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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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Villmar_-_Koenig_Konrad_Denkmal_1.jpg
독일어: Konrad I. (콘라트 1세)
라틴어: Conradus I (콘라두스 1세)

890년 ~ 918년 12월 23일

동프랑크 왕국 및 독일 왕국의 국왕. 관점에 따라서 동프랑크의 마지막 국왕 또는 독일 왕국 초대 국왕으로 기록된다.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왕조의 대가 끊기자 제후들이 회의를 통해 그를 동프랑크의 국왕으로 선출했다. 비록 그는 "독일의 왕"(Rex Teutonicorum)이라는 칭호를 쓰진 않았지만 카롤루스 왕조의 마지막 동프랑크 왕인 루트비히 유아왕의 후계자로 이후부터는 독일의 군주로 간주된다.


2. 생애[편집]


콘라트 1세는 같은 이름의 튀링겐 공작인 아버지 콘라트와 국왕 아르눌프의 딸 글리스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촌수로는 즈벤티볼트와 그보다 나이 어린 유아왕 루트비히의 외조카뻘이 된다. 906년 프랑켄 공작이 되었다.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후사 없이 죽자 모계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동프랑크 국왕 자리가 돌아갔다.

그러나 이는 매우 미약한 계승권이었으므로 일부 귀족들의 반발과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왕조의 직계였던 샤를 3세의 반발을 불러일으켜와 로타링기아를 빼앗기는 등 외침과 내침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는 이러한 전쟁에서 번번이 패했으며 선왕 시절부터 계속 거세져오던 마자르족의 침공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이러한 결과 국왕으로서의 권위도 실추되었고 귀족들의 신임도 점점 잃게 되었다. 거기다 더해 그는 아들도 없었으므로(유일한 아들 헤르만은 일찍 요절했다.) 마땅한 후계자를 찾기도 어려웠다.

결국 918년경 병에 걸린 그는 동생 에버하르트가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왕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제후였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에게 선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후사없이 사망하였다. 이는 그가 왕국을 괴롭히는 내우외환을 해결할 유일한 적법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생 에버하르트와 제후들은 유언을 지켜 하인리히 1세를 왕으로 선출함으로써 오토 왕조가 시작되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통일신라의 37대 왕 선덕왕(김양상)과 유사한 면이 보인다. 전 왕가의 외손으로서[1] 전 왕가의 부계 직계가[2] 끊어지자 옹립됐지만, 정작 본인은 본인 일가에게 물려주지 못하여 1대에 그치고, 전 왕가와 혈통상 거의[3] 혹은 완전히 무관한[4] 다른 가문으로 왕권이 완전히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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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각각 콘라트는 카롤링거 가문 아르눌프의 외손자, 선덕왕은 김씨 무열왕계 성덕왕의 외손자.[2] 각각 루트비히 4세와 혜공왕.[3] 원성왕(김경신) 계열. '거의'인 이유는 부계로는 정말 멀기는 하지만 어쨌든 같은 김씨이며, 또한 증조모가 무열왕의 딸이기 때문.[4] 콘라트 및 그 자손의 작센 왕조(오토 왕조). 신라와는 달리 구 카롤루스 왕가와는 전혀 친인척이 아니었다.[5] 다만 그의 후손들은 동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독일 왕국의 사실상 후신,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 선덕왕과는 큰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