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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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 초대 집정관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José Gaspar Rodríguez de Francia y Velasco


출생
1766년 1월 6일
파라과이 야과론(Yaguarón)
사망
1840년 9월 20일 (향년 74세)
파라과이 아순시온
국적
파일:파라과이 국기.svg 파라과이
재임기간
파라과이 임시 총독
1811년 5월 16일 ~ 1811년 6월 17일
파라과이 초대 집정관
1813년 10월 12일 ~ 1814년 2월 12일
파라과이 제3대 집정관
1814년 8월 15일 ~ 1840년 9월 20일

1. 개요
2. 생애
2.1. 독재 이전
2.2. 종신 독재
3. 여담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라과이의 변호사이자 정치인, 초대 집정관(Cónsul) 겸 종신 독재관.

파라과이의 독립 이후 첫 번째 독재자이기도 하며 엘수프레모(El Supremo) 또는 프란시아 박사라고 불린다.


2. 생애[편집]



2.1. 독재 이전[편집]


아버지 가르시아는 전직 군인이자 상파울루에서 담배 수출업을 했다. 원래 이름은 José Gaspar de Franza y Velasco였다. 하지만 미들네임에 Rodríguez를 추가하고 성씨인 Franza를 더 스페인식 이름 같은 Francia로 바꿨다. 원래는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다녔지만, 사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후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1807년 아순시온 지방 의회(cabildo) 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또한 지방 의장직도 겸임했다. 이때 주요 의원으로 초대 국가 원수이자 그의 정직이 되는 풀헨시오 예그로스, 최후의 식민지 총독인 베르나르도 데 벨라스코 등이 있었다. 1810년 5월 18일, 일명 5월 혁명(Revolución de Mayo)을 일으켜 스페인 총독을 쫓아내고 독립 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가 독립을 선언하자, 프란시아는 3인의 임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17일부로 군부가 통치권을 장악하고 풀헨시오 예그로스 중령이 의장직에 오르자 임했다.

1813년 10월 1일, 의회는 프란시아와 풀헨시오 예그로스를 1년 임기의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프란시아는 첫 4개월의 임기를 담당했다. 1813년 10월 12일부터 공식 임기가 시작되었다. 1814년 3월, 스페인인은 다른 스페인인과 혼인을 할 수 없으며, 오직 메스티소, 아메리카 원주민, 아프리카계 파라과이인들과만 결혼할 수 있다는 법을 제정했다. 이를 통해 인종에 따른 사회경제적 차별인식을 없애고 반도인(peninsular)과 크리오요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1]


2.2. 종신 독재[편집]


1814년 10월 1일 의회는 그를 3년 동안 절대 권력을 가진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이는 종신 독재의 시작이었다. 프란시아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의거하여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쇄국정책을 펼쳐 모든 외부 무역을 금지했고, 국가 산업을 육성했다. 물론 완전한 쇄국정책은 아니었고 난민이나 망명자를 받기도 했다. 1820년 우루과이 독립의 영웅 호세 아르티가스이나 1839년 탈영한 브라질 중대 등을 받아들인 적이 있다.

1820년 2월, 프란시아 암살 계획이 내부 고발로 적발되어 약 200명의 저명한 정치인, 유력가들이 체포되었고 대부분이 처형되었다. 1821년 6월 9일엔 반정부 음모 계획이 적힌 편지가 발각되어 관련자 300명을 체포했다. 주동자인 풀헨시오 예그로스 등 2명은 처형, 나머지는 보석금 15만 페소를 받고 풀려났다. 프란시아는 모든 반정부 세력을 불법화하고 비밀 경찰대를 설립했다. 사형 집행 시, 총알이 낭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총검으로 집행했고, 사형수의 가족들은 집행 후 하루동안 시체를 수거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프란시아는 상비군의 수는 줄여나간 대신[2] 15,000명의 예비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민병대를 유지했다. 또한 사람들은 군인을 만날 때 모자를 벗으며 예를 보여야했고, 모자를 쓸 여유가 없는 이들은 이 규칙을 준수하기 위해 모자 챙만 이라도 써야했다.

1828년에 모든 남성들에게 의무적으로 학교 교육을 받게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교사 수가 36배가 증가하고 문맹률도 감소했다.

약 10년에 걸친 토지 사업으로 국토의 절반가량을 국유화했다. 우선 1820년 반역자들의 땅을 몰수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성직자(1823년), 무단 거주자(1825년), 황무지(1828년)로 확대되었다. 그 땅은 둔전으로 활용되거나 농민들에게 임대되었다.

또한, 모든 교회를 국유화했다. 1815년 파라과이는 독립 교구[3]로 분리되고 프란시아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을 파라과이 가톨릭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교황 비오 7세가 파면시켰지만 전혀 개의치않고 진행했다. 1820년 8월 4일, 모든 성직자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 했고, 성직자 면책특권을 폐지했다.

몇 번의 암살시도[4]를 겪은 프란시아는 직접 관저 문을 잠그고, 독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누나가 만든 시가만 피우고, 마테차도 재료부터 본인이 챙기고, 베개 밑에 권총을 놓고 잠을 청하곤 했다. 아무도 그의 여섯 걸음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외출을 하게되면 길가의 모든 덤불과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서 암살자들이 숨을 수 없게 했고, 그가 지나갈 때 보행자들이 그의 앞에 엎드려 있어야 했다.

1840년 9월 20일 일요일 오후 1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3. 여담[편집]


파일:attachment/과라니/guarani033.jpg
파라과이 1만과라니 지폐의 인물이다.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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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세한 내용은 페닌술라르 문서 참조.[2] 1824년 5,500명 -> 1834년 649명[3] 이전까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 소속이었다.[4] 심지어 하녀가 프란시아가 먹을 케이크에 독을 넣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