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당

덤프버전 :

파일:지역당 로고.svg
Партія регіонів
Сильні регіони, міцна країна, багаті люди
강한 지역, 강한 국가, 부유한 인민

러시아어 명칭
Партия регионов
영문 명칭
Party of Regions
한글 명칭
지역당
창당일
1997년 10월 26일
해산일
2014년 (사실상)
후신
야권전선 (사실상)[1]
대표
올렉산드르 예페로모우 (해산 직전)
볼로디미르 리바크, 볼로디미르 폐호타, 올가 사모팔로바 (서류상)
이념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권리
사회민주주의
지역주의
유럽회의주의
문화적 보수주의
친러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2]
당원 수
약 45만명 (2013년)
당 색
파란색 (#035A9E)}}}[3]
최고 라다
80석 / 450석 (해산 직전)}}}
청년조직
젊은 지역 (Молоді регіони)
기관지
지역의 시간 (Время Регионов)
홈페이지
파일:지역당 로고.svg

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우크라이나에 존재했던 친러 빅텐트 정당. 당명은 '지구당'이나 '지방당'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며, 명칭이 '지역당'인 고유명사다.

한때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필두로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큰 위세를 떨치던 정당이었으나, 유로마이단 혁명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원투펀치를 맞고 완전히 와해되어버렸다.

2. 역사[편집]


1997년 10월 26일, 볼로디미르 리바크 도네츠크 시장을 중심으로 해 우크라이나 지역 부흥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대회를 열었다. 동년 11월 6일 법무부에 등록되었다. 11월 27일, 제1차 당대회가 개최되었고 1998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의 비례대표 명단과 당 강령을 채택했다.

1998년 1월 13일,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에 우크라이나 지역 부흥당 교섭단체가 설립되었다.

1998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241,262표(0.91%)를 득표해 비례대표 의석을 건지지 못했다. 그러나 도네츠크주 45번 선거구에서 볼로디미르 리바크가 당선되는 등 도네츠크주에서만 지역구 2석을 가져갔다.

1999년 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제2차 당대회에서 199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독자 후보를 내지 않고 무소속 후보인 레오니드 쿠치마를 지지했다. 1999년 여름, 지역 부흥당은 1999년 대통령 선거 쿠치마 후보의 선거기구인 "우리의 선택 - 레오니드 쿠치마"에 합류했다.

2000년 11월 17일, 지역 부흥당과 우크라이나 연대당을 포함한 5개 정당이 합당해 우크라이나 지역 부흥당 "우크라이나 노동 연대"를 창당했고, 2월 21일 법무부에 등록되었다.

2001년 3월 3일, 제3차 당대회에서 당명을 지역당으로 개칭하고 미콜라 아자로우 국세청장을 당 대표로 임명했다. 2001년 12월, 아자로우 대표가 사임하고 볼로디미르 세미노젠코 부총리가 대표로 임명되었다. 곧이어 지역당 당원인 이호르 유시코가 재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

2001년 3월, 지역당의 최고 라다 내 단체인 우크라이나의 지역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01년 3월 20일, 구 연대당 세력을 포함한 일부 세력은 분열의 조짐을 보였고, 200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분열되었다.

200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통합된 우크라이나를 위하여 선거 블록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3,051,056표(11.78%)를 득표하며 비례대표 35석을 획득했고 지역구에서 무려 86석을 쓸어담는 압승을 거두었다. 121석 중 지역당의 몫은 60석이었다.

2002년 11월 21일부터 2004년 12월 7일까지 지역당 당원인 빅토르 야누코비치우크라이나 총리로 재임했다.

2003년 4월 19일, 전당대회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야누코비치는 동부지역 유권자를 의식하여 사민주의적 복지정책과 친러적인 외교정책을 공약으로 내놓았고, 이를 통해 공산당 지지층을 흡수할수 있었다.


2.1.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편집]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전 전체적으로 포퓰리즘적 공약을 추가하면서 좌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는 동부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공산당 유권자를 흡수할 수 있었다.

대선 당시 러시아계 유권자들을 위한 정책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를 제2의 공용어로 제정하고 사회 지출을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연방화를 지지했다.

선거 결과 1차 투표에서 11,008,731표(39.26%)를 득표하며 2위로 결선에 진출했다. 11월 21일, 결선 투표에서 15,093,691표(49.46%)를 득표해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가 1위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곧이어 빅토르 유셴코 후보 측이 선거 결과에 불복해 오렌지 혁명을 일으키면서까지 부정선거를 주장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12월 26일에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12,848,528표(44.20%)를 득표해 2위로 낙선했다. 선거 이후 지역당과 야누코비치 후보 역시 부정선거 증거를 입수해 법원에 선거 무효를 요청했으나 법원이 전부 기각했다.

2005년 4월, 도네츠크주 지역당 주당 대표인 보리스 콜레스니코우가 강요죄로 체포되었다. 지역당은 이를 정치적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나 우크라이나 당국은 콜레스니코우가 실제로 조직 범죄와 연관돼 있다고 주장했다.

2005년, 러시아의 통합 러시아와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2.2. 2006년과 2007년 총선[편집]


2006년 총선에서 8,148,745표(32.14%)를 득표하며 비례대표 186석을 획득했다. 그러나 오렌지 혁명을 주도한 빅토르 유셴코가 이끄는 '우리의 우크라이나'와 율리야 티모셴코가 이끄는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올렉산드르 모로즈우크라이나 사회당이 각각 81석과 129석, 33석을 획득하고,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고작 21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친러 세력은 36석 차이로 패배했다. 그러나 2006년 7월 6일, 사회당의 모로즈 대표가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장 직을 가져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우크라이나 측이 반발해 사회당이 오렌지 연합에서 탈퇴해 지역당, 공산당과 반위기 연합을 구성했다. 반위기 연합의 몰표로 30표 차로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했고, 지역+사회+공산 반위기 연합 연립정부는 계속 집권했다.

같은 해에 치러진 크림자치공화국 의회 선거에서 '야누코비치를 위하여!'라는 선거연합에 참여, 324,710표(32.55%)를 득표해 44석을 얻었다.

2007년 중반 우크라이나 공화당과 노동당을 흡수합당하며 세를 불렸다.

그러나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은 정적인 야누코비치를 총리를 임명한 것에 반발하며 최고 라다를 해산했고, 다시 선거가 열렸다. 그렇게 시행된 2007년 총선에서 8,013,895표(34.37%)를 득표해 작년 총선보다 득표율은 2.23% 올랐지만, 175석을 얻어 작년 총선에 비해 11석이 감소했다. 또한 빅토르 유셴코의 '우리의 우크라이나'와 율리야 티모셴코율리야 티모셴코 블록이 각각 156석과 72석을 획득해 과반 의석을 확보한 반면 공산당은 27석, 사회당은 0석을 기록하면서 결국 야누코비치의 총리직을 율리야 티모셴코에게 헌납했다.

2009년 3월 13일,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지역당이 최대 라이벌인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과 연합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고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 측과 사이가 틀어진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도 의회 현안부터 다음 대선까지의 협력을 시사했다. # 2009년 3월 30일, 야누코비치는 현 의회에서 티모셴코와 협력을 하게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밀하면서 동시에 그는 지방 자치 개혁과 삼권분립을 포함하는 우크라이나 헌법 수정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6월 초,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통합 정부 구성 회담이 무산되었고, 티모셴코는 야누코비치를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


2.3.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후 최전성기[편집]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표가 2004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선거 결과 1차 투표에서 8,686,642표(35.32%)를 득표하며 1위로 결선에 진출했고 결선 투표에서 12,481,266표(48.95%)를 득표해 빅토르 야누코비치 후보가 1위로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월 3일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라 야누코비치는 탈당 처리되었으며 미콜라 아자로우가 대표 권한대행으로 임명되었으나 9일 후 아자로우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이를 올렉산드르 예프레모우에게 위임했다.

2010년 4월 23일, 제12차 당대회에서 신임 대표로 미콜라 아자로우 총리가 선출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지방선거에서 당은 서부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장을 배출하고 시의회 다수당이 되었다. 또한 같은 해 크림자치공화국 의회 선거에서 357,030표(48.93%)를 득표하며 비례대표 32석, 지역구 48석을 획득했다. 지방선거가 치러진 모든 주에서 지방의원 의석을 얻은 유일한 정당이었고, 그 중 서부 4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2.4. 201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편집]


2011년 8월, 강한 우크라이나와 인민당은 지역당과의 합병을 목표로 한다고 발표했다. 인민당과 지역당의 합당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강한 우크라이나와 지역당은 2012년 3월 17일에 합당했다.

그러나 2011년 말,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약진으로 지지율이 20% 초반을 기록했으며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바티키우시나보다 지지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6,116,815표(30.00%)를 득표하며 비례대표 72석, 지역구 113석을 획득했다. 2012년 12월 12일, 일부 의원들의 추가 합류로 210석의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그러나 최고 라다 조직범죄 및 부패위원회 부위원장인 헨나디 모스칼에 따르면 최소 18명의 지역당 의원이 범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2.5. 유로마이단 혁명과 실각[편집]


2013년 11월부터 2014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는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과 총선 실시를 요구하는 유로마이단 혁명에 휩싸였다. 2014년 1월 말, 당의 상징과 활동이 체르니우치주, 테르노필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에서 금지되었다.[4] 2014년 2월 19일, 지토미르주 지역당이 자진 해산했다.

2014년 2월 22일,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탄핵이 가결되었다. 지역당 의원 중 36명이 탄핵에 찬성했고 2명은 기권, 나머지는 불참했다. 같은 날,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과 미콜라 아자로우 전 총리가 러시아로 도피했다. # 다음 날, 지역당은 "희생자, 빈 국고, 막대한 부채, 국가 망신을 초래한 범죄 명령을 강력히 규탄한다"라고 밝히면서 야누코비치를 규탄했다. # 2014년 2월 24일, 임시 당 대표 올렉산드르 예프레모우는 당이 반 야누코비치 야권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선언했고 77명의 의원이 탈당했다. ## 2014년 2월 25일, 아나톨리 키나흐와 32명의 지역당 의원들이 최고 라다 내 교섭단체인 경제 발전을 만들었다.

2014년 3월 28일, 야누코비치는 지역당에 그를 제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 다음 날, 전당대회에서 미하일로 돕킨을 201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지역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또한 야누코비치와 아자로우 등 거물 인사들을 제명했다. ##

2014년 4월 7일, 지역당 정치평의회는 세르히 티힙코, 올레흐 차로우, 유리 보이코 등 독자 대선 출마 후보 3인을 제명했다. #

선거 결과 1차 투표에서 546,138표(3.03%)를 득표하며 6위로 낙선했다. 독자 출마해 94만표 이상을 얻은 세르히 티힙코(전 강한 우크라이나 대표)보다도 못한 성적이다. 그나마 유리 보이코 전 부총리를 앞서고 하르키우주에서 1위를 한 지역이 한 곳 있다는 게 위안.[5]

2014년 6월 3일, 20명의 지역당 의원이 탈당했다. 이에 따라 지역당은 2012년 12월 12일 210석에서 2014년 6월 6일 80석으로 쪼그라들었다.[6] 2014년 7월 2일, 전 지역당 의원 32명의 새 교섭단체인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를 창설했다. #

2014년 9월 17일,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소속 최고 라다 의원 24명이 러시아 국가두마 의장인 세르게이 나리시킨을 만났다. # 2014년 9월 25일, 우크라이나 내무부 중앙수사국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침해한 혐의로 기소된 의원들에 대한 형사 소송을 시작했다.

지역당은 2014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고, 야권전선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인민당, 통합 러시아(크림 반도) 등으로 흩어졌다.


2.6.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와해[편집]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완전히 실각하여 국민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지만, 공식적으로 해산된 것은 아니었다. 서류상으로 볼로디미르 리바크[7], 볼로디미르 폐호타, 올하 사모팔로바가 2020년대까지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을 벌이면서 우크라이나 내 친러 세력 전체가 적국에 동조하는 잠재적 국가반역자로 낙인 찍혀 증오와 척결의 대상으로 몰려, 겨우 유지해오던 명맥조차 끊길 위기에 처했다.

결국 2023년 2월 21일 우크라이나 제8행정항소법원의 판결에 따라 정당 활동 금지 처분을 받으며 사실상 정당으로서의 명목상 기능조차 상실하였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22:36:30에 나무위키 지역당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야권전선이 지역당을 거의 대부분 승계했고 이외에도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인민당, 통합 러시아(크림 반도)가 지역당을 흡수했다.[2] Nordsieck, Wolfram (2014). "Ukraine". Parties and Elections in Europe.[3] 남색 계열부터 하늘색 계열까지 다양한 파란색을 사용한다.[4] 우크라이나에서는 법원만이 정당의 활동을 금지할 수 있기 때문에 법적 근거가 없는 금지이다.[5] 올레흐 차로우 후보는 등록이 취소되었다.[6] 그래도 85석의 바티키우시나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교섭단체였다.[7] 지역당 창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