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귀스타브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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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Gustave Roz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miralRoze.jpg

이름
피에르귀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
출생
1812년 11월 28일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툴롱
사망
1883년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파리
소속
프랑스 해군

1. 개요
2. 병인양요
3. 병인양요 이후



1. 개요[편집]


프랑스의 군인. 한국에서는 병인양요 당시 조선과 충돌했던 프랑스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다.


2. 병인양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병인양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866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가톨릭 선교사 9명이 순교하는 병인박해가 발생하였다. 당시 로즈는 프랑스 극동함대의 사령관으로 톈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병인박해에서 살아남았던 펠릭스 클레르 리델[1] 신부 등이 로즈 제독에게 병인박해에 대해 알려오면서, 로즈 제독은 조선 원정을 준비하였다.

당시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던 조선은, 프랑스 함대가 출격하자 전쟁 분위기에 휩싸인다. 리델 신부는 이 기회에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저지하자고 제안하였는데, 로즈는 병인박해 이전 한성으로 진공할 때 받았던 호의적인 태도 때문에 리델 신부의 제안을 거부하고 즈푸항으로 돌아온다.

로즈는 이후 다시 강화도로 진공하기 위해 영종도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이 전투를 통해 강화도로 진공하였다. 이후 강화해협 봉쇄령을 청나라와 각국의 공사관에 발송하고 해상훈련을 실시하였다. 조선에서 항의서한을 보내자 로즈는 조선에서 선교사들이 처형당한 사건을 비난하며 전권대신의 파견을 요구하였다.

로즈의 함대는 이후 문수산성을 정찰하다가 매복 중이던 한성근의 공격으로 인해 27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이후 정족산성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퇴각하면서 강화이궁과 외규장각에서 각종 무기와 서적 등을 약탈하였다.

3. 병인양요 이후[편집]


병인양요 이후 로즈는 일본 요코하마로 돌아갔다가 1868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로즈는 이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도 참전하고 중장으로 지중해 방면 사령관을 맡았다가 1883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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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