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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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역사
ההיסטוריה של פלסטין ・ تاريخ فلسطي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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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הוֹרְדוֹס
고대 그리스어
Ἡρῴδης
한국어
공동번역 성서
헤로데
가톨릭
개신교
헤롯

1. 개요
2. 이름
3. 역사
3.1. 헤로데 대왕(헤로데 1세) 치세
3.2. 헤로데 사두정치



1. 개요[편집]


에돔 혈통의 왕가로, 고대 로마의 속국으로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왕국을 세운다.


2. 이름[편집]


신약 성경이나 역사 기록에 남은 '헤로데'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는 'Ἡρῴδης(헤로데스)', 히브리어로는 'הוֹרְדוֹס(호르도스)'이다. 가문명을 비롯하여 인명에도 사용된다.

보통 아기 예수를 미리 죽이기 위해 애꿎은 어린애들을 학살한 헤로데왕으로 유명하지만, 사실은 대가 이어진 동명이인 임금 여러 명이다. 성경에서만 따져도 무려 4명, 실제로는 6~7명이라서 착각하기 쉽다. 그나마 성경에서도 구별은 해준다.

영어로는 'Herod'. 뜻은 '영웅의 아들'로서 'Hero'(히어로)와 어원이 같다.

3. 역사[편집]






3.1. 헤로데 대왕(헤로데 1세) 치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헤로데 대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유대인들에 흡수된 에돔의 유력가문 출신인 안티파테르(안티파텔)와 나바테아 왕국의 페트라(요르단강 동쪽)의 공주 키프로스의 둘째 아들, 이 사람이 그 유명한 유아대학살[1]을 했다고 알려진 헤로데왕이다. 이스라엘(야곱)의 후손이 아니면서 이스라엘 왕족이 된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당시 유대 백성들한테 헤롯 대왕과 헤로데 왕조의 사람들은 사실상 외국인으로 취급받았고, 그다지 백성들로부터 충성심도 얻지 못했다. 그 무렵 유대의 성직자들 중 상당수는 헤롯 대왕을 거짓 왕이라며 증오하였고, 헤롯 대왕이 죽자 유대 각지에서 헤로데 왕조에 반대하는 수많은 반란들이 잇달아 일어났다.

현재 이스라엘에선 나름대로 대왕으로 칭송하는 편이다. 그가 유대인도 아니고 다윗의 후손도 아닌데도 말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면 대표적인 이유는 하나는 성서와 본문에서 나오듯, 성전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지에서 현지 취재를 할 때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이, "기독교 나라에서 신약 성경을 근거로 헤로데 대왕을 비하하는 일을 좀 집어쳤으면 한다"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이다. 사실 유대교는 로마 황제를 위해 제물을 바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로마 내에서 가장 높은 종교적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고, 헤로데왕은 이를 보호하는 대표적 인물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다만 헤로데가 당대 유다인들에게 미움 받았던 군주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베들레헴 유아 학살에 대한 역사적 진위 여부를 논외로 하더라도, 헤로데가 매우 잔혹한 군주여다는 것은 성경과 성경 외 문헌에서 교차검증이 되며, 사제 가문 및 열혈당원들과의 대립은 당시 유다인들에게 헤로데가 어떻게 취급 받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대 유다인들에게, 헤로데는 유다인조차 아닌 에돔(이두매아) 출신의 비정통 이방인 군주에 불과했다.

헤로데에 대한 현대 이스라엘의 고평가는, 현대에는 헤로데의 혈통 문제와 왕위의 비정통성이 아무래도 좋은 문제가 되었고, 잔혹성은 별로 와닿지 않는 문제가 되었으며, 그보다는 영토 확장 등 국익을 증진하고 토목 인프라를 건설하는 노회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3.2. 헤로데 사두정치[편집]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은 적자를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고, 그의 영토는 아들(서자) 셋과 여동생에게 분할된다. 하지만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받은 게 아니었다.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아우구스투스가 이들의 왕의 지위를 인정하나 통치권을 박탈한다.

파일:Herodian_tetrachy.png
파일:map-back-11.png
헤로데 사두정치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필립보 2세

헤로데 필립보 2세

살로메 1세

데카폴리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Ἀρχέλαος)
사실상의 적자. 유대·사마리아·이두메아 상속.
헤로데 안티파스
아르켈라오스의 동복 동생. 갈릴래아·페레아 상속.
헤로데 필립보 2세
아르켈라오스의 이복 동생. 이투레아(골란 고원과 바타니아)·트라코니티스 상속.
살로메 1세
헤로데 대왕의 여동생. 얌니아 등 상속.
[1] 당시 해당지역 인구를 토대로 추정하면 2살 이하의 사내아이 약 20여 명을 학살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근거로 12월 28일을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로 기념한다. 다만 실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어서 사건의 실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역사가들이 많다. 다만 그런 역사가들도 그가 저기 권력을 위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다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아르켈라오스는 유대사마리아, 이두메아를 아우르는 가장 넓은 땅을 물려받았으나 강압통치 때문에 기원후 6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폐위되어 갈리아에서 죽었다. 그의 영토는 사마리아와 이두메아를 포함하여 그대로 로마 제국의 유다이아 속주가 된다.

다섯째 부인(측실)인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로 헤로데의 사망 때 갓난아기였던 헤로데 필립보 2세는 바타니아를 물려받는다. 34년 헤로데 필립보 2세는 자식 없이 38세에 죽어 대가 끊기게 되고, 바타니아는 시리아 속주에 편입된다. 그러다가 37년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가 바타니아 왕위에 오른다.

갈릴래아와 페레아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고 있다가 39년 그가 칼리굴라 황제에게 폐위당한 뒤 40년 그의 조카이자 바타니아의 왕인 아그리파스 1세의 손에 들어간다. 41년 아그리파스 1세가 유대 왕위에 오르면서 유다이아 속주는 그의 치하에 자치권을 누렸는데, 44년 그의 사망 이후 유다이아 속주가 다시 로마 제국의 직할령이 되면서 그가 가지고 있던 갈릴래아와 페레아가 유다이아 속주에 편입된다.


3.3.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 치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역대 국왕[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헤로데 왕조/역대 국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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