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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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Wilhelm Freiherr von Seydlitz

1. 개요
2. 일생
2.1. 초기 경력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3. 7년 전쟁
2.4. 이후의 삶
3. 여담



1. 개요[편집]


프로이센 왕국의 기병대 지휘관. 프리드리히 대왕이 가장 신임한 최측근 중 한 명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참고로 본 문서 제목은 이전에는 자이들리츠라고 적혀 있었으나, 실제 독일어의 표기법상 자이틀리츠가 정확하다. Sey + Dlitz가 아니라 Seyd + Litz인 것이다.

2. 일생[편집]



2.1. 초기 경력[편집]


자이틀리츠는 1721년 2월 3일 클레베 공국 칼카-니데르헤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다네일 플로리안 폰 자이틀리츠는 프로이센 드래곤 연대 기병 대위였다. 그의 가족은 브란덴부르크-슈베트 출신이었다. 1728년, 자이들리츠가 7살일 때 아버지는 프로이센군에서 사임한 뒤 얼마 안되어 급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1735년 14살의 나이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궁정으로 들어갔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기마술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여러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그가 가동되고 있는 풍차의 돛 사이를 말을 타고 통과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의심스럽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편집]


1740년, 자이틀리츠는 브란덴부르크 기병대에 소속되어 로히요 대령의 지휘를 받았다. 1742년 5월 20일, 로히요 기병연대는 라티보르 시 근처 크라노비츠에 정박했다. 그러던 중 로히요 대령은 6천 명의 헝가리 경기병대가 마을로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자이들리츠에게 마을 앞에 30명의 기병들과 함께 배치하도록 했다. 헝가리 경기병대는 곧 그를 공격했고, 프로이센 증원부대는 헝가리 기병대에게 격퇴되었다. 자이들리츠는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결국 적에게 붙잡혀 라브 요새에 수감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의 용감한 행동에 대해 전해듣고 그를 위해 포로로 잡아뒀던 오스트리아군 대위와 교환하기로했다. 이리하여 자이들리츠는 6월 11일에 오스트리아군 대위와 교환되어 프로이센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

1743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이틀리츠를 두비슬라프 폰 나츠머 원수의 후사르 연대 소속 제4 후사르 중대 대위로 임명했다. 자이들리츠는 자신이 맡은 중대를 프로이센군 기병대 중 최정예로 길려내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1745년 6월 4일 호엔프리드베르크 전투에서 나츠머 후사르 연대는 프로이센군 우익에 배치되었다. 자이틀리츠는 전투 중에 작센의 슐리흐팅 장군을 포로로 잡았고, 이 공적으로 그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또한 자이틀리츠는 9월 30일 조르 전투에서 기병대를 이끌고 고지에 자리잡은 오스트리아 포병대를 무찌르는 전공을 세웠으나 그 과정에서 왼쪽 팔에 총탄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이후 1745년 하반기에 치타우 근방에서 부르크하우젠 백작 휘하의 오스트리아 후위대를 기습해 격파했다.

전쟁이 끝난 후, 자이틀리츠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 사이의 전간기 동안 프로이센 기병의 전반적인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강훈련을 실시했다. 또한 그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1752년 9월 21일 중령으로 승진했고 10월 13일엔 슈배린 드래곤 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755년 6월 19일엔 대령으로 승진했다.

2.3. 7년 전쟁[편집]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이틀리츠 대령이 이끄는 기병연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작센 침공 작전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할레와 라이프치히를 거쳐 피르나로 진군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군단에 배속되었다. 작센군이 피르나에서 포위되자, 자이틀리츠 기병 연대는 막시밀리안 율리시즈 폰 브라운이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의 구원을 요격하려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에 포함되었다. 10월 1일, 양군은 로보지츠 전투에서 맞붙었다. 자이틀리츠는 기병 연대의 선두에 서서 적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초기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오스트리아군의 결연한 반격에 밀려났다. 그는 그 과정에서 거의 생포될 뻔했지만 그의 근위병 중 한 사람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후 프로이센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로보지츠 마을을 점령한 프로이센 보병대의 측면 공격에 밀린 오스트리아군이 후퇴하면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1757년, 자이틀리츠는 모리츠 폰 안할트-데사우 왕자의 군단의 전진 기병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그는 한스 요아힘 폰 치텐 장군의 지휘하에 여러 전투를 치렀으나 5월 6일 프라하 전투 당시에는 전장 반대편에 주둔하고 있어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프라하 전투 승리 후, 자이틀리츠 기병 연대는 프라하에 고립된 아군을 구하려는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휘하 오스트리아군을 요격하려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따라갔다. 이후 6월 18일의 콜린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은 적에게 패주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도망치는 적을 맹렬히 추격했다. 이때 자이틀리츠는 휘하 기병대를 이끌고 반격을 개시해 적 보병대를 연이어 밀어내 아군이 궤멸되는 걸 막아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 공적을 치하하고 자이틀리츠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소장으로 승진시켰다.

1757년 9월, 프리드리히 대왕은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작센 침공을 저지하고자 출격했다. 9월 19일, 약 1,800명의 기병대를 거느린 자이틀리츠는 고타에서 약 6,000명의 보병대와 4,000대의 기병대를 거느린 적을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후 로스바흐 전투가 벌어진 날인 11월 5일 아침,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이들리츠를 전 기병대의 선두에 배치했다. 자이틀리츠는 이어진 로스바흐 전투에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여 프리드리히 대왕의 대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팔에 부상을 입었으나 개의치 않고 병사들을 게속 지휘했으며,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런 그의 공적을 치하하며 11월 20일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했으며 중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부상 치료차 잠시 군무를 떠나있던 자이틀리츠는 1758년 여름 군대에 다시 들어가 8월 25일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좌익 기병대 지휘를 맡았다. 자이들리츠는 초기 공세가 적 보병대에게 막히자 군대를 재정비한 후 때를 기다리다가 프로이센 좌익 보병대가 패주하고 적이 무질서하게 추격해오자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그를 막아서는 러시아 기병대를 쿼트센 습지로 밀어낸 뒤 러시아 보병대의 측면을 요격해 후방으로 물러서게 했다. 이후 1758년 10월 13일 밤에서 14일 새벽 오스트리아군이 기습을 감행해 호크키르히 전투가 발발했을 때, 그는 혼란에 빠진 프로이센군을 재정비시키고자 사력을 다했고 아군의 후퇴를 철저하게 엄호해 전력이 와해되는 걸 저지했다.

1759년 8월 12일 쿠네르스도르프 전투 때,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이들리츠에게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중앙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처음에는 이 명령이 무리라며 대왕을 만류했지만 결국 대왕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지시에 따랐으나 적 포병대의 포격전과 기병대의 역습을 버티지 못한 기병대가 와해되는 걸 막지 못했으며 그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 이렇게 프리드리히 대왕 인생 최악의 패전이었던 쿠네르스도르프 전투가 끝난 뒤, 자이들리츠는 부상을 치유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다.

1760년 4월 요양하던 중 알베르티나 폰 하케 여백작과 결혼한 자이들리츠는 5월에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장으로 나아가 마이센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재회했다. 그러나 대왕은 그의 몸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음을 보고 그를 베를린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던 10월 초, 토틀젠 장군 휘하의 소규모 코사크 기병대가 오데르 강을 건너 베를린을 위협했다. 그러자 자이틀리츠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소규모 기병대를 모아서 쿄페닉에서 코사크 기병대를 저지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증원대가 도착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베를린을 떠나야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이 서둘러 베를린으로 돌아오면서, 며칠 동안 베를린을 점거했던 러시아-오스트리아 기병대는 철수했다.

1761년 마침내 군대에 복귀한 자이틀리츠는 5월 20일 작센의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왕자가 지휘하는 군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혼합군으로 구성된 독립 야전군을 맡았다. 지금까지 기병대만 이끌었던 그가 보병대 지휘까지 맡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군대를 잘 이끌어 여러 차례의 소규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으며 10월에는 2천 명의 보병대와 12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군의 마그데부르크 진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762년 자이틀리츠는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왕자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세를 이끌었고 10월 29일 프라이베르크 전투때 프로이센군 우익을 지휘했다. 그는 전투가 한창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에 척탄병 2개 대대를 이끌고 총검돌격을 개시해 적을 패퇴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전투 이후 전의를 상실한 오스트리아는 마침내 1763년 2월 프로이센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2.4. 이후의 삶[편집]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 협약 이후, 자이틀리츠는 슐레지엔 기병대 감찰관으로 임명되어 촉망받는 기병 장교들을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1767년 7월 29일, 자이틀리츠는 기병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가정사 문제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아내를 무시하고 불륜을 일삼다가 매독에 걸렸고, 아내는 그를 치료하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고 맞바람을 피웠다. 또한 그의 장녀는 한 번 이혼했고 차녀는 두 번 모두 이혼했다. 게다가 그는 말년에 독선적인 성향이 극에 달한 프리드리히 대왕과 불화를 일으켜 대왕의 신임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던 자이들리츠는 1773년 11월 8일 오흘라우에서 전신 마비 증세로 사망했다. 향년 52세.

3. 여담[편집]


제2차 세계 대전독일 국방군의 포병대장으로 종군한 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가 그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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