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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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어부.

2. 생애[편집]


1910년 11월 7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13살부터 고기잡이배를 타며 살았고 8.15 해방 이후 1946년 청진수산사업소 선장 겸 어로장으로 발탁되었다.

2개년 인민경제계획 기간에 많은 생선을 잡아 내각순회우승기를 받았으며 물고기잡이에 일가견이 있어 바닷물 빛깔만 봐도 어느 물고기가 얼만큼 있는지를 맞출 정도로 빠삭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높은 어획고를 올려 1955년,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57년에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 참석하여 김일성을 직접 만나 칭찬을 받았다. 이후 1958년 전국생산혁신자대회에도 김일성이 황중업을 불러 교시를 내리는 등 이뻐해주었다.

1958년 9월 16일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수산상 리주연 밑에서 수산성 부상으로 발탁, 1961년 7월에 최초의 원양어선단을 파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원래는 1년간 수산성 부상으로 근무하면서 경험을 쌓아 수산상에 임명할 계획이었다던데 내각 성원으로는 영 아니었는지 수산상 임명은 되지 않았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나 1970년에 서해에 나타난 수많은 고등어 떼를 낡은 방식으로 잡으려다가 실패하면서 김일성에게 수심이 얕은 서해에서 수심이 깊은 동해에서 잡듯이 잡으려 했으니 잡힐리가 있는가, 해양상태 변화로 서해에도 고등어가 나타날 수 있다고 했는데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는가 하고 황중업을 경험주의자로 비판하였다. 하지만 수산 부문의 원로라서 책벌당하진 않고 1973년 5월에는 수산성 참사로 내려갔다.

이후 은퇴단계에 접어들어 1982년 2월, 수산위원회 고문에 임명되어 1986년 12월까지 일하다가 완전히 은퇴, 1988년 11월 4일에 사망하였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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