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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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역사적인 의미
3. 군소 포교당의 문제




1. 개요[편집]


사전적 의미로는 "종교를 널리 전파하는 일을 맡아보는 곳"으로 정의되어 있으나 이곳에선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교의 종교시설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2. 역사적인 의미[편집]


대개 대형 사찰에서 분점(?)형태로 개설하며, 어느정도 이상으로 규모가 커지면 정식 사찰로 등록되어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장기간의 숭유억불로 인해 도심지역에서 사찰의 씨가 마른 상황에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며 기독교 등 외래종교와 일본불교가 한반도에 적극 진출하게되고, 이에 대항하고자 각 사찰에서 산하에 도심종교시설을 세운 것을 유래로 한다. 해당 포교당들은 종교시설로써의 역할 뿐만아니라 계몽 교육활동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각황사(조계사의 전신)을 비롯하여 오늘날 도심 속 사찰의 대부분은 이러한 개념으로 근현대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승려들 대부분이 자신의 출신 사찰의 산하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교구제도가 지역과 불일치하는 세태의 시작이 되었다.[1]

정법사 (통도사 마산포교당) - 1912년 창건

동불사 (마곡사 공주포교당) - 1918년 창건

대각사 (서울 종로구) - 1912년에 만해, 용성스님 등 항일인사들의 주도로 세워진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을 원류로 한다. 역사적 뿌리로 조계종에는 교구 체계에 속하지 않는 대각회란 법인으로 등록되어있다.

법륜사 (범어사 동래포교당) - 1.4 후퇴 당시 피란온 순정효황후가 한동안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수원사 (용주사 수원포교당) - 1929년 나혜석의 전시회를 개최하여 유명해졌다.

불이성법륜사 (서울 종로구) - 금강산 유점사의 경성포교당으로 시작되었으나 해방과 분단, 불교 내 분규 등의 복잡한 역사를 거치며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무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 외에도 오늘날에도 새로운 포교당들이 계속 세워지고 있다.


3. 군소 포교당의 문제[편집]


대한불교조계종의 사찰법에 따르면, '소유부동산이 없이 부동산을 임차하여 운영하는 사찰'인 포교소와, '교구본사나 말사에서 직접 운영하고, 그 재산권은 관할 사찰이 소유하며, 도심지역 등 동일 경내 이외에 위치한 사찰'을 가리키는 직영포교당으로 각각을 구분하여 규정하고있다.

이 중 직영포교당의 경우 조계종에 정식 사찰로 조회되진 않지만 소속된 상위 사찰의 관리 하에 놓여있어 행정적으로는 그 사찰 소속으로 등록되어 활동할 수 있으나, '포교소'의 경우는 행정적으로만 사찰일 뿐 개신교의 미자립교회와 마찬가지의 열악한 환경에 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일부 포교소는 유사조계종의 명칭을 달고 떳다방, 불교의 탈을 쓴 무속행위, 납골당 홍보 및 다단계 판매 등 사회적 문제와 함께 인근 주민들과의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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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적으로 19교구 화엄사 예하인 해동용궁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