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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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皇帝 | Emp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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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초의 황제 진시황제
로마의 초대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1. 개요
2. 어원
3. 상세
3.2.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
3.2.2.2. 서유럽의 우회적 조건: 교회의 인정
3.2.3. 근세 이후
3.2.3.1.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
3.2.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
3.2.3.4. 19세기~20세기 서양의 황제국들
3.6. 아프리카
3.7. 아메리카
4. 황제로 보기 미묘한 사례
4.2. 동로마 제국 부흥운동
4.3. 스페인
4.4. 불가리아
4.5. 이탈리아
4.6. 추존 황제
5. 참칭 황제
5.1. 한국
5.2. 일본
5.3. 중국
5.4. 베트남
5.5. 몽골
5.6. 러시아
5.7. 이탈리아
5.8. 터키
5.9. 시리아
5.10. 스페인
5.11. 그리스
5.12. 미국
5.13. 세르비아
5.14. 루마니아
6.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
7.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
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 Emperor[1]

자기 휘하의 직할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지를 통치하는 제후를 거느리고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君主). 군주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권위와 지위를 지니는 군주 중의 군주이다.

일반적인 왕 또는 그 이하의 군주들과 달리, 명목상 또는 실질적으로 다른 국가의 군주인 왕을 자신의 밑에 둘 수 있다는 점이 황제와 왕의 차이점이다. 자신의 휘하에 왕을 신하로 둘 정도면, 그 영토 또는 정통성의 스케일이 다를 테니까 말이다. 다만 황제라고 해서 항상 영토가 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나라의 군주를 해당 문화권의 주변 국가들이 자기네 군주들보다 실질적인 국력이나 권위 면에서 한 수 위라고 널리 인정한다면 그 칭호가 해당 문화권의 황제의 칭호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각 국민국가들이 기존 황제국의 정통성과는 어떠한 연관도 짓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황제를 칭하기 시작하는[2] 근대 이후가 아닌 그 이전의 황제 칭호는 주변을 억누를 수 있는 강대국의 역사와 결부된다.

황제라는 단어는 영어 어휘인 Emperor의 번역을 위해 쓰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천자(天子)[3]라고도 한다.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황제와 Emperor의 개념은 완전히 같지 않다.

원래의 의미와 달리 실제로 여러 왕국을 지배하지 않아도 황제의 호칭을 쓰는 경우도 많다. 과거 대한제국이나 현재의 일본이 그런 예라 할 수 있다.[4]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다른 국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군주들을 이끄는 강대국임을 자부하기 위해서다. 원래 뜻은 여러 왕국을 지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여러 왕국을 거느리지 않더라도 원 의미와 비슷하게 구색을 맞추려 했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자국 영토 내에 태수 또는 번왕을 두었고 영토 밖의 국왕들과 함께 제후로 취급했다. 나폴레옹프랑스 제국의 경우도 스페인 왕국, 나폴리 왕국, 네덜란드 왕국, 스웨덴 왕국 등 여러 국가의 왕들을 명목상 제국의 휘하에 두었다. 이러한 대제국들과 동일한 나라임을 자부하기 위해 작은 제국들은 보통 자기 아들 등 핏줄들에게 왕의 칭호를 주거나 지방의 일부를 제후국처럼 명목상 취급해서 제국의 모양새를 만들어보이기도 했다.

이 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황제라는 말이 있음에도 천자황상(皇上)처럼 다른 단어로 돌려 부르기도 했다.[5] 유럽 문화권에서는 로마 제국 초기에 임페라토르카이사르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지만 후에는 임페라토르로 굳어지고 카이사르는 동의어처럼 사용하였다.[6]

세계의 황제들은 군주의 무덤이라 불리는 20세기[7]에 일본 천황을 빼고 다 사라졌는데 특히 1910년대에 많이 사라졌다. 대한제국, 청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 경술국치신해혁명으로 무너졌고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이 무너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인도 제국베트남 제국의 황제 칭호가 폐지되었다. 이후 그나마 남아있던 에티오피아 제국, 이란 제국1970년대에 무너져, 21세기 현재 세계에서 'Emperor'로 칭해주는 직책은 일본의 천황이 유일하다.


2. 어원[편집]


최초로 중국 전토를 통일한 진 시황제 영정(嬴政)이 새롭게 만든 천자의 칭호. 진시황 이전에도 천자라는 개념은 있었다. 진시황 이전에는 주나라 왕이 천자였다. 이렇게 천자의 칭호가 '왕'이었고 그 밑의 군주들을 제후라 불렀으며, 이를 따르지 않는 초나라에서 '왕'을 칭했다.

전국시대 말기에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제후들이 너도나도 왕을 칭하게 되자 왕이라는 작위의 가치가 떨어졌고, 이 왕들을 모조리 정복한 시황제가 새롭게 한 급 올려서 황제라는 자리를 새로 만들었다. 이 때부터 황제가 천자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는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게 된다. 진나라가 쇠락하고 항우유방이 거병하던 시대에는 진나라 3세 황제 자영이 자진해서 왕으로 직위를 낮추기도 했다.

황(皇)과 제(帝)는 상나라 때부터 군주를 가리키는 어휘이긴 했으나 보통은 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옥황상제기독교 신의 번역어로 중국에서 사용되는 상제(上帝)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황제라는 단어 자체가 원래 위대한(皇) 하느님(帝)이라는 뜻.[8]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왕(王)[9]을 대신해서 천하의 지배자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명칭을 올리도록 이사(李斯)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요구했다. 이에 신하들이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 중에 가장 존귀한 것은 태황(泰皇)이라면서 태황이라는 호칭을 바치자, 이를 거절하고 태황의 황과 신을 뜻하던 제를 붙여 직접 만든 것이 황제(皇帝)[10]라고 한다. 그 이전에도 삼황오제나 황천상제(皇天上帝) 등의 단어에서 보듯이 황(皇)이라는 단어와 제(帝)라는 단어가 각각 사용되었지만, '황제'라는 합성어를 만든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다. 그리고 황제라는 어휘가 널리 사용되면서 오히려 황(皇)과 제(帝)는 황제라는 말의 약자로 여겨졌다.

황제를 구성하는 두 단어인 황과 제 사이에서도 의미 차이가 있다. 기원부터가 왕(王)의 상위호환격의 위대한 자,라는 뜻이였던 황(皇), 제사장, 신 등의 의미가 있는 제(帝). 즉, 황은 권위 있고 위대한 존재라는 개념이며, 제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개념이 강하다.[11]

그렇기에 한나라 시대에 황제의 아버지로서 명목상의 존칭을 받을 때는 태상황이라고 불렀지 통치자의 '제'를 붙이지 않았다. 《한서》에 안사고(顔師古)는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천자의 부친이므로 '황'이라고 한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제'라고 하지 않는다." 또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는 태상황제라고 불렸다. 이처럼 황과 제 양자가 거의 동격이기는 하나 실제로 '황'은 황제의 상징어에 가깝고, '제'는 실질적인 권한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었다.


3. 상세[편집]



3.1. 한자문화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황제/한자문화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유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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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황제는 혈통과 종법제도에 근거한 정통성을 강조하며, 그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천자다. 그러나 유럽 세계의 황제는 기독교의 수호자인 로마 제국의 황제(임페라토르, 바실레우스)의 후계자이며, 세속 세계의 최고 군주이며 유럽 세계 전체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의 권위를 획득한 군주를 의미한다.

동아시아의 황제=최고 종교인[12]인데 반해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전통과 법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강력한 권력을 가져서 우상화되는 최고 시민[13]이었다. 동아시아의 법이 법가 항목에서 설명하듯 군주로부터 발하여 신민을 지배하는 지배 규율이었다면, 로마의 법은 구성원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대표자를 정치인으로 뽑아 정해놓은 사회 구성원들의 계약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군주는 언제나 법을 실행하는 대표자의 위치였을 뿐 법의 기반이나 원리로 여겨지지 못했기 때문에 동아시아와 같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때문에 종법 질서에 따른 혈통이라는 기준이 존재한 중국과 달리 유럽의 황제는 그 선출 기준이 불분명하여 수 없이 찬탈이 일어나거나,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다.


3.2.1. 고대 로마[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임페라토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로마의 '황제'는 혼란한 공화정을 군사력으로 갈아엎으면서 등장한 존재이다. 공화정 말기의 로마는 전례없는 영토의 확장과 시민의 증가를 겪었지만, 정치 체제는 여전히 도시국가 시절의 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일례로 포로 로마노에 1만 명을 자기 사람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지중해를 지배하는 로마 전체의 정책을 입맛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력을 동원하기 일쑤였고, 세력 간에 유혈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일상다반사가 되어 시민들의 총의가 정상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화정의 혼란은 이윽고 공화정을 포기하려는 권력자의 등장을 불렀다. 그러나 그 카이사르조차도 로마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거머쥐었지만 모두를 제압하지는 못했고 결국에는 암살당하기에 이르렀다.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서 교훈을 얻었는지 원로원에게 종신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과 임기 제한없는 군단 지휘권(Imperium Maius) 두 가지를 얻어낸다.[14] 이 두 가지 특권은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계속 상속되었으며, 그의 후임들은 광대한 직할령(이집트 등)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구 체제의 권위를 더해서 로마 제국 전체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렇듯 법적으로는 여러 시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초월적 지위를 누리는 특성을 고려해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을 원수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로마 초기의 황제라는 것은 'IMPERATOR'라는 새로운 이름의 관직인 것이고, 그것 또한 완벽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공화정 시대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던 기존 관직들의 권한을 약간 변형하고 조립해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즉, 그 당시의 로마인 누구도 새로운 이 직책을 동양의 황제처럼 하늘의 뜻을 받드는 고귀한 존재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로마 황제의 권한인 호민관 특권과 로마군 최고통수권이 합쳐져서 어떻게 강력한 황제권으로 둔갑하였는지 그 비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공화정 시기부터 호민관이 가졌던 권한은 ①원로원 의결에 대한 거부권 ②민회를 통한 입법권(원로원 의결과 동등함) ③신체에 대한 불가침 특권이다. 각 권한이 부여된 취지를 살펴보면, ①은 원로원이 귀족에게만 유리하고 평민에게 불리한 법이나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견제하고 ②는 평민의 입장을 반영한 법이나 정책을 제정하고 시행할 여지를 제공하며 ③은 힘을 가진 원로원 및 귀족세력이 평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호민관을 함부로 해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 그렇다고는 하나 곰곰이 따져보면 매우 강한 권한으로 다른 나라였으면 전제군주나 다름없을 정도다. 발상을 전환해 본다면 ①을 통해서 현대로 치면 의회+내각(+법원) 정도에 해당하는 원로원의 결의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뒤집을 수 있고, ②를 통해 지지자들을 모아서 자신이 원하는 법을 뚝딱 만들어 버릴 수 있으며[15] 마지막으로 ③을 통해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공적으로 처벌하고 제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이러한 권한을 평민들이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호민관의 권력보다 원로원의 권력이 압도적으로 큰 로마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 정도 권한을 주어도 원로원은 호민관과 민회에 대해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호민관은 단독으로 원로원 결의를 거부하거나 원로원 결의와 동등한 입법행위를 할 수 있으니 혼자서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 전체와 맞먹을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물론 평민집회의 지지를 얻어야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호민관 자체가 평민집회에서 선출되는 관직이라 호민관이 지지하는 정책은 평민집회를 쉽게 통과하므로 이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데 그라쿠스 형제 이전의 호민관들은 대부분 호민관 임기를 마친 후 원로원 의원이 되어 정치경력을 이어갔다. 즉 로마인들의 정치관념에서는 '호민관이 무사히 임기를 마치면 승진하여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 말하자면 호민관보다 원로원 의원이 더 격이 높은 직급이었던 셈이다. 이는 현실 정치에서는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 영향력을 가진 원로원이 비공식적으로 호민관 따위는 찍어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라쿠스 형제는 호민관으로써 원로원에서 주장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불보듯 뻔한 반귀족적 정책을 호민관의 권한을 통해 추진했다. 원로원은 자신들보다 격이 낮은 호민관이 반귀족적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정상적인 절차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자금력과 군사력으로 찍어누르고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새로운 수단까지 만들어내어 그라쿠스 형제의 계획을 무너뜨렸다.[16]
그런데 아우구스투스가 종신 호민관이 되고 군단 지휘권까지 갖자, 원로원과 호민관의 권력관계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로마 제국의 기반인 로마 군단병에 대한 통수권을 가지게 되면 호민관은 원로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권한을 마음껏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용하여 사실상의 전제권력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이후 황제는 이런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직책을 본인의 사적인 '재산'으로 인정받는데까지 성공하여 자손이나 원하는 이에게 상속/수여할 수 있는 권리마저 따낸다. 즉 로마 황제의 직위는 (신성하고 역사적으로 정통성있는) "공적인 군주의 자리"라기보다는 (상속 및 증여가 가능한) "사적인 재산"으로 여겨졌다는 것.[17] 이런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상상도 못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황제 제도 같은 것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가진 재산을 단지 분할증여한 것으로 본다면 신기할 것도 없다.

이렇게 출발한 로마 황제직은 권력은 강했지만 권위는 부족하였다. 고귀한 특권 계층이라기보단 '큰 권리를 가진 시민'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외려 호민관의 피선거권은 평민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황제는 반(反) 귀족적인 존재였다. 따라서 혼란의 불씨는 처음부터 있었다. 그나마도 초대 황가인 아우구스투스 가문이 오래오래 황위를 계승하면서 혈통에 의한 권위를 쌓아갔다면 모르겠는데, 그마저 중간에 갈려나갔다.[18]

그 이후로 황제의 권위는 내내 불안정했다. 따라서 기회만 보이면 황제를 자칭하는 야심가들이 발호할 수밖에 없었고, 군인 황제 시대에 그 혼란은 절정에 달한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로마의 황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영토인 이집트에서 들어오는 재물을 바탕으로 사병집단인 군단에 충성을 받는 인물이었고, 공식적인 지위가 평민들의 대표였기에 평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자신의 부를 바탕으로 여러가지 오락(콜로세움)과 음식을 제공하였다.

이 사항은 굉장히 복잡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인데, 로마라는 국가는 황제 개인의 재산으로써 방위하고 운영될 뿐, 여타 귀족들은 공직에 있을 때에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나설 뿐이었으며, 평민들은 로마가 팽창하면서 대다수가 빈민이 되어 사실 시작부터 붕괴되는 체계였다. 다만 대외원정을 통한 재물획득과 황제의 개인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유지될 뿐이었던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군단을 상속받았고, 이집트라는 부유한 젖소를 획득함으로 사적인 체계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젖소라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비용[19]을 모두 충당한다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였다. 이를 그나마 채우던 것이 외정으로 적들을 약탈하는 것이였는데, 로마의 팽창이 한계에 도달하자 이것도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돈으로 산 충성은 돈으로 무너지기에 군대는 자신들을 보다 더 잘 대우할 사람을 황제로 옹립하게 된다.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을 누르고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를 넷으로 늘려 각각의 황제가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서 보다 밀도 높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고, 대신 황제 간의 서열을 확고히 하여 기존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가 현직에 있을 때는 그 자신의 권위가 사두정치를 유지시켰고, 그가 은퇴한 이후에는 그의 후임인 갈레리우스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갈레리우스마저 급사한 뒤에는 네 명의 황제는 동등한 위치가 되어 다시 혼란이 시작되었다.

혼란한 제국을 평정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가 지명한 후계자는 조정자로서 권한을 가졌지만, 각자가 군대를 가진 세력가들 사이에서 황제와 부제로 누구를 임명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설사 임명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세력가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지고, 종국에는 또다시 혼란이 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결국 다른 황제들과 자칭 황제들을 격파하고 다시 정국을 안정시킨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방의 군주제를 로마에 맞게 벤치마킹하면서 안정화 작업을 펼쳤다. 황제의 자리에 그리스도교의 보호자라는 권한을 주면서 정통성을 부여했고, 덤으로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동방의 요충지로 이사를 가버렸다.[20]

이후 그 후계자들이 다시 나라를 쪼개면서 동로마는 어떻게든 천 년을 더 버티게 되었지만 서로마는 그게 안 돼서 일찌감치 망했다. 이 이후에도 구 서로마 제국령의 황제는 근본적으로는 '힘있는 자 A' 그 이상으로 가지 못한다.

이러한 로마식 황제 제도는 이 후 다른 유럽 제국들의 군주 제도에도 영향을 크게 끼쳐서, 유럽의 군주제도는 동아시아인이 보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때문에 유럽 문화 배경의 창작물이나 역사물을 볼때 동아시아인들은 꽤 미묘한 느낌을 받는다. 한 국가 안에서 XX왕조 XX왕조 하는 식의 여러 왕조가 있다든지[21], 왕실의 혈통이 끊기자 외국에 있는 왕실의 먼 친척을 모셔와 왕으로 삼는다든지.[22]


3.2.2. 중세[편집]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뒤에 생긴 유럽의 황제는 필요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라는 타이틀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폴레옹 시대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유럽 세계에서 유일한 황제로 인정받았다.

단, 동로마 제국의 군주는 쭉 황제로 인정받았다. 왜냐면 나라가 로마 제국 자체인 것이었기에 너무나도 당연했다. 신성 로마 제국 또한 어느 정도의 정당성은 있었으나, 아예 로마인들에게서 직접 이어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에 비하면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처지는 본인들이나 동로마측이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랬기에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승인과 지지를 통한 권위의 보강이 필요했던 것이며,[23] 동로마측은 이러지 않아도 되었기에 어디까지나 전체 기독교 세계 서열에선 2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게 승인을 요청하지 않아도 되었다.

적어도 제위 문제에 한해서, 서방 교회(가톨릭 교회)와 동방 교회(정교회)의 분리보다는 옛 로마 세계의 서방에 종교계의 1인자인 교황이 있게 된 반면 동방에는 정치계의 1인자인 황제가 있게 되어 이러한 일이 빚어졌다고 보면 된다. 각각 로마의 뿌리는 같지만 지역과 종교가 분할되었기 때문에 로마도 둘, 교회도 둘이 공존했으나, 서방은 종교적 권위가 보다 높았던 반면 동방은 정치적 권위가 보다 높아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3.2.2.1. 조건: 로마 황제의 후계자[편집]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어떤 방식으로든 로마와 관련 있거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첫째로 로마가 아닌 국가를 계승하는 황제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유럽세계의 실질적 전부를 지배한 사람은 로마 황제 말고는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권위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둘째로 자신부터 시작하는 황제도 큰 의미가 없었다. 중세 내내 '로마 제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국력을 갖춘 나라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으므로 누가 인정을 해줄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권위는 매우 떨어져 있고 주변의 어그로만 끌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세를 지배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전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단 하나의 제국이 존재해야 했다[24]. 다니엘서로 대표되는 "4마리의 짐승" 예언에 의하면 지상에는 4개의 거대 제국이 차례로 존재하며 이는 신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 왕조, 알렉산드로스 제국, 로마 제국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온 유럽 세계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마지막이어야 했고, 그 제국이 멸망하면 바로 찾아올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로마 황제는 계속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즉, 새로운 정통성의 황제가 나타나는 것은 교리상 용납 불가하므로 본인을 황제로 칭하고 싶은 자는 로마 제국과의 연관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중세 초기에는 동방에 잔존한 동로마 제국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황제 국가였고,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동로마 황제가 교황을 갖고 노는 일은 수두룩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서유럽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동로마 황제의 서방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형식뿐이었다. 그러던 중 800년 성탄 전야에 교황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망한지 300년도 넘은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이 사건을 동로마 제국 측에서는 완전히 무시했으나, 이후 카롤루스 대제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힘겨워하는 동로마 황제 미하일 1세로부터 811년 황제 자리를 승인받으면서 유럽의 황제 자리는 공적으로 이 되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단지 황제일 뿐이며,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명실상부히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25] 서유럽의 교황이 카롤루스 대제를 로마 황제로 추대한 것도 교황이 로마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세력이었다는 증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제국이 3분할되면서 황제 명칭이 잠시 유명무실해졌으나, 독일의 오토 1세가 황제 자리를 넘겨받아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자기 아들 오토 2세를 결혼시키면서 다시 한번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그가 창립한 작센 왕조의 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잠시 대공위 시대(황제가 없는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1806년까지 계속하여 이어졌다.

프랑스의 경우,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이 끊긴 이후 왕좌를 이어받은 카롤루스의 모계 후손인 위그 카페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대혁명 이전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26] 하지만 손꼽히는 강한 국력을 가진 프랑스의 왕은 "오직 하느님에게서만 명령을 받는 왕"을 대신 모토로 삼으면서,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았던 랭스에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의무적으로 개최하는 등의 세레머니를 통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버금가는 독립적인 권위를 쌓으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황제로부터 정통성을 내려받거나 인정받았다는 최소한의 족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전까지 수많은 유럽 국가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할 수 없었다. 사실 9세기 무렵 크누트 대왕이 다스리던 잉글랜드, 10~11세기의 카스티야 등에서 황제를 스스로 칭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전혀 로마적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개중에는 스스로도 외교 문서 같은 데 쓰지 못하고 국내에서 몰래 몰래 쓰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3.2.2.2. 서유럽의 우회적 조건: 교회의 인정[편집]


위에서 보다시피 유럽에서의 황제는 무조건 로마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그것을 우회할 수 있는 예외적인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전통은 457년 레온 1세 이후 동로마 황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세계 총대주교에게서 제관을 받던 것을 시초로 볼수 있으나, 서유럽만으로 본다면 그보다 300년 뒤인 800년에 카롤루스 대제의 대관식을 로마 교황이 거행했던 것에서 기원한다. 그 이전에는 교황에게 서로마 제위를 수여하는 관습이나 권한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은 국가가 몰락하기 이전까지는 교황에겐 황제즉위를 추인하거나 수여할 수 있는 자격이 없으므로 정당한 로마황제로서의 자격은 오로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서유럽국가들도 인정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아우구스투스 칭호 수여(후대에는 로마의 제정 성립, 혹은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즉위로 일컬어지는)는 기원전 27년으로서 교황을 비롯한 총대주교 체제의 성립은 물론 예수 탄생보다도 더 이전이다. 즉 오리지널 로마에서는 국가/황제위가 교회/총대주교위보다도 먼저부터 존재해 왔었던 것이다.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에게서 서로마 황제위를 받기 전까지는 로마 제국 그 자체인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정치적 보호자였다. 소위 '서로마의 멸망' 이후 열린 5, 6, 7차 기독교 세계공의회 역시 당대의 동로마 황제가 소집한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동로마 황제의 부하 1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이는 성화상 문제 등의 일을 촉매로 양측의 갈등으로 번져나가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동로마 제국은 6~7세기 사이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게 되었는데 이때 랑고바르드족에게 밀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세력권이 남부로 쪼그라들면서 동로마의 영향력에서 실질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던 중 랑고바르드족을 몰아낸 프랑크족의 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의 제관을 요청한 것. 이를 통해 교황은 '황제를 대관해주는' 세계 총대주교와 동등한 권위를 얻고, 카롤루스 대제로서도 '교황으로부터 제관을 받은' 권위를 손에 얻은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 로마 주교인 교황은 비록 5대 총대주교의 일원이라도 그 격과 권위가 다른 총대주교보다 높았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는 비교적 정통성을 가진 직위인 것과는 다르게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는 뒤늦게 만들어진 자리였다.
    • 초기 기독교가 한참 성장하던 당시, 로마 제국 내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었다.[27] 따라서 로마 제국 내에서 대도시=거대 기독교 공동체의 본거지였던 것이며, 이 점에서 로마 제국의 3대 대도시였던 로마,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에 총대주교좌가 설치되었다.
    • 로마는 베드로좌로서 가장 앞선 주교좌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를 담당했으며, 이슬람에게 넘어가지 전까지도 기독교 사회에서 2인자로 공인되었다. 안티오키아는 시리아와 아시아를 담당하던 곳이었으나, 예루살렘이 총대주교좌가 되면서 권위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가 안티오키아 교구에서 나왔음을 보면 오래되고 정통성을 가진 곳이었다.
    •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제국의 수도가 이전되면서 높아진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 명색이 새로운 수도(새로운 로마)인데 총대주교가 없으면 격에 어울리지 않으니 총대주교좌를 설치한 것이다. 이슬람의 침입으로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가 넘어가게 된 이후에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기독교 사회에서 2인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 예루살렘 총대주교좌의 경우 자체적인 규모보다는 예수의 탄생지라는 상징성 때문에 총대주교가 부임한 곳이다.
  • 서로마 멸망 이후 국가는 혼란기에, 회사가 세워지고 없어지듯이, 없어지는데 교회는 그대로 있었다. 처음에는 별 힘도 권위도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도 커지고 오랫동안 잘 버텨온 것에 대한 보상으로 강한 힘이 주어진 것이다.[28]

교황의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추대(?) 혹은 임명(?) 사건이 결론적으로는 서로에게는 윈윈이었지만, 서로의 꿍꿍이는 달랐다.
  • 카롤루스는 본래 동로마 제국과 발을 걸쳐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 황제로서의 정통성이 있다고 여겨지던 동로마의 황제에게 "응, 너 황제 해라"고 인정받는 것은 황제로서의 정통성에 대한 아주 강력하고 일반적인 근거로 여겨졌다. 물론 동로마 역시 이런 황제라는 칭호의 이름값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다른 나라의 지도자가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단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어쩌다 인정해 주더라도 절대 '로마 황제'로 인정해 주지는 않고 '불가리아의 황제'나 '트라페준타의 황제', 정 뭐하면 로마 황제이긴 한데 로마인의(=로마라는 국가의) 황제는 아니고 로마 땅[29]의 황제로만 인정해주는 식으로 대단히 짜디짠 반응을 보여주긴 했지만, 어쨌건 카롤루스와 그의 제국이 보여준 위세를 생각하면 적당한 외교적 교섭+위력 과시 등을 통해 동로마로부터 '응, 너 서방의 황제 하셈' 하고 인정받을 수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던 것. 물론 그렇다고 동로마가 카롤루스를 선뜻 자신과 동등한 로마 황제로 인정해줬을 가능성은 절대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로 낮지만... 불가리아 제1제국만 보더라도 그 위력이 카롤루스 제국을 뛰어넘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동로마에 군사적 위협(+경우에 따라서는 협력)과 영향력을 가한 끝에 (불가리아인의) 황제로 인정받았다는 사례[30] 등을 생각하면 동로마측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융통성과 협상력만 발휘했다면 황제로 인정받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로마 제국은 이미 공동황제나 복수황제의 전통이 있는 나라였고, 동방과 서방의 황제가 공존하던 시절에도 한 쪽 황제위가 비면 다른 쪽 황제가 선임황제로서 후임황제를 임명한 전례는 여러 번 있었다. 이에 비해 '교황의 대관'은 카롤루스가 교황에게 대관받기 이전까지 단 한번도 전례가 없었고 당연히 법적 근거도 없었던 것이다. 카롤루스가 작정하고 새로운 전통을 확립할 목적이었으면 모를까, 전통에 따라 황제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었다면 당연히 동로마의 인정이 훨씬 유용했다.
  • 카롤루스는 교황을 존경하기보다는 이용 대상으로 생각했다. 대관식도 교황의 작전으로 얼렁뚱땅 진행된 것으로, 카롤루스 입장에서는 내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관을 '받음 당하면서' 자신이 교황의 아랫사람처럼 보이면 어쩔까 우려했다.
  • 그러나 최종적으로 카롤루스는 동로마의 갑질을 참고 견디고 숙여 인정받기보다는 차라리 교황을 통한 권위 인정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카롤루스의 시대에는 교황의 권한이 아직 강력하지 않았으므로, 카롤루스 입장에서 교황은 권위가 높다 하더라도 '여차하면 자기 권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또한 카롤루스 이후의 신성 로마 황제들도 통제하기 어려운 봉건제후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교-영주를 임명하는 등 교회 조직에 힘을 실어준 이득 역시 적지 않게 보았다.

어쨌거나 교황의 계략으로 연출된 이 한 번의 '사건'은 그 뒤로 '관례'가 되었고, 카롤루스 대제 이후 서유럽 황제의 대관식은 교황이 집전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카롤링거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후[31]로 교황의 대관식 유무가 황제의 권위에 매우 중요해지면서, 어느새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가 되었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바로 황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잡혔다. 군주를 선출하는 것은 독일 제후의 권리지만, 그렇게 뽑힌 인물이 황제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권리는 교황에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교황에게 제관을 받기 전에는 격이 떨어져서 '로마왕'이라고 칭해야 하며, 대립 황제와 같이 교황의 인정을 아예 받지 못하는(무효인 경우) 경우에는 격이 또 한 단계 더 떨어져서 '독일왕'이라고 했다.

이로써 교황의 권위는 수직상승하여 서유럽 열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간의 주교 서임권 다툼은 중세 유럽의 중요 사건인데, 로마 제국 시기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주교란 황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서 '해당 지역의 종교적 업무를 담당하는 관직'이었기에 그 영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이 당연시됐기 때문에 교회란 정치 권력보다 하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대해진 교황권 덕분에 최전성기의 교황은 황제도 파문으로 굴복하게 만드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이 힘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호랑이 없는 굴에 여우가 왕인 것이 이 체제의 근본이었기 때문에 국가들의 틀이 잡히고 각자의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자 이젠 교회의 인정 따위는 필요가 없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황제가 칼을 갈고 닦은 뒤 교황을 로마에서 쫓아버린 복수를 한 사건이 대표적.

그래도 교황이 제관을 씌워주는 일은 유지되었지만, 이미 실추되기 시작한 교황권은 아비뇽 유수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점령, 파괴, 약탈한 '사코 디 로마' 사건 이후로 완벽히 무너져 더 이상 제관을 씌우는 관습은 폐지되었다. 더 이상 황권에 침을 바를 형편이 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종교개혁이 터지는 바람에 교황은 세속적인 영향력은 둘째치고 종교적으로도 위태롭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교황이 '손수' 제관을 씌워준 사례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의 형식적인 인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때까지도 여전히 이어졌다.

동로마 제국도 비슷했다. 이쪽은 교황이 제위 계승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세계 총대주교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로마의 제정은 그 근본이 공화정의 연장이었던 만큼 황제의 정통성에는 제국민의 인정이 필요했고, 이는 교과서에서 전제군주화되었다고 설명하는 중세 동로마 시대에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그 제국민의 인정에 교회의 인정도 하나의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서유럽 가톨릭 세계와 동유럽 정교회 세계는 두 황제와 두 주교를 구심점으로 삼으며 정신적으로 자연스럽게 분리되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이 신성로마제국보다 일찍 망한 뒤,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이후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를 칭했다. 실제로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선출된 옌나디오스 스콜라리오스는 메흐메트 2세를 로마 황제로 인정해버렸다. 오스만 제국도 셀림 1세 이후로는 5개의 총대주교구 중 로마를 제외한 4개를 보유하고 있으니[32] 어떤 의미에서는 나름대로 기독교의 보호자라고 할 만은 했다.

문제는 그들은 이슬람이라는 것이었고, 교황은 이교도를 황제로 인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세계관에서 오스만 제국이 가지는 동로마 제국의 제위는 멸망한 것 취급을 받았으며, 거꾸로 나머지 4개 총대주교의 권위가 바닥을 치게 되었다.[33]

러시아도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스스로 칭제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근거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였고, 이반 3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신생 러시아 제국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칭했다.(제2의 로마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그러나 신생 러시아 제국은 머나먼 서유럽에서 신경써야 할 만큼 강한 나라가 아니었고 이 때 사용한 칭호 차르(Tsar)는 유럽의 공용어 라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시기 다른 유럽 국가에서는 칭제를 한 것이 아니라 'Tsar를 칭한 것' 정도로 취급당하며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으며, 황제로 인정해달라는 이반 3세의 편지도 명확히 거부하였다.

훗날 표트르 1세가 스웨덴과 싸워 이긴 후 차르 대신 라틴어로 황제(Imperator)라고 선포한 뒤에야 비로소 유럽에 비중 있게 알려졌다. 이때에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는 황제는 오직 한 명 밖에 없다며 표트르의 황제위를 불인정했다. 그러나 이후 독일 왕족들과 통혼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러시아 국력이 너무 강성해지자 결국 신성로마제국을 비롯해서 서유럽 국가들도 러시아 차르를 대충 황제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가 유럽을 정복한 황제 나폴레옹의 침략을 격퇴하자 유럽 전체에서 러시아의 황제위는 공고해진다.


3.2.3. 근세 이후[편집]



3.2.3.1. 신성로마제국의 선출황제[편집]

중세에서 근세로 이행하며 서유럽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변화가 생기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의 자격에도 변화가 생긴다.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를 기점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더 이상 교황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선제후들의 선거로만 황제직에 올랐다.

막시밀리안 1세 이전의 황제는 선제후들의 선거에 의해 황제로 선출된 후에도 일단 로마왕(독일왕) 직위에 머물렀다. 이후 교황의 대관식이 치러진 후에야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이어지면서 교황은 대관식을 황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빈번하게 사용하며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즉 교황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이 황제로 선출되는 경우 그에게 대관식을 치러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선출된 황제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로마왕/독일왕 직위에 머물고 만다. 실제로 역대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된 이들 중 제법 많은 이들이 황제 대관을 받지 못해 공식적으로는 로마왕에 머물고 말았다.

중세 교황의 위세가 절정에 이른 시절에 황제 자리가 비게 되는 대공위 시대가 발생하기도 했고, 대공위 시대 이후 황제들은 한동안 교황 대관을 받지 못했다. 다만 이때는 워낙 시대가 혼란했기 때문에 독일왕이 대관을 받으러 로마까지 가기도 힘들었고, 교황 역시 황제의 권위가 필요했기에 굳이 로마로 대관을 받지 않아도 황제라 칭할 수 있다고 원격 승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시기에 대관을 받지 않은 황제들은 영문 위키피디아에는 황제가 아닌 독일왕으로 분류가 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 교황의 위상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연이은 십자군 원정의 실패, 14세기 기근과 흑사병 등의 재난,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 분열 등을 거치며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356년 카를 4세는 황제 선출 방식을 명문화한 금인칙서를 반포 하면서 황제 선출과정에서 교황의 관여를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선제후들의 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황제 권한을 양보했기 때문에 황권이 더욱 유명무실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말았다.

15세기 황제를 세습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막시밀리안 1세는 선거에서 황제로 선출된 후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이에 대해 교황은 물론이고 어떠한 세속 군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막시밀리안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공식 직함을 Imperator Romanus Electus (Elected Roman Emperor)로 바꾸었다. 이는 선출된 황제라는 뜻이다. 이 직함은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의 공식 직함이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 이후로 황제들은 로마로 내려가 교황 대관식을 받지 않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하고 황제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후계자인 카를 5세가 마지막으로 교황의 대관을 받은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카를 5세의 교황 대관식도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카를 5세는 대관을 받아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라 황제가 된 다음 대관도 받은 것이었다. 그의 대관식은 황위에 오른지 11년 뒤에야 치러졌으며, 교황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추진한 것이다. 예전만큼의 중요성은 없는 단순한 세레머니에 불과했다.


3.2.3.2. 19세기 유럽 - 나폴레옹과 그 이후[편집]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이어 서유럽에서 황제가 된 이는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1804년에 프랑스 상원의 요청을 받아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 이전까지 서유럽에서 오직 신성 로마 제국 황제만이 황제로 인정받았으나, 나폴레옹에 의해 왕권신수설의 논리가 무너지고 힘에 의해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는 사례가 나타나자 로마 제국의 계승과는 별개로 힘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편법으로 황제를 자처하는 식민 제국 국가들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해 '황제 인플레' 현상이 나타났다. 교황의 대관 따위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국민들이 의회를 통해 황제로 임명해주는 나폴레옹의 방식은 방법론적으로 시민들이 원로원을 통해 황제로 인정하는 로마식과 가장 유사하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들어선 나폴레옹의 제정이 갖는 시대적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로마의 임페라토르처럼 공화정 위에 올라탄 독재자에 가까웠고, 따라서 명목상 프랑스 혁명으로 대두된 혁명 정신과 공화국에 대한 신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라는 국가를 소유한 황제'의 의미가 되는 '프랑스 황제'가 아닌 ​프랑스인의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라는 칭호를 썼고 프랑스의 정치체제를 '국가원수가 황제인 공화정'으로 포장했다. 로마도 황제(임페라토르)의 공식명칭은 로마인의 황제로 시민에게 선출된다는 공화정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의 방식은 로마와 유사하며, 이를 본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로마의 임페라토르가 명목상 군주는 아니지만 권력을 휘두르고 세습같이 할건 다 했듯이 나폴레옹 역시 나폴레옹 2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때 국민투표같은 공화정 특유의 인정 절차를 싹다 무시하고 아들에게 제위를 세습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는 나폴레옹이 한참 몰락하던 시기라 정권을 이양받은 프랑스 임시 정권 인수위원회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부르봉 왕조의 복고가 이루어졌다.

이미 15세기 신성 로마 제국가 선출황제로 전환하면서 황제 제위에 대한 중세시대의 규칙이 무너졌다. 사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실력으로 인정받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권위라는 것은 덕지덕지 붙이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나름 명목상 제위에 대한 조건을 충족하려고 했는데,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정통성이 이어진다는 '제3의 반열'이라는 사상을 급조해 로마의 후계자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의 인정이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을 열었는데 본인이 로마로 가지 않고 교황을 파리로 직접 오도록 했다(...) 또 교황이 대관식을 집전하기는 했는데, 왕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 또한 나폴레옹은 그의 아들 나폴레옹 2세로마왕에 책봉하고, 점령지를 제후국으로 삼으면서 최대한 신성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 구색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황제의 명칭을 '프랑스인의 황제'라고 한 것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겸직하던 '독일인의 왕(독일왕)/로마인의 왕(로마왕)' 제위와 같은 형식을 취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이렇게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는 프랑스 제국에 꿀리지 않기 위해 1804년에 합스부르크 세습령들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프란츠 2세는 두 개의 황제 제위를 가졌다. 나폴레옹이 라인란트를 점령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회의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뒤를 도모한 것이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패배로 프란츠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제위를 내려놓았으며,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은 (원래도 허울뿐이었지만) 공식적으로 멸망한다. 그러나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명칭을 계속 유지하며, 외교적으로도 변함없이 황제 대우를 받았다. 나폴레옹 또한 현실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를 인정하고 오히려 조세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위를 더욱 드높이려 하였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실각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다시 부르봉 왕조가 들어섰다. 예전으로 되돌린다는 상징성을 표현하기 위해 나폴레옹 이후 루이 18세샤를 10세는 다시 왕을 칭했다. 그러나 1848년 혁명 이후 들어선 공화정의 대통령이 된 나폴레옹 3세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스스로 또다시 황제가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호엔촐레른 가문프로이센 왕국도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독일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자칭했다. 황제의 명분은 당연하게도 독일 땅에 세워졌던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신성 로마 제국 시절 제후국들이 거의 그대로 독일 제국의 제후국이 되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 때와 달리 독일제국은 제후들의 실권을 크게 제한했고, 황제의 권한이 강했다. 제후들은 여전히 자신의 영지에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자치권은 황권에 의해 전면적으로 제한될 수 있었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차르 역시 동로마 멸망 직후부터 황제를 칭하고 있다가 스웨덴,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하는 등 명성을 쌓으며 서유럽에서도 황제로 대접받았다. 이에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3명의 황제가 만나 맺었다 하여 3제 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버렸기 때문에 독일 제국 성립 이후 50년도 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황제를 칭하던 나라들의 제정이 모두 몰락했다. 이로서 유럽에서 황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3.2.3.3. 편법으로 황제가 되는 방법[편집]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보았듯이 유럽인들은 황위에 있어서 정통성과 권위를 극히 중시했지만, 정작 유럽 밖의 황제들에 대해서는 '아 그런 게 있나보다'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넘어갔다는 점이다.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 제국은 로마 제국이 유일했으므로 '유럽 내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뿐이지만, '그 외의 땅'에 대해선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다른 황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최대 수혜자가 러시아 차르인데, 차르가 동방 정교회 세계의 황제라는 인식 덕분에 의외로 서유럽에서 별다른 이견없이 황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부분이 자신들이 세계의 유일한 제국이고 황제라 생각했던 중국 사례와의 큰 차이점이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열강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자, 영국에서도 황제 직위에 대해 갈망하는 이들이 있었다. 영국의 수상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모시는 빅토리아 여왕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편법을 동원했다. 자신들이 멸망시킨 무굴 제국의 타이틀을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의 칭호를 추가했던 것이다. 유럽인의 관념에서는 이것이 통하는 방법이기는 했다. 왜냐면 중세 유럽의 모든 국가와 칭호는 개인이 아닌 땅에 귀속되며 세속은 칭호와 국가가 아닌 그 칭호와 국가를 가진 땅을 넘김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황제 자체도 고대 로마의 세습 가능한 관직(또는 특권)에 가까운 것에서 출발한 것이고. 하지만 이런 시도는 영국 국내 여론에서조차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취급되어 조롱받았고, 빅토리아 여왕은 Empress라고 불리기보다는 여전히 Queen이라는 칭호를 썼다.[34] 사실 이 시도가 대단히 위험한 것이 자칫하면 대영 제국에서 인도가 종주국으로 인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국에서 (여)황제라는 표현을 꺼렸던 것.

이런 꼼수의 원조는 포르투갈브라질 제국이다. 인도 제국보다 50년 빠르다. 인도 제국은 형식적으로라도 원래 있던 무굴제국으로부터 제국 타이틀을 얻었는데 브라질 제국은 그냥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와 브라질 사람들이 제멋대로 선포한 거다. 물론 브라질 땅에 로마 제국이 힘을 미친 적이 없으니 빈 땅에 황위를 제수해버리는 것 자체도 유럽의 관념에서는 틀린 것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결국 2개월만에 왕조 가문만 그대로고 나라와 군주는 따로 놀았다.

2차 대전 때로 가게 되면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고 에티오피아 황제 직위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겸임하면서 이런 식으로 황제를 자칭한 적이 있었다. 다만 그 후 1943년 이탈리아가 추축국을 탈퇴하면서 에티오피아 황제 자칭은 폐지했고, 몇 년 뒤 군주제도 소멸해버렸다.


3.2.3.4. 19세기~20세기 서양의 황제국들[편집]

  • 영국(하노버 왕조,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윈저 왕조[35])
  • 프랑스 제국(보나파르트 왕조)
  • 독일 제국(호엔촐레른 왕조)
  • 러시아 제국(로마노프 왕조)[36]
  •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합스부르크 왕조)
  • 이탈리아 왕국(사보이아 왕조[37])
  • 오스만 제국(오스만 왕조)
  • 멕시코 제국(이투르비데 왕조(아구스틴 1세), 합스부르크 왕조(막시밀리아노 1세))
  • 아이티 제국(장자크 드 살린(자크 1세), 포스탱 엘리 술루크(포스탱 1세))
  • 브라질 제국(브라간사 왕조)
  • 미국 (노턴 1세)


3.3. 인도[편집]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찬드라굽타 마우리아를 최초의 황제로 본다. 그리고 그의 손자 아소카전륜성왕 황제(Samraat Cakravartin)로 인정한다.[38] 그 후 라자(서구의 Prince에 비견되는 칭호다.) 칭호를 쓰는 북인도, 데칸, 벵갈의 여러 왕조가 난립했고 이슬람 세력이 진입해오면서 술탄이란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이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파디샤나 샤한샤 칭호를 도입하기도 하였다. 무굴 황제들은 미르자라는 칭호를 쓰기도 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어로 아미르의 아들이라는 뜻의 amirzadeh가 변형된 것으로 아미르 티무르의 후손이란 의미에서 쓴 것이지 황제격과는 관련이 없다. 마라타 제국에서는 전통적인 국왕의 의미인 마하라자(직역하면 대왕)에 더해서 마하라자 디라자(왕중왕)나 차트라파티(양산을 쓴 지배자)란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 영국이 인도 전역을 지배한 후 인도제국을 성립하자 영국왕이 인도황제를 겸하게 되었다.


3.4. 서아시아[편집]



동아시아의 황제와 유럽의 imperator에 비견될 만한 지위로는 고대 서아시아의 왕중왕(王中王, king of kings)이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 군주들을 평정한 앗시리아 제국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으며, 사용 시기로 따지면 황제격 칭호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이후 서아시아 일대를 1100여 년간 지배한 이란계 제국들(아케메네스 왕조, 아르사케스 왕조, 사산 왕조)의 군주들이 모두 군주의 기본 호칭으로 왕중왕을 쓰면서 로마의 imperator augustus에 맞먹는 황제격의 칭호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사산 왕조가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정복된 이후 중세 서아시아에서는 이슬람식 군주 칭호가 더 널리 쓰여 왕중왕이라는 칭호는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근세에 들어 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부활시킨 사파비 왕조 시대부터 이란의 왕중왕이라는 표현이 다시 쓰이기 시작했고, 팔레비 왕조 시절에 '샤한샤(왕중왕)'의 공식적인 번역을 황제로 정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팔라비 왕조가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왕중왕 칭호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페르시아어 칭호 중에는 파디샤(pad-e shah, padishah)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왕(shah)들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역시 왕보다 한 단계 높은 황제격의 칭호이다. 이란 본토와 직접적 관련은 없었지만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근세 오스만 제국무굴 제국의 군주들이 군주의 기본 칭호로 이 파디샤를 썼다.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수장들은 신이거나 신의 위치에 준하는 자들이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봉건적 수직 질서 아래 일반인들은 평생 보지도 못하고 고위 관료들조차도 황제를 만날 때는 특수한 예를 갖춰야 했다. 한마디로 황제는 형이상학적인 국가 자신 그자체였다.[39]

이슬람 문화권의 칼리프, 술탄들의 경우 보통 칼리프를 술탄의 상위 군주로 보고 황제와 왕의 관계와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실상은 조금 다르다. 물론 칼리프가 명목상 술탄의 상위 군주이긴 하지만, 이미 10세기부터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여 세속 군주들의 종교적 권위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교황에 더 가까울 것이다. 칼리프가 세속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초창기에는 술탄이 세속 군주의 칭호로 쓰이지 않았다. 칼리프의 지방 통제력이 무너진 뒤 사실상 독립 세력화된 지방 군주들이 명목상 이슬람 세계의 최고 지도자인 칼리프의 권위를 존중하되, 그를 대신하여 실권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왕(아랍어로 말리크, 혹은 페르시아어로 샤)을 쓰지 않고 대신 쓰기 시작한 호칭이 술탄이다.

술탄이라는 단어는 그냥 지배자 정도의 의미라서, 일반적으로 왕과 동격으로 보긴 하지만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술탄은 도시 몇 개나 지방 하나 정도를 다스리는 소국의 군주일 수도 있고, 여러 지방과 민족을 아우르는 제국의 군주일 수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군주의 격을 한 단계 올린다는 의미에서 술탄 중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썼지만,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만 쓰인 특수한 경우이며 상술했듯 오스만 황제들은 술탄보다는 파디샤라는 칭호를 더 많이 썼다. 다른 대부분의 거대 이슬람 국가들(셀주크 왕조, 아이유브 왕조, 이집트 맘루크 왕조, 델리 맘루크 왕조 등)은 그냥 술탄, 혹은 大 술탄 정도의 칭호를 썼다.


3.5. 중앙아시아 유목제국[편집]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튀르크, 몽골 등 북방 유목민족은 중국식의 왕이라는 칭호 대신에 자신들만의 전통적인 칭호를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흉노는 선우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카간이라는 칭호는 비공식적으로는 3세기경 선비족이 먼저 사용했고, 공식적으로는 탁발부의 압력에서 벗어난 유연의 구두상벌가한 욱구려사륜이 최초로 사용했다. 유연을 무너트리고 강력한 제국을 세운 돌궐이 카간의 칭호를 사용한다.

본래 칸과 카간은 유목민족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로 동일한 의미로 쓰였으나 몽골 제국이 등장하고 오고타이 대부터 여러 칸이 난립하면서 칸 위에 카간내지는 대칸이라는 존재를 새로 두게 되어 카간은 중화권의 황제와 같은 의미로 변하게 된다. 다만 이후로도 몽골의 최고 지도자에게도 종종 칸이라는 명칭이 쓰인 것을 보면 칸은 부족의 우두머리와 몽골족 전체의 우두머리를 모두 통칭하는 의미로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몽골 제국중국 전토를 장악하면서 몽골의 대칸이 원나라 황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대칸 지위 대신 중국의 황제가 된 것은 아니고 둘 다 겸하고 있었다.[40] 이후 원나라가 주원장에 의해 북원으로 쪼그라들어 다시 내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고(북원) 이후 중국식 원 황제 지위는 포기하고 대칸 지위만 이어지다[41] 훗날 청나라가 내몽골을 정벌한 이후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 대칸의 지위도 세습하였다.[42] 그리고 투르크계인 오스만 제국페르시아어인 파디샤와 함께 칸호(Han)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술탄 술레이만 한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아랍식과 투르크식 군주 칭호를 같이 썼고 유럽 국가를 상대할 때에는 카이세리 룸(로마 황제)도 자칭했다.


3.6. 아프리카[편집]


아프리카 동부의 에티오피아는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가 폐위되기 전까지 황제를 모시는 제국이었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을 전설적 조상으로 한 솔로몬 왕조가 그것인데, 황통(皇統)이 3000년간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황실이 만세일계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아닌 것처럼 사실 에티오피아의 황통 자체는 여러 줄기에서 이어져 왔던 것이며 3천 년 황통설은 근대 국가를 확립한 메넬리크 2세 시대에 만들어진 신화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아프리카의 말리제국에서는 황제를 만사라고 칭했고 유명한 만사로 만사 무사가 있다.

이외에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인 장 베델 보카사가 잠시 황제를 칭하고 제정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


3.7. 아메리카[편집]


아메리카의 국가들 중에서는 아즈텍 제국의 군주 '틀라토아니', 잉카 제국의 군주 '사파 잉카'도 보통 황제로 번역되어 불린다. 이들은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의 기습침공으로 황제가 너무 쉽게 생포되어버려, 무력하게 제국이 무너지는 한 요인이 되었다.

미국의 경우 공화국이지만 세계 최강대국인만큼 미국 대통령은 사실상 '미국의 선출 황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예 미국의 황제를 넘어 세계의 황제라는 말도 나올 정도. 물론 미국인들은 겸손한 태도를 항시 고수하는데다가 서열을 엄격하게 따지는 군주제 같은 것을 매우 혐오하기 때문에 자국의 대통령을 미국의 황제니 세계의 황제니 이렇게 높여부르는 일이 절대로 없다. 미국이라는 국가부터가 제국인 대영제국을 물리치고 독립한 공화국이고 미국인들 스스로가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4. 황제로 보기 미묘한 사례[편집]



4.1. 고려/조선[편집]


한국사의 고려는 다원론적 천하관[43][44]에 따라 운영됐기 때문에 중원의 황제를 자처하여 '황제국'을 선포하기보단 독자적인 해동의 '천자국'으로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거의 모든 문물에 황제 제도를 수용했다.[45][46] 화이사상에 기반한 성리학적 질서를 중시했던 조선은 이러한 요소들을 대부분 걷어 냈으며 심지어 고려의 해동천하관[47]을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려 때 사용했던 황제 제도의 일부를 관습적으로 받아들이긴 하였다. 그 외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등 한국 고대 왕조 시기에도 굳이 황제라는 명칭은 사용하진 않았지만 스스로 연호를 세우고 번국을 책봉하는 등 제국적 성격을 드러내는 요소가 등장하기도 한다.

  • 고려에서는 광종이나 경종 등 고려 전기 군주들의 경우 비문이나 문건 등에서 황제라 불렸던 사례가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중국을 상대할 땐 외교 형식 상 굳이 황제라 하지 않았다. 중원의 천자와는 별개로 고려만의 천자를 자칭한 것이다. 이후 겉으로 드러나는 비문 등에 '황제' 칭호의 사용은 다소 줄었으나 '천자', '성황' 등 황제의 격식에 해당하는 용어는 여전히 많이 쓰였다.
  • 조선시대 성종 같은 전기 군주들이 일본의 몇몇 다이묘들에게 조공을 받으며 황제 폐하로 불린 사례가 있다. 조선도 은근히 이점을 지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고려 때와 달리 내부적으로나 공식적으로 자칭한 것은 아니며 용어도 폐하가 아니라 전하, 짐이 아니라 과인같이 제후국에 맞는 용어를 썼다. 조선이 황제 제도를 유지한 부분은 묘호 책정으로 묘호는 원래 황제만 쓸 수 있는 것인데 조선에서도 다른 건 모두 제후국 격식에 맞췄지만 묘호만큼은 고려의 전례에 따라 끝까지 유지했다.[48] 더불어 조선왕조실록에는 신하가 조선에 재위한 모든 임금에게 제왕이라 부른 사례가 적혀있다.
  • 조선에서 고종이 1894년에 군주의 지위를 대군주로 올렸으나 이게 전통적인 중화 질서의 황제에 준한 것인지는 애매하다. 일단 호칭으로는 '대군주 폐하'로 불리긴 했는데 사실 황제보다는 서양 국가들의 King을 참고해서[49] 황제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군주의 칭호를 만들어낸 것에 가깝다. 결국 동아시아 세계의 오랜 관점에서는 애매한 칭호이기 때문에 3년 뒤 칭호를 황제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910년 2대 황제가 자리를 물려받은지 3년 만에 나라가 망해버렸고 그게 아니어도 고종의 황제로서 재위 기간 대부분이 일본에 간섭받던 시기라 있으나 마나 한 칭호였다.[50]
  • 흥미로운 사례는 정작 중국 방송에서 대장금 등 한국 사극을 자막으로 내보낼 때 조선왕을 '조선 황제'로 표기했다는 점이다. 중국 입장에서 독립국가의 군주는 황제이고, 왕은 왕자한테나 붙이는 이름이기에 조선이 제후국 노릇을 하는 사실상의 독립국이란 것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어서 이런 묘한 자막이 나오게 되었다.


4.2. 동로마 제국 부흥운동[편집]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동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잠시 라틴 제국이 들어섰다. 그로 인해 동로마 제국 재건을 위해 서 아나톨리아에 황제의 사위 가문이었던 라스카리스 가문의 니케아 제국, 트레비존드(옛 트라페주스) 지방에 옛 황제 가문이었던 콤네노스 가문의 트레비존드 제국이 생겨났으며, 니케아 제국은 후에 팔라이올로고스 가문이 제위를 찬탈하고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해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4.3. 스페인[편집]


11세기 무렵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레온 왕국카스티야 왕국의 왕 알폰소 6세는 자신을 전 스페인의 황제로 자칭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위에 나온 것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명목상 로마 제국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불평을 대차게 샀고, 알폰소 7세 이후 이 칭호는 버려졌다.


4.4. 불가리아[편집]


1946년까지 불가리아의 공식 국호는 불가리아어로 차르스트보 벌가리야(Царство България)로 불가리아의 군주는 불가리아어로는 '차르'로 불렀다. 그러나 이 국호는 타 언어로는 "불가리아 왕국"이라 번역되고 불가리아의 차르는 "국왕"으로 번역된다.[51] 비슷한 예로는 19세기부터 1970년대까지의 그리스 왕국이 있다. 그리스 왕국의 국왕은 동로마 제국 황제가 썼던 '바실레우스' 칭호를 칭했다.


4.5. 이탈리아[편집]


제2차 세계 대전이탈리아 왕국은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을 점령하고 인도 제국을 본따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이탈리아 국왕 겸 에티오피아의 황제 칭호를 주었다.[52]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를 사칭으로 보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1941년 영국에 의해 에티오피아 제국이 해방되면서 명목만 남았다. 게다가 1943년 9월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내각이 들어서면서 이탈리아 왕국이 추축국을 탈퇴하자 허울뿐인 에티오피아 황제 겸임도 공식 폐지되었으며 몇년뒤에는 본토인 이탈리아의 왕정도 국민투표로 폐지되었고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53]


4.6. 추존 황제[편집]


수 많은 왕조에서는 살아생전에 황제를 한 적이 없지만 후손을 잘 둬서 죽은 이후 황제로 추서된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삼국지에만 여러명이 등장하는데 그 예가 조등, 조숭, 조조(이상 위나라), 손종, 손견(이상 오나라), 사마의(진나라) 등이 있다. 조선왕조도 대한제국 선포 후 건국자인 태조정조에서 철종까지의 군주들을 황제로 추존하였다.


5. 참칭 황제[편집]


나라에 혼란이 올 때 실제로는 황제도 아니면서 황제라고 사칭하거나 황위계승권자도 아니면서 황위계승권자라고 사칭해서 황제 자리를 차지한 가짜 황제들도 여럿 있었다. 삼국지만 해도 원술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며 일본의 경우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천황을 사칭했었다. 특히 러시아 제국가짜 드미트리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좀 애매한것이 예를들어 한고조도 딱히 이세황제에게 양위를 받은 것은 아니기에 진나라 입장에서는 원술이나 다를것 없는 참칭자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역사의 승자는 한나라였기 때문에 유방을 참칭자라 부르지 않고 정식 황제로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유방이 어느 정도 할거하다 무너졌으면 평가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원술도 만약에 성공하여 한나라 이후에 '중나라'(仲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으면 그도 유방과 같이 평가되었을 것이다. 또한 남북조시대에는 남북이 서로 상대방을 참칭 황제라 하기도 하였다. 명나라를 창업한 주원장도 홍건적 잔당에 불과한 인물이었고 그 당시 혼란기에 다양한 세력이 나라를 세워 할거하였고 대부분 왕을 칭하기는 했으나 황제를 칭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주원장도 근본을 따지자면 그들과 다를게 하등 없었다.

그래서 반란이 성공하면 혁명이고, 혁명이 실패하면 반란이듯이 창업군주나 실패한 황위 즉위시도도 그런 경향이 있다. 또한 성패와 별개로 촉한정통론이나 조위정통론 같이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도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참칭황제는 실은 실패한 황제에 더 가깝다.

황제라는 칭호가 생기기 전에 황제의 지위에 해당하는 천자의 위치는 왕이라는 칭호가 해당되었으며,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의 왕들이 해당되었고, 참칭한 자는 춘추시대에는 주나라에서 내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즉위한 사람, 전국시대에는 주나라의 몰락 이후 왕을 자칭한 국가들 중 내란으로 일시적으로 즉위한 사람이 해당된다.


5.1. 한국[편집]




5.2. 일본[편집]


출처: 호사카 마사야스 - 《천황이 19명 있었다》#, 나카미 토시오 - 《가짜 천황 사건에 감춰진 일본사의 수수께끼》#
  • 타이라노 마사카도
  • 쿠마자와 히로미치(熊沢寛道, 1889 ~ 1966) - 일본의 자칭 천황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 남북조시대 남조의 마지막 천황인 고카메야마 천황의 후손을 자칭, 스스로 다이엔 천황(大延天皇)이라 칭했는데 이게 언론에도 보도되어 한때 일약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유명세를 이용해 히로히토의 전국 순행을 쫒아다니며 히로히토의 퇴위와 황위를 자신에게 양위할 것을 요구하고 도쿄 지방법원에 히로히토가 자신의 황위를 빼앗은 찬탈자라며 황위 반환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했지만 천황은 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되었고 정황당(正皇党)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국회 의석을 차지해 자신을 천황으로 옹립하게 하려고 시도했으나 내보낸 후보가 모두 낙선했다. 후에는 손신 천황(尊信天皇)을 자칭한 아들에게 자칭 황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자칭 법황이 되어 《일본 역사의 숨겨져왔던 진실을 밝힌다》는 책을 쓰다가 사망.
  • 미우라 요시마사(三浦芳聖, 1904 ~ 1971) - 1945년 일제가 패망했을때 할복자살을 하려 했으나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여신으로부터 "그대는 천황가의 숨겨진 적통 황손이니 마음대로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 그 이후로 스스로 미우라 천황이라 자칭하고 신국 재건 운동을 벌이다 GHQ에 찍혀 공직추방, 감시 처분을 받음
  • 나가오카 나가코(長岡良子, 1903 ~ 1983) - 사이비 종교 지우교(璽宇教)의 교주. 히로히토의 인간선언으로 인해 천황에게 깃들어 있던 아마테라스 오오카미 여신이 빠져나와 자신에게 옮겨와 강림했다고 주장한 뒤 스스로 아마츠시루스테루타에히카리나가히메노스메미코토 신성천황(天璽照妙光良姫皇尊 神聖天皇)이라 자칭 연호 쇼와를 레이주(霊寿)로 개원, 신도들을 병부경, 문부경 등으로 임명하고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입조할 것(...)을 명했으나 GHQ는 당연히 씹었고 신도들의 식량을 갈취한 혐의를 적용해 식량관리법 위반으로 체포했으나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바친 것이라 주장해 석방되었다.
  • 아사하라 쇼코 - 사이비 종교 옴진리교의 교주. 국회 회원식이 열리고 있을때 옴진리교가 소유한 군용 헬리콥터를 도쿄 상공에 띄워 사린 가스를 살포하여 아키히토 천황과 정부 각료, 국회의원을 모두 몰살한 다음 일본국을 진리국으로 바꾸고 죽은 천황 대신 본인이 신성법황으로 즉위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전에 벌인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으로 인해 옴진리교 일당들이 체포되어서 실패.


5.3. 중국[편집]



5.3.1. 춘추시대[편집]




5.3.2. 전국시대[편집]




5.3.3. 초한쟁패기[편집]




5.3.4. 전한[편집]




5.3.5. 양한교체기[편집]


  • 갈영(葛榮)
  • 공손술
  • 왕랑
  • 유망(劉望)
  • 유분자
  • 유영(劉永)
  • 이헌(李憲) - 전후한 과도기에 노강에서 세력을 일으켰다.


5.3.6. 후한[편집]


  • 개등(蓋登, ? ~ 165) - 165년 겨울 10월에 발해현에서 태상황제를 칭하면서 옥 도장, 홀, 벽, 철권을 준비하고 부서를 배치했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 궐선
  • 노방(盧芳)
  • 대이(戴異, ? ~ 166) - 166년에 패국에서 글자가 없는 황금 도장을 얻어 광릉 사람 용상 등과 함께 우물에 제사를 지내고 부서를 지어 태상황이라고 칭하다가 잡혀 죽었다.
  • 마면(馬勉, ? ~ 145) - 144년 11월에 구강에서 서봉과 함께 한나라의 성읍을 공격하고 불태웠으며, 145년 3월에는 황제를 칭했고 당도에 있는 산 속에 영루를 지어 연호를 세우고 백관을 두었다. 등무의 공격을 받아 범용, 주생 등과 함께 참수되었다.
  • 배우(裵優, ? ~ 150) - 150년 2월에 우부풍에서 황제를 자칭하다가 잡혀 죽었다.
  • 상단정
  • 원술
  • 이견(李堅, ? ~ 147) - 진류현에서 황제를 자칭하다가 잡혀 죽었다.
  • 장거
  • 허창
  • 화맹(華孟, ? ~ 145) - 역양현에서 흑제(黑帝)를 자칭해 구강태수 양잠을 공격해 죽였고 등무의 공격을 받아 참수되었다.


5.3.7. 서진[편집]




5.3.8. 오호십육국시대[편집]


  • 구침(丘沈)
  • 막절염생(莫折念生)
  • 법장(法長)
  • 왕시


5.3.9. 남북조시대[편집]


  • 당우지(唐寓之)
  • 번소안(樊素安)
  • 왕혜정(王惠定)
  • 원고낭
  • 유경궁(劉敬躬)
  • 유려(劉黎)
  • 이산화


5.3.10. 수당교체기[편집]




5.3.11. 당나라[편집]




5.3.12. 오호십육국시대[편집]


  • 무을(毋乙)
  • 주을(朱乙)


5.3.13. 송나라[편집]




5.3.14. 원나라[편집]


  • 사오십(謝五十)
  • 양진룡(楊振龍)
  • 올안발로환(兀顔撥魯歡)
  • 원명화상(圓明和尙)
  • 유육십(劉六十)
  • 황광덕(黃廣德)


5.3.15. 원명교체기[편집]




5.3.16. 명나라[편집]


  • 서홍유(徐鴻儒)
  • 장연(張璉)
  • 전구성(田九成)


5.3.17. 명청교체기[편집]




5.3.18. 청나라[편집]




5.3.19. 중국[편집]


  • 스딩우(石顶武:1947~1953), 스진신(石金鑫: 1983) - 스딩우는 대중화불국이라는 거창한 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올랐으나, 중공당국에 의해 반란죄로 체포되어 처형. 아들 스진신은 후주가 되어 국가를 재건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처벌받는다.
  • 딩싱라이(丁兴来:1981-1990) - 사이비교주. 도덕금문교를 창시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도덕금문황제라고 자칭. 재상과 비빈을 책봉했으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해 10년후에 발견되었다. 체포후 처벌.
  • 장칭안(张清安:1982) - 중원청정국의 창업자. 정황제를 자칭해 승상과 문무백관을 임명하고, 장제스를 위국왕으로 봉하고 인민공화국을 토벌하기 위한 친정을 감행하려고 했으나 역시 관계당국에 체포된다.
  • 린원융(林文勇:1980-1982) - 성조국(聖朝國)의 창업자. 황제를 자칭했으나 역시 공안당국에 체포된다.
  • 차오자위안(曹家元:1982) - 옥황대제를 자칭했다.
  • 리청푸(李成福: 1990~1992) - 만순천국을 세웠으나 공안 세 명한테 체포당한다.
  • 쩡잉룽(曾应龙: 1985) - 계획생육정책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대유국을 세운다. 군사를 일으켜 병원을 점거하고 의사와 간호사들을 포로로 삼았으나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제압당한다. 공안급에게 진압 되었던 다른 자칭 황제들과는 달리 군대까지 출동시켰으니 그나마 좀 더 나은 취급일지도.


5.4. 베트남[편집]


  • 마이툭로안(梅叔鸞, Mai Thúc Loan)
  • 마이툭후이(梅叔輝, Mai Thúc Huy)


5.5. 몽골[편집]


  • 도기 선우
  • 아리크부카
  • 오자 선우
  • 윤진 선우
  • 질지 선우
  • 차리 선우
  • 호게 선우


5.6. 러시아[편집]




5.7. 이탈리아[편집]




5.8. 터키[편집]




5.9. 시리아[편집]




5.10. 스페인[편집]




5.11. 그리스[편집]




5.12. 미국[편집]


  • 노턴 1세 - 대담하게도 스스로를 미국의 황제라고 자칭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황제를 자칭한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엄청난 대인배에다가 사람을 인종, 빈부에 따라 차별하는 것을 싫어했던 인도주의자였기에 이 항목에 있는 다른 가짜 황제들과는 달리,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다.


5.13. 세르비아[편집]


  • 시메온 우로시 - 스테판 우로시 5세에 대항해 차르를 자처했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독립을 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세르비아의 왕위는 포기했고 차르가 되지 못했다.
  • 존 우로스
  • 스메데레보의 폴


5.14. 루마니아[편집]


  • 조번 네바드


6. 황제라는 별명을 가진 실존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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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보통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거나,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인물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황제라는 최고의 미칭을 붙여주는 사례가 종종 있다. 다만 이러한 용법은 한국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이는 별명으로 서양권에서는 '황제(Emperor)'라는 칭호 자체가 천하를 주름 잡거나 패권을 거머쥔 왕의 상위 단계라는 느낌 보다는 로마가 무너진 이후 로마를 계승하는 군주에게 주는 고유명사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황제라는 별명 보다는 오히려 '왕/여왕(King/Queen)'이 더 의도하는 바와 어울린다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이런 왕/여왕(King/Queen)을 최고의 미칭으로 더 여긴다.

  • AS 로마의 황제 프란체스코 토티[54]
  • F1의 황제 미하엘 슈마허
  • 가요트로트의 황제 나훈아[55]
  • 고문의 황제 김덕기[56]
  • 골프의 황제 타이거 우즈
  • 김정은을 비롯한 대다수의 독재자
  •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57]
  • 뉴욕의 황제 데릭 지터
  • 단거리 육상의 황제 우사인 볼트
  • 당구의 황제 토브욘 브롬달
  • 라인하르트의 황제 류상훈[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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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그 오브 레전드의 황제 이지훈[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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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에른 뮌헨독일의 Der Kaiser 프란츠 베켄바워
  •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
  • 의 황제, 침대 위의 황제 자코모 카사노바
  • 배드민턴의 황제 린단
  • 빙속의 황제 이승훈
  • 삼국지 도원결의의 황제
  • 쇼트트랙의 황제 빅토르 안
  • 수영의 황제 마이클 펠프스
  • 스노보드의 황제 숀 화이트
  • 스켈레톤의 황제 윤성빈
  • 스키점프의 황제 시몬 암만
  • 스타크래프트의 황제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임요환[62]
  • 스피드 스케이팅의 황제 스벤 크라머
  • 씨름의 황제 이만기
  • 아이스하키의 황제 웨인 그레츠키
  • 예능의 황제 이경규[63]
  • 유튜브의 황제 보겸
  • 인터밀란세리에 A의 L'Imperatore 아드리아누[64]
  • 일본 경마심볼리 루돌프
  • 종합격투기마지막 황제 표도르 예멜리아넨코
  • 중고나라 로마법 사건의 황제
  • 축구의 황제 펠레[65]
  • 카트라이더의 황제 문호준[66]
  •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 클래식의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탁구의 황제 마룽
  • 테니스의 황제 로저 페더러
  • 의 황제 마이클 잭슨[67]
  • 피겨 스케이팅의 황제 예브게니 플루셴코
  • 피파 온라인 3의 황제 김정민
  • 힙합의 황제 노토리어스 B.I.G.
  • 1박 2일이승기[68]

7. 황제 지위에 오른 가공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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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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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m(Im, In)+Pir(Par=준비하다, 명령하다)의 합성어로 제국, 제왕의 통치권, 절대 통치권 등의 의미로 발전하였다.[2] 대표적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프랑스 제1제국.[3] 천자와 황제는 거의 같은 개념이지만, 황제는 정치적 의미, 천자는 종교적 의미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 마치 단군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왕검은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뜻인 것과 유사하다.[4] 사실 대한제국은 주변 국가들이 황제국이니 (비록 명목상이라도) 청의 제후국으로 있으면 외교를 할 수가 없으니 여기에 급을 맞추기 위해 간판만 바꾼 사례고, 일본은 현재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관습적으로 과거 쓰던 이름표만 계속 쓰는 것이다. 즉, 이 경우는 황제란 칭호가 그 국가관을 반영하진 않는다. 쉽게 말해 고종이 열강에게 나라가 집어삼켜지기 직전인데 상황파악도 못하고 칭제한 것이 아니라, 실효성 때문에 한 선택이라 적절한 예시는 아니다. 여러 왕국을 지배하지도 않는데 이런 자부심 때문에 황제를 자칭하는 경우 중국 후한 말기 원술중나라가 적절한 예시.[5] 사실 천자가 황제보다 더 오래된 어휘이다. 본래 왕(王)으로 칭해지던 천자의 호칭을 한층 격을 높인 것이 황제인 것. 따라서 중국 천자라고 하면 선진시대의 왕과 진(秦) 시황제 이후의 황제들을 포괄한다.[6] 로마제국을 개창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이라는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장 높게 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자), 임페라토르(Imperator, 전 군의 임페리움을 지닌 자/군 최고사령관),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최고 제사장)>, 프린켑스(Princeps, 시민의 제1인자),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Tribunicia potestas, 호민관의 특권을 가진 자)등의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각각이 모두 로마 공화정체에서는 극존칭들이였지만, 황제라는 의미와 동일한 것은 아니였다. 따라서 역사학에서는 이를 원수정이라고도 하는데, 원수로 번역할 수 있는 명칭은 프린켑스이다. 이후 동방의 전제군주제가 수용되면서 황제의 의미를 가진 명칭은 아우구스투스가 되었고, 부황제(副皇帝)로 카이사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황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카이사르로부터 승계받은 군단 때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임페라토르라는 명칭도 황제의 의미로 쓰였다.[7] 프랑스, 브라질, 멕시코는 19세기에 제정이 폐지됐다.[8] 서주 시대 청동기에는 황상제(皇上帝)라는 낱말이 쓰여 있는데 위대하신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상서》 <여형(呂刑)편>에서 이 황상제는 한 글자씩 빠져서 "황제"와 "상제"로 나온다.1851년 태평천국을 일으킨 홍수전은 기독교의 신을 天父上主皇上帝라고 불렀다.[9] 백스터-사가르(Baxter-Sagart)에 의하면 상고음은 /*ɢʷaŋ/[10] Baxter-Sagart의 상고음 재구 소리값은 /*ɢʷˤaŋ tˤek-s/이다. 중세 소리값인 중고음으로는 /ɦwɑŋtei/, 현대 표준중국어로는 huángdì라고 읽는다. 청나라를 통치한 만주 황실의 만주어 발음으로는 ᡥᡡᠸᠠᠩᡩᡳ(hūwangdi)이다.[11] 실제로 3황(천황, 지황, 태황 혹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은 사마천의 시대에 이미 전설 속 인물로 여겨졌다. 반면에 5제는 실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전근대 동아시아인들이 역사상 가장 태평한 시대로 미화하는 요순 시대의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은 5제의 마지막 2명에 해당한다.[12] 동아시아의 황제는 그 시작부터 천하 제패를 스스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올려 보고하는 제사장과 같은 위치였다. 황제 등장 이전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한 나라의 왕이 부덕하여 천명이 다른 필부에게 옮겨가는 개념'이 등장했으므로 황제=신의 등식은 엄밀히 말해 성립하지 않는다.[13]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우상화가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삼두정 시절부터 양아버지인 카이사르를 철저히 신격화하여 "신의 아들"(Divi Filius)이라는 호칭을 썼다.[14] 카이사르가 행정수반인 집정관의 비상시 관직인 독재관으로써 정권을 획득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기에, 옥타비아누스는 공식적인 공직에서 물러나는 대신에 비토권을 가진 호민관의 특권으로써 로마의 행정과 입법에 대한 권한을 장악하였고, 카이사르 사망 이후 유산으로 받은 군단에 대한 지휘권은 원로원의 인정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였지만, 대외적으로 보여주기식으로 반납하였다가 되돌려 받는 모습을 취하였다. 물론 카이사르에게서 받은 군단을 바탕으로 안토니오스와 클레오파트라와 싸우면서 원로원으로부터 군단의 확장을 허가받기는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 이전 시기부터 로마의 군대는 장군이나 재력가들에게 클리엔텔라 관계로 귀속된 사병과 같아졌기에 명목상에 불과한 것이다.[15] 현대와 같은 체계적인 국민투표 시스템은 상상하기도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 '민회를 통한 결의' 라는것은 공정한 대중의 의견수렴이 아니라 포럼을 지지자들로 채울 수만 있다면 자신의 주장을 '민회의 결의'로 포장하여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이 한 도시에 모여있던 도시국가 시대와 달리 광대한 제국 전역에 시민권자들이 흩어져 있는 제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명색이 황제인 자가 사람을 못 모을 리는 없으니 이런 민회의 의결이란 단순한 요식절차에 지나지 않게 된 것.[16] 물론 그라쿠스 형제도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원로원이 여러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반격해 올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로원의 행태가 그라쿠스 형제의 예상보다 좀 더 뻔뻔하고 파렴치했던 것이었다.[17]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는 해괴한 해석이지만... 유럽의 경우 고대뿐 아니라 중세, 심지어 근대 무렵까지도 관직 심지어는 국가마저 그 사람의 '재산'으로 여겨 사고 팔거나 상속하는 것을 그리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18]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독특한 이유로 줄줄히 사망해 나간 나비효과다. 아우구스투스 참조.[19] 군단 유지비와 빈민층 복지(콜로세움 운영비와 음식비 지출) 등이 있다. 어찌되었든 황제는 평민들의 대표로서 평민들의 지지를 받아야하는 존재였기에 불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책임이 있었다.[20] 당시 동방지역은 서방지역보다 발전되고, 번화한 지역이였다. 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동방에 군주제를 채용하면서, 오랜기간 쇠락하였지만 공화정의 향수가 남아 있던 로마를 버리고, 새로운 기반을 조성하였다.[21] 동아시아의 경우는 특정 왕조의 종말은 곧 국가의 교체로 보았다. 몇몇 예외는 있었으나, 왕조가 교체되면 국가 이름까지 갈아버리는게 일반적이었다. 왕조의 단절을 국가의 멸망으로 보지 않는 견해는 비유럽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중국과의 교류가 적었던 초기 신라만 하더라도 세 가문이 왕을 돌려먹는 게 현대 동아시아인의 관점으로는 꽤 이질적이다. 이마저도 박, 석, 김씨만이 혼인이 가능했고 왕의 후계자로 아들뿐만 아니라 사위 혹은 딸까지 포함되는 정도였다.[22] 이는 동아시아식 왕조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일부일처제가 기본인 유럽식 군주와 달리, 동아시아식 군주는 많은 첩(후궁)을 거느리기에 혈통이 끊기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서양의 군주들 역시 개인적으로 정부를 두었고 정부의 자식도 있었지만, 정부는 첩과 달리 법적인 아내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의 소생은 모두 사생아로 취급되어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23] 로마 황제의 칭호 중 하나였던 폰티펙스 막시무스(대제사장)가 기독교 공인으로 로마 황제 칭호에서 제외된 후 로마 주교가 서로마 유민들에겐 폰티펙스 막시무스와 같은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24] 고대 말기에 로마 제국이 동서 로마로 분리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로마 제국은 한 번도 갈라진 적은 없다. 단지 하나의 제국을 2명 이상의 황제가 다스린 것일 뿐.[25] 참고로 그 1세기 후인 919년, 동로마 제국과 경쟁 중이던 불가리아 왕국의 시메온 1세도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유럽에는 공식적으로 3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제 직위가 평가절하될 듯 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채 100년이 안 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26] 사실 그 이전에 샤를 8세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헐값으로 사들인 전통 로마 제국 황제의 타이틀도 명목상 보유하고 있긴 했으나, 스페인도 안드레아스의 유언을 통해 동일한 타이틀을 확보한 상태였고, 따지고 보면 공식적인 타이틀 자체는 '임페라토르 콘스탄티노폴리타누스(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 즉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였다. 더구나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완전히 정복된 터라 신성 로마 제국 제위와는 달리 아무런 권한이 없는 명예직이었으며, 계승한 수단이나 경로도 좀 그렇고(...) 주권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이탈리아로 도망친 그리스인들에게라면 모를까, 아무래도 누구 앞에 내놓기 영 민망한 껍데기에 불과했다.[27] 영어로 이교도를 뜻하는 pagan과 농부, 시골뜨기를 뜻하는 peasant가 모두 라틴어 paganus를 어원으로 하는 것이 이 때문.[28] 로마제국의 황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최고제사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지만 제국이 기독교화 되면서 이 직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포기한 직위의 위상이 서로마 유민 사이에선 교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여겨지면서 얼떨결에 교황이 서로마 유민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15세기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교황이 본격적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라고 칭하게 되었다.[29] 지리적으로 로마라는 도시가 포함된 영역을 다스리는[30] 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로마의 바실레우스와 동등한 군주인 짜르로 인정받은 것[31] 그러나 방계 혈동은 유럽의 여러 왕가와 제후 가문으로 이어진다. 부르봉 가문이라든지. 유럽에서 역사가 오래된 왕실들은 조상을 상고해보면 거의 다 카롤링거 방계 혈통과 연결된다. 즉,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이라는 것이다. 애당초 그런 권위가 있어야 왕위의 정통성을 확보 가능하기도 하였고. 처음부터 카롤링거 직계 후손이 시작한 왕조가 아니더라도 혼인을 통해 후손들은 카롤링거 왕가의 후손이 된다.[32]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티오키아.[33] 물론 교황과 별개로 서유럽 국가들은 외교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을 황제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칼리프였기 때문이다. 이는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무관한 것이므로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항목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34] 빅토리아 여왕이 황제 칭호를 받게 된 데에는 왕족끼리의 혼인도 한 몫 했다. 여왕의 첫째딸이 프로이센으로 시집갔는데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성립함으로써 어머니보다 높은 황후의 직책에 오르게 될 상황이었다. 외교적 수사에서 독일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던 정치인의 심리가 작용했다.[35] 인도 황제 한정이며, 윈저가의 황제 직위는 조지 6세 때 끝이 났다.[36] 이쪽은 동로마 계승을 근거로 삼았다.[37] 에티오피아 제국 황제 한정.[38] 이 차크라바르틴이라는 칭호는 한참 후대 청나라에서 청 황제의 권위를 티베트 불교를 믿는 티베트와 몽골에 과시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었다.[39] 이집트의 파라오는 하늘에서 내려온 神 호루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살아 생전에는 神 라의 아들, 神 호루스의 지상대리자이며, 죽어서는 神 오시리스와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당시의 다른 중동의 체계와 비슷하게 고위 관료들이 담당하는 직무가 군주의 개인적인 업무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곳들보다 더 심하다.(파라오의 면도담당자, 파라오의 신발담당자 등)[40] 그러나 몽케가 사망한 이후 쿠빌라이와 아릭부카가 카안 자리를 두고 다투면서 서방의 汗國들은 자체적으로 운영되었다. 이후 쿠빌라이가 카안자리에 올랐음에도 서방은 그 통치에서 벗어났기에 카안의 통치력이 크게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에케 몽골 울루스의 통치자라는 관념만 유지될 수 있었다.[41] 영락제가 북원의 잔당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때려대면서 실질적인 힘을 모두 잃어버렸고, 이후에는 보르지긴 혈통의 인물을 초원세력가가 옹립하는 것으로 명맥만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다얀칸이 초원을 다시 재통일하면서 부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42] 청의 중국통일 이후 청나라의 황제는 중국의 황제, 몽골의 대칸, 만주의 한(han) 그리고 강희제 이후에는 티베트 불교의 보호자 칭호까지 겸하게 된다.[43] 10~13세기 동아시아 세계를 관통했던 기준이 되는 천하관. 중국이 유일한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 군주가 천명을 받은 천자국이듯이 고유의 토풍을 지닌 여러 나라들도 각 천하의 중심이 되어 병존한다는 사상이다. 고려는 이 같은 천하 다원론을 독자적인 해동천하관으로 구현하여 각국의 군주를 '해동천자(海東天子)', '송조천자(宋朝天子)', '거란주(契丹主)', '금주(金主)' 등으로 지역명을 덧붙여 지칭함으로써 그 세계를 명확히 구별하였으며, 고려의 제후국이었던 여진 또한 이러한 사상을 바탕에 두고 “이적과 화하는 바뀔 수 있다”는 '이하가변(夷夏可變)'의 논리를 국제 사회에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 그 결과 여진은 종래의 수많은 침투·정복 왕조들이 종족적 개념의 정통관을 극복하지 못한 것과 달리, 자신들의 뿌리가 고려에서 나왔음을 당당히 밝힌 채 중원의 유일한 정통 왕조임을 천명하여 한족 중심의 종족주의를 타파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으니 이는 매우 특기할 만한 사항이라 하겠다. ☞ "1142년 4월 “남송이 (여진의) 신하로 칭하게 된 사실을 세상에 선포하였다”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성덕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1141년 『조종실록』이 완성되고, 같은 해 소흥화의를 맺어 남송과 신속 관계를 맺은 다음 해다. 성덕비에는 『조종실록』의 조상들의 세계와 소흥화의 이후 남송이 신속국임을 밝히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한족들의 주거지인 연경에 신공성덕비를 세워 자신의 근원이 고려에 있음을 밝혔다는 것은 금 통치자가 종족주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정통 왕조가 되겠다는 의지를 천하에 공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거란과 금나라는 송나라의 정통성에 대한 태도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거란은 자신을 정통 왕조라 하였으나 북송도 정통 왕조인 것을 굳이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나라는 달랐다. 금 통치자들은 남송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유일한 정통 왕조가 되고자 하였다. 원나라 사가들은 송-요-금 3사 중 “누가 정통인가”에 관한 대토론을 거쳐 “세 나라 모두 정통(三國各與正統)”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금나라는 종족적 한계를 뛰어넘어 객관적으로 정통 왕조로 인정받게 되었다." 〈전사들의 황금 제국 금나라-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中〉[44] 중세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견지했던 다원론적 천하관은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한 당나라 중심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루었다는 자부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 "요하(遼河)의 동쪽에 따로 한 천지('해동천하')가 있으니, 우뚝 솟아 중국과 뚜렷이 나뉘어 있네..." 《제왕운기 하권》|"우리나라(고려)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은 없을 것입니다." 《고려사, 문종 12년》|"충선왕이 “우리나라(고려)의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묻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광종 이후 문교(文敎)를 닦아 서울에 국학(國學·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고려사 열전, 이제현》[45] "우리 동방(東方)은 옛날부터 당나라의 풍속(唐風)을 흠모하여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다 그 제도를 따랐으나, 지역이 다르고 인성(人性)도 각기 다르므로 꼭 같게 할 필요는 없다. 거란(契丹)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풍속이 같지 않고 말도 다르니 의관제도(衣冠制度)를 삼가 본받지 말라" 【훈요 10조 中 제4조(其四曰)】[46] 고려에서 황제 칭호는 성황, 신성제왕 등과 함께 별칭으로써 사용됐다.[47] 신성 혈통을 부여받은 용의 후손이자 해동 세계의 주인인 고려의 군주가 중원의 천자와 구별되는 해동의 천자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관념.[48] 이로 인해 정유재란명나라의 정응태한테 트집이 잡히는 촌극도 빚어졌다.[49] 그래서 외국의 King도 대군주로 번역하였다.[50] 그래도 1897~1904년 전까지는 나름 실권이 있었다.[51] 다만 불가리아 제1제국과 제2제국의 호칭이던 '차르'는 황제로 번역된다.[52] 1939년에는 알바니아 국왕도 (자칭)겸임한다. 이 역시 1943년에 포기.[53] 그래서 왕위 요구자/아프리카 문서의 에티오피아 황제 문단에는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 왕조왕위 요구자가 없다.[54] 이것 역시 직역하면 L'Ottavo Re di Roma, 로마의 여덟번째 왕이라 불리었다.[55] 보통 '가황(歌皇)'으로 많이 줄여 부른다. 여담으로 조용필은 '가왕(歌王)' 즉 '가요의 왕'으로 불린다.[56] 이 사람은 노덕술, 하판락과 더불어 악질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57] 미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는 왕을 3인칭으로 지칭하는 his highness의 말장난인 his airness. 물론 중계를 보다보면 The King도 나오고, 역대 최고의 선수로 널리 인정받던 워싱턴 위저즈 시절엔 대놓고 중계자가 The Greatest of All Time이라고 했다. 문서화 할 때는 GOAT라고 쓰인다. 한술 더 떠서 basketball god(!!)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god이란 수식어는 한 분야에서 역대 최고 수준의 달인을 지칭할 때 종종 쓰는 단어다. 예를 들어 guitar god인 에릭 클랩튼. 물론 이 수식어가 붙으려면 웬만한 달인이 아니라 조던이나 클랩튼처럼 정말 역대 최고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조던을 제외하면 god이란 수식어를 달고 있는 농구선수는 없다. 조던의 위치가 그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음악의 경우 여러 명이 있는데, 종목 특성상 객관적인 우열을 가리기 힘들기 때문이다.[58] 그덕에 방송만 키면 시청자들이 백성을 자처해서 황제 폐하 문안드리러 왔다는 드립이 매번 나온다.[59] 영어로는 King of Rock 'n' Roll.[60] 아지르로 유명해 황제라는 별칭이 붙었다.[61] 김범수의 얼굴이 독보적으로 못생긴 건 연예계에서 아주 유명한 얘기라서, 김태호 PD가 대놓고 못친소 페스티벌 특집에서 그를 얼굴 황제라고 칭송해 마지 않으면서 해당 특집의 1부와 2부에서 내내 황제니, VVVIP니 하는 수식어가 다닥다닥 붙었다.[62] 이전 별명은 테란의 황제. 스타크래프트가 정립된 이후로 보통은 그냥 '황제'라고 부른다. 그냥 테란만의 황제라기엔 스타판 전체에 영향력이 너무나 막강해졌기 때문.[63] 후술할 이주일과는 또 다르다.이주일은 모든 코미디를 통합한 황제라고 본다면, 이경규는 흔히들 말하는 예능이라는 장르의 황제라고 보면 된다.[64] 2000년대 초반.[65] 포어로는 O Rei do futebol,즉 ‘축구의 왕'이라고 불리었다.[66] 과거에는 지금은 은퇴한 강진우김대겸을 말하기도 했다.[67] 영어로는 ‘King of Pop'.[68] 1박 2일에서 황태자에서 성인이 돼 황제로 불렸으나, 사실상 장난식으로 황제라 불렀지만, 당시 찬란한 유산1박 2일 두개의 프로로 시청률 70%를 자랑하던 한때는 진짜 황제였다.[69] 황제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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