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아테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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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19대 샤한샤
𐭐𐭓𐭇𐭕 | 프라아테스 5세
파일:프라아테스 5세.jpg
제호
한국어
프라아테스 5세
파르티아어
𐭐𐭓𐭇𐭕
영어
Phraates V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
재위 기간
기원전 2년 ~ 기원후 4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파르티아의 제19대 샤한샤.

이탈리아 노예 출신의 어머니 무사와 함께 샤한샤에 올랐으나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 의해 로마로 축출되었다.

2. 생애[편집]


프라아테스 4세무사의 아들이다.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로마군을 사열시킨 뒤 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하여 카르헤 전투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원정때 노획당한 로마군 깃발과 안토니우스의 옛 부하들을 돌려받았으며,[1] 양국의 경계를 확정지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무사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노예 소녀를 선물로 줬다.

아브로마에서 발견된 양피지에 따르면, 프라아테스 4세에게는 이미 올레니에르, 클레오파트라, 바시르타, 비스테이바냅스 등 4명의 황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라아테스 4세는 무사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프라아테스 5세를 낳았다. 기원전 10년 또는 9년, 무사는 친아들의 제위를 확보하기 위해 남편 프라아테스 4세로 하여금 세라스판데스, 로다스페스, 보노네스 1세, 프라아테스 등 그의 다른 자식 4명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4명의 어린 파르티아 왕자들을 대중에 보이면서, 파르티아가 로마에 굴복했다고 선전했다. 기원전 2년, 무사는 프라아테스 4세를 독살하고 아들 프라아테스 5세와 함께 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서기 1년, 아우구스투스는 양자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을 파견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점거하도록 했다. 이후 파르티아의 사절단이 가이우스를 만나 인질로 갔던 네 명의 이복형제들을 돌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로마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신 아르메니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가 프라아테스 5세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를 단순히 '프라아테스'라고 불렀다. 그러자 프라아테스 5세는 답신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단순히 '카이사르'라고 부르는 것으로 맞대응했다고 한다.

하지만 양국은 곧 합의에 이르렀다. 아르메니아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로마는 파르티아를 동등한 국가로 인정하며 프라아테스 5세를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귀족들은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속국으로 들어가는 걸 용인한 통치자에게 분노했다. 가뜩이나 이탈리아 여자 노예의 자식이 샤한샤가 된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파르티아의 봉신이었던 아르메니아가 로마에 귀속되는 걸 허용했으니 분노를 터트릴 만 했다. 결국 그들은 서기 4년에 반란을 일으켜 프라아테스 5세와 무사를 몰아내고 오로데스 3세를 제위에 앉혔다. 두 모자는 로마로 망명했으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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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르헤 전투의 포로들은 파르티아 측이 세월이 많이 흘러서 다 죽었다고 주장해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