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오관화 (r20200302판)

문서 조회수 확인중...


파일:교관화.jpg
중화인민공화국 4대 외교부장
정체
喬冠華
간체
乔冠华
한국식 독음
교관화
영문
Qiao Guanhua
출생
1913년 3월 28일 중화민국 강소성 임청현
사망
1983년 9월 22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학력
칭화 대학교 졸업
도쿄 대학교 석사학위
튀빙엔 대학교 철학박사 학위
직업
언론인, 정치가, 외교관
종교
없음(무신론)
외교부장
재임기간

4대 1974년 11월 ~ 1976년 12월 2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이력
2.2. 문혁시기
2.3. 말년
3. 참고문헌
4. 주요경력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관. 4대 외교부장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913년 중화민국 강소성 염성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에 돈이 많았던 덕분에 칭화대학 졸업 이후 일본 도쿄대학에 유학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독일로 유학, 튀빙엔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일전쟁 중 귀국하여 언론계에 종사하다가 194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신화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다. 충칭에 머물며 언론전을 주도하던 저우언라이 밑에서 일하며 우커젠과 함께 정기 간행물인 <군중>을 발행했다. 전쟁 종식 이후 저우언라이를 따라 상하이에 파견, 신화통신 홍콩 지국장에 임명되었다. 국공내전 이후 정부판공청 부주임, 정보국장을 역임했다. 외교부가 출범하고 저우언라이가 1대 외교부장에 취임하자 저우언라이의 신임을 받던 왕빙난, 천자캉, 커바이녠, 궁펑 등과 함께 중용되어 1950년 외무부 아시아국장대리에 임명되어 유엔 안보리에 출석, 타이완 문제를 논했다. 이후 6.25 전쟁 정전협상에서 중국측 대표 중 한 사람으로 출석하였다.

2.2. 문혁시기


1961년 제네바 회의에 중국 대표단원으로 출석하여 라오스의 중립 문제를 논했고 1964년 지펑페이, 왕빙난, 천자캉 등과 함께 외교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이후 홍위병들이 주도한 외교부 탈권 현상에 휘말려 1967년 지펑페이 등과 함께 감금당하는 등 박해를 받았으나[1] 마오쩌둥이 왕리, 관펑 등 중앙문혁소조의 급진파들을 숙청한 후 다시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1971년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지시로 중국 수석대표로 임명되어 11월 15일 유엔 총회에 출석,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을 인정받았다. 차오관화는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의 우호국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중국정부의 원칙과 입장에 대해 설명하며 결의안 통과가 중국 외교사업에서의 한차례 중대한 돌파이며 평화를 사랑하고 정의를 주장하는 모든 국가들의 공동 노력의 결과라고 밝혔다.
파일:vdTM9us.jpg
1971년 10월, 2758호 결의안이 통과되는 순간의 차오관화. 오른쪽 인물은 후임 외교부장이 되는 황화다.
1972년 닉슨-마오쩌둥 회담 이후 헨리 키신저와 함께 공동성명의 초안을 작성했다. 1973년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의 관계가 악화되자 11월 21일 인민대회당에서 소집된 회의에 지펑페이, 중시둥, 황전 등과 함께 외교부 대표초 참석하여 저우언라이를 규탄해야 했다. 하지만 차오관화는 문혁이 종식된 후 자신은 저우언라이가 잘못한 것을 믿지 않았으며 회의에서 저우언라이를 규탄해야 했던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1974년에 외교부장에 임명되었고 1974년 3월 유엔 6차 특별회의 대표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수행원이 덩샤오핑이었는데 실질적인 대표단장은 당연히 덩샤오핑이었다. 차오관화는 1주일만에 덩샤오핑의 유엔연설문을 준비했다. 마오쩌둥은 차오관화의 원고에 대해 동의를 표했고 덩샤오핑은 2세계와 3세계가 연합하여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에 대항해야 한다고 연설하여 큰 갈채를 받았다.
차오관화는 1974년 10월 "UN이 더 이상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되며 모든 주한 외국군이 철수해야 한다.", "한반도 문제의 책임은 남조선의 탓이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한중수교 전까지 중국의 공식입장이었다. 하지만 북한이 남침을 하면 즉각적인 중공군 개입은 없을 거라고 한발 빼긴 했다. 1976년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미국 연락사무소 소장 조지 H. W. 부시와 함께 일정을 정리했다.

2.3. 말년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4인방이 숙청되는 과정에서 1976년 10월 2일 <중국 대표단 단장의 국제연합 제31회 회의에서의 발언> 초고를 제출하였는데 여기에 마오쩌둥이 임종 직전에 장춘차오의 손을 잡고 뒷일을 부탁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마오쩌둥의 유언이 "기정 방침대로 하라."라고 되어 있는 것이 적발되어 화궈펑의 비판을 받았다.
4인방 숙청 후 4인방 지지자로 몰려 12월에 황화에게 외교부장 자리를 내주고 실각했다. 1983년 대외우호협회 고문에 초빙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덩샤오핑 평전, 에즈라 보걸,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두산백과 차오관화 문서.
  • 중국 공산당 역사 2권 하,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4. 주요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외교부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12px-National_Emblem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China.svg.png
3대

5대

5대
지펑페이

차오관화
(1974년 11월 ~ 1976년 12월 2일)

황화
[1] 이때 다른 부부장들도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등 비판을 면치 못했고 홍위병들은 급기야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