품 주었다. 조공 무역은 속국과 속부는 물론, 요 왕조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상업적인 이익과 교류의 확대는 상호 간의 우호 관계로 이어졌고 송이 요에게 세폐를 주고 전쟁을 억제하듯이 요 왕조도 조공 무역을 이용해 속부의 반란을 억제할 수 있었다. 만약, 반란이 일어나 조공 무역으로 들어오는 하사품과 선물, 각종 이익이 끊기면 그 동안 무역의 혜택을 보며 경제 규모가 커진 부족이 수입 감소로 고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밖에도 자연재해가 터지거나 기근이 발생하면 속부를 진휼하고 도움을 주었다.

자치권을 주고 공물만 받으면서 간접 지배하는 것이 꽤나 느슨해 보일수도 있으나, 요 왕조는 통제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생기면 속부에 절도사나 상온을 파견하고 부족민들의 원성을 사거나 반란을 일으킨 부족장은 해임하고 조정에서 절도사를 파견했다. 만약 반란을 일으키면 속부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부족을 해체하는 식으로 통제력을 유지했다. 또한 속부의 영토에 초토사나 통군사 같은 행정 기관과 군사 기지를 지어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유목민들의 반란을 두려워한 요는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유목민 부족장들의 친족을 인질로 받았다. 요 조정은 인질로부터 부족의 사정을 청취하고 민원을 해결해주었으며 수도로 온 인질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관료나 무관으로 기용했다. 또한 돌아갈 때가 되면 높은 관직을 주어서 부족 내부에서의 권위를 높이고 통치의 정당성을 세워주었기 때문에 인질 제도는 여러 부족들에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소속된 유목민 부가 반란을 일으키면 인질은 무조건 죽였다.

만약 전쟁이 나서 요가 군대를 요구하면, 속국과 속부는 무조건 군대를 제공해야 하며 불응하면 요의 토벌을 각오해야 했다. 다만, 서하의 원병 제의를 요가 거절한 사례가 있고 전시에 속국과 속부의 병력을 동원하는 일은 비교적 적었다. 그리고 요는 속국에 대한 내정 간섭과 원병 파견도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요가 내정에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고 반란과 내전 때문에 서하의 원병 요청을 여러 차례 거절해서 서하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일도 있었다.

요 왕조의 속부 통치 전략은 당의 기미주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서 관직 하사와 군사 기관 설치, 조공 무역, 병력 요구 같은 정책은 모두 당에서도 시행하던 것이다.

부족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하고 유능한 절도사들이 각 부족을 잘 안무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요는 소수민족과 속국을 철권으로 통치하고 관용과 자비는 선택 사항으로 여겼다. 그래서 비거란계 유목민, 발해인, 여진인과 같은 요의 소수민족들은 정치적 억압, 사회적 차별, 경제적 수탈에 당하는 일이 많았다. 또한 요 조정은 여러 민족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해서 해인들은 거란인과 동급으로 우대하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인들은 신경써서 대우한 반면, 발해인들에게는 강온양면책을 쓰고 여진인들은 아주 가혹하게 대했다.


5.2.2.1. 몽골인 통치[편집]

위구르 제국이 붕괴한 뒤, 키르기즈가 몽골 초원 지역을 장악하지 않고 예니세이로 돌아가 버리자, 힘의 공백이 발생해 아르군 강과 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실위계 민족들이 몽골 초원으로 이주하기 시작하고 일부 투르크계 부족들이 초원으로 들어왔다. 삼림 수렵 민족으로 살던 실위인들은 상대적으로 자원이 풍부한 초원에 정착한 뒤부터 유목민으로 변화해 갔다. 이들 중에 타타르를 비롯한 일부 부족들은 연맹을 구성해 세력화했으나, 요에 맞설 수준은 되지 못해서 요 태조와 태종은 몽골 초원으로 원정해 몽골인들을 복속시키고 위구르 제국의 고토를 차지했다.

원래 몽골 초원의 주인이던 위구르인들은 대다수가 서부와 남부로 이주했으나, 본토에 남은 위구르인들도 일부 존재했다. 이들은 요대 초기의 몽골 원정 중에 포로로 잡혀 부에 편성되거나, 요 왕조에 의탁해 속부가 되었다. 성종대에 새로이 설립한 34부 중, 설특부(薛特部)가 위구르인으로 편성한 부족이며 위구르인 속부는 요사 영위지에 기록된 회골부(回鶻部)이다.

982년, 성종은 초원에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 초원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했다. 1003년에는 위구르 제국의 중심지였던 카툰성을 수축하고 진주로 개칭한 뒤, 인근에 유주 · 방주를 설치하고 건안군 절도사사를 세워 톨라 강과 오르콘 강 유역을 관할하도록 했다. 3개 주 중에서 톨라 강 하반의 진주가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며 많은 수의 병사와 주민들이 거주했다.[41]

요는 몽골계 유목민들의 통제와 방비를 위해 흥안령 산맥(興安嶺. 싱안링 산맥) 서쪽에서 몽골 칠렝긴 톨고이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700 ~ 1,000km)의 장성을 건설하고 곳곳에 군사 기지를 세웠다. 소위 칭기즈칸 장성이라 알려진 성벽은 동쪽으로는 에르구네 강에서 시작해 오논 강 남쪽에 이르며 성벽 높이는 1 ~ 2m, 해자는 3 ~ 4m이다. 다만, 칭기즈칸 장성은 금계호라 부르는 금국의 영북로 방어선과 구간이 겹치기 때문에 요대의 장성과 군사 기지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요와 몽골 부족들간의 관계는 우호와 적대가 섞인 매우 복잡한 애증 관계였다. 몽골의 각 부족들은 속부로서 공물을 바치고 요 조정은 국경 곳곳에 각장을 세워 조공 무역을 진행하고 하사품을 내렸다. 여러 몽골 부족들은 요와 교류하면서 획득한 선진 기술과 문화를 흡수하여 내부 발전에 활용하고 일부는 요가 멸망하는 순간에도 충성심을 유지해 야율대석을 따라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면서도 몽골 부족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 통제에 저항하고 요 조정을 근심케 했다. 이는 요 왕조와 몽골 부족간의 불편한 감정 외에도 양자 간의 입장 차이가 작용했다. 요 왕조 입장에서는 유목민들의 통제를 위해 각 부족의 영유지를 정해놓고 이주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좋지만, 유목민들 입장에서는 자연 재해나 지역의 자원 고갈, 부족 간의 갈등 문제 때문에 이주의 자유가 필요했다.


5.2.2.1.1. 오고 · 적렬부[편집]

몽골 오고부(烏古部)는 실위계인 오소고(烏素固)의 일파로 추정하며 해륵수(海勒水. 현대의 아르군 강. 한어 : 해랍이하. 海拉爾河) 일대에 거주했다. 아르군 강 이북에 거주하는 이들을 삼하(三河) 오고부, 아르군 강 이남에 거주하는 이들은 오고부라 불렀다. 오고부의 영토 서쪽에는 적렬, 동쪽에는 실위, 동남에는 거란이 거주했다.

오고부가 요에 신종하게 된 것은 요 태조 신책 4년(919년)에 황태자 야율배가 오고를 정벌하면서부터였으며 이때 오고부는 14000명의 포로와 많은 물자를 약탈당한 끝에 일부는 직할 부족으로 편성되고 나머지는 요에 복속하고 조공을 바치는 속부가 되었다. 오고날랄부(烏古涅剌部)과 도로부(圖魯部)가 포로로 끌려온 오고인들로 구성된 부이다. 통제 강화를 위해 요 조정은 오고와 적렬에 절도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요가 비옥한 오고의 초원에 인민들을 이주시켜 오고부의 땅을 개척하고 오고부가 쓸 방목지를 줄여 버리자, 오고부는 이때부터 요의 개척과 토지 침탈에 저항하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성종대에 오고의 대규모 반란을 진압한 뒤에는 통치력을 개선하고 반란을 막기 위해서 포로로 잡아온 오고부의 인민들을 알돌완(斡突盌) 오고부로 편제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오고의 부족들을 진휼했다.

적렬부(敵烈部)는 케룰렌강 하류에 살던 유목민족으로 8부로 구성된 연맹이며 오고와는 친척으로 간주받았다. 요는 성종대의 반란 이후, 요는 사로 잡은 적렬인 포로들을 북적렬부(北敵烈部)와 질로적렬부(迭魯敵烈部)로 편성하고 통제를 강화했다. 알돌완 오고부와 북적렬부, 질로적렬부는 모두 요의 서남과 북부 국경 지역을 방어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적렬이 어떤 민족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여러 중국의 사서에서 그들을 정령(丁零) · 고차(高車) · 철륵(鐵勒)의 분파로 보았기에 투르크계일 가능성이 높다.

요 태조가 오고를 정벌할 때, 적렬도 함께 정벌했다. 930년(요 태종 천현 5년)에 적렬은 요에 항복했으나, 이후로도 계속 요에 반항했다. 이 때문에 성종은 994년(통화 12년)에 소호련과 소달람에게 적렬 경략을 명했다. 소호련은 적렬부의 영토에 진주 · 방주 · 유주의 3개 성을 세워 여러 적렬 부족들을 통제하고 위무하는 한편, 몽골 초원에 산재한 조복 부족들의 반란에 대비했다. 이러한 조치가 효과를 내서 조복의 여러 부족들이 비로소 요에 신종하고 오고, 적렬, 조복에 대한 통치력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요 도종 함옹 4년(1068년)에는 오고 적렬 통군사를 설치해서 오고, 적렬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

마고사의 난 이후, 요는 몽골 초원에 대한 통제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고, 적렬부가 초원의 반항적인 부족들과 연계하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1096년(요 도종 수창 2년)에 오고, 적렬 양대 부족을 오납수(烏納水. 아마도 눈 강으로 추정) 유역으로 이주시켰다. 이후에 야율대석이 가돈성으로 와 인근 주의 지방관들과 부족장들을 소집하자, 오고부와 적렬부의 일부가 그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야율대석을 따라가지 않은 나머지는 금에 항복했다.


5.2.2.1.2. 조복[편집]

요는 오르콘, 툴라, 케룰렌 강 일대와 인산 산맥 남부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을 모두 조복(阻卜)이라 일컬었으며 북조복, 서조복, 조복찰랄(阻卜札剌)로 분류했다. 북조복과 서조복은 몽골 초원의 제세력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조복찰랄은 다찰랄부(茶札剌), 즉 잘라이르 부족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는 조복의 부족장들을 대왕이나 절도사, 태사, 상온으로 임명하고 초토사로 이들을 관리했다.

몽골 초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케레이트는 [42] 한어로는 극렬(克烈)이라 하며 요는 그들을 조복, 또는 북조복이라 불렀다. 케레이트라는 명칭은 검다는 뜻을 가진 투르크어 KARA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며 케레이트 부족의 피부가 다소 어두웠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추정한다. 케레이트는 세력이 큰 부족으로 도종대에 연맹 수장인 마고사(磨古斯)가 여러 몽골 부족을 규합해 수차례에 걸쳐 요의 진압군을 격파하고 요의 몽골 통치력을 붕괴시킨 바 있다. 마고사는 칭기즈칸의 시대에 케레이트를 이끌었던 옹칸(王罕)의 조부인 마아홀사(馬兒忽思), 즉 마르쿠즈 부이룩 칸으로 추정한다.

나이만은 투르크계에 속하며 한어로는 내만(乃蠻)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서쪽으로는 이르티시 강, 동쪽으로는 타미르 강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한 강대한 세력으로서 이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신앙해서 기독교 성직자들로부터 지식을 전수받고 천산 위구르나 탕구트 같은 선진 세력과의 교류를 통해 위구르 문자를 받아들이는 등, 다른 몽골 부족들보다 문화 수준이 높았다. 요 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금국과의 거리가 멀고 서요와는 가까워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몽골 부족들이 요의 관인을 금에 바치고 금의 관직과 관인을 받을 때도 계속 서요에 신종했다. 나이만은 1175년(서요 숭복 11년, 금 대정 14년)까지 서요에 충성하다가 1176년부터 서요의 관인을 금에 바치고 금국에 신종했다.

바이칼 호 남쪽의 셀렝게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메르키트는 목축과 수렵에 종사했으며 일부 부족민은 농사도 지었다. 메르키트는 호전적인 부족으로 유명해 요가 멸망하고 초원의 통제가 풀린 뒤부터는 여러 몽골 부족들과 상쟁을 벌였다. 케레이트, 나이만과 마찬가지로 메르키트도 부족민 중 일부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신앙했다.

초원 동부의 타타르는 키르기즈인들이 9성 타타르의 나라(Toquz Tatar Eli)라고 부르거나 송의 사신 왕연덕(王延德)이 구성 달단(九性 韃靼)이라 부른 사실로 볼 때, 연맹을 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에서는 타타르를 조복의 일파로 간주했으며 송에서는 타타르를 달단이라 칭하거나 백달단(白韃靼)이라 부르는 옹구트 부족과 구분지어 흑달단(黑韃靼)이라 불렀다.

옹구트는 내몽골 음산 산맥(阴山山脉. 인산 산맥) 대청산(大靑山. 다이칭산) 북부 지역에 살았다. 백달단, 또는 숙달단(熟韃靼)이라고도 불렸다. 막북에 거주하는 타타르를 비롯한 몽골 부족들은 반대로 흑달단, 또는 생달단(生韃靼)이라고도 불리었다. 요는 유목민 약탈자들을 막고 서하 방면 국경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 위주에 요새(위주새 衛州塞)를 세우고 옹구트족에게 요새를 지키고 위주의 통로를 보호하는 의무를 부과했다.

타타르와 옹구트, 운기라트 부족은 영토 안에 비단길의 하나인 초원길이 지나고 있어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취했다. [43] 또한 이들은 지리적으로 선진국인 송, 요, 서하와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다른 몽골 부족들보다 기술력이나 문화 수준이 높았고 부족 내부에는 농사를 짓는 이들도 일부 존재했다. 또한 타타르, 옹구트, 운기라트는 거리가 가까워서 다른 부족들에 비해서는 충성심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가깝다는 점이 독이 되기도 했는데, 금군이 상경을 함락하고 여러 몽골 부족들에게 신종을 요구했을 때에 가장 먼저 항복하고 요의 관인을 바친 부족들이기도 했다.[44] 이 조복 부족들 또한 오고, 적렬부처럼 일부는 야율대석을 따라 서쪽으로 이주하고 나머지는 금에 항복하거나 독립했다.


6. 세금 제도[편집]


요 왕조는 이원 지배 체제를 구축한 만큼, 유목민과 정주민에 대한 세금 제도가 달랐다. 건국 초기에는 초보적인 수준에서 세금과 공물을 징수했으나, 요 태조의 지시를 받은 한연휘가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조세 제도를 제정하면서 체계적으로 세금을 걷기 시작했다. 태종대에는 당과 발해, 오대의 제도를 참고해서 제도를 재정비하고 효율을 높였다. 성종은 조세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고 토지와 재산을 조사해 세금 대장을 새로 개정했다. 이 과정에서 세금 부담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인민의 원성이 높자, 성종은 세금을 감면하고 지역별로 조세와 요역을 형편에 맞게 부과했다. 이로써 국가의 조세 제도가 완비되었다.

조세는 지역마다 세율을 다르게 책정했다. 강제 이주당한 발해인들이 많이 사는 동경도는 토지세를 감면해주고 관영 시장에서 장사할 때도 세금을 걷지 않았다. 상경도와 중경도는 정주민들의 신분과 지위, 재산 수준이 제각각이라 세금 부담이 모두 상이했다.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전한 연운 16주에서 보내오는 막대한 세금은 국가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로서 정치 · 경제 · 군사 · 문화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전반적으로 요의 세금 부담은 송보다 낮은 것으로 추정된다. 송이 보내주는 세폐 30만냥(흥종 이후 50만으로 증액) 덕에 재정에 여유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역적으로는 무역세, 상세 면제에 전매제도 느슨하고 부세도 낮은 동경의 세율이 제일 낮지만, 상경과 중경도 세금 부담이 비교적 적은 편이고 가장 조세 부담이 높은 남경 지역도 한인들이 송으로 도망치는 일이 없어서 역시 세 부담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대와 송의 세금 제도인 절변(折變)도 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절변은 규정된 세금(현물이나 화폐) 대신에 대체품을 받는 것인데, 아래의 전부(田賦) 문단에 서술한 대로 양세를 현물로 대납하는 것도 절변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절변은 규정된 세금을 바치기 어려운 지역민들의 호소를 중앙 정부가 받아들여주거나 중앙의 편의에 따라 정하는 일이 많은데, 요 왕조에서 지역별로 절변을 허용한 곳으로는 남경과 서경이 있다. 남경에서는 염철세를 비단으로 대납하고, 서경에서는 양세를 곡물로 대납했다. 명신 야율말지가 개원군 절도사로서 인민의 세 부담을 줄여준 것도 개원군의 주민들이 동전 대신에 납부하던 곡물의 가치를 종전의 5전에서 6전으로 증액해준 것이다.[45]

정주민에게는 토지세인 전부(田賦)와 노동력 징발인 요역(徭役)을 부과하고 정기적으로 괄전(括田. 장량(丈量) 토지 조사)과 괄호(括戶. 인구 조사)를 실시해서 조세 공정성과 효율성을 제고했다. 전부는 당과 오대의 제도를 따라 양세법(兩稅法)을 적용해 여름과 가을에 하세와 추세를 징수했으나, 중국에서처럼 완전 전납은 아니어서 현물로 세금을 바치는 것도 허용했다. 또한 영토가 광대한 요는 북부와 남부의 기후는 물론이거니와 작물의 생장 속도도 달라서 특정 지역의 환경에 맞춰 곡물을 징수하면 다른 지역에서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후당의 제도를 적용해 보리와 밀, 완두의 납부 기한을 6월부터 9월까지로 정했다.

농토는 공유지인 관전(官田)과 사유지인 사전(私田)으로 분류하고 사전은 무(畝) 단위로 계산해서 토지세를 징수했다. 관전은 다시 둔전(屯田)과 한전(閑田)으로 나뉘는데, 둔전에서 징수한 둔전미(屯田米)는 창고에 저장해 비상시에 대비하고 군량미로 썼으며 함부로 대출해주지 않았다. 한전은 유민들을 정착시켜 버려진 땅을 개간한 토지로서 처음 경작하는 유민에게는 토지세를 몇 년간 면제해주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경작권을 인정하고 전부를 징수했다. 한전을 경작하던 유민이 추가로 한전을 빌리면 소작료를 걷었다.

요역은 한제(漢制)를 따라 재산을 기준으로 등급을 정하고, 조세 공정성을 위해 정기적으로 재산 조사와 호구 조사를 실시한 뒤에 부과했다. 정주민들이 부담한 요역은 매우 다양해 역체(驛遞) · 마우(馬牛) · 기고(旗鼓) · 향정(鄕正) · 청예(廳隸) · 창사(倉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로 화물과 세금 운송(역체), 중요 화물 보관(창사), 치안 유지(향정), 관청의 공공 사업(청예), 하천 정비와 도로 공사 같은 일이 많았다.

한인과 발해인들로 경주군과 금군을 편성한 예로 보아 정주민들도 군역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나, 군역은 주로 유목민들이 부담하고 정주민들은 주로 요역을 담당했다. 당시 요에서는 기병 1명당 4명의 봉족(奉足)을 할당해서 정주민으로서 봉족의 의무를 부담하는 이들이 존재한 것으로 파악된다.

요 왕조의 잡세에는 염 · 철세, 주세 · 농기구세 · 가죽세 · 비단세 · 의창속(義倉粟)과 상세(商稅) 등이 있다. 다른 중국 왕조와 마찬가지로 요 왕조는 염 · 철과 술에 대한 전매를 실시하고 염 · 철세와 주세로 막대한 세수를 확보했다. 그래서 요 왕조에서 염 · 철세와 주세, 상업세의 수취는 매우 중요했다.

효율적으로 잡세를 징수하기 위해 조정은 5경에 전운사와 탁지사를 비롯한 재정, 잡세, 상업 등을 담당하는 관청을, 각 주현에도 상세, 염 · 철세, 주세를 담당하는 관청을 설치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상경은 염철사(鹽鐵使)와 도상세원(都商稅院), 중경은 탁지사(度支使), 동경은 호부사(戶部使)와 전운사(轉運使), 국원(麴院), 남경은 도국원(都麴院)과 상세도점검(商稅都點檢), 주방사(酒坊使), 서경은 상세점검(商稅點檢)을 설치하고, 주현에는 도감(都監)과 염원사(鹽院使)와 철원사(鐵院使) 같은 원사(院使)를 설치했다.

목축을 업으로 삼는 유목민들은 매년 보유한 가축의 수에 맞춰서 가축을 징수하고 노동력을 징발했다. 요 왕조의 유목민 세제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대의 원 왕조에서 보유한 가축의 1%를 징수하는 가축 추분세 제도를 운영한 바 있기에 요 왕조도 그렇지 않았나 추측한다.

부에 소속된 유목민들은 주로 교량과 도로 건설, 하천 정비 등의 공사를 하는 요역을 수행하고 군역도 부담했다. 군역은 유목민들에게 가장 부담이 큰 역으로 전시가 되면 스스로 무기와 말을 준비해 절도사를 따라 전장에 나서고, 평시에는 변방을 수비했다. 군역을 질 수 없는 노약자는 마을에 거주하면서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했다.

유목민들도 정주민들처럼 잡세를 부과받았다. 절도사들이 조정에 매년 진봉하는 안장과 말, 진귀한 재화들은 모두 유목민들에게서 수취한 것이어서 유목민들은 가축세와 요역 외에 별도로 사치품과 가축을 납부해야 했다. 또한 조정은 급하게 재원이 필요하면 귀족과 관료, 황족들의 재산을 헌납받고 경조사, 황제와 태자의 결혼 예물, 혼수품, 결혼 비용, 능원 조성 비용, 관료 하사품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이 조정에 헌납하는 세금은 모두 부와 장원에 소속된 인민들에게서 징수하는 것이어서 지배층들에게 ‘특별세’를 걷는 것은 인민에게 부가세를 징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속국과 복속한 유목민들에게는 공물을 징수했다. 조복(阻卜)은 말과 낙타 같은 가축과 담비, 날다람쥐 가죽을 공물로 바치고, 여진 오국부(烏國部)와 오야부(烏野部)는 가축 · 진주 · 가죽 · 인삼 · 사금 · 밀랍 · 노예 등을 바쳤다. 오외부(烏外部)와 몽골 오고부(烏古部)는 담비와 날다람쥐 가죽을 바쳤으나, 생산량이 적어 성종 통화 6년에 소와 말로 대체해줄 것을 청원하여 그 때부터 소와 말로 대납했다. 천산 위구르는 옥 · 진주 · 호박 같은 보석과 마노 세공품, 금속 공예품 · 모직물 · 유향 · 가죽을, 고려는 직물과 인삼 · 종이 · 먹 · 술 · 공예품을 조공했다.[46]

요 왕조는 한인 왕조에 준하는 정교한 조세 제도를 구축했으나, 문제점이 많았다.

주현에 거주하는 자영농은 국가에 토지세만 부담하면 되지만, 소작농들은 토지세 뿐만 아니라 소작료도 부담해야 했다.[47] 귀족과 황족의 개인 영지인 두하주에 거주하는 두하호와 불교 사찰에 거주하는 사원호(寺院戶)들은 국가와 영주 모두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세금을 두 번 낸다고 해서 '이세호(二稅戶)'라고 불렸다. 일반 소작농들은 나름대로 재산을 모아 자영농으로 성장할 수 있고 두하주는 국가 정책으로 일반 주현화해서 두하호들도 평민이 되지만, 사원호들은 요 조정의 불교 우대 정책 때문에 요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이중으로 세 부담을 져야 했으며 최종적으로 금 세종의 이세호 해방령이 있기 전까지 계속해서 사원과 국가에 조세를 바쳤다.

요역 제도의 경우, 지역별로 요역 부담이 불균형하고 정주민의 요역이 유목민보다 더 과중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부담하는 정역(正役)외에도 불규칙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부과하는 잡역(雜役)도 많았다. 전시에는 세금이 오르고 잡역 징발도 늘어나서 요의 인민들은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이중으로 부담을 졌다.

게다가 요의 영토는 매우 광대해 물품 운송과 가축 제공, 화물 보관, 치안 유지 등의 요역은 그 역이 과중하고 교통의 요지나 행궁이 머무르는 지역은 그야말로 부담이 극심해 파산을 해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역들은 후대의 명 왕조 시절에도 문제가 되던 것이었으니, 그 부담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요역 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한 일부 관료들이 개혁을 실시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마인망(馬仁望)은 송산 현령(松山 縣令) 시절에 요역 부담이 과중한 송산현(松山縣)의 요역을 줄여주고, 남원 추밀사(南院 樞密使)를 역임하면서 인민들에게 돈을 걷는 대신에 노동자를 고용해 요역을 맡기는 모역제(募役制)를 시행해 요역 부담을 줄여주었다.

삼하 현윤(三河 縣尹) 유요는 공사를 장인들에게 맡겨 백성들의 요역 부담을 감면하고, 요역 징발 과정에서 재산만을 기준으로 삼는 원칙을 적용해 인민을 3등급으로 편성하고 공평하게 요역을 부과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유요는 가문의 위세와 평판을 이용해 기득권층과 부호들이 요역을 회피하는 폐단과 관리들이 양민을 혹사시키고 재산을 강탈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 개혁책들을 전국적으로 확대되지 못하고 지역 단위의 개혁으로만 남았다는 한계가 있고 요의 국력이 이미 쇠퇴한 시점에서 시행한 것이라서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특히나 마인망의 모역법(募役法)은 요의 인민들이 버거워하던 군역과 요역 부담을 낮출 수 있는 것이었는데, 확대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긴다.[48]

명 왕조와 비교하자면, 명은 이갑제에 기초해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작성하여 세금을 걷는 조세 제도가 붕괴하여 서민층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기득권층은 관료, 서리와 결탁해 궤명자호(詭名子戶), 궤명기산( 등의 방법으로 세금을 회피하고 자신들이 납부해야할 것들을 서민들에게 전가했다. 이 상황에서 개혁적인 지방관과 의식 있는 신사들이 양보와 타협에 기초한 개혁을 실시해 사회적 모순을 완화하고 조세 공정성을 확보하려 했다.

균요법(均徭法), 보갑법(保甲法), 관수관해, 강남의 징일법, 균전균역법(均田均役法), 하북의 십단법(十段法) 등이 명대 중, 후기에 시행한 대표적인 개혁책들이다. 이러한 지역 단위의 개혁이 이뤄지고 사회적 공감대가 생겨나면 여론의 영향을 받은 조정에서 여러 개혁책들을 비교, 분석하고 단점을 보완해 전국적으로 시행했다. 이렇게 전국화된 제도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강남의 징일법을 보완해 만든 일조편법(一條鞭法)이다. 반면, 요 왕조는 지역 단위의 개혁만 일부 이뤄졌고 황제들이 개혁안들을 거부하거나 체제 정비를 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중흥을 이루지 못하고 멸망했다.

군역의 경우, 원래 공평하게 교대로 복무하게 되어 있지만, 어쨌거나 일을 해야 할 장정들이 군역으로 빠져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목축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혔다. 게다가 전민 개병제를 채택한 요는 군역 부담자가 무기와 갑주, 군마, 활, 화살 등을 직접 자비로 갖춰야 해서 군역 부담이 높았다. 또한 군사 안보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서북과 동북의 국경 지역은 전쟁이 잦고 물자와 인력을 보내기가 까다로워서 군역을 지러 온 이들이 파산하는 일이 빈발해 민생과 국가 안보에 큰 문제가 되었다.

원래 국경 수비 군역을 부담하던 부유층들이 파산해서 군역 수행을 못하게 되자, 요는 중산층과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군역을 징발해 서북과 동북 국경으로 보냈다. 국경 방위를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대체 인력을 징발한 것이었지만, 부유층들조차 파산하는데 그보다 재산이 적은 이들에게 군역을 부과했으니 파산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흥종대부터 군역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하고 수많은 서민들이 군역을 지다가 파산하는 일이 속출했다.

군역 문제를 인식한 변경의 지휘관들과 여러 관료, 지식인들이 국경을 재설정해서 수비할 지역의 범위를 줄이고 유목민들에 대한 요역 · 군역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몇 차례에 걸쳐서 개혁안들을 상주했으나, 당시 황제였던 흥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주요 군역 부담자인 거란인 평민들과 중산층들이 몰락해서 요의 군사력이 약화되고 민생이 어려워졌다.

잡세의 경우, 빈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의창을 설치해놓고는 농민들에게 의창속이란 부가세를 걷어 의창의 운영 비용을 충당하고, 전비와 군마를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불시에 부호들의 마차와 말을 징발하는 문제가 있었다. 본래 의창은 국가가 조세로 걷은 곡물의 일부를 저장해놓고 빈민 구제와 가뭄 피해 원조에 쓰거나 지역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곡식을 조금씩 모아 운영하는 것인데, 의창의 곡식을 충당한다는 명목으로 조세 외에 별도로 의창속을 걷는 것은 국가가 빈민 구제 같은 복지 부담을 인민에게 전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마차와 말을 징발하는 것은 정해진 액수도 없고 형편에 따라 수시로 정하는 것이라서 인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 외에도 조정에서 급히 재원이 필요할 때마다 각 지방에 은패천사(銀牌天使)를 파견해 인민의 재산을 강탈하는 폐단이 있었다. 은으로 된 패(銀牌)를 차고 다닌다고 해서 은패천사라 불리는 이들은 지방 관료와 속부의 부족장들에게 특별세 납부를 강요하고 제대로 양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들에게 장형을 가했다. 심지어는 죄 없는 부호들의 재산까지 마구잡이로 강탈해서 원성이 높았다. 은패천사들 중에서 가장 악질은 여진족들이 사는 동부 지역으로 가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여진족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특산물과 재산을 강탈하고 부족장들에게 모욕을 주었으며 여진의 땅을 방문할 때마다 미녀를 요구하는 등, 온갖 패악질을 부렸다. 이러한 은패천사들의 만행은 여진족들의 반요 감정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요가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개선된 폐단으로는 타초곡(打草穀)이 있다. 타초곡은 말 그대로 가축을 먹이기 위한 풀과 군인이 먹기 위한 식량을 빼앗는다는 것으로서 요 왕조는 군대를 일으킬 때면 군인들에게 타초곡을 허가해 민간인들에게서 물자를 강제 징발하거나 약탈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날 때면 타초곡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특히나 요 태종이 개봉을 함락하고 난 후에 허락한 타초곡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켜 후진의 한인들이 요에 저항하게 만들고 요군의 총퇴각을 야기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타초곡은 조정 내부에서도 곧잘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성종대에 인민에 대한 타초곡을 금지해 인민들의 불편을 없애 주었다. 그러나 성종의 금령 이후에도 몇 차례 타초곡을 행하는 일이 있어 폐단을 완전히 근절하지는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리하자면, 요는 송보다 세금이 적은 편이었으나 갑작스러운 세금 징발과 과중한 부역, 정주민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성종대에는 여러 차례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세금 부담을 낮춰주어서 이런 문제점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흥종대부터 이러한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사회적 모순과 세금 부담이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흥종은 여러 관료, 인사들이 세금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책을 올리는데도 사안을 무시해 해결할 시기를 놓쳐버렸으며 흥종의 뒤를 이은 도종과 천조제는 사치에만 몰두하여 요의 쇠퇴를 앞당겼다.


7. 경제[편집]



7.1. 농업 경제[편집]


유목민이라 농업과는 거리가 멀 것 같지만, 요는 연운 16주를 얻기 이전의 연맹 국가 시절부터 농사를 짓고 직조 기술과 경작 기술을 습득하는 등, 자체적으로 농업을 시작했다. 또한 곳곳에 한성(漢城)을 세워 농사 경험이 풍부하고 기술력이 높은 한인 유민과 포로들을 정착시키고 농사를 짓게 하여 한인의 선진 기술과 농기구, 좋은 품종을 흡수하고 농지를 개척했다. 이후, 인구가 많고 문명이 발전한 발해와 연운 16주를 정복한 뒤부터는 농업이 엄청나게 발전하고 산업에 미치는 영향도 급증했다. 그래서 요의 황제들은 농업을 중시하고 농민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농업과 목축업의 이중 경제가 조화를 이루게 하고 상호 교류와 발전을 유도했다.[49]

태종은 농번기이니 요양 순행의 규모를 줄여달라는 요청을 듣고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환도했으며 남경으로 순행할 때는 조서를 내려 호종하는 자들이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태종은 석중귀를 치기 위해 병력을 징발할 때, 농작물을 훼손하고 조세를 감소시키는 자는 군법으로 처리하겠다고 령을 내렸으며 마을의 유력자들을 촌장으로 임명하고 부호들의 남는 땅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빈민을 구제했다. 임종 직전에도 태종은 개봉에서 곡식을 빼앗고 약탈을 용인한 것을 후회했으니, 그가 진정으로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경종은 송 · 요 전쟁으로 인해 들판이 황폐해지고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자, 982년에 조서를 내려 조세를 1년간 면제하고 인민들에게 주인 없이 버려진 농토를 임의로 경작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조세를 걷었다. 그리고 원주인과 경작자간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땅 주인이 5년 이내에 돌아오면 토지의 2/3를, 10년 이내에 돌아오면 절반을, 15년 이내에 돌아오면 1/10을 돌려주도록 했다. 경종의 이 조치는 농지가 황폐해지지 않게 하고 땅이 없는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한 좋은 조치였다.

성종과 예지황후는 이전의 황제들보다 농업을 훨씬 더 중시해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여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부세를 정비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동시에, 유민들을 정착시키고 상업을 보호했다. 성종이 세운 이 정책은 도종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요의 농업 생산력은 정점을 찍었다. 이러한 통치자들의 중농 정책은 요의 관료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서 대부분의 관료들은 농사와 양잠을 백성들에게 권장하고 가르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았다.

통치자들의 중농 정책과 보호 속에서 농민들은 열심히 일하고 농업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그 덕분에 요의 곡창은 매우 풍족해졌다. 경종 때는 북한에 조(좁쌀. 粟) 20만 석을 원조할 만큼 비축한 곡물이 많았고, 성종 시기에는 국경 지역의 춘주(春州)에서 쌀 1말을 6전에 살 만큼 물가가 낮았다. 그리고 서북 지방과 동경도에서는 20 ~ 30만 석에 달하는 곡물을 저장했는데, 이는 전쟁이 자주 벌어져도 충분히 보급할 수 있는 양이었다. 추가적으로 국경의 여러 주에는 화적창(禾積倉)을 설치해서 햇곡식과 묵은 곡식을 바꾸고 백성들에게 낮은 이자로 곡물을 빌려주었다.

요에서 자라는 농작물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농민들은 조 · 보리 · 벼 · 기장 등의 곡물과 여러 가지 채소, 과일을 재배하고 위구르에서 수박과 완두를 들여오는 등, 송과 발해, 위구르를 비롯한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작물과 좋은 종자를 도입했다. 이렇게 들여온 작물들은 초원 지역의 기후에 적응해서 새로운 특성을 발현했으며 요의 농민들은 새로운 작물과 품종을 키우면서 자신만의 농사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요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작물은 조(粟)이나, 지역별로 주로 재배하는 작물은 상이하다. 상경도를 위시한 북부 지역에서는 기장을 주로 심고 조, 콩, 마를 재배했다. 그래서 거란인과 북부 지역의 불교 승려들은 손님을 대접할 때 기장죽을 내놓고, 해인들도 기장을 주식으로 먹었다. 반대로 연운 16주를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는 주로 밀과 벼를 재배하고 보리, 조, 수수, 뽕나무도 심었다.

최종적으로, 농업은 풍부한 식량과 각종 농산물을 생산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고 요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확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목 경제 일변도의 단조로운 경제 구조를 보완해 주었다. 그리고 농민과 유목민의 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생산이 늘어나면서 상공업도 함께 발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해서 요는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고 210년간 정권을 유지하면서 송과 서하와의 삼각 구도에서 장기간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7.1.1. 상경도와 중경도의 농업 경제[편집]


상경도를 비롯한 초원 지역의 농업은 상술한대로 연맹 국가 시절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거란인들이 처음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대하씨 연맹부터였으며 요련씨 연맹 시절에는 야율아보기의 조부인 균덕실과 숙부 술란이 각각 농사 기술과 직조 기술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야율아보기는 형제들과의 내전을 끝내고 요를 세운 뒤부터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고 세금을 감면해 농사를 장려했다. 건국 이후에는 북대농올부(北大濃兀部)를 2개 부로 분할하고 오곡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여러 유목민 부들이 이를 본받아 농사 짓는 법을 배웠다,

요 태조는 한인 포로들을 초원 지역에 이주시켜 한인의 선진 기술과 좋은 농작물 품종을 도입하고 토지를 개간했으며 926년에 발해를 무너뜨린 뒤에는 많은 수의 발해인들을 상경 지역에 이주시켜 농업 인구를 늘리고 개발을 가속화했다. 후대의 청 왕조도 그랬지만, 한인과 발해인 포로를 잡아와 정착시킨 것은 기술력이 떨어지는 거란인으로서는 농경에 부적합한 초원을 개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요 왕조가 강제 이주 및 정착을 통해 지역 개발과 기술 흡수라는 일석이조의 성과를 거두려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요 태종은 아르군 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 구곤석렬(甌昆石烈)을 정착시키고, 수초가 풍부한 오고의 땅에 구근돌려(毆蓳突呂) · 을사발(乙斯勃) · 온납하랄(溫納何剌)의 3개 석렬을 이주시킨 뒤에 해리하(諧里河)와 케룰렌 강(당대 명칭 : 여구하. 臚胊河) 인근의 토지를 분배해주고 농사를 짓게 했다. 이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목민들에게 농업을 장려한 일이다.

지속적인 농업 장려와 이주 정책을 통해 상경도의 농업 경제가 발달하자, 거란인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반농 · 반목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또한 토지가 비옥하고 수초(水草)가 풍부해 농경과 목축 두 가지 모두에 적합한 상경 지역에 정부의 개발 정책이 더해지면서 상경은 농업이 빠르게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농업과 목축업이 공존하는 농 · 목 복합 지역이 되었다.

반농반목으로 전환하긴 했지만, 해인들 만큼 정주화의 정도가 높지 않은 거란인과 여러 유목민들은 부족 내부에 농경 기술을 가진 이들이 부족이 임시로 정주할 때마다 농사를 짓거나 다른 목초지로 떠날 때, 씨앗을 뿌리고 다시 돌아올 때 수확하는 식으로 농작물을 생산했다. 또한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실위계 부족 중에는 남실위인들처럼 농사를 지는 부족들이 존재했으나, 기후가 너무 춥다보니 수확량은 매우 적었다.

상경도 농업의 발전에는 종교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상경도의 불교 승려들과 사찰들은 동 시기 유럽의 수도원처럼 빈민 구제와 인민 교화 외에도 개간과 농경에 힘쓰고 유목민과 지역 농민들에게 농사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이러한 종교계의 활동은 지역 개발과 상경도의 농업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상경도의 광대한 초원 지역은 두하주와 같은 유목도성과 여러 거점 도시의 정주민들, 일부 유목민들이 농사를 짓거나 국가가 직접 둔전을 운영하고 곡식을 저장했다. 중앙 정부는 둔전을 중심으로 몽골 초원과 서남부 국경 지역에 농업을 일으키고 몽골인들에게 농업 기술을 전수했다. 성종기에 활동한 야율고욱(耶律古昱)의 경우, 지방 장관으로서 둔전을 운영하며 유목민들에게 농경, 식수(植樹), 직조 기술을 전수해주고 지방 행정 항목에 상술했듯이 야율고욱외에도 여러 절도사들이 지역민들에게 농경과 직조, 공예 기술을 가르치고 농업과 양잠을 장려했다.

또한 성종 초에는 위구르 제국이 세운 가돈성의 폐허에 진주(鎭州)를 설치하고 발해 · 여진 · 한인 등의 700여 가구를 진주 · 유주(維州) · 방주(防州) 세 곳에 이주시키는 등, 변경 지역의 개발에도 힘썼다. 성종은 야율당고에게 명해 케룰렌 강과 진주 인근에 둔전을 만들고 서북 지방 수비군에 군량을 공급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상경도에서 자체적으로 식량을 조달할 수 있으면 군량 운송에 따른 손실과 노동력 소모를 막을 수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 나온 정책이었다. 성종의 명을 받아 서북으로 간 야율당고는 15년 동안 내정에 힘써서 수십만 석의 곡물을 비축하고 군량 공급 문제를 해결했으며 막북 지방에 농업의 기초를 세웠다. 요 왕조가 힘써 개발한 이 지역들은 원대까지도 주요 식량 생산지의 하나였으며 초원 통치의 핵심인 진주에서는 몇 전만 주고도 곡식 한 말을 살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요가 멸망하기 직전에 야율적렬이 양왕 야율아리를 옹립하고 북요를 세워 서북 지방으로 이주할 때, 북요 정권은 서북 지방의 곡창에 쌓아둔 막대한 양의 곡물을 징발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한인 · 발해인 · 여진인의 이주, 조정의 지역 개발과 둔전 운영, 종교계의 농력 덕분에 상경도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으며 수초가 풍부한 시라무렌 강(당대 명칭 : 황수. 潢水), 아르군 강, 케룰렌 강, 톨 강(당대 명칭 : 토올납하. 土兀拉河, 중국 명칭 : 土拉河) 유역도 농업이 크게 발전하고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다. 다만, 요 말기에는 기온 하강과 사회적 모순 심화,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둔전호가 몰락하고 유민이 늘어나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고 일부 지역의 둔전을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중경도는 해인들이 많이 살았고, 해인들은 이미 당대부터 일부 세력이 기장과 마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등, 목축과 수렵 외에 농경에도 종사했다. 송대 학자들인 구양수, 송수, 왕증 등은 해인들의 농사 짓는 방식과 기장죽을 먹는 생활 양식, 해인의 수렵 문화와 궁술에 대해 기록했으며 소송, 소철도 시에서 해인이 경작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본래 유목민으로 출발한 해인들이 농사에도 능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중경도의 농업 경제 성장을 견인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죽영 일대가 요에 편입된 이후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농업에 종사하고, 당과 오대의 국경 지역 주민들의 토지를 소작하던 중경의 해인들 중에서도 소작지를 사들여 어엿한 자작농이 되는 이들도 일부 있었다고 하니 중경도의 농업이 발전하고 생산력도 늘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해인들은 거란인들보다 더 많이 정주화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송 사신의 기록에 따르면, 거란인들은 이주 생활을 하는 반면에 해인들은 정주화해서 집에서 살고 농경에 능하다고 한다.


7.1.2. 서경도, 동경도, 남경도의 농업 경제[편집]


동경도의 중심지인 요양은 수초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했으며 목재 · 철 · 소금 · 물고기 등이 많이 산출돼서 이익이 많았다. 그리고 태종대에 발해인들을, 성종대에 숙여진인들을 요양 지역에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고 지역 개발에 힘썼다. 이로 인해 동경도의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발전했다. 그리고 황제들은 이주민들이 많은 동경도의 조세와 부역을 낮게 부과해서 동경도의 농업 성장을 촉진시켰따 동경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발해인들은 농사 기술이 뛰어나서 동경도의 농업 발전을 제고하고 막대한 양의 농산물을 생산했다. 심지어 성종 태평 연간에 연운 지역에서 기근이 들자, 호부부사(戶部副使) 왕가(王嘉)가 요동의 곡물을 연운의 주민들에게 나눠준 일도 있었다. 후대에 아골타가 동경도를 유린할 때에 요 왕조가 저장한 곡식 수십만 석을 취해 군량을 확보했다고 하니 동경도의 농업 생산력이 상당하고 곡물 비축도 잘 이루어졌다고 평할 수 있다.

동경도 북부의 생여진 부족들은 초보적인 수준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이들은 마, 조, 피 등의 곡물과 파, 부추, 마늘, 박 등의 채소를 재배했다. 송막기문에 따르면, 혼동강(송화강 중류)와 영강주(길림성 부여현) 일대의 주민들이 복숭아와 자두 같은 과수를 재배하고 냉해 방지법과 추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과수를 키우는 기술을 터득했다고 한다.

요 조정은 서북 지역과 마찬가지로 동북 지역에도 둔전을 설치했는데, 황룡부를 중심으로 조성한 둔전은 주둔군이 먹을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동북의 여진인들에게 농경 기술을 전수하고 동북의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일조했다.

남경도는 거란국지에 따르면 "채소, 과실, 곡식 등 나지 않는 작물이 없고, 상 · 마 · 보리 · 양 · 돼지 · 뀡 · 토끼는 불문가지다. 이곳은 물이 달고 땅이 기름졌으며, 사람들이 재주가 많았다."는 내용이 전해질 만큼 땅이 비옥하고, 남경도와 서경도 남부의 대동부(大同府) · 울주(蔚州) · 응주(應州) · 삭주(朔州) · 무주(武州) · 귀화주(歸化州) · 가한주(可汗州) · 유주(儒州) 등의 지역도 농업이 발달하고 물산이 풍부해 농업 중심지로 기능했다. 그러나 당말과 오대의 혼란으로 인구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건국 초기에 한인 포로들을 잡아와서 정착시키고 새로 군현을 세웠다. 그리고 요의 황제들은 농업 인구를 늘리는 것과 농업 생산을 중시했으며 농민들이 편안하게 농사지을 수 있도록 보호하고 연운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7.2. 유목 경제[편집]



7.2.1. 목축업[편집]


요의 경제는 유목 경제와 농업 경제를 혼합한 이중 경제 체제다. 유목 경제를 떠받치는 유목민들은 거주지의 자연 환경에 따라 목축 · 어업 · 양봉 · 수렵 · 채집 · 농경 · 운송 · 상공업 등 다양한 분야에 종사했으나,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산업은 목축업이었다. 목축업은 유목민들에게 생필품과 군마를 공급해주는 생존 수단이었으며 국가 입장에서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유목민들이 통치를 지탱하고 군사력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목축업은 요를 강성하게 만들어 준 근본이었다.

이전 시기부터 많은 유목 민족과 유목 국가들이 초원에서 목축업을 한 덕분에 요의 유목민들은 목축업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고, 자연 환경도 목축업을 하기에 적합하여[50] 요는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유목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다. 요 조정 또한 부족별로 방목지를 설정해주고 부족 간의 전쟁을 방지해 유목민 사회를 안정시키고 유목민들이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만드는 등,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요의 유목민들은 가축 수를 늘리고 목축업에 대한 지식을 전수 · 발전시켰으며 유제품과 펠트 천 같은 모직물, 공예품을 생산했다.

유목민들은 말 · 소 · 양 · 닭 · 염소 · 낙타 · 돼지 등, 다양한 가축을 길렀으며 심지어는 사슴도 키웠다. 가축 중에서 유목민들이 가장 많이 키우고, 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가축은 양과 말이었다. 유목민들은 양과 말의 소유량에 따라 빈부를 정하고 부족간의 거래와 세금, 공물 납부에도 양과 말을 지불했으며 요 조정이 중국의 왕조들과 교류할 때 선물로 주거나 그들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얻어낼 때도 쓰이는 등, 양과 말은 중요한 경제 수단이었다.[51]

가축 중에서 양은 고기와 털, 젖을 얻는 용도로 키우고 황소와 낙타는 수레를 끌게 했다. 젖소와 암말은 젖을 짰으며 유목민들은 이렇게 얻은 젖으로 유제품을 만들었다. 낙타 사육법은 위구르인들에게서 배운 것이었는데, 낙타는 요에서도 값비싼 동물이어서 황소 한 마리가 양 3 마리 값일 때, 낙타 한 마리는 양 8 마리와 맞먹었다. 염소는 양떼를 이끄는 리더 역할로, 닭은 알과 고기, 돼지는 고기를 얻을 용도로 키웠으며 셋 다 조금만 키웠다. 반면에 도시와 농촌에 사는 정주민들은 돼지를 많이 길렀다.

초원은 4월부터 8월까지는 풀이 무성해 방목하기 좋아서 유목민들은 4월부터 8월까지 초원에서 방목과 이동을 반복하다가 8월말부터 사막으로 옮기거나 가축들을 불러들여 겨울이 지날 때까지 보호했다. 유목민들은 말을 자연스럽게 내버려둬야 번식이 잘 될 거라 생각해서 말에 따로 손을 대지 않았고, 그래서 유목민들이 키우는 말은 발굽을 다듬거나 털을 깎지 않아서 중국의 말과는 생김새가 달랐다. 유목민 목동들은 말에게 굴레를 씌우지 않고 채찍으로만 다루어서 하루 종일 달리게 해도 말들이 피곤해하지 않았으며, 2 ~ 3명만으로도 충분히 수백, 수천 마리의 말들을 통제했다. 또한 양들을 키울 때도 울타리 없이 방목하고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게 해주었는데, 그렇게 해도 양들이 잘 번식했다.

다만, 목축업은 농업 만큼이나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산업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가축이 얼어죽거나 풀이 상하는 일도 있는 반면, 너무 적게 와서 풀이 자라질 못해 가축이 굶어죽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요의 유목민들은 눈이나 비가 평시보다 적으면 기우제나 기설제를 지내고 폭풍이나 폭설이 발생하면 제풍제나 기청제를 지냈다.

요의 영토에는 유목민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목초지 외에도 국영 목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군목(群牧)이 있다. 군목은 야율아보기 때 군마를 조달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서 북추밀원의 감독하에 담당자인 군목사(群牧使)와 군목부사(群牧副使)의 자녀들, 요역을 부과받은 평민과 부호들이 관리했다. 군마의 수가 전투력에 직결되는 만큼, 조정은 군목의 운영에 신경 써서 정기적으로 군목의 장부를 검사해 가축의 번식 상황을 파악하고 가축의 증감에 따라 군목관의 승진과 해임을 결정했다. 군목에서 키우는 가축들은 복속시킨 유목민들에게 받은 공물, 약탈물, 자연 번식한 것들이었고 그 수가 매년 증가해 전성기 때는 군목의 마필 숫자가 100만 두를 넘을 정도였다.[52]

군목의 설치 목적이 군마를 조달하는 것이었던 것 만큼, 군목에서 사육하는 수만 필의 말은 기병대와 5경의 군대에 보내서 군에서 필요로 하는 군마를 조달하고 황실과 귀족의 사냥용 말로 쓰기도 했다. 또한 군목은 복지 차원에서 가난한 유목민들에게 말을 나눠주고 송과의 무역을 진행할 때 결제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 다만, 흥종 후기부터 군목의 관리가 부실해지고 관료들이 군목의 말을 밀매한 탓에 도종대에는 군목이 유명무실해져서 새로 장부를 정리하고 군목을 재정비해야 했다. 게다가 11세기 후기의 기온 하강으로 폭풍이나 폭설과 같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가 늘어나 가축이 상하는 일이 빈발했으며 1083년(도종 태강 8년)에는 가축의 6 ~ 7할이 죽어나가는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천조제 시절에는 금과의 전쟁 때문에 민간의 말까지 징발하다보니 말 값이 폭등해서 군목의 군마 대부분이 밀매되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도 야율대석이 요의 잔존 세력을 이끌고 이동할 때 전부 다 가져가 버려서 요의 군목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53]


7.2.2. 어업&어로, 채집, 수렵[편집]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수산물을 먹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요 태조가 오림하에서 사람들이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한 적이 있고 거란인들의 겨울 낚시와 고기 잡이를 묘사한 송의 기록, 요사에 '유목민들은 전시가 아니면 사냥과 낚시를 한다.'는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어 요의 유목민들이 수산물을 꺼리지 않고 어업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지역별로 요의 유목민들 중에 삼림과 해안, 강을 끼고 살아가는 이들은 목축업과 어렵(漁獵), 채집을 병행했으며[54] 다른 유목민들도 기회가 되면 어렵 활동을 했다. 또한 여진족과 몽골, 삼림 지역 민족들도 채집과 수렵, 어업을 중요시했으며,[55] 옛 발해의 고토와 여구하, 호륜호 일대는 수산 자원이 풍부해서 일부 주민들이 어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요의 황제가 순행 중에 직접 낚시를 했던 사실로 봤을 때, 요의 유목 경제에서 어업이 목축업만큼은 아니더라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냥은 경제적으로 목축업과 함께 유목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산업이며, 유목민들에게는 생계 수단이면서 생활의 일부였다. 요의 유목민들은 사슴과 들소를 주로 사냥하고 담비와 해달 · 족제비 · 여우 · 토끼 · 물새 · 호랑이 · 표범도 사냥했다. 그리고 계절별로 사냥하는 동물의 종류가 달라서 봄에는 오리나 거위, 기러기를, 4 ~ 5월에는 사슴, [56] 8 ~ 9월에는 호랑이와 표범을 잡았다. 담비 · 해달 · 족제비 · 여우는 고가의 모피를 얻을 수 있어서 잡으면 모피를 벗겨 옷으로 지어 입거나 상인들에게 판매했으며 호랑이나 표범도 잡으면 가죽과 이빨을 취했다. 유목민들은 날씨가 따뜻할 때도 사냥을 했지만, 유목 활동이 한가한 겨울철에는 사냥이 일상이었다. [57] [58]

그리고 상류층에게 사냥은 하나의 오락이지만, 황제에게는 오락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요의 황제들은 사냥을 통해 스스로 무예를 익히고 병사들을 훈련했으며 황제가 친렵(親獵), 친어(親漁)해서 처음 잡은 두아(頭鵝, 고니)와 두어(頭魚)는 풍어(豊漁)와 풍렵(豊獵)을 기원하는 것으로 중국의 황제들이 친경(親耕)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59] 또한 원정 중에 군량이 없으면 사냥을 통해 군량을 보충했으며[60] 송의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 때에도 사냥한 곰 · 기러기 · 백조 · 사슴 · 담비 · 꿩 · 토끼 고기를 대접했다.

전반적으로 사냥과 어업은 북쪽 연안과 삼림 지대에 사는 오국부, 생여진, 타타르 같은 민족들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유목민들에게도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고 유목 경제의 보조 수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요대의 무덤에서 당시에 사용한 여러 가지 사냥 도구와 낚시, 고기 잡이용 도구들이 출토되고 있고 거란인이 물고기를 잡거나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진 벽화들이 당대의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다.


7.3. 상업[편집]


건국 이전의 거란인들은 내부적으로는 물물교환을 하고 초원에 유목도성을 건설해서 주변국과 교역을 하는 수준이었으나, 건국 이후에는 점차 농업, 목축업, 수공업이 발전해 잉여가 쌓이고 재화의 교환이 빈번해지면서 교역량이 늘어나고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다. 요의 시장에서 주로 거래하는 재화는 곡물과 식료품, 가죽 세공품이나 유제품, 비단과 아마포, 모직물, 각종 공예품과 생필품이며 외국에서 수입해 온 각종 사치품과 진귀한 재화도 판매했다.

조정 역시 상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어서 도량형을 통일하고 도량형에 맞지 않는 물품은 판매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내렸다. 성종대에는 인민의 가계 경제를 개선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개의 교역로를 개방하고 부세를 줄여 상거래량을 늘려주기도 했다.

오경은 중요한 상업 · 무역 중심지가 되어 상인들이 모이고 저택과 상점이 줄지어 세워졌다. 오경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고 상업이 발전하자, 요는 상경, 남경, 서경에 상세원(商稅院)을 설치하고 점검(點檢), 도감(都監), 판관(判官) 등을 임명해서 상세 징수와 시장 관리를 맡겼다. 추가로 상경과 동경에는 호부사(戶賦使), 서경과 동경에는 전운사(轉運使)를 설치해 통상과 무역 등의 사무를 관리했다. 추가적으로 각 주현에는 전백사(錢帛使) · 염철사(鹽鐵使) · 상국원(桑麴院) · 장상각주 등과 같은 기관을 설치해서 동전 · 비단 · 소금 · 철 · 술 등을 관리했다.

지역별 상업 활동에 대해 알아보자면, 오경 중에 가장 번화하고 풍요로운 도시는 남경이었으며 중경과 서경도 그에 못지 않게 번화한 도시였다. 상경의 경우에는 한인 포로들과 종교인들이 가져 온 기술과 문화 덕에 도시가 발전하고 상업이 번영했다. 상경의 남쪽 성인 한성(漢城)은 한인들의 거주지면서 점포와 누각이 늘어선 상업 지구이고, 상경 서쪽 지구는 상점들과 상공업자 · 기술자 · 관료 · 종교인 · 유학자들이 사는 주거지가 존재했다.[61] 또한 상경에는 회골영(回骨營)이라는 위구르인 거주 구역이 있어서 위구르 상인들이 이 곳에 거주하면서 상행위를 벌였다.

중경은 상경과 마찬가지로 남쪽에 상업 지구를 두었다. 중경의 상업 지구는 넓은 거리에 커다란 광장과 300여개의 회랑이 연결되어 있고 주민들은 이 곳에서 가게를 열고 장사를 했다. 동경은 외성을 한성이라 불렀고 이 곳에는 남시와 북시라는 2 개의 시장이 있어서 상인들은 새벽에는 남시, 저녁에는 북시에 모였다.[62] 서경은 다른 수도들에 비하면 군사 도시에 가까워서 서경의 상업은 다른 4경과 비교하면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리고 남경은 요의 최대 도시로 가장 거대하고 가장 풍요로웠다. 대부분 한인이긴 하지만, 30만 호 이상이 거주하고 26개 지구로 나뉘었다. 남경의 거리와 광장은 질서정연하고 거대했으며 남경의 상업은 다른 4경 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취급하는 재화도 더 많았다.

이밖에도 동경도의 건주 · 요서주, 서경도의 삭주 · 울주, 중경도의 흥중부 · 금주 · 의주 · 택주, 남경도의 유주 · 순주 · 영주 · 계주 · 노현 · 범양현, 상경도의 경주 · 조주 등의 도시들도 상업 중심지였다. 남경도 계주의 신창진은 행상들이 모여 각지의 재화가 쌓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상경도의 경우에는 유목 경제가 발달해서 도시가 아닌 행궁에서도 시장이 열렸다. 그래서 조정은 행궁시장순검사(行宮市場巡檢使)를 설치해 행궁의 시장에서 이뤄지는 상업 활동을 관리했다.

국경 무역 시장인 각장도 운영했다. 조정은 상세와 아전(牙錢)을 납부하는 조건으로 상인들에게 각장 출입과 상행위를 허용했다. 국가 입장에서 각장은 수입 확보와 무역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 국경 지역도 안정화시킬 수 있어서 이익이 많았다. 서경 삭주의 각장(榷場)에 진귀한 재화가 모이고 교역이 활발했다는 기록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상업 발전은 화폐 경제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요 왕조는 태조대에 처음 동전을 사용하고 태종 시기에 오야태사를 설치해서 철전을 관리했다. 경종대에는 주전원(鑄錢院)을 설치해 매년 500만 관(貫)의 동전을 발행하고 동광과 철광이 풍부한 동경도의 장춘주 · 평주 · 서요주 · 울주 등의 지역에 전백사(錢帛使)를 설치해서 화폐를 주조했다. 또한 법적으로 사주전(私鑄錢) 주조와 동전의 해외 유출, 외국과의 동 · 철 매매를 금지하고 이와 관련된 범죄를 저지른 자들에게는 중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연호전(年號錢) 제도를 도입해서 황제가 즉위하거나 연호를 고칠 때마다 화폐를 새로 주조했다. 화

대체로 요가 발행한 동전들은 그 종류는 다양하지만, 수량은 비교적 적은 편이고 오대와 송의 동전을 대량으로 수입해서 부족한 수량을 충당했다. 그래서 요 왕조는 자국에서 발행한 동전보다 중국의 동전이 훨씬 더 많이 통용될 정도였다.[63] 그러나 완전히 화폐 경제 체제로 전환한 것은 조금 늦어서 전기에는 양과 말, 베와 비단을 실물 화폐로 사용하고 동전과 혼용했다. 조정에서는 성종 시기부터 베와 비단과 같은 실물 화폐 사용에 따른 문제를 우려해서 비단과 베를 화폐로 쓰는 것을 금지하자는 논의를 꾸준하게 이어갔으며, 마침내 도종대에 비단과 베를 상거래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추가적으로 요 왕조는 국가 사업으로 도로와 다리, 역참을 건설했다. 특히 성종 연간에는 여러 차례 도로를 건설해 연운 16주와 주요 도로망을 정비하고 태평 7년(1027년)에 도로 폭을 30보로 확장하는 칙령을 내렸다. 요의 도로망과 역참은 초원 지역과 각 지역의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지역간 교류를 촉진시켰다. 덕분에 유목민과 대상들이 수월하게 각지를 이동하고 정보 전달과 물자 운반도 용이해졌다. 소식을 전하는 전령은 마패라 할 수 있는 은패를 지참하고 있다가 역참에 들러 은패를 보여주고 말을 갈아타거나 물자를 수령했다.

요는 도로를 건설할 때, 땅을 다지고 모래와 자갈을 썼으며 도로의 폭을 매우 넓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의 도로는 자연재해에 취약해 여름에는 먼지가 일고 우기에는 진흙길이 되어 여행자들이 불편을 느꼈다.[64] 또한 판석을 깔아 포장하지 않고 물이 노면에서 흘러 나가도록 설계하지 않아서 자연 재해가 일어나거나 큰 비만 내리면 도로가 손상되어서 매년 정기적으로 도로망을 보수해줘야 했다. 도로와 다리의 유지 및 보수, 건설은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에게 부과한 요역이고 매년 있는 일이라 부담이 상당했다.

그래서 요의 도로망은 적대적인 자연 환경과 상대적으로 낮은 기술력 때문에 송의 도로망보다는 그 수준이 낮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송은 주요 도로망은 물론, 여러 지역을 잇는 간선 도로망도 구축해 두었고 도로폭이 넓고 평탄해 바퀴 지름이 2m에 가까운 커다란 마차도 다닐 수 있었다.


7.3.1. 대외 무역 및 속국과의 조공 무역[편집]


요는 개방적인 국가라서 대외 관계가 넓었고 초기부터 오대의 국가들과 교역했다. 후진과는 매년 30만 필의 세공을 받으면서 국경 지역에서 교역을 진행했으며 매년 무역 규모가 커져서 상당한 숫자의 거란인들이 국경 지역으로 가서 장사를 했다. 심지어는 거란 상인들이 후진을 통과해 남당까지 가서 교역을 하기도 했다.[65] 송이 건국된 이후에도 요는 국경 무역을 이어나갔으나, 양국간의 관계가 자주 나빠지고 군사적 충돌이 빈번해 무역이 단절되는 일이 잦았다. 다행히 전연의 맹을 체결함으로서 양국의 국경 무역이 부활하고 그 규모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요 · 송 양국은 국경 일대에 각장과 관청을 설치해서 호시의 물가를 안정시키고 국경 무역을 통제했다.[66]

요는 은화와 직물 · 양 · 말 · 낙타 · 모피를 가져와서 송의 유황 · 염초 · 명반 · 차 · 비단 · 물소뿔 · 상아 · 향료 · 비단 · 칠기 · 약재 등과 교환했다. 요가 소비재와 기호품, 사치품을 수입했기 때문에 송은 전연의 맹을 맺던 경덕 연간부터 요와의 무역을 통해 매년 40만 냥의 수입을 취했다. 양국은 수출 · 입 금지 품목을 정해서 송은 동 · 철 · 유황 · 염초 · 명반 · 차 수출을 금하고 [67] 국가 기밀이 빠져나가는 것을 우려해서 일부 서적의 수출도 금하는 한편, 전매를 하는 소금의 수출도 엄금했다. 또한 송은 지나친 동전 유출을 우려해서 동전 수출을 통제하기도 했다.

반대로 요는 송의 군사력 강화를 경계해 비정기적으로 군마의 수출을 통제하고 서하와 여진을 협박해 그들이 송에 군마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또한 송과 마찬가지로 국가 기밀 유출을 우려해 서적의 수출도 제한했다. 이러한 통제는 요와 서하의 강력한 기병대에 맞설 기병 전력이 부족한 송에게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송은 군마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서하와 여진에 비단을 주고 우수한 군마를 수입했다. 송은 최하품 군마에도 수십 필의 비단을 지불하는 금전적 보상을 통해 서하와 여진이 요의 보복이라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이후, 서하와 여진이 자신의 명을 거부하고 송에 군마를 매각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요는 격노하여 서하와 여진에 사자를 보내어 이를 추궁하고 재차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서하와 여진은 일시적으로나 군마 매각을 중지할 뿐,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군마를 판매해 요와 갈등을 빚었다.

이렇듯 송 · 요 양국은 매우 강력한 통제 정책을 펼쳤지만, 완전한 무역 통제에는 실패하여 민간 무역의 성행을 막지 못했다. 요에서 유입된 밀매염이 송의 소금 전매 제도에 큰 타격을 주고, 송이 여진과의 밀무역으로 군마를 조달해 요가 이를 간 적도 있다. 그리고 요나라 사람들이 워낙 송의 시와 문학을 좋아하다보니 금령에도 불구하고 송의 서적과 문인들의 시집이 지속적으로 유출되었고, 요의 사신이 송 조정에 대놓고 위야(魏野)의 시를 요청해서 진종이 시집을 하사한 일도 있었다.[68]

요는 송과의 무역 이외에도 비단길 중 하나인 초원길을 장악하고 진무군(내몽골 화림격이 지역)과 영강주, 동 · 서부 국경 지역에 호시를 열어 고려, 서하, 천산 위구르, 고창, 구자, 우전, 여진, 조복 등과 교역했다. 이들 주변국과의 경제 교류는 대부분 조공과 국경 무역인 호시를 통해 이루어졌다.

서하와의 대외 무역은 양국 간의 우호적인 관계에 기반한 조공 무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요 · 서하 양국은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교류했는데, 서하의 사신단은 조공 무역과는 별도로 요의 도시를 지날 때마다 그곳의 상인들과 사무역을 했다. 서하의 조공품은 말 · 낙타 · 비단 · 소금 · 보석 · 가죽 등이며 요는 하사품으로 직물 · 말 · 활 · 포도주 · 과일 · 비단 등을 주었다.

고려와와는 보주(지금의 의주)를 고정적인 무역 시장으로 삼아 상거래를 벌였다. 고려는 요에 여러 가지 금은 세공품 · 직물 · 구리 · 인삼 등을 조공품으로 바치고 요는 답례로 각종 장식품 · 말 · 양 · 활 · 비단 등을 주었다.

요는 또한 이슬람 제국과 페르시아의 여러 국가와 일본, 그밖의 나라들과도 교류했다. 고창, 구자, 우전과 같은 실크로드 국가들은 3년마다 400명 정도의 규모로 사신단을 파견했는데, 요 조정은 사신단이 가져온 옥 · 유향 · 호박 · 강철 · 마노 · 보석 등의 조공품을 받고 그에 대한 답례로 최소 40만 관 이상을 지불했다. 실크로드 국가들과의 공무역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중에서도 천산 위구르와의 교역이 가장 많았는데, 상업 항모에 서술했듯이 수도 상경에 회골영이라 부르는 위구르 상인들만을 위한 거주 지구가 존재할 정도였다. 일본의 경우에는 후지와라노 무네타다가 저술한 중우기(中右記)에 요에 몰래 무기를 판매하고 재화를 받아온 이들이 적발당한 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후지와라노 코레후사가 금지된 사무역을 벌이다 발각당해 처벌당한 일도 있어 요 - 일본 간의 사무역은 강하게 통제된 상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외교적 선물도 상호 교류의 수단이었다. 고려는 종이 · 묵 · 쌀 · 동 · 인삼 · 직물 등을, 서하와 천산 위구르는 진주 · 옥 · 물소뿔 · 유향 · 호박 · 철기 · 말 · 낙타 · 모직물 등을 선물했으며 요는 안장 · 말 · 활 · 화살 · 모피 · 견직물 등을 답례로 주었다. 그리고 요는 자국에서 생산한 재화를 주변국과 교역했을 뿐 아니라 국경 무역을 통해 얻은 상품을 다른 지역에 되팔아 중간 이익을 얻기도 했다. 여진에게서 진주를 구해 송 황실에 매각하거나, 천산 위구르에게서 야생마 가죽과 호피를 구매해 송에게 되파는 등,[69] 요는 주변국과의 조공, 사여, 선물, 국경 무역을 통해 여러 가지 재화를 직, 간접적으로 교역했다.

속국, 속부와의 무역과 상거래도 많았다. 숙여진은 금과 비단 · 직물 · 밀랍 · 잣 · 꿀, 백부자와 천삼성, 인삼과 같은 약재를, 동북의 생여진과 철리(鐵離), 말갈(靺鞨), 우궐(于厥) 등은 담수 진주 · 날다람쥐 · 담비 가죽과 상어 껍질 · 소와 말 · 낙타 · 모직물을, 조복과 오고, 적렬 같은 몽골 유목민들은 소와 말, 낙타, 각종 가죽 등의 특산물을 조공품으로 바치고 답례물을 받았으며 조공품 외에 가져온 재화들을 시장에서 거래했다. 《요사》 「식화지」에 이들 삼림, 유목 민족들 중에 요와 교역을 하려는 자들이 도로에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과의 무역이 상당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 조정은 송과의 무역과 마찬가지로 외국과 속국, 속부와의 무역과 상거래를 할 때에 금지 품목을 정했다. 서하와의 무역에서는 금과 철의 유출을 금하고 천산 위구르와 조복과의 무역에서도 철의 판매를 막았다. 아무래도 철이 갑옷과 무기, 화살촉을 만들 수 있는 자원이기 때문에 통제한 것으로 보인다.


7.4. 광업 · 금속 공업[편집]


건국 이전의 거란은 살랄적이 공방을 설치하면서부터 금속 가공 기술을 습득하고, 야율아보기의 치세에는 은광과 철광을 개발하고 한성에 공방을 설치해서 한족들의 선진 기술을 흡수했다. 발해를 무너뜨리고 요동의 패권을 차지한 뒤부터는 요동의 풍부한 철과 발해인의 우수한 야금 기술을 이용해서 제철업을 더욱 발전시키고 요동에 갈술석렬(曷述石烈)을 설치해 노예들을 시켜 철을 채굴했다.[70] 시간이 지나 생산력과 생산 방식이 발전하자, 성종은 석렬을 부로 승격시키고 노예는 평민으로 올려주었다.[71]

다만, 요는 초기에 노예 경제를 운영하고 당의 관영 수공업 제도를 받아들인 영향으로 인해 관영 공방의 장인들은 모두 관노비였고 죄수들도 동원했다. 죄수 노역자의 경우, 상서나 시랑급의 고위급 인사가 죄를 짓고 일정 기간 공방에서 노역을 하기도 했는데, 황제의 진노를 사거나 중죄를 진 경우에는 거의 평생토록 노역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반대로 송은 장인들에게 매년 20일의 요역을 부과하는 당의 번장제(番匠制) 대신에 장인들을 모집해 급료를 지급하는 모장제(募匠制)를 시행하여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거나 공공 사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조선의 선혜청처럼 민간과 계약을 체결해 물품을 조달하고 민영 수공업이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72] [73] 그래서 운영에 있어서는 요가 송에 비해 미진한 면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철기는 무구 뿐만 아니라 농업, 목축, 어렵 등의 주요 산업에 필요한 도구와 생필품을 만드는데도 필수적이어서 요 조정은 제철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요의 철기는 그 품질이 매우 높아져 요는 철기로도 유명해졌다.

요의 주요 금속 생산 지역으로는 요동 안산의 수산(手山, 현재의 안산시 수산, 首山), 삼출고사(三黜古斯), 유습하(柳濕河) 일대가 있으며 요는 이 지역에 광산과 공방을 설치하고 금속을 생산했다. 특히나 발해 고토 지역은 철이 풍부하고 철을 생산하는 제철 공방이 많아 발해 정복 이후, 발해가 보유한 철산지들은 그대로 요의 주요 철 생산 지역이 되었다.[74]

동경도 동주(요녕성 개원현)과 동평현, 상경도 요주 장락현(내몽골 임서현)에서는 수백 호의 주민들이 제철업에 종사하고 생산한 철을 세금으로 바쳤으며, 중경도 유하 유역의 발해인들도 제철업에 종사했다. 그리고 남경도에는 관영 광산인 경주 용지야, 영주 신흥야가 있으며 요는 이 두 곳에 감을 설치하고 생산과 운영을 관리했다.

요의 금 · 은 생산은 태조가 연운 지역의 한인 포로들을 끌고 와 은광과 철광을 채굴하도록 한 것이 시초이다. 성종 연간에는 요하와 황하 유역에서 금, 은 광맥을 발견하고 광산을 개발했다. 금속과 금 · 은 같은 비철금속의 채굴 및 제련, 가공은 주로 한인과 발해인 장인들이 맡았으나, 거란인과 솜씨 좋은 여진인 장인들도 참여했다.

요의 대표적인 은광으로는 동경도 은주(요녕성 철령)와 남경도 어양 · 도봉 · 대석 · 보흥, 중경도 택주 · 엄주 등이 있다. 그 중에서 택주의 함하야는 요 태조가 성채를 쌓고 은 채굴, 제련을 한 곳으로 청대까지 은을 생산할 정도로 매장량이 많았다. 그리고 내몽골 대청산 일대의 음산에도 은 광맥이 있어서 요는 1027년에 서남로 초토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방을 설치하고 금, 은을 생산했다.

그리고 요는 이른 시기부터 난하 상류 지역과 흑거자실위(黑車子室韋)가 거주하는 광제호[75]에서 소금을 생산·판매했으며 발해와 연운 16주를 차지한 뒤부터는 해염(海鹽)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요의 제염업은 매우 발달해서 요의 소금은 내수 시장에서 팔릴 뿐만 아니라 송의 국경 지역에서도 밀매되었다. 이렇게 밀매된 소금 덕분에 요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지만, 송은 밀매염 때문에 국경과 하북 지방에서 소금 전매를 실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북로(河北路)에서 소금 전매를 실시하려 한 시도가 두 번이나 실패했고[76] 결국에는 하북로에서의 각염(搉鹽, 소금 전매)을 완전히 중지해야 했다.

사족으로 서북 지방의 경우에도 질 좋기로 유명한 서하의 청백염이 대량으로 밀매되어 송의 소금 전매제를 위협했다. 송에게는 불편한 일이지만, 국경 지역에서는 요와 서하 같은 두 잠재적 적국 때문에 소금 전매제가 흔들렸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7.4.1. 금속 기술 발전[편집]


요대에는 금속 기술력도 크게 성장했다. 야철 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발달해서 광산 몇 곳은 갱도 깊이가 18m 이상이었다. 구리와 철 제련 기술도 매우 발달해서 요의 기술자들은 순동과 황동을 제련하고 안정적인 금속 제련법을 터득해 요대의 쇠못 성분은 근현대의 것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요의 장인들은 농업용 도구와 수공업 공구, 각종 생활용품 등, 다양한 종류의 금속 제품들을 생산하고 농업용 도구 중에 어떤 것은 근대에 사용한 공구와도 매우 비슷할 정도였다. 그래서 금대 후기까지 연운 지역의 농기구는 요대에 이용하던 것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했다. 추가적으로 요는 동경도 하주에 군기방, 현주에는 갑방, 중경도 지역에도 무구 공방을 세워 무기와 갑옷을 생산했다. 요가 만든 무구 중 일부는 고품질의 저탄소강을 사용한 것이어서 무기 제조 기술이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요의 금속 공예 기술은 아주 정교했다. 요대 금속 공예의 시작은 포로로 잡아온 한인, 발해인 장인들이 철기 제작을 시작하면서부터였으며 점차 금은 세공품도 만들기 시작했다. 요대 금속 공예품들은 당과 오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송의 영향이 짙어졌다.

요의 금속 장인들은 금 · 은으로 도금하거나 여러 무늬를 새기고 화려한 장식을 한 생활용품들, 예컨대 마구와 안장, 고삐, 식기, 장식품을 제작했으며 불상도 만들었다. 또한 금속 공예 기술과 도예, 직조 기술을 융화해 금도금 백자, 금사나 은사로 자수를 놓은 가죽 장화, 은도금을 입힌 가죽 장화도 제작했으며 고급 공예품들은 황실에 진상했다. 이 시기에 제작한 유물들은 현재까지 남아서 요대 금속 공예의 높은 수준을 알려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요의 금·은 공예 기술은 당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지만, 조형면에서는 유목민 예술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요대의 금속 공예품은 다른 왕조의 유물과 비교할 때 매우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정리하자면 요는 한인과 발해인들의 기술을 흡수하고 유목민의 미적 감각을 접목시켜 고유한 금속 공예 기술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채광 기술력도 키워내어 금속 생산량을 늘렸다.


7.5. 공예업[편집]



7.5.1. 직조업[편집]


요는 건국 이전에도 자체적으로 직조 기술을 습득하고 있어서 펠트나 가죽, 아마포를 생산했으나, 기술력은 뒤떨어졌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란의 위정자들은 직조업을 장려하고 영토에 삼과 뽕나무를 심어 직물을 생산했다. 그러나 요의 직조업을 발전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자체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한인과 발해인들을 흡수해서 그들의 선진 기술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요는 한인, 발해인 포로들과 연운 16주의 한인들로부터 직조 기술을 습득해 직조업을 발전시키고 견직물을 생산했다. 한인들의 기술이야 말할 필요가 없으며 발해는 예전부터 방직업 기술이 뛰어나고 특산물로 직물이 유명한 곳이 많았다.[77] 초창기에는 기술 수준이 떨어져서 거칠고 수수한 직물만 만들었지만, 점점 수준이 오르면서 거의 모든 종류의 견직물을 생산하고 직물도 섬세해져서 중국에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78]

요에서 생산하는 비단은 능(綾) · 라(羅) · 기(綺) · 금(錦)의 4 종류가 있고 자수 기술을 비롯해 각종 문양과 무늬를 새기는 기술이 뛰어났다. 이러한 요의 직조 기술과 도안, 문양은 당, 송과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또한 목축업이 번창함에 따라 그 부산물인 모직물과 가죽옷도 꽤 많이 생산했으며 그 기술력도 상당히 높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유행이 바뀌어 사람들이 두꺼운 비단인 금(錦) 대신에 얇은 비단인 라(羅)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는 중국의 유행을 따라해 금보다 라를 더 많이 생산했으며 라의 직조 기술도 상당히 높았다. 요에서 생산한 번라(蕃羅)는 요 · 송 무역에서 송의 상인들이 좋아하는 재화였고 그중에서도 품질이 우수한 견직물은 송에서도 진귀한 것으로 취급했다. 또한 호흠영의 요대 무덤에서 출토된 비단 유물들 중에는 당대 최고 수준의 직물들도 나왔으며 비단으로 무늬를 넣은 나문사직물(羅紋絲織物)은 송과 같은 수준이었다. [79]

직조업과 더불어 직물에 염색을 하는 날염업도 함께 성장해서 요는 남경과 중경에 염원(染院)을 설치하고 사제점원사(使提點院事)를 두어 날염 공정을 관리했다. 요는 당대에 개발한 협힐(夾纈)과 납힐(蠟纈) 기술을 터득했고 요의 염색공들은 다양한 종류의 무늬와 도안을 염색할 수 있었다.

지역별로 가장 직조업이 발전한 지역은 연운 16주와 그 중심지인 남경이며 중경도와 동경도가 뒤를 따른다. 남경은 관영 직조업의 중심지이면서 요의 직조 기술 발전을 선도한 선진 지역으로 그곳에서 생산한 비단은 아름답고 수준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80] 요 조정은 연운 16주의 뛰어난 직조 기술을 타 지역에 전파하기 위해서 16주의 한인들을 중경과 상경, 동경도 지역에 보내었다. 덕분에 3개 도의 직조업이 크게 발전하고 관영 공방은 물론 민간에서도 견직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직물을 생산했다.

중경도의 경우, 중경도 영하(靈河 지금의 대릉하) 유역의 일부 주현이 뽕나무와 마를 재배하기 적합해 요 초에 황제들이 한인 포로 중에 방직에 능한 이들을 안치시켰다. 한인들이 정착하고 안정적으로 직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 지역을 중심으로 직조업이 크게 성장했다. 특히 영하 유역에 위치한 홍정현과 백천주는 높은 품질의 명주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해져 요 조정은 매번 북송으로 사신을 파견할 때마다 백천주에서 생산한 견백을 예물로 보냈다.

동경도는 발해 시기에 현주의 직물, 용주의 명주가 특산물로 유명하고 이 지역 외에도 발해 전역에서 비단을 비롯한 각종 직물을 생산할 정도로 직조업이 발전했고 동란국 시기에는 마포 10만 단을 조공으로 바친 전력이 있어 연운 16주처럼 요의 지배를 받기 전부터 직조업이 발전한 지역이었다. 요 조정 또한 이러한 지역의 사정을 알고 있어 상경과 중경처럼 연운 16주의 한인 직공들을 정착시키고 양잠과 직조를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해 동경 일대의 직조업을 성장시켰다. 재밌는 점은 발해만과 요동 반도 일대에 살던 숙여진인들도 직조와 양잠 기술을 터득하고 있어서 각종 직물과 비단을 공물로 바치거나 상거래에 활용했다.

또한 요는 상경, 중경, 조주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 관영 견직물 공방인 능금원(綾衾院)을 설치하고 한인과 발해인, 거란인 직공들을 모아 황실에 쓸 견직물을 생산했으며 중경도의 의주(요녕성 의현) · 천주(요녕성 표남) · 금주 · 패주(요녕성 조양)와 동경도 현주에 뽕나무와 마를 심어 능금원에 필요한 원료를 조달했다.

민간에서는 요의 주민들도 중국인들처럼 방직업을 부업으로 삼아 뽕나무를 키우고 질 좋은 견직물을 생산했으며 이렇게 생산한 견직물을 세금으로 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중경도의 일부 주민들 같은 경우에는 생사나 견직물만 납부하고 곡물은 납부하지 않아서 사잠호(絲蠶戶)라고 불렸다. 요 조정은 이런 식으로 징수한 견직물을 관료에게 하사하거나 외국에 선물로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7.5.2. 도예 · 가죽 공예 · 목공예[편집]


요는 오대와 당 · 송의 도예 기술을 받아들이고[81] 그들의 도자기를 모방했으나, 단순히 중국의 도예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목 문화의 개성을 더해 요삼채(遼三彩)와 요 백자 같은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냈다.

요삼채는 이름 그대로 당삼채(唐三彩)를 계승한 것이나, 중국 도자기의 역사에서 요삼채가 탄생한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뜬금 없는 사건이다. 원래 당삼채는 중당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맥이 끊기고 8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인데, 200년이 지나 그것도 거란족의 나라인 요에서 출현했기 때문이다. 추측하자면 당이 쇠퇴하면서 당삼채 기술이 산서 · 하북의 국경 지역으로 전해지고, 요가 산서와 연운 16주 일대를 차지하고 한인의 기술,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요삼채가 탄생한 것으로 추측된다.[82] 요삼채는 당삼채처럼 색상이 황색 · 녹색 · 백색이며[83] 요의 도공들은 요삼채로 접시 · 병 · 쟁반 등을 만들었다. 요삼채 중에 유명한 계관호(鷄冠壺)는 닭볏을 얹은 듯한 모양을 한 편평한 병(편호, 扁壺)으로 그 형태는 유목민들이 쓰는 가죽 부대를 발전시켜 만든 것이다.[84]

요 백자는 송의 정요(定窯) 백자를 계승한 것으로서 요삼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사발 · 접시 · 쟁반 등이었다. 요 백자는 정요를 모방하긴 했지만, 가장 자리를 금 ·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요 백자 그릇처럼 고급스럽고 정교한 자기는 원본인 정요의 도자기를 능가하는 수준의 예술품이다. 그리고 요삼채에서 계관호가 유명한 것처럼 요 백자는 긴 목을 한 장경병(長頸甁)과 소의 넙적 다리처럼 생긴 우퇴병(牛腿甁), 봉황의 머리를 한 봉수병(鳳首甁)이 유명하다. 그외에도 요의 도공들은 사슴 무늬가 그려진 게르의 모양을 한 창식관(倉式罐)을 만들었는데, 이 창식관들은 유골 단지로 사용했다. 그리고 지역별로는 특히 중경에서 도자기를 많이 생산했으며 중경 송산주에는 큰 규모의 도요가 있어서 이 곳에서 많은 양의 요대 도자기들이 출토되었다. 발굴한 도자기의 대부분은 거친 백자에 다양한 종류의 생활 용기와 장난감, 주사위로 구성되어 있었고, 도자기를 빚을 때 쓰는 유약과 무늬도 종류가 다양해서 여러 가지 무늬와 색을 그린 도자기들이 출토되었다.

문화적으로 유목 생활을 하는 거란인은 한인과는 생활 양식이 달라서 서로 사용하는 도자기의 종류가 달랐다. 그래서 요는 전통적인 중국풍 도자기도 생산하지만, 유목민의 예술을 가미한 도자기도 만들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손잡이 달린 잔을 제작한 것과 승마 중에 휴대할 수 있게끔 설계한 도자기를 제작한 것이 있다.[85]

요의 유목민들은 가죽 공예와 목공예도 수준이 높은 편이었으며 유목민의 필수품인 마구의 생산을 중시했다. 특히나 요에서 만드는 안장과 고삐는 송인들이 "요의 안장, 서하의 검이 천하제일이며 다른 곳에서는 모방을 해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 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았다. 요의 장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안장과 고삐를 제작했는데, 그 중에 유명한 것으로는 금 · 은으로 용과 봉황을 새겨 넣은 안장, 여러 종류의 닥나무 껍질을 쓰고 은을 새긴 안장, 비단과 금으로 장식한 말 고삐와 사슴과 물범 가죽으로 만든 고삐들이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정교하고 수준 높은 예술품이다. 그외에도 요의 유목민들은 사냥과 목축을 하면서 얻은 가죽과 털, 뼈로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활 시위, 가죽 공예품과 뼈 공예품, 펠트 천을 비롯한 모직물을 생산했으며 요 조정은 속국과 유목민들로부터 진귀한 모피를 받아 각국에 선물하거나 교역품으로 활용했다.

목공예의 경우, 다양한 종류의 공구를 사용하고 상당히 높은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주로 생산한 '목공예품'은 유목민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교통수단인 마차였다. 요는 건국 이전에 마차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흑거자 실위인들로부터 마차 제작 기술을 배운 적이 있으며 해인과 발해인들의 마차 제작 기술도 뛰어나서 요는 그들의 기술을 흡수했다.[86] 또한 불교 승려들도 마차 만드는 기술이 대단해서 거란인 귀족들은 승려들이 만든 마차에 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요에서 제작한 마차는 이주용 물품 운송 마차, 부녀자와 노약자용 마차, 귀족과 부자들이 쓰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마차 등, 그 종류와 용도가 아주 다양했다. 그리고 요는 국가 단위에서도 마차 제작에 신경 써서 상경에 거자원(車子院)을 설치하고 마차 생산을 관리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당시 요의 마차 제작 기술이 높았으며 마차 제작 산업의 규모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차 외에도 요는 의자와 탁자, 침대 같은 가구와 각종 목공예품을 제작했으며 활과 화살도 잘 만들었다. 그리고 한인과 발해인들로부터 조선술을 배워 여러 가지 종류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었으며 [87] 흥종대에 수군을 육성해 황하에서 송을 상대로 수전을 걸어서 승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한인 기술자들로부터 제지 기술과 목판 제작 기술을 습득해 제지업과 목판 제작으로도 유명세를 얻었으며 자국의 목판 제작 기술로 대장경을 제작할 만큼 요의 제지 기술은 그 수준이 높았다. 요에서 제작한 대장경은 요장(遼藏), 또는 거란장(契丹藏)이라 부르며 고려에서도 이 대장경을 수입했다.


8. 사회[편집]


요는 귀족, 평민, 천민으로 구성된 계급 사회이면서 유목민과 정주민이 공존하는 다민족·다문화 사회였다. 요의 귀족들은 유목민 귀족, 관료, 과거에 합격한 사대부, 지방 세력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지주이거나 개인 영지를 가진 영주였다.건국 초기의 귀족들은 대부분이 유목민 귀족이고 경제적 기반은 두하주를 비롯한 개인 영지였으나, 점차 요의 사회 · 경제가 고도화되면서 농민과 계약 관계를 맺는 지주들이 등장하고 장원 영주들도 점차 농장 지주로 변해 갔다. 그러나 요가 멸망할 때까지 농민을 인신 지배하는 장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의 황족과 귀족들은 국가로부터 직역을 수행하는 대가로 수조권과 토지, 관직을 받았다. 귀족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세선제를 악용해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주요 지방관직의 선출에 개입해서 기득권을 유지했다. 또한 이들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음서의 혜택도 가지고 있어서 귀족의 지위를 자손들에게 계속 물려줄 수도 있었다. 전쟁에서는 평민들보다 더 많은 약탈품과 포상을 받을 수 있어서 귀족들은 성종대까지 벌어진 정복 전쟁에서 많은 이득을 취했다.

평민들은 국가에 세금과 노동력을 제공했다. 평민 유목민들은 각 부에 소속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는 부유층과 중산층, 서민과 빈민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유목민 세력가들은 절도사나 상온 같은 고위직 임용에 개입하고 많은 숫자의 가축과 고용인들을 거느렸지만, 빈민들은 가뭄이 들면 먹을 식량도 부족해지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요 조정은 빈민들을 진휼하고 이들을 위해서 군목의 가축들을 무상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유목민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어서 조정과 절도사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자신이 속한 부를 이탈할 수가 없고, 평소에는 부의 거주 지역에 살다가 국경 방위 의무를 이행할 때는 방위 지역으로 떠났다.

다만, 유목민들은 군역과 요역 부담이 점점 높아져서 어려움을 겪었고 귀족들처럼 전쟁으로 이득을 얻기도 어려워서 일부 유목민들이 전쟁을 치르다 파산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사회, 경제가 고도화하면서 성종대부터 빈부격차가 발생해 일부 유목민들이 빈곤으로 고생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반란과 전쟁이 늘어나 군역 부담도 높아졌다. 이로 인해 군역을 부담하던 서민과 중산층들이 몰락하고 빈민화하는 유목민들이 늘어났다. 특히 부담이 큰 것은 서북과 동북 국경 지대를 지키러 가는 의무였는데, 중산층은 물론이거니와 부유층들까지 파산할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계속해서 식량과 가축을 제공하고 진휼 정책을 실시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유목민들의 몰락은 요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 이어졌다.[88]

정주민들은 주현에 편입되어 있고 정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들은 소작농과 자영농, 두하주와 사찰에 소속된 이세호(二稅戶)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하주에 소속된 인민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 출신으로 두하주의 영주인 황족과 귀족들의 지배를 받았고 일반 주현에 편입된 평민들보다 인신 지배의 강도와 착취의 정도가 높은 데다 그 지위도 낮아서 고충이 컸다. 그리고 사찰에 소속된 이세호는 말 그대로 세금을 두 번 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국가에도, 소속된 곳에도 세금을 내야 했으며 두하주에 소속된 평민들처럼 지위도 낮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두하주에 소속된 이들은 천천히 두하주가 해체되어 일반 주현으로 변경되면서 나아졌지마는 이세호는 요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 이세호로 살아야 해서 계속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유목민과 정주민 모두 소속된 알로타의 궁분인들은 제궁제할사(諸宮埞轄司)의 관리를 받았고 이들은 오르두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저장호는 죄를 지은 황족, 외척과 대신의 가속들이며 이들은 복역(僕役)·시종(侍從)·경위(警衛) 등의 일을 맡았다. 초기의 궁분인은 한인 · 발해인 · 거란인 지원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전쟁 포로, 황후와 후궁을 호종한 자, 주현과 부족에서 뽑힌 이들이었으며 대다수가 농업과 수공업, 목축업과 수렵에 종사했다. 궁분인들은 평민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황제를 호종하면서 행궁에서 필요한 물자, 노역을 부담해야 해서 일반 평민들보다 착취의 정도가 높고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밖의 계층으로는 상인을 특기할 수 있는데, 상인들은 의외로 지위가 높아서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들 중에 일부는 관료가 되기도 하고 어떤 상인은 외교 사절단의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노예는 채무 노예와 포로 노예, 죄를 짓고 신분이 하락한 노예들이 있었다. 초기에는 한인, 발해인, 유목민 포로 노예들이 많았으나, 점차 요의 사회 경제가 발전하고, 성종을 비롯한 요의 위정자들이 여러 차례 노예들을 해방하고 새로이 편제한 부에 소속시켰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숫자가 줄어들었다. 다만, 건국 초에는 전쟁 포로로 끌려온 한인과 발해인들을 함부로 다루고 학살하는 일이 많아, 성종대에 대규모 노예 해방 정책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상당한 숫자의 한인, 발해인들이 착취와 폭압에 고통받았다.

여성 인권의 경우, 요의 여성들은 높은 권리를 향유했다. 요는 유학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성리학처럼 성별에 따라 직업과 업무, 가정 내에서의 의무를 엄격하게 구분짓지 않아서 거란인 여성들은 다른 유목 민족의 여성들처럼 사냥과 목축에 종사하고 남편이 전장에 나갔을 때는 집안 재산을 관리하는 등, '남성들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하고 능동적으로 생활했다. 그리고 상류층 여성들은 더 나아가서 국가 운영에 참여해 행정 업무와 군사 업무를 맡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순흠황후(淳欽皇后) 술율평(述律平)과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작(蕭綽)이 수렴청정을 하면서 엄청난 수준의 권력을 행사한 사례가 있다.

순흠황후는 태자인 야율배(耶律倍) 대신에 동생인 야율독욕(요 태종)을 옹립할 만큼 권력이 강했으며 자신에게 순장을 강요하는 신하들을 역으로 무덤에 집어넣고 자신은 한 팔만 잘라 남편의 무덤에 바치는 기지를 발휘할 정도로 재기가 뛰어났다. 그리고 순흠황후는 수십년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요 태종이 그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며[89] 군사력도 상당해서 태종 사후에는 손자인 세종과 내전을 벌였다.

그리고 예지황후는 수렴청정 초기에 송 태종이 북벌을 일으키자, 스스로 갑옷을 입고 군을 소집해 송의 공세를 3번이나 막아냈으며 수렴청정을 하면서 국가를 잘 운영했다. 그밖의 사례로는 성종이 예지황후의 맏언니였던 소호련(蕭胡輦)에게 오고부와 영흥궁의 군사를 이끌고 서북 변경을 지키게 한 일이 있으며[90] 서요에서는 감천태후(感天太后) 소탑불연(蕭塔不煙)과 승천태후(承天太后) 야율보속완(耶律普速完)이 거의 황제에 가까운 권력을 행사하며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요의 여성 인권이 상당히 높았으며 황제의 친족에 한정된 일이기는 하나, 여성이 행정과 군사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류층 여성들은 주로 중매 결혼을 하고 가문의 이해 관계 때문에 정략 결혼을 하는 일이 많았지만, 중하류층 여성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요에서는 한인들이 중시한 처녀성 같은 것은 무시했고, 요의 미혼 여성들은 한인들이 보기에는 '문란한' 수준의 성생활을 즐겼다. 그리고 그녀들은 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는데, 노래의 내용은 자신들의 아름다움과 가사 능력, 자기 집안의 지위에 대한 것들이었다. 요에서는 약탈혼(掠奪婚)이 성행해서 거란족 남성들은 한인과 거란인 여성을 가리지 않고 '약탈'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약탈혼'이 단순히 결혼 준비 과정 중 하나로 일종의 퍼포먼스[91]였으나, 일부 경우에는 진짜로 여성을 납치해서 강간하는 것이라 문제가 되었다. 거란인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소수민족들에게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수의 한인 여성들은 기존의 성관념을 따랐을 것으로 보이나, 일부는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구는 요 태조 때 40만 호 · 200만 명, 태종대에 57만 호 · 280만 명이었으며 성종 초에 600만, 도종 중기에 750만, 천조제대까지 900만 ~ 1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전체 인구에서 민족간의 인구 비율은 거란인을 75만, 한인을 200 ~ 300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송 사신 허항종의 『봉사여정록』에 따르면,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중국어로 대화를 했다고 하니 중국어가 공용어처럼 쓰인 듯 하다. 거란인들이 지배층이긴 하지만, 인구의 대다수가 한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렇게 변한 것으로 추정되며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나는 중국어를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지만, 중국어로 말하지는 않는다."고 신하들 앞에서 이야기한 일, 여러 거란인 관료와 문인들이 한시와 한문학에 정통했던 것을 생각해볼 때, 거란인들도 중국어를 익히고 사용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9. 문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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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시대에 그려진 벽화들이다. 당시 의복, 생활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10. 종교[편집]


거란족은 민족 고유의 샤머니즘과 텐그리즘 신앙을 믿어서 하늘, 땅, 태양, 산, 강 등을 모두 숭배하고 중요한 일에는 하늘과 땅의 신들과[92]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거란족은 여러 신들 중에서도 특히 태양을 크게 숭배해서 태양이 뜨는 동쪽을 중요시하고 제사는 모두 동쪽을 향해 지냈다.[93] 그리고 흑산(黑山)을 영혼이 돌아가는 곳이라 믿고, 흑산의 산신이 모든 영혼들을 관장한다고 생각해 매년 동지날마다 흑산에 제사를 지냈으며 제사를 지내지 않고는 감히 흑산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또한 거란인들은 지금의 시라무렌 강과 요하가 만나는 백음(白音) 지역에 있는 목엽산(木葉山)을 전설상의 시조인 기수가한의 발상지로 보아 목엽산을 경배하고 흑산과 마찬가지로 매년 제사를 지냈다. 이는 불교를 수용한 뒤에도 마찬가지라서 요의 황제들은 불교 사찰과 불상을 목엽산에 지을지언정, 목엽산에 대한 제사는 항상 충실하게 지냈다.

거란인들은 어렵 활동을 할 때에 처음 잡은 것은 무조건 텐그리를 비롯한 여러 신들에게 제물로 바치고 제례에는 꼭 백마와 백양, 백조 같은 하얀색의 동물을 제물로 썼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산 속에 안치한 뒤, 3년이 지난 후에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 이러한 풍장 문화는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뒤부터 장례를 치른 뒤에 곧바로 매장을 하거나 시신을 수습한 뒤에 화장을 하는 식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거란인들이 인신 공양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순장 문화가 있어 생전 고인과 친분이 깊던 이들이나 배우자, 지원자, 노예들을 함께 묻었다. 사회 항목에 서술했듯이 순장 문화는 정적을 제거하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다만, 요의 순장 문화는 순장을 극도로 증오하는 한인, 발해인 유학자들의 강력한 비판과[94] 생명을 중시하는 불교계의 반대가 이어져 점차 사라져갔다.

요가 중앙집권화되고 점점 유 · 불 · 도의 영향력이 강해져 거란인들이 샤머니즘과 텐그리즘을 버리고 불교로 경도되었다는 학설도 있지만, 요는 멸망하는 그날까지 고유의 신앙을 유지해 태무(太巫)를 임명하고 황제의 즉위식과 주요 행사에 꾸준히 텐그리즘 제례를 진행했다. 따라서 불교에 경도되긴 했어도 텐그리즘을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고 종교 혼합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게 옳을 것으로 파악된다.

거란인들은 건국 이전부터 한인 지식인들을 흡수하고 유학자를 비롯한 종교인들을 포로로 끌고 와 유목도성에 살게 했기 때문에 유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 태조를 비롯한 요의 황제들은 유학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공자에게 존경을 표했다. 건국 초기에 태조는 역사적으로 큰 업적이 있는 사람들을 정해 제사를 지내려 했는데, 태자 야율배가 ''공자는 대성인으로 만세에 존중받을 사람이니, 마땅히 가장 먼저 해야 한다.'고 진언해서 태조는 수도 상경에 공자의 사당을 짓고 직접 제사를 지냈다. 심지어 요의 수뇌부 다수가 유학의 도덕 규범을 인재 임용과 도덕 수양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요는 유교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95]

한인 지식인, 관료들도 거란인에게 유학을 전파하는데 적극적이라서 성종 초에 추밀사를 지낸 설방이 서경 무일편을, 시독학사 마득신이 당 고조, 태종, 현종의 행적 중 본받을 만한 것을 성종에게 올리기도 했으며 흥종 때는 추밀사 마보충이 불교에 너무 빠지지 말라고 진언하고 불교를 비판했다. 그리고 도종은 경연관이 『논어』 <팔일>편에 '이적에게 군주가 있더라도 중국에서 군주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구절을[96] '이적'인 자신 앞에서 감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97] ''과거 흉노족은 방탕하고 예법이 없어 오랑캐라 불렀지만, 내가 문물을 배워 기품을 갖춘다면 중화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인데, 무얼 거리끼겠는가?'' 고 말하고, 그 구절을 그대로 해석하라고 명했다. 신료들을 모아놓고 경연을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할 만큼, 도종이 유학에 능통하고 자신감이 넘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요의 황제들은 유교 경전을 배우고 존중했으며 통치에 도움이 되는 점들을 흡수해 국가 운영에 활용하고 유교의 도덕규범을 이용해 인민을 교화했다.

그리고 유교 외에 도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요의 도교는 끌려온 도사들과 한인 도교 신자들이 전파한 것에서 시작한 것으로서 점차 세력을 늘려 상경에는 천장관, 중경에는 통천관이란 도관을 세우고 일부 주와 성에도 도사와 도관들이 많이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또한 일반 백성 뿐만 아니라 일부 거란인 상류층들도 도교를 믿어서 성종은 도교와 불교 모두에 능통했고, 성종의 동생인 야율융유는 동경 유수 시절에 궁관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도원을 설치해 도사들을 데려올 정도로 아주 독실한 도교 신자였다. 이런 식으로 도교가 세를 얻자, 요의 황제들은 일부 고위 도사들을 고위 승려들과 동등하게 예우하고 관직을 하사하기도 했다.[98] 그리고 도교의 전파는 도교 경전에 대한 연구를 유행시켜서 요 초기에 도사 유해선이 도교 경전을 저술하고 야율배가 음부경을 번역한 바 있고, 성종대에는 우전 출신의 장문보가 성종에게 내단서를 바쳤다. 추가적으로 도교는 요의 장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쳐서 요대 고분 중 일부에서 도교의 사신도가 그려진 석관이나 화상석, 도교의 영향을 받은 벽화나 부장품,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요의 지배를 받던 여러 유목민들은 거란족과 같이 샤머니즘 신앙과 텐그리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나이만, 케레이트, 옹구트 같은 일부 몽골 부족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었다.[99] 그리고 산서, 하북 지역에 요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교회가 발견된 적이 있어서 한인 인구가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밖에도 상경에 회골영이라는 위구르인 거주 구역이 있었던 만큼, 위구르인들이 믿는 마니교도 요에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10.1. 불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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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궁사 목탑. 현존 최고(最高) 목탑이다.[100]
요나라 시대 관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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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 다퉁 화엄사의 요나라 시대 불상들. 화엄사의 요나라 불상들은 그 조형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중국의 비너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요는 원래 샤머니즘, 텐그리즘을 신앙하던 민족이나, 연맹 시절부터 중국과 교류한 영향으로 건국 이전부터 불교를 신앙했으며 잡아온 한인 포로들 중에도 승려와 불교 신자들이 많아 한인을 중심으로도 불교가 성장했다.[101] 정부 차원에서는 902년에 개교사(開敎寺)를 세우고 신책 3년(918년)에 상경 임황부에 사찰을 건설하는 등, 불교를 후원했다. 같은 해, 요 태조는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을 선정해 제사를 지내기로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부처를 사당에 모시고 가장 먼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태자 야율배가 혼자 반대하고 공자를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 일이 있다. 이 사건을 통해 거란인 고위층들이 불교를 깊게 믿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다만, 거란인을 비롯한 요의 유목민들은 종교 혼합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를 믿을지라도 텐그리 신앙을 중요시했고 거란인 귀족들은 불교 뿐만 아니라 유교, 도교에도 정통한 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성종, 흥종, 도종인데, 성종의 거란어 이름은 문수보살(文殊菩薩)에서 따온 문수노(文殊奴)이며 성종 자신은 불교 뿐만 아니라 도교 교리와 철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유학에 대한 이해도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흥종도종도 신실한 불교 신자이면서[102] 유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렇듯 초기에도 불교가 성장하고 있었으나, 요의 불교가 급격히 성장하게 된 시점은 연운 16주를 흡수하면서부터였다. 불교계는 황실의 보호와 후원을 받아 사찰 건립이나 불상 조영, 경전 판각 같은 사업을 진행하고 불사를 벌였다. 요 조정은 당제를 모방해 승관 제도를 만들어 승정, 승판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경전에 능한 이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진행해 교리에 정통하고 자질이 뛰어난 승려들을 법사로 임명했다. 또한 5경 뿐만 아니라 각 주군에도 사찰을 설립하여 덕망 있는 승려들로 지역 승려들을 지도하게 하고 경전 연구, 암송, 참선 수행에 힘쓰게 했다. 이러한 조치는 불교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교리에 능하고 신앙심이 깊은 고승들의 수가 늘어나고 교학 연구도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조정은 불교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 허락 없이 사적으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손끝이나 이마를 불로 지지면서 기도하는 등의 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승려들을 승병으로 징집하기도 했는데, 고려-거란 전쟁 시기에 동경 요양부 등지의 승려들을 징집해 참전시켰다. 원래 승려들은 면세와 면역의 혜택을 받지만, 국가가 예외적으로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

요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불교 종파는 화엄종(華嚴宗)이었다. 요의 서남부 국경에 위치한 산서 오대산(五台山)은 예전부터 화엄종의 중심지로 유명했으며 요대에는 국가 전체의 불교 중심지로 군림했다. 또한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로 유명한 화엄 사상이 다민족 · 다문화 국가인 요의 성격에 잘 맞았던 것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민중들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는 정토종(淨土宗), 미륵불(彌勒佛)을 믿는 미륵 신앙을 가장 많이 믿었다. 그밖에도 법상종(法相宗), 율종(律宗), 밀교(密敎), 선종(禪宗)이 존재했으며 아미타불과 미륵불 외에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 약사여래(藥師如來), 관음보살(觀音菩薩)도 인기가 좋았다.[103] 그리고 성종의 이름이 문수보살의 이름을 따온 문수노이고 상술한 오대산이 문수 신앙의 중심지이기도 해서 문수보살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한다. 요는 선종 중심이었던 송과는 정반대로 당대 불교의 계승자로서 교종 중심적이었으며 선종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또한 요의 불교는 동시기 고려와 마찬가지로 귀족적인 성향을 띠었다.

민간에서는 고려에서도 성행한 읍사(邑社)가 나타났다. 여러 지역에서 승려와 불교 신자들이 읍사를 조직해 각종 불사를 벌이고 사찰 건설, 중창, 불상 조영에 참여했으며 신자들은 이러한 활동에 금전이나 물자, 노동력을 제공했다. 다만, 모든 읍사가 이 모든 활동을 진행하는 것은 아니어서 불상 조영에 치중하는 읍사, 사찰에 식량을 공급하는 읍사, 사찰 수리 및 불상 조영을 하는 읍사 등, 한 두 가지 목적만 정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읍사는 빈민 구제나 구휼과 같은 자선 활동도 벌였으며 읍사는 내부적으로 읍장, 읍정, 읍록 등의 직책을 두고 각종 업무를 맡겼다. 요대에 가장 성행한 읍사는 1천 명으로 구성된 '천인읍사(千人邑社)'이며 사찰에서 나서서 읍사를 조직하고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행사에 읍사를 참여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읍사의 활동과 지원으로 불사가 더욱 성행하게 되고 신자들의 대중적 지지를 통해 불교 신앙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사회적으로 불교계는 빈민 구제와 구휼, 기근과 홍수 같은 재해에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한 원조 같은 자선 사업과 불교 교리와 문자, 유학을 가르치는 교육 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며 경제 항목에 상술했듯이 동 시기 유럽의 수도원들처럼 농경에 힘쓰고 지역 주민들에게 농업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요대의 유명한 승려로는 화엄 사상을 토대로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주장한 선연(鮮演), 인도 출신으로 국사가 된 자현, 대각국사 의천과 시를 주고 받은 지길 등이 있다.[104] 이러한 유명 사찰의 승려들은 황제와 시를 주고 받으며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다. 요 후기에는 이전보다 더 거대한 사찰과 불상의 건립, 대장경 간행이 이루어지고 유명 승려들이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불교가 발전했던 만큼 요는 수많은 탑을 세웠다. 특히 백탑(하얀 탑)을 많이 지었으며 현재까지도 14개이 탑들이 남아 있다. 요의 불탑 건축 문화는 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훗날 금나라의 불교 건축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 시의 광우사 백탑[105] 역시 금나라 세종 때 지어진 요나라 양식의 백탑이라는 주장이 있다.

황실의 국찰인 산시성의 화엄사는 금나라 때 다시 중건하긴 했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며 고려도 대장경을 만들 때 요나라 불경을 참조했다.[106] 지금까지 남아있는 요나라 불교 관련 유물, 유적들을 보면 그 규모와 화려함에 거란을 단순히 야만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충격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

요나라 쇠퇴의 원인으로는 권신의 전횡으로 인한 국정의 혼란이 거론되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 불교에 심취한 요나라 황실이 지나치게 많은 액수를 절에 시주했고 불교 관련 잦은 토목 공사가 끊이지 않아 재정 악화가 가속화한 점도 꼽힌다. 요나라 황실은 중, 후반기로 들어갈수록 불심이 아주 깊어졌는데 절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시주는 기본이었고 대규모 불상과 절을 건설하느라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요사에는 도종 때 하루에 3000명이 출가한 기록이 있으며 36만 명의 승려에게 공양을 올렸다고 적혀 있다. 덕분에 요나라는 화려한 불교 문화 유산을 남길 수 있었지만, 동시에 거란 고유의 샤머니즘 신앙이 쇠퇴하고 상무 정신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요 조정에서는 불교계의 구휼과 자선 사업에 많은 기대를 했는데, 요를 방문한 송의 사신,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상당수 사찰이 고리대로 인민을 착취했다고 한다. 상당수 사찰이 고리대로 돈을 불리고 있었다고. 후대에는 비구, 비구니로 출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계(受戒) 내리는 것을 제한했을 정도였다.

후대에 세조 쿠빌라이 칸은 송, 요, 금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요는 불교 때문에 멸망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107], 중국에서 이러한 평가를 오래도록 정설로 인식할 만큼 요대의 불교는 그 명암이 뚜렷했다.


11. 주요 인물[편집]


요 조정에서 활동한 한인 관료로는 요 태조의 참모였던 강묵기(康默記), 조사온(趙思溫),[108] 유성(劉晟), 요의 이한(二韓)이라 불린 한연휘(韓延徽)와 한지고(韓知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대부분 잡혀온 한인 지식인과 억류당한 외교관들이었다. 그리고 항복한 한인 관료 출신으로는 요군에게 공성술을 가르친 노문진(盧文進), 전연의 맹을 중재한 왕계충(王繼忠), 검소한 것으로 칭송받은 장검(張儉) 등이 있다. 또한 이들의 자손들도 대를 이어 관료가 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한지고의 손자인 한덕양이다.

한덕양예지황후와 부부관계였으며 성종 초기에 요의 국정을 총괄한 실력자로 군림했다. 예지황후는 한덕양(韓德讓)을 총애하여 국성을 하사하고 야율융운(耶律隆運)이란 이름을 지어준 것은 물론, 황제와 태후의 직할령인 오르두를 만들 권리도 주었다. 심지어 황제인 성종까지도 그에게 아버지를 대하는 예법을 취할 정도로 한덕양의 권세는 무지막지했다. 황제가 태후의 재혼남에게 아버지를 대하는 예법을 취하는 것이 어이 없이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거란의 전통과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덕양은 살아생전엔 문충왕(文忠王)이란 관작을 받고 죽어서는 장례 규모가 예지황후와 버금갈 정도로 컸으며, 후대에 죄에 연루되어 관작이 깎이거나 부관참시당하는 일도 없어서 청대의 도르곤보다 더 성공했다고 평할 수 있다. 한덕양은 내정면에서는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는 평을 받을 만큼 일처리가 뛰어났으며, 의외로 군사적인 재능도 있어서 송의 북벌군이 남경을 포위하고 공성을 시도하는 것을 잘 막아낸 바 있다. 그러나 한덕양은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 인민들이 그를 싫어했고,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한 송이 2차 북벌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한덕양은 파벌을 조성해 권력 기반을 강화했는데, 이로 인해 붕당의 폐단이 발생해서 요 조정은 한덕양이 은퇴하고 나서도 한덕양파와 왕계충을 중심으로 하는 반 한덕양파 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밖에도 한덕추(韓德樞) · 실방(室昉) · 유신(劉伸) · 양길(楊佶) · 마인망(馬人望) · 대공정(大公鼎) 등의 한인 · 발해인 관료들은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가르치고 세금을 낮춰 인민들의 부담을 낮춰주었으며, 폐단을 없애고 분쟁을 조정해 명성이 높았다.

여기서 실방은 태종대에 과거에 급제해 태종, 세종, 목종, 경종, 성종의 5대를 섬긴 요의 명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마인망은 실무에 밝아 인민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공정하게 조세를 걷고 각종 공사와 민원을 빠르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해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말년에 금군의 공세를 막고 조정의 업무를 맡게 되었다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바람에 세간의 조롱을 받는 신세가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한덕추, 대공정 등도 명신으로 활약했다.

강공필 · 시립애 · 양박 · 우중문 · 유언종 ·조의용 · 좌기궁 · 한기선 등은 요의 관료로서 금에 항복한 자들이다.

우중문은 문예로 유명하며 요 말에 과거에 급제한 양박(陽朴)은 발해 대족 출신으로서 교서랑까지 진급한 관료이다. 요군이 요동에서 대패를 거듭하여 금군이 밀고 들어오자, 양박은 금에 항복하여 금국에 종사했다. 능력이 출중하여 금 태조에게 여러 가지 헌책을 올리고 중용받았으며 요사보다는 금사에 더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다.

한기선은 한지고의 후손으로 금에 항복한 인사이다. 그 능력이 뛰어나고 강직하여 유능한 관료로서 명성을 날렸으며 수십 년 동안 고위 관료로 종사했다. 재밌는 점은 선조인 한지고는 요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후손인 한기선은 금사 열전에 기재되어 있다. 양자 모두 양대 정복 왕조에서 중용받은 한인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거란인 관료 중에는 야율달렬(耶律撻烈), 야율말지(耶律抹只), 야율사진(耶律斜軫), 야율학고(耶律學古), 야율해리(耶律海里), 야율휴가(耶律休哥), 소달람(蕭撻覽),[109] 소배압(蕭排押), 소유자(蕭柳者), 소한가노(蕭韓家奴), 소효목(蕭孝穆) 등이 활약했다. 이들은 모두 인민을 잘 다스리고 치국에 공헌해 명신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며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자들도 있다.

야율휴가는 고량하에서 송의 북벌군을 대파한 명장으로 남경유수(南京留守)와 남면행영총관(南面行營摠管)을 겸임하면서 민 · 군정 양면에서 치적을 남겼다. 군정면에서는 수비군의 복무를 균등하게 배분해 교대로 휴식을 주고, 내정면에서는 농상을 장려하고 군수품을 잘 관리하는 등, 국경 지역을 잘 다스렸다. 야율말지는 개원군 절도사((開遠軍 節度使) 재임 중에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었고, 소효목은 북원 추밀사(北院 樞密使)로 있으면서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요역을 균등하게 할 것을 진언해 조세를 이전보다 더 공평하게 조정했다.

소효목은 송과의 평화 유지를 유지하고 전연의 맹을 지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 송 · 요 양국 사이에서 벌어질 뻔한 전쟁을 막아냈다. 특히 소효목은 거란인이고 대연림(大延琳)이 세운 흥료국(興遼國)을 무너뜨린 장군 출신인데도 같은 거란계 강경파와 군부의 주전론에 반대했으니 식견이 높은 인물로 평할 수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연운 16주의 백성들이 전쟁에 대한 걱정 없이 살고, 남북이 서로 왕래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소한가노와 야율소 등은 동북과 서북 국경 지역을 안정시킬 방안을 제안하고 요역과 세금을 경감해 줄 것을 건의했다.

야율달렬은 남원대왕[110] 재직 중에 부역을 균등하게 부과하고 농사를 권장해 유목민들을 교화했으며, 인구를 늘리고 생계를 개선해서 인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야율해리는 주민 생계를 개선하고 지역을 관대하게 통치해 그가 재임한 뒤부터 인구가 늘어나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소달람도 서북로 초토사를 역임하면서 국경을 안정화하고 지역을 잘 다스려 이름이 높았으며 1004년 침공 때는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서 황제의 기마 군단을 개봉이 보이는 전주까지 이끌었던 명장이었다. 그런 그가 정찰 중에 쇠뇌에 맞아 죽었을 때는 예지황후가 크게 통곡하고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5일이나 조회를 파했으니[111] 소달람의 위상을 잘 알 수 있다.

문예로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는 요사 탁행전에 기록된 소차랄, 야율관노, 소포리불과 요사 문학전에 이름을 올린 왕정, 야율맹간 등이 있다. 여기서 왕정은 도종대에 활동한 사람으로서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고 시문과 정무에 능해 도종대의 제도와 법령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야율을신이 총애하는 애첩과 인척 관계가 있고 야율을신이 죽인 소황후의 비행을 기록한 금초록을 작성해서 야율을신의 당파로 간주받았고 후에 을신이 주살당할 때에 좌천당했다.

야율맹간은 총명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야율을신의 전횡을 여러 번 간하다가 유배당했다. 유배 중에 태자 야율준이 주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해 자신의 심경을 담은 시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에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하고 천조제 초기에 육원부 태보와 고주 관찰사를 지냈다. 육원부 태보 시절에 법령에 구애받지 않고 임의로 일을 처리해 사람들이 비웃었으나, 맹간은 상고 시대에는 문서로 된 법령이 없었으나, 태평성대였고 법령을 이유로 부정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낫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12. 참고 문헌[편집]


1번 ~ 10번 항목까지의 참고 문헌
  • 『정복 왕조의 출현, 요·금의 역사』, 이계지 지음, 나영남, 조복현 옮김.
  •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지음.
  • 『요사』
  • 중문위키, 영문위키, 러문위키 요 왕조 문서
  • 바이두 백과 요 왕조 문서


13. 한국사에서의 관계[편집]


거란과 그들이 세운 요 왕조는 고대 예맥계 국가들과 고려와의 충돌이 잦았다. 초기의 거란인들은 그 세력이 약해 일부 부족이 고구려에 종속한 적도 있고, 거란의 중심 세력인 대하씨 연맹도 고구려와는 별다른 갈등을 빚지 않았다. 그러다, 고 - 당 전쟁을 계기로 대하씨 연맹이 당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고구려와 충돌했다.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고 측천무후가 정권을 잡은 상황에서 영주 도독 조문홰가 폭정을 일삼자, 대하씨 연맹은 봉기했다. 무주와 거란 연맹이 싸우는 틈을 타서 당의 통제에 놓여 있던 영주의 고구려 유민들은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중심으로 결집해 요동으로 도주, 발해를 세웠다.

거란인들은 고구려를 공격한 적도 있지만, 세간의 평이나 나무위키의 여러 항목의 내용과 달리, 거란인들은 요련 연맹 시기까지도 발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다, 발해가 크게 팽창하던 선왕 시기에 이르러 발해와 거란 연맹 간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기 시작하여 요 태조의 치세에는 태조 본인이 발해와는 대대로 원수였다고 이야기할 정도가 되었다.

발해 왕 대인선과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시대에 발해 - 요 양국은 정말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고 서로의 영토를 침탈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요 왕조의 강력한 공세로 요양이 함락당하자, 발해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요양이 무너져 발해의 방어선에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요양을 취한 요군은 이를 이용해 발해에 심한 방어 부담을 가중하고 다방면으로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26년, 요군은 부여부를 급습해 빠르게 발해의 방어 병력을 무력화하고 상경성을 포위, 3일 만에 발해를 멸망시켜 한국사 국가의 만주 지배 역사를 끝냈다.

그러나, 요 왕조는 지나치게 넓어진 국토, 요 태조의 급사, 황위 계승 분쟁, 발해 지방군의 반격, 부흥 세력의 강력한 저항 등의 문제로 인해 발해 고토 지역의 지배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요 왕조는 발해 고토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해서 동란국이란 괴뢰국을 세워 간접 지배하는 형식을 취했음에도 발해 유민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지 못했고 유민들이 결집하여 부흥 운동을 전개할 시간을 허용하게 되었다.

발해의 후속 국가인 후발해, 정안국, 올야국 등의 발해부흥운동 세력들이 발해 고토 지역을 중심으로 할거하고 발해인 장군 연파, 고욕이 반란을 일으켜 부여부를 공격하고 상경 용천부에서 저항했다. 발해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들은 숙여진을 비롯한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력이 발해 고토 지역으로 흩어져 점차적으로 요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 때문에 요는 발해 고토 지역의 발해 유민 세력들을 제압하는데 애를 먹었고, 성종대에 와서야 겨우 발해 부흥 세력들을 모두 제압하고 지속적으로 국경을 침탈하던 생여진 부족들을 복속시킬 수 있었다.

고려의 경우, 나무위키의 관련 항목과 세평과는 달리, 건국 초에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궁예의 태봉 정권 시기에는 요에 보검을 선물하고 2차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한 일이 있고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자, 요 왕조에서는 사절단을 보내 말과 낙타, 양탄자 등을 선물했다. 925년, 고려는 이에 대한 답방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고구려 계승 의식이니 발해는 형제국이니 떠들어 대는 일이 많지만, 후백제와의 전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요양을 장악하고 발해에 공세를 취하는 요 왕조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양면 전선을 자초하는 자살 행위였기 때문에 고려는 현실적인 방안을 취했다. 심지어는 발해가 멸망한 직후에도 요 왕조에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925 ~ 27년 동안 총 4회에 걸쳐 사절단을 보냈다.

다만, 발해가 멸망한 뒤부터 고려 태조는 요 왕조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점점 적대하기 시작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는 나와 결혼했다.", "발해는 친척의 나라다,"는 표현을 후진의 외교관에게 말할 정도로 발해에 대해 우호적인 외교적 수사를 표현했고 발해 유민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기류 변화를 느꼈는지, 요 왕조는 927년에 공산 전투에서 고려가 대패하자, 즉각 후백제에 사절단을 파견했다.[112]

그리고 고려 - 요 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요 왕조에서 보내온 외교관들을 섬에 유배 보내고 선물로 보내온 낙타는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이다. 920년대에는 통일 전쟁의 부담 때문에 요 왕조와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했지만, 만부교 사건이 있던 942년에는 이미 통일을 이뤄 부담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고려 태조는 대단히 강경하고 어찌보면 외교적으로는 심각하게 무례한 일을 벌였다. 이때부터 고려와 요 왕조 간의 관계는 파탄이 나버렸고 3차에 걸친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첫 번째 침공은 원정군 총수인 소손녕서희와 교섭을 진행해 고려가 양국 사이에 놓인 강동6주의 땅을 차지하는 것을 요가 인정하는 대신, 고려는 요와 사대 관계를 맺는다는 조건으로 양국은 화평을 맺었다.

두번째는 요군이 강조가 이끄는 고려의 주력군을 분쇄하고 수도 개경까지 함락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흥화진의 양규에게 전쟁 기간 내내 괴롭힘을 당하고, 전쟁 목표인 고려의 항복, 강동 6주의 반환에 대해서는 달성하지 못해 고려 현종이 입조한다는 조건으로 철군하여 실익이 없었다.

마지막은 강감찬에게 그야말로 참패하고 만다. 여요전쟁 이후, 요는 고려와 화친하고 상호 적대적이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일반적인 사대 관계로 전환했다. 덕분에 금 왕조가 탄생하기 전까지 약 100여 년 동안, 동북아시아는 송 - 요 - 고려 - 서하의 4개국이 서로 균형을 이루고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벌어졌다.

1차 여요 전쟁 직후에는 고려 조정에서 거란어 학습을 지시하고 유학생들을 요에 파견하기도 했다. 종교면에서는 교류가 더욱 활발하여 불교 경전이나 이론 등의 유입이 잦았고 이때 수입한 요 왕조의 불경들은 훗날 팔만대장경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113] 또한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은 송 · 요 양국에서도 인정받는 유명 인사였다.

요의 대군이 출하점(出河店)에서 대패하고, 1115년에 금 왕조가 개창해 요의 쇠퇴가 가시화되자, 고려는 1117년에 압록강변의 보주를 급습해 장악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금 왕조의 수뇌부들이 불편해 하긴 했으나, 요와의 전쟁이 급하다는 이유로 고려와의 충돌을 피했다. 대요수국(후요)의 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고려로 침공해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농성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

나무위키의 일부 항목에서 고려 - 요 관계를 "대등한 관계", 요 왕조에 대한 고려의 사대는 "형식적"이라 평하는 오류를 빚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예컨대 사신을 맞이할 때에 고려 국왕이 예법대로 북면하지 않고 서면하여 상국의 사신이 아닌, 손님을 맞이하는 예법을 취했다는 것을 이유로 명목상으로만 군신 관계를 취했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요 왕조에 보내는 고려의 국서에는 국왕의 성씨와 이름을 그대로 서술했으며 연호도 요 왕조의 것을 사용했다.

게다가 상호 간의 사절단을 보내오는 방식이나 요사에 기록된 고려 사신에 대한 의례, 외교 기록들을 참고하면 중국 왕조와 거의 동일한 형태의 사대 관계를 맺었음이 드러난다. 단순하게 국왕이 서면했다거나, 2차 여요 전쟁 이후에 국왕이 입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요 왕조와의 사대 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14. 요나라가 등장하는 대중매체[편집]


시대적 배경상 거란의 1, 2, 3차 침공이 모두 묘사되며, 한국사 사극 최초로 귀주대첩이 재현되었다. 다만 큰 기대는 하지 말자. 나왔다는 것에 의의를 두면 된다.
여요전쟁 2차, 3차를 심층적으로 다루었기에[114] 요나라가 매우 비중있게 등장한다.


15. 역대 황제 목록[편집]


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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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묘호
시호
(거란식/중국식)
연호
재위 기간
1대
태조(太祖)
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야율억(耶律億)
신책(神冊, 916년 ~ 922년),
천찬(天贊, 922년 ~ 926년),
천현(天顯, 926년)
916년 ~ 926년
2대
태종(太宗)
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야율요골(耶律堯骨)/
야율덕광(耶律德光)
천현(天顯, 927년 ~ 938년),
회동(天顯, 927년 ~ 938년),
대동(大同, 947년)
926년 ~ 947년
3대
세종(世宗)
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야율올욕(耶律兀欲)/
야율원(耶律阮)
천록(天祿, 947년 ~ 951년)
947년 ~
951년
임시
-
-
야율찰할(耶律察割)
-
951년
4대
목종(穆宗)
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야율술율(耶律述律)/
야율경(耶律璟)
응력(應曆, 951년 ~ 969년)
951년 ~
969년
5대
경종(景宗)
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야율명의(耶律明扆)/
야율현(耶律賢)
보녕(保寧, 969년 ~ 979년),
건형(乾亨, 979년 ~ 982년)
969년 ~ 982년
6대
성종(聖宗)
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
야율융서(耶律隆緖)
건형(乾亨, 982년),
통화(統和, 983년 ~ 1012년),
개태(開泰, 1012년 ~ 1021년),
태평(太平, 1021년 ~ 1031년)
982년 ~ 1031년
7대
흥종(興宗)
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야율지골(耶律只骨)/
야율종진(耶律宗眞)
경복(景福, 1031년 ~ 1032년),
중희(重熙, 1032년 ~ 1054년)
1031년 ~ 1055년
8대
도종(道宗)
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야율열린(耶律查剌)/
야율홍기(耶律洪基)
청녕(清寧, 1055년 ~ 1064년),
함옹(咸雍, 1065년 ~ 1074년),
태강(太康, 1075년 ~ 1084년),[115]
대안(大安, 1085년 ~ 1094년),
수창(壽昌, 1095년 ~ 1101년)[116]
1055년 ~ 1101년
9대
-
천조황제
(天祚皇帝)
야율아과(耶律阿果)/
야율연희(耶律延禧)
건통(乾統, 1101년 ~ 1110년),
천경(天慶, 1111년
~ 1120년),
보대(保大, 1121년 ~ 1125년)
1101년 ~ 1125년


16. 추존 황제[편집]


묘호
시호
성명
재위 기간
능호
비고
숙조(肅祖)
소열황제(昭烈皇帝)
야율누리사(耶律耨里思)
-
-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의조(懿祖)
장경황제(莊敬皇帝)
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
-
-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현조(玄祖)
간헌황제(簡獻皇帝)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
-
-
태조 추숭, 야율아보기의 조부
덕조(德祖)
선간황제(宣簡皇帝)
야율적노(耶律的魯)
-
-
태조 추숭, 야율아보기의 아버지
의종(義宗)
문헌흠의황제(文獻欽義皇帝)
야율배(耶律倍)
-
현릉(顯陵)
세종 추숭, 태조의 장자
-
장숙황제(章肅皇帝)
야율이호(耶律李胡)
-
-
목종 추숭, 태조의 3자
순종(順宗)
대효순성황제(大孝順聖皇帝)
야율준(耶律濬)
-
-
천조제 추숭, 천조제의 부친


17. 요나라 계열 국가[편집]



17.1. 괴뢰국[편집]



17.1.1. 동란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동란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2. 잔존국[편집]



17.2.1. 북요(北遼)[편집]


北遼. 존속기간은 1122 ~ 1123.

요나라 최후의 황제인 천조제가 도망간 후 야율대석과 이처온(李處溫)이 연경의 한인 관료들과 함께 흥종의 손자 위국왕 야율순(耶律淳)을 황제로 세워 성립된 정권(국가)이다. 그러나 천조제는 도망갔을 뿐, 재기를 꾀하고 있었고, 요나라와 그 요에서 갈라져 나온 북요는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북요의 영역은 연운16주와 요서일대 였을뿐, 그 이외 지역은 아직 천조제의 통치권이었다. 1122년 야율순이 죽고, 덕비(德妃)가 뒤를 이어 통치했으나 1123년 덕비와 야율대석이 요나라의 천조제에게 항복하고 만다. 이후 자립한 야율아리, 야율출렬이 북요 정권을 계속 이어갔으나 야율출렬이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금나라태종이 연경(燕京)을 점령하여 멸망하였다.


17.2.1.1. 역대 황제[편집]

  • 국성이 같고 서요의 실질적인 전 국가이기에 10대부터 표기한다.
대수
묘호
시호

재위 기간
10
선종(宣宗)
효장황제(孝章皇帝)
야율순(耶律淳)
1122년
11
-
-
야율정(耶律定)
1122년[117]
섭정
-
덕비(德妃)
소보현녀(蕭普賢女)
1122년
12
-
유황제(幽皇帝)
야율아리(耶律雅里)
1123년
13
영종(英宗)
회황제(懷皇帝)
야율출렬(耶律朮烈)
1123년


17.2.2. 서요(西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서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3. 부흥 운동 국가[편집]



17.3.1. 동요(東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동요(국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3.2. 후요(後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후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 사서 둘러보기[편집]





{{{#fff
[ 본기(本紀) ]
1·2권 「양본기1·2(太祖紀一二)」
3권 「양본기3(梁本紀三)」
주황
주우정
4·5권 「당본기1·2(唐本紀一二)」
6권 「당본기3(唐本紀三)」
7권 「당본기4(唐本紀四)」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 이종가
8권 「진본기1(晉本紀一)」
9권 「진본기2(晉本紀二)」
석경당
석중귀
10권 「한본기(漢本紀)」
유고 · 유승우
11권 「주본기1(周本紀一)」
12권 「주본기2(周本紀二)」
곽위
시영 · 시종훈
}}}
[ 열전(列傳) ]
13권 「양가인전(梁家人傳)」
문혜황후 · 원정황후 · 진소의 · 이소용 · 장덕비 · 곽비 · 주전욱 · 주존 · 주우유 · 주우문 · 주우규 · 주우자
14권 「당태조가인전(唐太祖家人傳)」
유부인 · 정간황후 · 신민경황후 · 이극양 · 이극수 · 이극공 · 이극녕 · 이존미 · 이존패 · 이존례 · 이존악 · 이존예 · 이존확 · 이존기 · 이계급 · 이계동 · 이계숭 · 이계섬 · 이계요
15권 「당명종가인전(唐明宗家人傳)」
화무헌황후 · 소의황후 · 위황후 · 왕숙비 · 공황후 · 이종경 · 이종영 · 이종익 · 이종찬 · 이종장 · 이종온 · 이종민
16권 「당폐제가인전(唐廢帝家人傳)」
유황후 · 이중길 · 이중미
17권 「진가인전(晉家人傳)」
고조황후 이씨 · 안태비 · 풍황후 · 석경위 · 석경윤 · 석경휘 · 석중신 · 석중예(重乂) · 석중예(重睿) · 석중고 · 석연후 · 석연보
18권 「한가인전(漢家人傳)」
이황후 · 유빈 · 유승훈(劉承訓) · 유승훈(劉承勳) · 유신
19권 「주태조가인전(周太祖家人傳)」
성목황후 · 양숙비 · 장귀비 · 동덕비 · 곽동 · 곽신 · 곽수원 · 곽손
20권 「주세종가인전(周世宗家人傳)」
시수례 · 정혜황후 · 선의황후 · 부황후 · 시종의 · 시희성 · 시희함 · 시희양 · 시희근 · 시희회

21권 「양신전·1(梁臣傳一)」
22권 「양신전·2(梁臣傳二)」
경상 · 주진 · 방사고 · 갈종주 · 곽존 · 장존경 · 부도소 · 유한 · 구언경
강회영 · 유심 · 우존절 · 장귀패 · 왕중사 · 서회옥
23권 「양신전·3(梁臣傳三)」
24권 「당신전·1(唐臣傳一)」
양사후 · 왕경인 · 하괴 · 왕단 · 마사훈 · 왕건유 · 사언장
곽숭도 · 안중회
25권 「당신전·2(唐臣傳二)」
26권 「당신전·3(唐臣傳三)」
주덕위 · 부존심 · 사건당 · 왕건급 · 원행흠 · 안금전 · 원건풍 · 서방업
부습 · 오진 · 공겸 · 장연랑 · 이엄 · 이인구 · 모장
27권 「당신전·4(唐臣傳四)」
28권 「당신전·5(唐臣傳五)」
주홍소 · 유연랑 · 강사립 · 강의성 · 약언조
두로혁 · 노정 · 임환 · 조봉 · 이습고 · 장헌 · 소희보 · 유찬 · 하찬
29권 「진신전(晉臣傳)」
30권 「한신전(漢臣傳)」
상유한 · 경연광 · 오만
소봉길 · 사홍조 · 양빈 · 왕장 · 유수 · 이업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31권 「주신전(周臣傳)」
32권 「사절전(死節傳)」
왕박 · 정인회 · 호재
왕언장
33권 「사사전(死事傳)」
장원덕 · 하노기 · 요홍 · 왕사동 · 장경달 · 적진종 · 심빈(1) · 왕청 · 사언초 · 손성
34권 「일행전(一行傳)」
정요 · 석앙 · 정복윤 · 이자륜
35권 「당육신전(唐六臣傳)」
36권 「의아전(義兒傳)」
장문울 · 양섭 · 장책 · 조광봉 · 설이구 · 소순
이사소 · 이사본 · 이사은 · 이존신 · 이존효 · 이존진 · 이존장 · 이존현
37권 「영관전(伶官傳)」
38권 「환관전(宦官傳)」
주잡 · 경신마 · 경진 · 사언경 · 곽종겸
장승업 · 장거한
39권 「왕용등전(王鎔等傳)」
40권 「이무정등전(李茂貞等傳)」
왕용 · 나소위 · 왕처직 · 유수광
이무정 · 한건 · 이인복 · 한손 · 양숭본 · 고만흥 · 온도
41권 「노광조등전(盧光稠等傳)」
42권 「주선등전(朱宣等傳)」
노광조 · 담전파 · 뇌만 · 종전 · 조광응
주선 · 왕사범 · 이한지 · 맹방립 · 왕가 · 조주 · 풍행습
43권 「씨숙종등전(氏叔琮等傳)」
44권 「유지준등전(劉知俊等傳)」
씨숙종 · 이언위 · 이진 · 배적 · 위진 · 공순 · 손덕소 · 왕경요 · 장은
유지준 · 정회 · 하덕륜 · 염보 · 강연효
45권 「장전의등전(張全義等傳)」
46권 「조재례등전(趙在禮等傳)」
장전의 · 주우겸 · 원상선 · 주한빈 · 단응 · 유기 · 주지유 · 육사탁
조재례 · 곽언위 · 방지온 · 왕안구 · 안중패 · 왕건립 · 강복 · 곽연로
47권 「화온기등전(華溫琪等傳)」
화온기 · 장종간 · 장균 · 양언순 · 이주 · 유처양 · 이승약 · 장희숭 · 상리금 · 장정온 · 마전절 · 황보우 · 안언위 · 이경 · 이경암
48권 「노문진등전(盧文進等傳)」
노문진 · 이금전 · 양사권 · 윤휘 · 왕홍지 · 유심교 · 왕주 · 고행주 · 백재영 · 안숙천
49권 「적광업등전(翟光鄴等傳)」
적광업 · 풍휘 · 황보휘 · 당경사 · 왕진 · 상사 · 손방간
50권 「왕준등전(王峻等傳)」
51권 「주수은등전(朱守殷等傳)」
왕준 · 왕은 · 유사 · 왕환 · 절종완
주수은 · 동장 · 범연광 · 누계영 · 안중영 · 안종진 · 양광원
52권 「두중위등전(杜重威等傳)」
53권 「왕경숭등전(王景崇等傳)」
두중위 · 이수정 · 장언택
왕경숭 · 조사관 · 모용언초
54권 「풍도등전(馮道等傳)」
55권 「유구등전(劉昫等傳)」
풍도 · 이기 · 정각 · 이우 · 노도 · 사공정
유구 · 노문기 · 마윤손 · 요의 · 유악 · 마호
56권 「화응등전(和凝等傳)」
화응 · 주수은 · 양립 · 두정완 · 장건쇠 · 양언옹
57권 「이숭등전(李崧等傳)」
이숭 · 이린 · 가위 · 단희요 · 장윤 · 왕송 · 배호 · 왕인유 · 배우 · 왕연 · 마중적 · 조연의
(1) 구오대사 진서에서는 심빈(沈贇)으로 표기되며, 신오대사에서는 심빈(沈斌)으로 표기된다.
※ 58권 ~ 60권은 考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 세가(世家) ]
61권 「오세가(吳世家)」
62권 「남당세가(南唐世家)」
양행밀 · 서온
이변
63권 「전촉세가(前蜀世家)」
왕건
64권 「후촉세가(後蜀世家)」
65권 「남한세가(南漢世家)」
66권 「초세가(楚世家)」
맹지상
유은
마은 · 유언 · 주행봉
67권 「오월세가(吳越世家)」
68권 「민세가(閩世家)」
전류
왕심지
69권 「남평세가(南平世家)」
70권 「동한세가(東漢世家)」
고계흥
유민
※ 71권은 譜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 본기(本紀) ]
1·2권 「양본기1·2(太祖紀一二)」
3권 「양본기3(梁本紀三)」
주황
주우정
4·5권 「당본기1·2(唐本紀一二)」
6권 「당본기3(唐本紀三)」
7권 「당본기4(唐本紀四)」
이존욱
이사원
이종후 · 이종가
8권 「진본기1(晉本紀一)」
9권 「진본기2(晉本紀二)」
석경당
석중귀
10권 「한본기(漢本紀)」
유고 · 유승우
11권 「주본기1(周本紀一)」
12권 「주본기2(周本紀二)」
곽위
시영 · 시종훈
}}}
[ 열전(列傳) ]
13권 「양가인전(梁家人傳)」
문혜황후 · 원정황후 · 진소의 · 이소용 · 장덕비 · 곽비 · 주전욱 · 주존 · 주우유 · 주우문 · 주우규 · 주우자
14권 「당태조가인전(唐太祖家人傳)」
유부인 · 정간황후 · 신민경황후 · 이극양 · 이극수 · 이극공 · 이극녕 · 이존미 · 이존패 · 이존례 · 이존악 · 이존예 · 이존확 · 이존기 · 이계급 · 이계동 · 이계숭 · 이계섬 · 이계요
15권 「당명종가인전(唐明宗家人傳)」
화무헌황후 · 소의황후 · 위황후 · 왕숙비 · 공황후 · 이종경 · 이종영 · 이종익 · 이종찬 · 이종장 · 이종온 · 이종민
16권 「당폐제가인전(唐廢帝家人傳)」
유황후 · 이중길 · 이중미
17권 「진가인전(晉家人傳)」
고조황후 이씨 · 안태비 · 풍황후 · 석경위 · 석경윤 · 석경휘 · 석중신 · 석중예(重乂) · 석중예(重睿) · 석중고 · 석연후 · 석연보
18권 「한가인전(漢家人傳)」
이황후 · 유빈 · 유승훈(劉承訓) · 유승훈(劉承勳) · 유신
19권 「주태조가인전(周太祖家人傳)」
성목황후 · 양숙비 · 장귀비 · 동덕비 · 곽동 · 곽신 · 곽수원 · 곽손
20권 「주세종가인전(周世宗家人傳)」
시수례 · 정혜황후 · 선의황후 · 부황후 · 시종의 · 시희성 · 시희함 · 시희양 · 시희근 · 시희회

21권 「양신전·1(梁臣傳一)」
22권 「양신전·2(梁臣傳二)」
경상 · 주진 · 방사고 · 갈종주 · 곽존 · 장존경 · 부도소 · 유한 · 구언경
강회영 · 유심 · 우존절 · 장귀패 · 왕중사 · 서회옥
23권 「양신전·3(梁臣傳三)」
24권 「당신전·1(唐臣傳一)」
양사후 · 왕경인 · 하괴 · 왕단 · 마사훈 · 왕건유 · 사언장
곽숭도 · 안중회
25권 「당신전·2(唐臣傳二)」
26권 「당신전·3(唐臣傳三)」
주덕위 · 부존심 · 사건당 · 왕건급 · 원행흠 · 안금전 · 원건풍 · 서방업
부습 · 오진 · 공겸 · 장연랑 · 이엄 · 이인구 · 모장
27권 「당신전·4(唐臣傳四)」
28권 「당신전·5(唐臣傳五)」
주홍소 · 유연랑 · 강사립 · 강의성 · 약언조
두로혁 · 노정 · 임환 · 조봉 · 이습고 · 장헌 · 소희보 · 유찬 · 하찬
29권 「진신전(晉臣傳)」
30권 「한신전(漢臣傳)」
상유한 · 경연광 · 오만
소봉길 · 사홍조 · 양빈 · 왕장 · 유수 · 이업 · 섭문진 · 후찬 · 곽윤명
31권 「주신전(周臣傳)」
32권 「사절전(死節傳)」
왕박 · 정인회 · 호재
왕언장
33권 「사사전(死事傳)」
장원덕 · 하노기 · 요홍 · 왕사동 · 장경달 · 적진종 · 심빈(1) · 왕청 · 사언초 · 손성
34권 「일행전(一行傳)」
정요 · 석앙 · 정복윤 · 이자륜
35권 「당육신전(唐六臣傳)」
36권 「의아전(義兒傳)」
장문울 · 양섭 · 장책 · 조광봉 · 설이구 · 소순
이사소 · 이사본 · 이사은 · 이존신 · 이존효 · 이존진 · 이존장 · 이존현
37권 「영관전(伶官傳)」
38권 「환관전(宦官傳)」
주잡 · 경신마 · 경진 · 사언경 · 곽종겸
장승업 · 장거한
39권 「왕용등전(王鎔等傳)」
40권 「이무정등전(李茂貞等傳)」
왕용 · 나소위 · 왕처직 · 유수광
이무정 · 한건 · 이인복 · 한손 · 양숭본 · 고만흥 · 온도
41권 「노광조등전(盧光稠等傳)」
42권 「주선등전(朱宣等傳)」
노광조 · 담전파 · 뇌만 · 종전 · 조광응
주선 · 왕사범 · 이한지 · 맹방립 · 왕가 · 조주 · 풍행습
43권 「씨숙종등전(氏叔琮等傳)」
44권 「유지준등전(劉知俊等傳)」
씨숙종 · 이언위 · 이진 · 배적 · 위진 · 공순 · 손덕소 · 왕경요 · 장은
유지준 · 정회 · 하덕륜 · 염보 · 강연효
45권 「장전의등전(張全義等傳)」
46권 「조재례등전(趙在禮等傳)」
장전의 · 주우겸 · 원상선 · 주한빈 · 단응 · 유기 · 주지유 · 육사탁
조재례 · 곽언위 · 방지온 · 왕안구 · 안중패 · 왕건립 · 강복 · 곽연로
47권 「화온기등전(華溫琪等傳)」
화온기 · 장종간 · 장균 · 양언순 · 이주 · 유처양 · 이승약 · 장희숭 · 상리금 · 장정온 · 마전절 · 황보우 · 안언위 · 이경 · 이경암
48권 「노문진등전(盧文進等傳)」
노문진 · 이금전 · 양사권 · 윤휘 · 왕홍지 · 유심교 · 왕주 · 고행주 · 백재영 · 안숙천
49권 「적광업등전(翟光鄴等傳)」
적광업 · 풍휘 · 황보휘 · 당경사 · 왕진 · 상사 · 손방간
50권 「왕준등전(王峻等傳)」
51권 「주수은등전(朱守殷等傳)」
왕준 · 왕은 · 유사 · 왕환 · 절종완
주수은 · 동장 · 범연광 · 누계영 · 안중영 · 안종진 · 양광원
52권 「두중위등전(杜重威等傳)」
53권 「왕경숭등전(王景崇等傳)」
두중위 · 이수정 · 장언택
왕경숭 · 조사관 · 모용언초
54권 「풍도등전(馮道等傳)」
55권 「유구등전(劉昫等傳)」
풍도 · 이기 · 정각 · 이우 · 노도 · 사공정
유구 · 노문기 · 마윤손 · 요의 · 유악 · 마호
56권 「화응등전(和凝等傳)」
화응 · 주수은 · 양립 · 두정완 · 장건쇠 · 양언옹
57권 「이숭등전(李崧等傳)」
이숭 · 이린 · 가위 · 단희요 · 장윤 · 왕송 · 배호 · 왕인유 · 배우 · 왕연 · 마중적 · 조연의
(1) 구오대사 진서에서는 심빈(沈贇)으로 표기되며, 신오대사에서는 심빈(沈斌)으로 표기된다.
※ 58권 ~ 60권은 考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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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가(世家) ]
61권 「오세가(吳世家)」
62권 「남당세가(南唐世家)」
양행밀 · 서온
이변
63권 「전촉세가(前蜀世家)」
왕건
64권 「후촉세가(後蜀世家)」
65권 「남한세가(南漢世家)」
66권 「초세가(楚世家)」
맹지상
유은
마은 · 유언 · 주행봉
67권 「오월세가(吳越世家)」
68권 「민세가(閩世家)」
전류
왕심지
69권 「남평세가(南平世家)」
70권 「동한세가(東漢世家)」
고계흥
유민
※ 71권은 譜에 해당. 신오대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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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란어 발음은 모스 키타이 구르(Mos Kitai gur)로 재구되기도 한다. 거란국을 거란 문자 대자로 표기한 예시[2] 907년 야율아보기가 거란을 통일. 칭제한 것은 916년부터이다.[3] 발음은 홍디(hong-di), 그 외 가한(可汗)을 뜻하는 하안(ha-an)이라는 고유 군호도 있었다. 이하 주석의 '거란 문자의 발음' 출처 참고[4] 거란 발음으로는 '야루드'에 가깝다[5] 927년부터 발행한 천현통보(天顯通寶)부터 1120년까지 발행한 천경원보(天慶元寶)까지.[6] 거란 문자 소자 표기[7] The Khitan Language and Script(2009), Ken[8] 전한과 후한을 단일 왕조로 보고 중간의 신나라까지 합치면 한나라가 425년으로 단연 1위이다.[9] 한나라와 마찬가지로 북송과 남송을 합쳐서 보면 319년으로 2위이다.[10] 아골타가 말한 요는 여기서 거란을 의미한다. 아골타는 이 말을 남길 때에 요와 거란이란 단어를 동일시했다.[11] 흔히 키탄이 거란의 원음이고 키타이는 중앙아시아인들이 붙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이신기오로 울히춘(ᠠᡳᠰᡳᠨ ᡤᡳᠣᡵᠣ ᡠᠯᡥᡳᠴᡠᠨ, 愛新覺羅 烏拉熙春)의 연구에 따르면 거란은 키타이로 재구된다. 논문 참조 또한 거란 문자로 키드-운-이(Qid-un-i)로 읽히기도 한다. 거란 문자의 발음[12] 아관(牙官. 衙官)이라고도 부른다. 요련 연맹 시기에는 이리근(夷離菫)이라 불렀다.[13]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대항한 사람이나 역적의 이름을 개명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진충과 손만영의 이름을 개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성씨도 개명시키던 측천무후가 이진충의 성씨는 갈아치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하의 이원호를 비롯해 국성을 받은 인사들은 반란을 일으키면 바로 국성을 회수당하고 예전의 성씨를 붙여줬는데, 이진충의 조부인 대하굴가(大賀窟哥)가 당에 귀순하면서 받은 당의 국성인 이씨(李氏) 성은 갈아치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입장에선 전조(前朝)인 당의 국성까지 갈아치울 이유는 없었던 듯하다.[14] 주 - 거란 전쟁의 추이를 살펴보던 돌궐 제2제국의 묵철가한(默啜可汗)은 거란에게 참패를 거듭하던 주와 교섭하여 하서 지역의 돌궐인들을 돌려받는다는 조건으로 주에 원병을 제공했다.[15] 키르기즈가 위구르를 멸망시키고 무주공산이 된 몽골 초원을 차지하지 않은 것은 위구르 제국을 무너뜨린 전염병과 기온 하강에 따른 초원의 황폐화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6] 카마그 몽골과 타타르, 나이만, 케레이트, 메르키트를 아우르는 몽골 부족들을 이르는 말[17] 아보기가 황태자 야율배를 동란국왕으로 삼은 것은 일종의 거란 – 발해 동군 연합 정권을 구성하려 한 시도였다고 파악하는 학설도 있다.[18] 원래는 일석이조였다. 황위 계승 투쟁에서 패배해 후당으로 망명한 야율배였지만, 그래도 조국에 대한 애착은 남아 있어 요 태종과 내응하여 요군의 침공을 도왔다. 다시 조국의 품으로 귀환하면 되는 찰나에 이종가가 같이 현무루(玄武樓)로 올라가 자살하자는 것을 거부했다가 주살당했다.[19]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018년 5월 출간/ 97~98쪽.[20] 원문: 我不知中國之人難制如此! 한글 음 : 아부지 중국지인 난제여차! 출처 : 자치통감 286권. 후한기 1. 실제로 학사 장려(張呂)가 태종이 지적한 자신의 잘못들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헌책을 올렸으나, 태종은 듣지 않았다.[21] 양계업의 재능을 아까워한 성종과 요의 수뇌부들이 여러 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양계업은 이를 거부하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다 죽었다.[22] 이렇게 평화 협정을 맺긴 했지만, 송은 워낙 요를 얄미워해서 북송 말기를 배경으로 하는 수호지 등에는 원래 없던 요나라와 맞서는 부분이 추가되기도 했다.[23] 정복왕조 개념을 제시한 학자[24] 파일:attachment/요나라/liaodynasty.jpg[25] 요의 추밀원이 북면관제에 속해 있고 요사 백관지에 남추밀원을 북면관제의 이부에 해당한다고 기록하여 남추밀원을 북면관의 소속 기관으로 보는 학설도 있으나, 본 문서에서는 남추밀이 남면관의 업무를 맡아보고 소속 관원들도 대부분 한인, 발해인이어서 남면관제로 보는 것이 옳다는 학설을 채택했다.[26] 추가적으로 요사 백관지를 살펴보니 예부가 존재한 것으로 나오고, 일부 서적에서는 중서성이 당말 ~ 송대와 마찬가지로 기능을 상실했다는 내용이 나와서 중서성과 예부의 권한과 기능 차이, 요대 중서성의 기능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후에 내용을 수정, 보충하겠습니다.[27] 백습은 선비 또는 투르크 계열로 알려진 민족으로 문화는 거란과 유사하고 당대부터 해족에 복속해 점차 해인들과 융화되었다.[28] 아마, 송의 심관원(審官院)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추정한다. 송은 이부에서 인사권을 발령해도 심관원의 심사를 거쳐야 최종적으로 임용이 이루어진다.[29] 말기인 도종대까지도 이러한 폐단이 이어졌고, 발생하는 빈도도 적지 않았다. 3소 중 한 명인 소철(蘇轍) 또한 사신으로 오면서 요의 법 제도가 가진 폐단을 지적한 바 있다. '북조(요)의 정치는 거란인에게는 관대하고 연인(연운 16주인, 한인)에게는 모질었는데, 대개 옛 제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산전(山前)에 있는 여러 주의 기후(祇候)와 공인(公人)을 방문했을 때, 서민이 싸워 살상한 죄에 대한 판결은 폐해가 많았으나 강한 집안이나 부자에게는 이와 같지 않았다.'[30] 사실 이런 문제는 요나라 이후에 들어선 정복왕조인 원나라와 청나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원나라 시절, 지배계층인 몽골족이 한족을 죽이면 당나귀 한 마리 값만 물어내면 죄를 용서받았으나 한족이 몽골족을 죽이면 기본이 사형이었다. 또한 청나라 시절에도 지배 계층인 만주족 팔기군 병사 한 명이 무려 도시의 시장을 구타했는데도 무죄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이유는 그 시장이 피지배계층인 한족이었기 때문이었다.[31] 요는 발해인들이 용맹하고 무용에 뛰어난 강병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선봉에 세웠다. 죽게 만드려고 선봉에 보낸 것은 아니다.[32] 거란 오원부가 북대왕원, 육원부는 남대왕원으로 불렀다는 백관지의 내용이 있어서 '대왕원'과 '대왕부'가 다른 기관인지에 대해 조사한 후에 내용을 수정하겠습니다.[33]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기 위해서 송과 연결된 남경 일대의 교통상의 요충지에는 기병의 이동을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논 농사를 금지할 정도였다. 이 금지령은 전연의 맹을 맺은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고 말기가 되어서야 폐지했다.[34] 1004년 송 - 요 전쟁 때는 4월에 출병해서 늦가을에 전주에 도착할 때까지 송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35] 원래 요에는 도(道)가 없는데 요사의 편찬자들이 오류를 범해 도가 있던 것처럼 서술했다는 학설도 있으나, 이 문서에서는 일단 요가 도를 편성한 것으로 서술한다.[36] 당, 송처럼 향리제(鄕里制)를 실시하고 향촌 조직인 인보를 구성했다는 내용은 찾을 수가 없어서 향촌 지역은 조금 느슨하게 마을 단위로만 관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추가 조사 후에 수정하겠습니다.[37] 석렬은 적게는 몇 십호, 많게는 몇 백호가 있으며 1천 호를 넘기는 경우도 있다.[38] 수비할 지역과 이용할 수 있는 목초지는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했다.[39] 다만, 영주가 두하주의 관리들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주세를 제외한 모든 부세를 영주가 수취했다는 내용도 있다. 아마, 초기 단계에는 이런 식이지 않았을까 싶으며 추가 연구 후에 수정, 보충할 예정이다.[40] 여기서의 횡장은 야율씨의 방계 황족들로 구성한 부족만을 의미한다.[41] 사족으로 3주에는 발해인들도 보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발해인들이 건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온돌이 발굴되기도 한다.[42] 케레이트는 몽골계인지 투르크계인지에 대해서 이론이 많은 민족이다. 투르크계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키르기즈나 위구르계로, 몽골계로 추정하는 학자들은 9성 타타르의 분파로 본다. 지배층은 투르크계, 피지배층은 몽골계로 파악하는 학자도 있다.[43] 말과 모피를 주고 유목민들의 생필품인 철기와 주요 무역 결제 수단인 비단을 받았다. 그리고 대상단 호위로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44] 그래도 야율대석이 금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진주로 탈출할 때에 운기라트 부족이 야율대석을 지원해주기도 했다.[45] 독자 연구 : 요사 식화지에서 이를 선정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송 왕조에서는 중앙 정부가 대체품의 가치를 임의로 조정해 규정된 세금 납부량보다 몇 배 이상 많은 재화를 갈취하는 일이 빈발했으므로 요 왕조에서도 이런 식의 착취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46] 요사와 고려사에 고려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왔다.[47] 송의 소작농이나 요의 소작농이나 바쳐야 하는 소작료는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자연구 : 동 시기 비잔틴의 소작농들은 토지세를 내지 않고, 송도 지주가 토지세를 전가하는 일은 있어도 원칙적으로는 소작농이 토지세를 내지 않는데, 요의 경우에는 소작농이 토지세도 납부한다는 점에서 요 조정이 송처럼 소작농 보호를 하지 않았거나, 지주의 입김이 강해 국가가 이것을 인정했거나, 송처럼 원칙적으로는 토지세를 내지 않지만, 지주가 전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48] 사족으로 비슷한 시기의 송도 범중엄이 경력 신정을 단행해 국가를 개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마인망이 시행하려 한 모역법은 송의 왕안석이 실시했다.[49] 농민과 유목민들 사이에서 자주 발생하는 분쟁이 농지와 목초지의 경계선 문제와 토지 침탈 문제, 그리고 가축의 농지 훼손 문제인데 요의 황제들은 농업이 주는 이익과 농민들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분쟁에서 주로 농민의 편을 들어주었다.[50] 요의 초원 지역은 케룰렌 강과 시라무렌 강, 요하, 아르군 강이 흘러서 수초가 풍부했기 때문에 목축업을 하기 적합했고, 요의 중심부인 상경과 그 인근 지역도 토지가 비옥해 농업 뿐만 아니라 목축업을 하기에도 알맞았다.[51] 세금으로 걷은 양 중에 일부는 봉양(俸羊)이라고 해서 관료들에게 급료로 주기도 했다. 양과 말 다음으로 많이 키우는 가축은 소와 낙타였다. 그리고 유목민들의 영향을 받아서 요의 한인들 중에도 목축업을 하는 이들이 많았고, 이들은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로 양과 말의 보유량에 따라 빈부를 정했다.[52] 다만, 이 기록은 1086년(도종 대안 2년)의 것인데, 1083년(도종 태강 8년)에 가축의 태반이 상한 상태였기 때문에 100만은 과장이고 수십만 두를 보유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53] 야율대석의 군목 '징발'은 의도치 않게 금을 엿먹이기도 했다. 파죽지세로 요를 멸망시킨 금군은 요의 군목을 뒤져 군마 손실분을 벌충하려 했는데, 야율대석이 이미 다 털어가 버렸으니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나중에 금군이 개봉을 취하고 하남과 회수 일대를 휘저을 때는 군마 손실이 누적되고 전투력이 떨어져 곤란을 겪었으니 야율대석의 '큰 그림'이 제대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54] 채집의 경우, 삼림 지대의 민족들은 호박과 송진, 과일, 석청, 밀랍 같은 것들을 채집하고 해안 지역의 민족들은 진주, 호수와 하천, 강에 사는 민족들은 담수 진주와 사금을 채취했다.[55] 몽골 오고부 지역은 큰 물고기가 잡혀서 주민들은 이것을 양식으로 삼았다.[56] 거란인들은 뿔피리로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불러들이는 식으로 사슴을 사냥하기도 했다.[57] 송의 사신 소송은 겨울만 되면 요의 땅은 사냥하는 곳이 된다는 기록을 남긴 적 있다.[58] 사족으로 북쪽 추운 지방에 사는 민족들은 눈이 너무 많이 오면 사냥하다 몸이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삼림 지대에서 말 대신 스키를 타고 다녔다.[59] 요 성종과 소태후가 직접 고기 잡이를 하는 일도 있었고, 요의 황제가 철갑상어를 낚는 일도 있었다.[60]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몽골의 부족들과 위구르를 정벌할 때 수천 마리의 동물을 잡아 군사들의 식량을 충당한 적이 있고 요 태종도 순행하면서 경기병 수천 명과 사냥을 한 일이 있다.[61] 이곳에 사는 한인의 대부분은 연운 16주와 하북 출신이었다.[62] 남시와 북시 가운데에는 간루(看樓)가 있다. 간루는 성문루 내지 망루로 보인다.[63] 태종대에 석경당이 바친 동전을 쓰거나 유인공이 북경의 대안산에 숨겨둔 동전을 찾아낸 적도 있고, 전연의 맹 이후에는 국경 무역을 통해 송의 동전을 꾸준하게 수입했다.[64] 요에 사신으로 간 소철은 도로 환경이 나빠서 하루에 30km 이상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마차 보다는 걷는 일이 많아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길이 험해 작은 수레들은 쉽게 파손되고 큰 수레들은 진창이 된 길에 빠져서 이용하기 힘들었다고 평했다.[65] 남당과의 교역 사례로는 요 태종 때 사신을 남당에 파견해 선물을 주고 3만 마리의 말과 300필의 말을 팔아 비단과 약, 차를 구매한 일이 있다.[66] 송은 요와의 국경 무역에서 거래하는 상품의 가치를 시세보다 조금 더 후하게 쳐주었다.[67] 개인이 사적으로 만든 사차(私茶)와 사적으로 유황, 염초, 명반을 판매하는 것을 통제했다. 국가가 관리하는 차와 유황, 염초, 명반은 허용했다.[68] 그것도 위야가 이미 죽어서 시집을 찾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수소문해서 구해줬다.[69] 야생마 가죽과 호피는 요에서도 진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다른 가죽을 염색해 호피로 사칭을 하는 일도 있었다.[70] 발해 멸망 이전에도 아보기는 발해와의 전쟁 중에 잡아온 포로들 중에 야금 기술을 아는 자들을 모아서 제철업에 종사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요주 장락현의 발해인 1천호가 철을 생산하고 납부한 것이다.[71] 이들은 부로 승격된 이후에도 철을 세금으로 냈는데, 요가 이런 기술에 특화된 부에는 생산물을 세금으로 걷었던 것으로 보인다.[72] 당에 비해서 개선되긴 했지만, 송의 장인들은 그 지위가 낮고 장인이란 것을 암시하는 문신까지 새기는 일도 있어 한계점이 명확했다. 사족으로 대명 안찰사를 비롯한 여러 중국 사극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장인과 목수들이 공공 사업의 입찰에 참여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이는 실제 사례를 참고한 것으로 고증에 맞다고 할 수 있다.[73] 독자 연구 : 여러 서적과 자료에서 관영 공방의 장인들은 관노비였다고 지적합니다. 다만, 성종이 중경 건설을 위해 건축, 토목공들을 모집한 일, 거란인 장인의 존재, 한인 직공들을 각 지역에 파견한 일, 상술한 갈술석렬의 면천 같은 사례가 있어서 국가에서 동원하는 장인들이 모두 노비는 아니었을 것 같기는 합니다.[74] 대부분의 지역이 철산지로 유명하나, 대표적인 지역을 한 군데 지목하자면, 발해 철리부(鐵利府)에 속한 광주(廣州)는 요에 넘어가서 철리부가 철리주(鐵利州)로 개명된 뒤에도 철 생산량이 많기로 유명했다.[75] 廣濟湖, 또는 학랄박 鶴剌泊, 대염박 大鹽泊, 지금의 내몽골 달포소염지. 즉, 소금호수[76] 송은 인종 시기에 다시 한 번 더 소금 전매를 재개하려 했지만, 여정과 장방평 등의 관료들이 전매를 실시하면 소금 값이 올라 하북 인민들의 원망을 살 뿐만 아니라 요의 소금 밀매업자들이 날뛸 것이고, 이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면 송 · 요 양국 간의 평화가 깨질 것이라 진언해서 인종은 하북로에서의 소금 전매를 포기했다.[77] 요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세운 동란국에 공물로 아마포 10만 단을 요구한 것을 발해의 직조 기술이 높았던 증거로 보기도 한다.[78] 송 진종은 건국 초에 받은 요의 직물과 성종에게 받은 직물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초기의 것은 거칠고 수수한 반면, 성종에게 받은 것은 섬세하다고 분석하고 연운 16주에 속한 유주에서 전부 생산한 것으로 판단했다.[79] 나문사직물 생산은 송대가 최고 수준이다.[80] 도종이 칙령을 내려 남경의 민간에서 사적으로 황제가 사용하는 비단을 직조하지 못하게 금지했던 것으로 보아 남경의 기술 수준이 아주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정은 남경에서는 염 · 철세를 비단으로 대납하는 것을 허용하여 비단을 추가로 확보하기도 했다.[81] 중기가 되면 당과 오대의 영향이 감소하고 이웃한 송의 영향이 강해졌다.[82] 발해 삼채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83] 당삼채는 여러가지 색을 썼으나, 주로 황색 · 녹색 · 백색이다.[84] 초기의 계관호는 아예 가죽 부대 끈에 있는 봉제 표시까지 표현했다.[85] 위구르와 중앙아시아 투르크인들과 교류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손잡이 달린 잔은 원래 중국에서도 당대 초기까지 제작하다가 이후로 사라진 도자기이다.[86] 국영 공방에서 마차 장인이나 목공예 장인으로 일하는 발해인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거란인들은 해인들이 자기들보다 더 마차를 잘 만든다고 생각해서 거란인 장인이 만든 것보다 해인 장인이 만든 마차를 더 선호했다.[87] 독자연구 : 성종대에 발해만을 통해 식량을 수송하자는 계획을 논의했던 것으로 보아 많은 화물을 수송할 수 있는 큰 배도 건조할 수 있고, 해운업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88] 후대의 원 왕조도 군역 때문에 유목민들이 몰락하여 군사력이 약화되는 문제로 고생했다.[89] 요 태종이 개봉에서 연운 16주로 퇴각한 것에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순흠 황후 세력이 자신의 부재를 틈타 본토에서 세력 확장을 꾀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90] 서북 지역은 요의 가장 중요한 국경 지역 중 하나로서 이 곳을 수비한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임무였다. 아무리 친족이라지만, 이 임무를 여성인 소호련에게 부여했다는 것은 요가 다른 중국 왕조들보다 여성 임용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91] 여성이 '약탈'에 합의하면, 남성은 여성을 '약탈'하고 서로 관계를 맺었으며 그 뒤에 여성의 집으로 가서 부모에게 서로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를 배문(拜門)이라고 한다.[92] 거란족이 믿는 천신과 지신은 흰말을 탄 남성과 파란 소를 탄 여성의 모습을 한 존재였다.[93] 이를 '제동(祭東)'이라 하며 거란인들은 유르트를 세울 때에도 동향을 향하게 했다. 이는 의례에도 적용되어 중국의 예법에서는 황제가 남면하지만, 요의 황제들은 동향을 향하고 신하들은 남, 북면에 입시했다.[94] 유학의 개조인 공자는 순장을 대체하는 인형인 용조차 극렬하게 비판했으며 유학자들은 공자를 본받아 시대를 막론하고 순장 제도를 강력하게 반대했다.[95] 야율아보기 시절에 역사 기록을 맡은 야율상가도 '사단오륜은 정치와 교육의 근본이고, 육부삼사는 백성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과 같다.'고 했으며 후대의 인물인 야율초재는 『회고일백운』란 시를 쓰면서 '요는 중국의 제도를 존중했다.'는 내용을 적었다.[96] 원문 :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한글 음 : 이적지유군, 불여제하지망야. 해석 : '오랑캐에게 군주가 있더라도, 하가 망한 것만 못하다.'[97] 북위의 최호가 선비족의 역사를 한인의 입장에서 서술했다가 태무제와 선비족의 분노를 사서 그 일족들까지 주살당한 전례가 있고, 도종처럼 '한화'된 '이민족' 황제 앞에서 이적 운운하는 것은 죽고 싶어 환장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후대의 청 왕조 시절에도 이러한 '사상' 문제 때문에 문자의 옥이 여러 번 일어나 한인 지식인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만큼, 정복 왕조의 황제 앞에서 '이적'을 논하는 것은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98] 성종이 도사 풍약곡에게 태자중윤 직을 수여한 사례가 있다.[99] 나이만과 케레이트 같은 유력 몽골 부족들이 기독교를 믿었다는 것이 상당히 뜬금 없이 들릴 수도 있는데, 회창의 폐불령에 타격을 입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북중국과 초원으로 탈출해 몽골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 일부 부족장들이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당시 몽골 초원에는 상당한 숫자의 기독교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100] 다만, 완공은 금나라때 되었다고 한다.[101] 발해인들도 독실한 불교 신자들이어서 발해의 영향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102] 도종은 아예 산스크리트어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황제들이 호불 군주였던 점은 여요전쟁 이후 고려와 요나라 불교계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103] 거란인의 민족 성산이며 텐그리 신앙의 중심지인 목엽산에 관음상을 세우고 민족 수호신으로 삼을 정도였다.[104] 도종 역시 의천으로부터 원효의 저술을 받아 읽고 대승기신론소를 극찬한 바 있다. 사실 의천은 요나라에서도 유명 인사라 도종의 국사로 추증되기도 하고 고려에 오는 요의 사신들이 의천을 만나고 싶어했다.[105] 요양(랴오양)에 있어 요양 백탑이라고도 부른다.[106] 송의 대장경 출간에 맞대응해 요는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거란 대장경을 출간했고 이 대장경은 문종 때부터 요나라 사신들을 통해 고려로 들어오기 시작한다.[107] 아이러니하게도 쿠빌라이 칸 본인부터가 종파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였다.[108] 조사온은 순흠황후와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순흠황후의 역공에 걸려 순장당할 뻔했다가 살아남은 인물이지만 결국에는 자기 집에 날아온 운석에 맞아 죽었다.[109] 소달람은 소달름(蕭撻凜), 또는 소달람(蕭撻覽)이라 부르며 이 문서에서는 편의상 소달람을 채택한다.[110] 김용의 무협지, 천룡팔부의 주인공 소봉이 요 도종으로부터 받은 그 직책이다.[111] 원래 대신이 죽었을 때는 조회를 3일 파하는데, 곽광과 같은 권신이나 뛰어난 명신들은 예외적으로 조회를 5일 파하기도 했다.[112] 이 때 사절단을 보낸 것과는 별개로, 신라와 후백제 등은 요 왕조와 이전부터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113] 참고로 발해도 대장경을 만든 적도 있었는데, 이것이 훗날 요나라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다.#[114] 서희가 활약했던 1차는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간다.[115] 혹은 대강(大康)[116] 혹은 수륭(壽隆)[117] 명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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