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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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피아스트.jpg

아버지
초시스코
배우자
줴피하
자녀
시에모비트
가문
피아스트 가문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피아스트 왕조의 시조.


2. 상세[편집]


12세기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집필한 <대 폴란드 연대기>에 따르면, 폴란의 대공 포피엘 2세가 두 아들이 머리를 깎는 성인식이 열리는 것을 기리기 위해 잔치를 열었다. 이때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초대도 없이 잔치에 오자, 포피엘 2세는 이를 불쾌하게 여겨 테이블에 앉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도 그니에즈노에서 쫓아냈다. 그 후 두 사람은 교외지를 떠돌다 피아스트라는 농부를 만났다. 피아스트는 두 사람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환대했고, 두 사람은 이에 감사를 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도착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기를 바라며, 당신은 우리에게서 풍성한 번영과 후손의 영예와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후 피아스트는 아들의 머리를 깎는 의식을 거행했고, 이를 기리기 위해 두 사람과 함께 식사했다. 가난한 형편이었던 터라 음식이 변변치 않았는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술통에 맥주가 떨어지지 않았고, 도살한 돼지가 열 그릇을 채울 만큼 많았던 것이다. 피아스트와 아내 줴피하는 두 손님과 상의한 뒤 마을 주민들을 모두 초대해 함께 즐기기로 했다. 이후 두 손님은 당시 7살이었던 피아스트의 아들에게 몸소 세례를 주고 시에모비트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후 성장한 시에모비트는 포피엘 2세를 몰아내고 자신이 폴란의 대공이 되었다고 한다.

크라쿠프 수도사이자 폴란드 역사 연대기 저자인 빈센티 카드우벡(Wincenty Kadłubek, 1150년경 ~ 1223년 3월 8일)에 따르면, 피아스트를 찾아온 두 손님은 일반인이 아니라 천사가 된 사도 요한바울로였다고 한다. 또한 14세기에 라틴어로 편찬된 <폴란드, 러시아 및 그 이웃 연대기>에 따르면, 이 사건은 크루슈비차에서 벌어졌으며 대공으로 선출된 이는 시에모비트가 아니라 피아스트였다고 한다.

폴란드 성직자, 연대기 작가인 얀 드우고시(Jan Dlugosz, 1415 ~ 1480)에 따르면, 피아스트의 선출은 포피엘 2세 사후 이웃 부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뤄졌다고 한다. 또한 그는 피아스트가 폴란인들의 수도를 크루슈비차에서 그니에즈노로 이전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피아스트는 120세까지 살았지만 레슈코 3세가 자녀들에게 분할하기 전에 존재했던 통합된 폴란인들의 나라를 복원하는 데 실패했다고 한다.

16세기 폴란드 역사가 마르친 비엘스키(Marcin Bielski, 1495 ~ 1575)에 따르면, 피아스트는 양봉가 또는 수레공이었으며, 포피엘 2세가 죽은 후 사람들이 호수 반대편에서 가장 먼저 올 사람을 대공으로 선출하기로 했을 때 호수 반대편에 위치한 양봉장에서 돌아오면서 대공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비엘스키는 그의 통치가 50년간 지속되었으며, 선출은 842년에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위의 이야기들을 후대에 지어진 전설로 취급하며, '피아스트'라는 명칭의 기원은 piasta (폴란드어로 "허브")와 piastun(폴란드어로 "관리인" 또는 "수호자") 중 하나일 거라 추정한다. 이중 두번째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가 다른 통치자의 궁정에서 메이저도모 (majordomo) 또는 "집의 청지기"를 맡았다가 점차 권력을 장악하여 원래 통치자를 몰아내고 폴란인의 지도자가 되었을 거라 추정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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