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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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оціалістична партія України (СПУ)
Соціалізм буде просякнутий патріотизмом!
사회주의는 애국심으로 물들 것이다!

영문 명칭
Socialist Party of Ukraine (SPU)
한글 명칭
우크라이나 사회당
창당일
1991년 10월 26일
금지일
2022년 6월 15일
전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
대표
빅토르 자이카
이념
사회민주주의
유럽회의주의
민주사회주의
친러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익
당원 수
약 15만명 (2012)
당 색
빨간색 (#640000)}}}
노란색 (#F9E536)}}}
최고 라다
0석 / 450석}}}
지방의회
0석 / 43,122석}}}
국제조직

(2004~2011)

(옵저버)
홈페이지
파일:우크라이나 사회당 로고.png

1. 개요
2. 역사



1. 개요[편집]


우크라이나 사회당우크라이나친러 성향 사민주의 정당이다. 특이하게도 지역 기반이 동부나 서부, 남부나 북부가 아닌 중부 지역이었다.


2. 역사[편집]


1991년 8월 26일, 갓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SSR 공산당이 해산되고 곧이어 금지되자 올렉산드르 모로즈를 비롯한 개혁 성향 공산당 당원들이 1991년 10월 26일 사회당을 창당했다. 10월 26일, 키이우에서 창당대회가 개최되었다.

1993년,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우크라이나 SSR 공산당의 후신을 자처하며 창당되었고 공산당으로 많은 인원이 유출되었다.

1994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지역구 14석을 획득했고 이후 25석짜리 원내 교섭단체를 이끌었다. 또한 당 대표 올렉산드르 모로즈가 4년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장 직을 맡았다.

199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현 대통령과 레오니드 쿠치마 현 총리 모두를 비판하면서 올렉산드르 모로즈 대표가 출마했다. 공산당 역시 모로즈 지지 선언을 했으나 선거 결과 3,466,541표(13.3%)를 득표해 낙선했다.

1996년 봄, 나탈리야 비트렌코을 주축으로 강경 성향 당원들이 탈당해 우크라이나 진보사회당을 창당했다.

1998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농민당과 연합해 참가했다.[1] 2,273,788표(8.55%)를 득표해 비례대표 29석, 지역구 5석을 획득했다. 농민당과 단일 교섭단체를 구성했으나 그 해 가을에 15명의 의원들이 농민당 파벌을 만들어 떨어져 나갔다.[2]

199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올렉산드르 모로즈 후보가 2,969,896표(11.29%)를 득표하며 3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10% 이상을 득표한 우크라이나 진보사회당나탈리야 비트렌코와 단일화했으면 2위인 우크라이나 공산당페트로 시모넨코와 2위 싸움을 할 수 있었을 아쉬운 결과였다.

2000년, 반 올렉산드르 모로즈 대표 성향의 인물들이 정의당을 창당했다.

2001년, 최고 라다 회의 도중 올렉산드르 모로즈 대표가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반정부 기자인 헤오르히 곤가제(Георгій Ґонґадзе, 1969–2000) 암살을 명령했다는 테이프를 공개했다.

200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반 레오니드 쿠치마 캠페인으로 1,780,642표(6.87%)를 득표해 비례대표 20석, 지역구 3석을 획득했다. 이후 빅토르 유셴코우리의 우크라이나, 율리야 티모셴코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페트로 시모넨코우크라이나 공산당[3]과 오렌지 연합을 구성했다.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올렉산드르 모로즈 후보가 1,632,098표(5.82%)를 득표하며 3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결선에서는 빅토르 유셴코 후보를 지지했고, 오렌지 혁명에 앞장섰다.

2005년, 우크라이나 정의당 - 참전용사, 장애인, 체르노빌 피해자, 아프간 전사 연맹이 사회당에 합류했다.

2006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1,444,224표(6.87%)를 득표해 33석을 획득했고 올렉산드르 모로즈 대표가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장 직에 올랐다. 그러나 빅토르 유셴코우리의 우크라이나, 율리야 티모셴코율리야 티모셴코 블록과 원 구성에 차질을 빚고 우리의 우크라이나가 올렉산드르 모로즈가 의장 직을 가져간 것에 반발[4]하면서 사회당은 연합에서 이탈했다. 이후 지역당, 우크라이나 공산당과 반위기연합을 구성했다. 그리고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는 데 찬성해 야누코비치 정부 출범에 큰 공을 세우는 등[5] 완전히 약 1년 전 오렌지 혁명 때와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의장과 총리 선출 과정에서 불법 논란이 일어 의회가 해산되었고 이로 인해 치러진 2007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 참여했지만 668,234표(2.83%)를 득표하면서 0석[6]을 획득하는 참패를 당했다. 갑자기 바뀐 스탠스에 친서방 성향과 친러 성향이 공존하는 지역 기반인 중부 지역의 표가 분산된 탓에 한 석조차 얻지 못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올렉산드르 모로즈 후보가 95,169표(0.38%)를 득표하며 11위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11개 주에서 의석을 얻는 데 그쳤고[7] 2011년 7월에는 아랍의 봄 당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방침을 따르지 않아 축출되었다.

2011년 11월에는 10개 정당과 합당 협상을 했고, 최종적으로 우크라이나 농민당과 5개 정당이 사회당으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법원이 이 합당 절차를 불법이라고 선언하면서 당세가 다시 기울었다.

2012년 4월, 20년간 당을 이끌어 온 올렉산드르 모로즈 대표가 사임하고 페트로 유첸코가 신임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2012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 93,081표(0.46%)를 득표해 비례대표 0석, 지역구 0석의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는 불참했다.

2017년에는 당시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인 세르히 카플린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의원이 사회당의 대표라고 주장했다. 카플린은 우크라이나 연급 수급자당과 "보통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리야 키바라는 인물이 본인이 우크라이나 사회당의 대표라고 주장했다. 2018년 1월 우크라이나 사회당 중앙통제위원회와 정치평의회 합동회의에서 키바는 당에서 축출되었다. 키바는 이 행위가 불법이라고 밝혔고 여전히 법적 대표는 키바였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일리야 키바 대표가 출마했으나 5,869표(0.03%)를 득표하며 29위로 낙선했다. 한편 올렉산드르 모로즈 전 대표는 사회당을 탈당했는지 개인 정당인 올렉산드르 모로즈의 사회당 소속으로 13,139표(0.06%)를 득표하며 26위로 낙선했다.

2019년 6월이 돼서야 키바는 인생을 위한 야권연단에 합류하기 위해 탈당했다. 한 달 후 2019년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선거에서는 두 명의 지역구 의원이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2022년 3월 20일 정당 활동이 중단되었다. 4월 18일 키바 전 대표가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다. # 6월 15일 정당이 금지되었다. 또한 당 대표가 키바의 최측근인 빅토르 자이카임이 드러나 키바가 2022년까지 당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2023년 12월 일리야 키바는 러시아에서 우크라나측에 의해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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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우크라이나 공산당과 연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 이들은 의원 수 미달로 2000년 봄에 해산되었으나 대부분이 유럽연대의 전신인 '연대'로 합류했다.[3] 2004년 대선 단일 후보 추대에 반발하며 탈퇴[4] 원래 페트로 포로셴코가 의장 직을 밑는 것으로 합의했다.[5] 우리의 우크라이나 + 율리야 티모셴코 블록 의석 수 = 지역당 + 공산당 + 3석으로 33석을 가진 사회당이 캐스팅보트 위치에 있었다. 지역당과 공산당에 합류함으로써 30석 차로 야누코비치 총리 임명을 강행한 것이다.[6] 당시 봉쇄조항은 3%였다.[7] 이마자도 유의미한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은 11%의 체르니히우주, 5.8%의 폴타바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