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흥

덤프버전 : r20210301



파일:최시흥.png
출생
1890년
평안도 의주부
(현 평안북도 의주군)
사망
1925년 3월 12일
평양형무소
이명
최시풍(崔時豊), 김경태(金敬泰, 金景太)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최시흥은 1890년생이며, 평안도 의주부(현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이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뒤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 삼원보에서 동지를 규합한 뒤 하얼빈으로 가서 노농병에 가입, 활동했다. 그러다 1919년 12월 오동진의 광복군사령부에 가입한 뒤 압록강을 건너 귀국한 뒤 1920년 3월 천마산에서 최지풍(崔志豊) 등과 함께 천마산대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군사를 조련했다.

천마산대 사령장은 최시흥이었고, 부관은 최지풍, 참모는 박응백, 박영찬, 최윤희(崔允熙), 경리 김세진(金世鎭), 중대장 최의집(崔義輯), 소대장 김상옥,김용택(金龍澤)으로 구성되었다. 1920년 7월 의주군 고령삭면에서 밀정을 처단하고, 평북 구성군 사기면의 신시(新市)주재소를 습격한 후 다시 의주에서 밀정 최학정(崔學貞)을 사살하였다.

1920년 8월에는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여 의주의 옥상(玉尙)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단원 2백여명을 모집하여 무장시켰으며, 군자금 1만여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1920년 7월 일본군이 천마산대 본부를 공격하자,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합류했다.

이후 광복군 총영 제4영장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대한통의부 읭요군 제3중대장을 맡았다. 또한 대종교에 입교한 뒤 제3대 단학회장이 되었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민사(義民社)·벽파대(碧波隊)·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의 무장투쟁에 천마산대 사령장의 자격으로 참여했다. 1923년 9월에는 그의 부하인 최오산(崔午山) 등이 평안북도 회천군 북면 명문동 창참에 있는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전소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 봉천성 임강현에서 중국 경찰에 체포된 뒤 봉천성 정부로 이관되었다. 일본 측은 봉천 군벌에게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봉천군벌이 응하지 않자, 일본측은 신의주경찰서의 김덕기(金德基)를 파견하여 봉천성 당국에 "최시홍은 독립군이 아니고 만주개척단 사업에 공이 있는 자이니 석방을 요한다."고 속여 석방하게 한 후 체포하였다.

이후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24년 11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조국의 독립은 우리 국민 모두의 희망이다."라고 외쳤다.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5년 3월 12일 평양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1925년 3월 25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추도문이 게재되었다.

도 최장군(悼 崔將軍)

최 장군은 이제 갔도다. 사계(斯界)의 모든 것을 뒤에 두고 훌훌히 먼길을 떠나갔도다. 아, 장군이여, 한 많은 그 길을 떠남에 당하여 장군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피는 용솟음쳤으리로다. 아! 장군을 보내는 우리의 눈에는 열루(熱淚)가 그칠줄 모르고 흘러 내리는구나. 이 시대의 불행이냐? 조물의 시기이냐? 혁명의 건아 최장군은 이제 어디로 갔느냐?

시국은 다 망하고 원수는 도전하는데 장군은 이미 떠나갔도다. 장군이여! 5. 6년간 폭풍 처우(凄雨)에 그 혈전 고투를 이제 무엇으로 기념하랴? 장군의 호통에 원수는 전율하며 장군의 위세에 적군은 사산(四散)하고 장군의 칼날과 총알에 원수는 삼대같이 쓰러지도다. 그러나 장군은 지금에 없도다. 피묻은 칼을 씻지 못하고 장탄(裝彈)한 총을 그대로 가지고 유인(裕仁) 취박(就縛)의 진중 첩보를 듣기도 전에 동경(東京)함락의 독립 호외를 보기도 전에 그만 이제 머나먼 길을 떠나갔도다.

장군이여. 천마 산중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주린 때는 얼마이었으며, 압록강두에 무주(無舟) 방황은 무릇 몇 번이었던가? 적진에 임하여 적의 수급(首級)을 취하는 동지들의 용무(勇武)를 보고 웃기도 하였을지며, 적의 탄우(彈雨)에 동지가 거꾸러어질 때 울기도 하였을지로다. 대계(大計)의 성공이 중도에 못미쳐 토병(土兵)의 무리한 발호(跋扈)는 왜 이리 극하며 원수의 독아(毒牙)는 왜 이리 강하냐?

40평생의 철천(徹天)의 한으로 형무대(刑務臺) 통부(通訃)는 웬일이며, 장성(將星)이 귀본(歸本)에 송사 무주(送死無主)는 이 무슨 애보(哀報)이냐. 이제 장군의 몸은 기성일우(箕城一隅)의 일부토(一抔土)로 동귀(同歸)할 것이며, 장군의 영양은 패수(浿水) 강상에 내거(來去) 방황하리로다. 아! 이것은 쾌남아의 불운이냐? 상도(常道)이냐? 장군이여!

속선(俗仙)이 비록 한계있다 하며, 영육(靈肉)이 비록 접어(接語)는 불능타 하나 장군의 영은 단손(檀孫)의 영이며, 오인의 육은 단손의 혈(血)이로다. 바라건대 장군의 영령은 한산수(漢山水)를 원리(遠離)치 말고 재생(在生)의 동지를 음우(陰佑)함이 있으면, 근원(槿園)의 강산에 왜적을 소탕하는 날, 일주(一炷)의 향을 사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최시흥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