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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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차희식.jpg
성명
차희식(車喜植)
생몰
1870년 11월 10일 ~ 1939년 10월 18일
출생지
한성부 서부 반송방 모화현
(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본관
연안 차씨
사망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매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차희식은 1870년 11월 10일 한성부 서부 반송방 모화현(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서 태어나 화성시 장안면 석포리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부터 생활했다. 그는 장안면에서 성장해 부인 이씨와 결혼하여 5남 1녀를 두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술이 높아 여러 사람들과 교유가 많았고 힘도 장사였다고 한다. 그 외에는 그의 전반적인 생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서 인물상을 자세히 확인할 수 없지만, 일제가 1910년대에 토지조사사업과 산림정책을 시행해 화성시 일대의 농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노동 착취를 심하게 하는 것에 깊은 반감을 품었을 것으로 보인다.

1919년 4월 초,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화성시에 전해졌다. 이에 차희식은 4월 3일 차병한, 차병혁과 함께 장안면 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소로 집결하도록 연락했다. 그 후 장제덕, 장순명, 장봉래[1], 이치덕 등과 함께 석포리 주민들에게 "오늘 독립만세를 외칠 작정이니 각 집마다 남자 1명 이상이 나오라."며 만세 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차희식은 시위대 선봉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불렀다. 그 후 군중 200여 명이 모인 장안면 사무소 앞에서 면장 김현묵에게 만세 운동에 동참하라고 강권했고 몽둥이와 투석으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불태웠다. 여기에 수촌교회의 기독교 신자들까지 합세해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차희식은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으로 인솔하여 그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어서 차병혁, 차인범이 인솔한 군중까지 합해 2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우정면 사무소로 진격했다. 이때 우정면장 최중환이 집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도망치자, 그는 우정면 사무소를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게 했다.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군중들은 장안면장을 다시 앞세워 태극기를 들게 하고 군중의 선두에 세운 뒤,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오후 4시경에 화수주재소로 몰려갔다. 군중들은 주재소 앞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곧 주재소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때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카와바타 토요타로우(川端豊太郞)가 도주하면서 권총을 발사해 시위군중 1명이 맞아 죽자, 차희식은 차인범, 정서송, 이순모, 장소진 등과 함께 추격했다. 카와바타는 겁에 질러 달아나면서 권총을 난사해 3명을 더 쓰러뜨렸지만, 곧 수십명의 군중에게 포위되었고, 이봉구가 곤봉으로 순사의 후두부를 내리쳐 넘어뜨린 뒤 수십 명이 달려들어 순사의 얼굴 및 전신을 난타해 죽였다.

이후 차희식은 산 속으로 도피했다가 4월 5일에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 살인, 방화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9년 2개월 만에 출옥했다. 그 후 서울 현저동에서 기거하다가 1939년 10월 18일에 사망했다. 향년 69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에 차희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장봉래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