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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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카를로스 2세의 왕비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von Pfalz-Neuburg


파일:Maria Anna von Pfalz-Neuburg.jpg

이름
독일어
마리아 안나 폰 팔츠노이부르크
(Maria Anna von Pfalz-Neuburg)
스페인어
마리아 아나 델 팔라티나도 네오부르고
(María Ana del Palatinado-Neoburgo)
출생
1667년 10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베르크 공국 뒤셀도르프 벤라스 성
사망
1740년 6월 16일 (향년 72세)
스페인 과달라하라 인판타도 성
배우자
카를로스 2세(1689년 결혼 / 1637년 사망)
아버지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
어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
형제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요한 빌헬름, 카를 3세 필리프, 알렉산더 지기스문트, 프란츠 루트비히, 마리 조피, 마리아 안나, 필리프 빌헬름, 도로테아 조피[1], 헤트비히 엘리자베트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2. 말년



1. 개요[편집]


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2세의 두 번째 왕비. 신성 로마 제국황제 레오폴트 1세의 세번째 황후 엘레오노레 막달레네포르투갈의 왕비 마리 조피의 자매이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요제프 1세카를 6세, 스페인의 펠리페 5세의 왕비 엘리사베타의 이모이다.


2. 생애[편집]


1667년 10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베르크 공국의 뒤셀도르프 근처 벤라트 궁전에서 필리프 빌헬름의 17남매 중 12번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큰언니 엘레오노레 막달레네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고, 또 다른 언니 마리 조피는 포르투갈 왕 페드루 2세와 결혼했다.

1685년 5월 아버지 필리프 빌헬름이 팔츠 선제후가 되었을 때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가 그 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루이 14세가 이끌고 있는 프랑스군은 1688년 9월에 침공했고, 1689년 철수하기 전에 하이델베르그의 많은 부분을 파괴하고 20개의 주요 도시와 수많은 마을을 파괴했다. 이 정책은 라인란트 전역에 적용되었지만, 1693년에 팔츠가 다시 공격을 받았고 그 황폐화는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다.[2]


2.1. 카를로스 2세와 결혼[편집]


1689년 8월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카를로스 2세의 첫 번째 부인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가 1689년 2월 12일에 사망했는데, 카를로스 2세의 왕위를 잇는 후계자가 없고 그의 심각한 건강 우려로 인해 새로운 왕비를 맞이하는 시급한 상황이었다. 카를로스 2세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는 가족의 출산력과 프랑스에 대한 반대를 바탕으로 마리아 안나를 선택했다.

스페인의 정치 기관은 친오스트리아파와 친프랑스파로 나뉘었고, 후자는 톨레도의 추기경이자 대주교인 페르난데스 데 포르토카레로(Fernández de Portocarrero)가 이끌었다. 이 기간 대부분 동안 시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왕대비가 1696년에 사망한 후 마리아 안나가 리더십을 맡으면서 '오스트리아인'이 정부를 통제했다. 1690년에 그들은 스페인의 9년 전쟁 참전을 지지했는데, 이는 비참한 결정임이 입증되었다. 국가는 1692년에 파산을 선언했고 1696년에는 프랑스가 카탈로니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마리아 안나의 권력은 차기 군주의 국모로서의 지위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국 그 지위는 사라졌다. 이제 카를로스 2세는 거의 확실히 발기부전 상태였으며 나중에 그의 부검 결과 위축된 고환이 하나만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상쇄하기 위해 그녀는 여러 차례 임신했다고 주장했고, 카를로스 2세에게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치료를 받도록 권유하여 상속인을 낳지 못한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2.2. 말년[편집]


1698년에 카를로스 2세는 죽음이 임박해 보였는데, 10월 11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승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강요하기 위한 시도인 헤이그 조약 또는 제1차 분할 조약에 서명했다. 바이에른 출신 요제프 페르디난트[3]는 스페인 왕국의 대부분을 상속받았고, 나머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었다. 1698년 11월 14일, 카를로스 2세는 자신의 유언장을 발표하여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그의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어린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사망 이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은 1700년 3월 제2차 분할 조약에 동의했다. 마리아 안나의 조카인 카를 대공으로 대체되었으며, 카를로스 2세는 카를 대공을 지지하도록 자신의 유언장을 수정했지만, 계속해서 완전한 군주제를 주장하고 스페인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추가했다.

마리아 안나는 조카 카를 대공을 차기 스페인 왕의 계승을 보장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카스티야 귀족들은 부르봉 왕족를 선호했다. 결국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한 후 카를로스 2세의 이복누나 마리아 테레사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가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로 확정되면서 마리아 안나는 톨레도로 추방되었다. 1706년 조카 카를 6세가 잠시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그곳에서 조용히 살았다. 펠리페 5세는 나중에 그녀를 프랑스의 바욘(Bayonne)으로 추방했고, 그곳에서 향후 수십 년 동안 살았다. 1739년에 마리아 안나는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었고, 과달라하라의 인판타도 성에서 지냈다. 결국 마리아 안나는 1740년 7월 16일에 사망하고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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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페인 왕비 이사벨 파르네시오의 어머니[2] 이는 친오스트리아와 반프랑스의 감정을 확증해주었고, 마리아 안나가 카를로스 2세가 두 번째 부인이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3] 카를로스 2세의 친누나 마르가리타 테레사레오폴트 1세의 외손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