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t op. 운명은 새빨간 선율의 거리를/일러스트레이션 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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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피소드
1.1.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1: 운명 <향기와 기억(香りと記憶)>
1.2.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2: 목성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힘(何もかもぶっとばす力)>
1.3.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3: 카르멘 <전장에서 춤추는 긍지(戦場に舞う誇り)>
1.4.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4: 작은별 변주곡 <이야기를 들어봐(話を聞いて)>
1.5.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5: 발퀴레 <고고한 처녀 전사(孤高の戦乙女)>
1.6.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6: 호두까기 인형 <정렬! 호두까기 소대!(整列!くるみ割り小隊!)>
1.7.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7: 박쥐 <굉장한 장난감(素敵なおもちゃ)>
1.8.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8: 볼레로 <두 개의 선율(二つの旋律)>
1.9.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9: 시바의 여왕 벨키스 <저에게 어울리는 사람(私に相応しい人)>
1.10.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10: 다프니스와 클로에 <내가 믿는 미래(私の信じる未来)>
1.11.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11: G선상의 아리아 <슬픈 독주자(悲しい独奏者)>
1.12.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12: 월광 『달빛(月の光)』



1. 에피소드[편집]



1.1.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1: 운명 <향기와 기억(香りと記憶)>[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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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 향기와 기억

찻주전자를 기울이자, 컵에 흐르는 기분 좋은 물소리와 함께 홍차의 푸근한 향기가 저를 감쌌습니다.

내리쬐는 양기 너머로 눈을 내리면, 펼쳐지는 거리가 보입니다.

이곳은 "베를린 심포니카"의 식당 테라스.

베를린 심포니카는 D2의 침략을 받은 인류가 황폐해진 지상을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지하도시입니다.

지금은 오후 3시를 넘었을 때, 올려다보면 구름 한점없는 푸른 하늘과 져가는 태양이 남서쪽에 보입니다.

의식하지 않으면 깨닫기 힘들지만, 이것은 진짜 하늘이 아닙니다.

이곳은 베를린 저 깊숙한 지하. 저 하늘은 거대한 천장에 비춘 포토리얼리즘의 극치인 영상인 것이지요.

이 생활권이자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요새이기도 한 거리를 "인류 최후의 희망"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화롭군요.」

홍차를 조금 머금은 저는, 컵을 내려두고 혼잣말을 중얼거립니다.

요 수개월, 베를린 주변에는 D2의 습격도 없이 비교적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어 어딘지 모르게 들뜬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요.

독일 사람들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축제.

크리스마스 마켓이 명물이며 거리 곳곳에 귀엽게 장식된 가게가 즐비하며 수제 오너먼트나 과자, 글뤼바인 등 다양한 것을 살 수 있습니다.

이곳저곳에 음악이 흐르며 웃음이 끊이질 않는 한달.

그것이, 이곳 베를린의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인류멸망"

이 말이 돌아다니는 이 세상에는 예전처럼은 불가능합니다.

지상의 참상은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1년에 한 번뿐인 축제이죠.

조금씩이나마 인간의 경제가 돌고 지상에 웃음이 돌아오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문득, 제 배후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야, 『박쥐』!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거잖아! 내놔!」

「어이쿠, 차갑기도 하셔라. 『목성』 씨? 크리스마스 시즌인데도 전선에 나가야하는 불쌍한 저에게 조금은 자비롭게 대해주셔도 닳는 것도 아니잖아요.」

『목성』과 『박쥐』 두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베를린 심포니카 소속 무지카트.

목성은, 언제나 활기차서 전장에 용기와 추진력을 주는 무지카트입니다.

홍차로 따진다면 맛이 좋고 깔끔한 아쌈일까요.

한편 박쥐는 조금 짖궃기는 하지만 타고난 즐기는 마음으로 저희에게 지성과 여유를 주지요.

말하자면, 카카오와 시나몬을 넣은 경묘한 스파이스 티.

그런 두 사람은 작은 꽃다발 같은 것을 두고 말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소란스러운 두 사람을 흘겨보며 천천히 컵을 기울였습니다.

「그건 『작은 별』이 나한테 준 거라고!」

「빌리는 거라구요, 빌리는 거. 그도 그럴게, 전장에 가는 거잖아요. 부적정돈 갖고 싶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너한테 부적은 안 어울리지 않냐?」

「물론이죠. 하지만 전선에 서는 건 저뿐만 아니라 컨덕터도 있죠? 컨덕터용, 이라구요.」

「윽⋯⋯.」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목성은 조금 입을 내밀었습니다.

박쥐가 말한 "전선"이란 오스트리아를 말하는 거겠죠.

D2의 격한 습격을 받는 그곳에 이곳, 베를린에서도 몇몇 무지카트와 컨덕터가 투입된다고 들었습니다.

박쥐는, 해냈다는 얼굴로 보이지 않게 혀를 내밀고는 식당에서 도망치듯 나갑니다.

목성은, 어딘가 납득이 가지 않지만 체념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따라 나갔습니다.

목성의 마음은 저도 잘 알겠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싸움이 퍼지고, 전선에서는 수많은 무지카트와 컨덕터가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특히나 "평범한 인간"인 컨덕터는⋯⋯.

이제부터 오스트리아에 보내질 컨덕터 중에는 아직 수습 단계인 소년소녀들도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컨덕터를 기르면 그 이상으로 죽어가는 그들.

마치 생과 사의 다람쥐 쳇바퀴.

컨덕터가 있으면 무지카트는 통상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가 그들의 목숨이어선, 수지타산이 맞질 않아요.

저는 조금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고자 홍차를 머금었습니다.

조금 남은 찻잎 찌꺼기와 상쾌한 꽃과 같은 향기.

순간, 언젠가 저를 지나쳐간, 지금은 없는 컨덕터의 뒷모습이 떠오릅니다.

향기와 기억이란 뇌의 깊숙한 곳에서 연결되어 있어서 특정 향을 맡으면 특정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제가 홍차를 마시고 있을 때에 출격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마중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문득, 떠올렸습니다.

이 베를린 심포니카의 더욱 깊숙히 지하에는 어떠한 일화가 붙은 컨덕터가 잠들어있다고 합니다.

세계의 재액을 불러들인 컨덕터가 징벌로서 잠들어있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세계를 구할 크나큰 힘을 얻기 위해 그때까지 잠들어있다고도 합니다.

헛소문이라며 웃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 소문에 무언가 이끌림을 느낍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타인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지하에 있는 그 사람이 깨어난다면.

그리고 제 컨덕터가 된다면.

그때는 제가 좋아하는 홍차를 블렌딩하여 인사 대신 대접해드리도록 하죠.

홍차에 곁들일 과자로⋯⋯ 타르트 타탱과 함께.

제가 언제까지고 그 사람을 잊지 않도록.

그가 언제까지고 저를 잊지 않도록.

그리고 그 홍차를── "운명"이라고 이름 붙일까요.

(원안: 타카하 아야/집필: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팝큔)


1.2.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2: 목성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힘(何もかもぶっとばす力)>[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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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다 날려버리고 싶어지는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해.

길가다 발에 걸리는 돌멩이나, 짜증나는 녀석의 얼굴이나, 웃기지도 않은 의무나 책무?

잘은 모르겠지만 무지카트가 아니라도 분명 그럴 거야.

아무도 없는 트레이닝실에서 울리는 건 내가 내 주먹이 반복적으로 허공을 가르는 소리.

그리고 삐익삐익거리는 신발 소리와 거친 숨소리.

「⋯⋯!」

뇌에 이미지한 가상의 적이 튀어오르듯 덮쳐왔다.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녀석이다.

놓치지 않고 낮은 킥으로 돌격한다. 엎어진 틈에 재빠르게 등 뒤로 돌아, 양팔로 그 거구를 잡았다.

그리고.

「으랴아아아아아압!」

혼신의 백 드롭을 보여줬다.

「하아⋯⋯ 하아⋯⋯.」

나는 일어나서 쏟아지는 턱의 땀을 팔로 닦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더러운 타격에 무모한 던지기 기술.

이런 엉망진창인 싸움법은 무지카트답지 않다고 『발퀴레』 같은 애한테 혼날지도 모르겠어. 그 녀석은 고지식하니까.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날려버릴 힘”을 원해.

한참 트레이닝을 하고, 깨닫고 보니 3시간이 지났다.

온몸이 땀범벅이다.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머리도 멍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나 단련하는 걸까.

체내 조직이 어느 정도 고정화되어있는 무지카트는, 근육 트레이닝이 의미가 없다고 한다.

무지카트의 훈련이란 어디까지나 싸움을 몸에 익게 하기 위한 것.

몸에 부하를 줘봤자 생각만큼 효과는 없다.

그래도 이렇게 단련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쩐지 안심이 돼.

「으앗⋯⋯ 아앗⋯⋯.」

다리에 힘이 풀려, 엉덩방아를 찧고 그대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소리없는 방에 내 숨소리만이 들린다.

바닥이 차서 기분좋다.

나는 대자로 누워, 멍하니 옛날 일을 생각했다.

전투 능력이 높다든지, 육체파라는 소릴 들었다.

확실히 많은 성과를 올려왔다.

그렇지만, 기억에 남는 건 진 싸움뿐이다.

그리 쉽게 죽지 않는 몸이란 것도 불편해서.

싫은 기억만이 점점 쌓여간다.

눈을 감으면 구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고 사라진다.

예를 들면, 같이 싸웠었던 컨덕터라든지.

기가 약했지만 돌보기를 잘하고 같이 있으면 좋은 녀석이었다.

──목성은 강하지만 생활 능력은 꽝이라니까. 자, 세탁물 개어뒀어.

──마음대로 하지마! 네가 내 엄마냐?!

그런 대화를 자주 했었다.

손가락이 예뻤고, 어렸을 땐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고 쑥스러운듯이 말했다.

일그러진 것을 싫어하고, 곤란한 녀석을 가만 못 두고, 그래서 컨덕터가 된 거겠지.

──목성은 히어로니까.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

──내가 히어로? 안 어울려 그런 거.

──아냐, 히어로야. 힘든 매일이나 무서운 적을 한방에 날려주잖아.

괜스레 날 띄워주고.

그 녀석이랑은, 강한 인연을 맺고 언제까지나 같이 싸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미안해, 목성. 실수했어⋯⋯.

──뭐하는 거야! 내 뒤에 있으라고 했잖아!

──멀리서, 소리가 들렸어. 목성 쪽으로⋯⋯ 무섭고 기분 나쁜 소리가⋯⋯.

──그렇다고 네가 날 지키면 안 되지! 넌 그냥 인간이잖아!

컨덕터의 가슴에 뚫린 상처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흘렀다.

예쁜 손가락이, 피로 물들어간다.

그런데,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점 내 상처는 나아간다.

──멈추라고! 젠장! 왜 피가 안 멈춰!

──숨 쉬라고, 바보야! 빨리! 늦어진단 말이야!

──젠장, 왜 넌 인간이야! 왜 난 무지카트야!

⋯⋯.

정신이 들고 보니, 눈꼬리가 조금 젖어든 것을 보고 서둘러 손등으로 닦았다.

이상한 곳에서 땀이 흘렀다. 이게 뭐람.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일어섰다.

생각할 때가 아니다. 떠올릴 때가 아니다.

나는 다시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이 몸이 존재하는 한 싸울 것이다.

적이 있다면 날려버릴 것이다.

그뿐인 이야기다.

⋯⋯그뿐인 이야기라고.

문득 생각한다.

그때 컨덕터에게, 이쪽에서 “계약”을 청했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계약”은 컨덕터가 청하는 것. ──그런 풍습을 날려버리고.

잘 모르겠다.

생각하는 건 맞지 않는다.

「아~ 진짜. 난 이런 느낌이 아니잖아!」

그래. 곧 크리스마스.

떠들 수 있겠다든가, 맛있는 거 먹겠다든가. 난 그런 소리나 해다는 녀석이잖아.

좋아, 가끔은 『발퀴레』라도 끌고 나갈까! 바로 싸우겠지만!

나는 트레이닝 강도를 점점 더 올렸다.

고동이 빨라진다.

다시 새 컨덕터를 만난다면 일단 훈련을 같이 하게 할까.

그리고, 어깨동무하고 같이 밥을 먹자.

전부 다, 나한테 맡기라고.

목성 님은 강하니까.

고독도, 우울도, 인류의 적도. 전부 모아서 내가 날려버려줄게!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saraki)


1.3.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3: 카르멘 <전장에서 춤추는 긍지(戦場に舞う誇り)>[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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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 전장에서 춤추는 긍지

──전장에 필요한 것과, 좋은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비슷해.

이렇게 말해서, 이해받은 적은 거의 없어.

하지만 생각해봐.

“무기”.

“건강한 몸”.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멘탈리티”.

전부 필요하잖아?

게다가, 이런 것도 필요하지.

“윤기나는 머리”.

“매력적인 입술”.

“새빨간 드레스”와 “하이힐”.

⋯⋯이 부근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걸까?

그렇다면 너도 공부해야 할 거야.

「⋯⋯후후, 역시 큰 욕조가 좋아. 좁은 욕조는 사람 마음까지 좁아지는걸.」

임무도 트레이닝도 없는, 오래간만의 휴일.

아직 밝은 시간대에 넓은 버스룸에서 느긋하게 반신욕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욕조에서 일어나, 소금으로 온몸을 닦고 마사지하면서 시어 버터를 조심스레 피부에 발라준다.

초콜릿, 또는 코코넛 같은 독특한 향기.

마음이 진정돼.

그저 달콤하기만 한 게 아니라 씁쓸함과 야성을 느끼게 하는 어른 여성이 맨살에 두르는 최초의 드레스.

살결이 얇은 갈색 피부에 윤기가 더해진다. 그 위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이 갈색 피부를 좋아했다.

──어째서 그렇게나 자신을 가꾸는 거야?

──그 몸을 안아줄 연인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G선상의 아리아』가 비난한 적이 있지만, 그 앤 모르는 것이다.

내가 자신을 가꾸는 것은 다름이 아닌, 무지카트로서 싸우기 위해.

아직 자신이라는 존재를 타인의 애정에 의해서만 결정짓는 어린이에게는 알 리가 없지.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이렇게 가꾼 몸으로 전장에 서서 춤추듯 싸울 때, 품질 높은 드레스가 나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치는 쾌감을──

전장에서 춤추는 것은 피와 연막, 그리고 적아군 어느 쪽인지 모를 비명과 노호.

끊이지 않는 폭격을 꿰매듯 나는 몸을 휘둘러 D2를 노린다.

⋯⋯격파.

⋯⋯⋯⋯격파.

⋯⋯⋯⋯⋯⋯격파.

「고맙다, 카르멘! 이걸로 활로를 열 수 있어!」

「좋아! 단번에 무너뜨린다! 늦지마라!」

동료들이 주먹을 치켜들며 쾌야를 외친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 싸움에 패배는 없어. 내가 이 무대에서 춤추는 한에는.」

휘날리는 머리칼. 살랑이는 드레스. 윤기나는 갈색 피부.

전장에서 춤추는 것은 피나 먼지뿐만이 아니야. 내가 춤추지.

잃어버린 것을 위해서, 정열에 달려갈때의 쾌감을 떠올리며 나는 움직인다.

잃어버린 것── 그것은 평화. 음악이 울려퍼지는 세계.

그것을 갈망하며 싸우고 있을 땐 이유 모를 고양감이 몸을 감싼다.

마치, 연애의 열에 취해 있을 때처럼.

마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노래하고 춤출 때처럼.

전장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긍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부터 더 힘들어질 싸움 속에서, 긍지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전장에 서는 사람은 눈 깜짝할 새에 재가 된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승부를 가르는 것은 “긍지”의 유무.

앞으로 한번 더 일어나면. 앞으로 한번 더 총알을 꽂아넣으면.

그 고빗사위에서 자신을 일어서게 하는 것이 “긍지”.

왜냐면 자랑할만한 내가 아니면, 거기서 죽어버리는 것에 주저할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난 몸을 가꾼다.

긍지를 가지고 전장에 서기 위해서.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서.

그러기 위한 무기가 이 피부, 이 머리칼, 드레스인 거야.

버스타올을 몸에 두르고,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을 보았다.

「응. 오늘도 자랑스러운 나야♪」

다른 수건으로 머리를 부드럽게 닦으며, 자연히 웃음이 흘러나온다.

역시 난 이게 좋아.

「나는 평화와 음악을 위해서 이 몸을 가꾸는 거구나.」

후후. 이런 말은 너무 멋부리는 걸까?

하지만 그 정도로 늠름함을 지니고 싶은 거야.

나는 여자이면서, 목숨 걸고 세계를 지키는 무지카트니까.

⋯⋯하지만. 문득.

「컨덕터에게, 나는 어떻게 보일까.」

D2와의 싸움에서 컨덕터가 실전 투입된 지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그들과의 공투도 꽤 익숙해졌지만 길들어지지는 않았다.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의 소망으로 싸울 뿐.

다시 한번 거울을 보고 거기에 비치는 나의 몸을 바라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카르멘. 누구에게도 물들지 않는 여자── 라거나♪」

귀여운 아이였다면 생각할지도. 후후.

하지만 만약에 나를 물들게 할 만한 아이가 온다면, 그땐 또 새로운 나를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건, 조금 기대되는걸.

그러다가, 버스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했더니, 버스타올을 몸에 두른 『목성』이었다.

「으앗, 카르멘 있었냐! 얼마나 길게 목욕하는 거야!」

「⋯⋯어머.」

『목성』은 아직 샤워하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젖어있었다.

아마도 트레이닝하고 온 참이겠지. 정말로 몸을 단련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니깐.

「몸을 힘들게 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씩은 휴식을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너도 같이 어떠니?」

「싫어! 너, 이상한 끈적끈적한 걸 바를 거잖아!」

「아까워라. 너도 가꾸면 더 빛날 텐데.」

「난 지금도 땀으로 반짝이고 있거든!!」

그런 별 거 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목성』에게 버스룸을 양보한 뒤 옷을 갈아입고 기분좋게 심포니카 복도를 걸어갔다.

유유히, 긍지에 가득찬 발걸음으로.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NaBaBa)


1.4.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4: 작은별 변주곡 <이야기를 들어봐(話を聞いて)>[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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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kle, twinkle, little star♪

(반짝 반짝 작은 별아)

──How I wonder what you are♪

(너는 대체 누구니?)」

곧 있으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오늘 아침부터 계속,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방에 넣어둔 좋아하는 오너먼트를 찾고 있어. 뒤적뒤적, 뒤적뒤적⋯⋯ 어디에 뒀더라?

1개월 쯤 전, 지상의 벼룩시장에서 첫눈에 반해서 샀었어.

「Up above the world so high♪

(이 세상 저 높이에 있는)

Like a diamond in the sky♪

(다이아몬드 같구나)」

크리스마스엔 그게 있어야지.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같은 별님들.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의 가장 높은 곳에 장식할 거야!

아, 그렇지. 너희는 알고 있니?

키이쨩은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의 무지카트인데, 그건 원래 원곡이 있고 모차르트가 그걸 어레인지한 거야.

원래는 프랑스 고전 노래고 가사도 전혀 달라.

작은 아이가 주인공인, 조금 슬픈 노래인데──.

「아앗!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옷장 구석 나무 상자에 소중히 보관해뒀던 유리로 된 별 모양 오너먼트!

해냈다, 해냈어!

분명 지금 키이쨩의 눈동자도 별처럼 빛나고 있을 거야!

「하아⋯⋯ 역시 예뻐⋯⋯.」

마치 보석 같아.

장식끈을 손가락으로 잡고 오너먼트를 눈높이까지 올리면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투과되어 조금 무지개빛으로 빛나.

⋯⋯근질근질

⋯⋯근질근질근질근질

「애들한테 보여주고 싶어!」

이렇게 예쁜 걸 독점하면 안 돼!

분명 모두들 「우와, 예쁘다!」라며 감동할 거야!

내 방에서 튀어나와, 콩콩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식당으로 뛰어갔다.

거기라면 분명 누구든 있을 거야.

그랬더니, 역시나! 『운명』이 창가 자리에서 홍차를 마시는 모습을 발견했어!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아침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카르멘』도 있었지!

「이거 봐, 운명! 이거 키이쨩이 제일 좋아하는 별님이야~!」

우선은 운명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 눈앞에, 별모양 오너먼트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그랬더니, 운명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렇게 말했어.

「좋은 아침이에요. 작은 별.」

「으, 응. 안녕⋯⋯.」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서 어쩐지 맥이 빠져.

그래서 한번 더 신중하게 물어봤어.

「저기, 그게 끝⋯⋯?」

「끝이라뇨?」

「그러니까! 이거! 키이쨩이 좋아하는 별님~!」

운명의 눈앞에서 온 힘을 다해 별모양 오너먼트를 보여줬다.

그랬더니 고양이처럼 말끄러미 몇 초동안 그것을 보고는 천천히 컵을 컵받침에 내렸다.

「소중한 물건이죠? 그렇게 난폭하게 다루면 부서집니다.」

「~~⋯⋯! 그게 아니라~!」

마음이 전해지질 않아, 양손과 양다리를 휘적휘적 흔들었다.

지금 키이쨩의 이마를 보면 미간에 주름이 생겨서 아코디언 같을 거야!

그러고보면 운명은 이런 면이 있지.

이야기가 잘 안 통한달까, 천연이라고 할까⋯⋯.

그러자── 또각, 또각.

뒤에서 하이힐 소리가 다가왔다.

뒤를 돌아보니 살짝 검은 피부에 웨이브진 검은 머리가 특징인 무지카트── 『카르멘』이 있었다.

「아~! 카르멘이다!」

「좋은 아침, 작은 별. 오늘도 기운차구나.」

카르멘은 꾸미길 좋아하니까 확실히 보석이나 꽃 같이 예쁜 걸 좋아해!

그럼 분명 이 별님도 알아줄 거야!

「있지~ 이거 봐~! 이 별님 예쁘지~?」

「어머, 그러네. 그치만 키이쨩이 더 귀여워. 그럼, 이만.」

카르멘은 엇갈리듯이 키이쨩의 머리를 쓰다듬고 윙크하면서 가버렸다.

텅 빈 샌드위치 접시와 커피잔이 올려진 트레이를 반환구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식당에서 나갔다.

어쩐지 서두르고 있는 느낌⋯⋯. 마치 키이쨩이랑 놀아줄 시간은 없다는 듯이.

어째서? 평소엔 잘 들어주는데.

「그럼, 저도 실례하겠습니다.」

「아, 운명⋯⋯.」

그러자, 운명도 일어나서 정리한 자기 티세트를 들고 식당에서 나가버렸다.

그러니까 이제 식당에는 키이쨩이 쓸쓸하게.

「정말~! 왜 다들 얘길 들어주지 않는 거야~?!」

키이쨩도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화난 걸음으로 저벅저벅, 이번에는 1층에 내려가서 다른 무지카트를 찾아 보니── 있다!

현관 근처에서 찾은 것은 마치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진지한 얼굴로 게시판을 보고 있는 『발퀴레』였다!

「발퀴레~!」

키이쨩이 손을 흔들며 다가가자, 발퀴레는 이쪽을 보며 인사해주었다.

「⋯⋯작은 별.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고 가볍게 머리를 숙여.

발퀴레는 키이쨩에게 늘 존댓말을 사용해.

어떻게 봐도 발퀴레가 언니인데 무지카트로서 싸우기 시작한 건 키이쨩이 먼저라며 선배 취급을 하는 거야.

존댓말은 쓰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는, 그런 초가 붙는 진지함과 고지식함이 그야말로 『발퀴레』란 느낌!

「있지, 봐봐! 이거 어때? 유리로 만든 별님이야!」

인사는 그쯤해두고, 바로 좋아하는 오너먼트 어필!

발퀴레는 턱에 손을 얹고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며 「이건⋯⋯.」이라고 했다.

그리고 눈동자를 반짝였다.

「이 모양⋯⋯ 나쁘지 않군요.」

와, 좋은 반응! 그래그래! 귀여운 모양이라구~!

키이쨩은 기뻐서, 그곳에서 뿅뿅 뛰어올랐어!

그러자, 발퀴레는 덧붙였지.

「이 별의 뾰족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새 무기로 “모닝 스타”는 어떤가요?」

「이 전투 바보~!!」

나도 모르게 소리친다.

어째서 이렇게 예쁜 별님을 보고 무기를 떠올릴 수 있는 거야?!

발퀴레는 너무 진지하고, 맨날 싸우는 일만 머리에 넣는다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발퀴레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바로 키이쨩에게 머리를 숙였어.

「그럼, 실례. 갈 곳이 있어서요.」

그리고, 키이쨩을 등지고 걸어가버려.

「에? 그런⋯⋯ 좀 더 이야기를⋯⋯.」

어째서?

어째서 발퀴레도 얘길 안 들어주는 거야?

키이쨩은 손을 뻗었지만 멈춰주질 않았어.

그러더니 우연히 『박쥐』가 지나갔다.

「이거, 이거. 발퀴레와 작은 별 아니십니까. 사이가 좋으시군요.」

평소처럼 장난기있는 말투.

이럴 땐 보통 키이쨩을 놀리러 오는데, 오늘만은 말을 걸어준 것이 기뻤다.

「박쥐! 있지, 키이쨩 얘기 좀 들어줄래?」

「어이쿠야, 고민 상담인가요? 그러나 유감. 박쥐 선생님의 고민 상담실은 지금 만원인지라. 예약을 잡는다면⋯⋯ 그러네요. 1개월 후 쯤에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거짓말⋯⋯.」

평소엔 장난치면서 키이쨩을 곤란하게 만드는 말만 하면서.

어째서 오늘은 상대도 안 해주는 거야?

「박쥐. 잡담할 시간이 있는 거냐.」

「예이예이. 알고 있다구요, 발퀴레. 그럼, 작은 별. 기회가 된다면 다음번에 사탕이라도 가져오겠습니다.」

「정말! 키이쨩을 꼬마 취급하지마!」

박쥐는 「예이예이」라면서 흐느적흐느적 손을 흔들고 발퀴레랑 같이 현관에서 나가버렸다.

「⋯⋯.」

또, 키이쨩은 혼자야.

어째서 다들 키이쨩 얘길 안 들어주는 거야?

별 장식, 시장에서 열심히 찾은 거란 말야.

귀여운 크리스마스 장식이 있으면 모두 기뻐해줄 거라고 생각해서.

크리스마스는 1년에 한번뿐인 축제인데.

가족들끼리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지내는 날이잖아.

⋯⋯키이쨩이 좋아하는 날이야.

「키이쨩에게 있어서, 무지카트들은 가족인데⋯⋯.」

키이쨩에게 가족은 없어.

옛날엔 있었겠지만 이제 없어. 기억도 전혀 없고.

그래서, 베를린 심포니카의 모두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결국 무지카트들은 싸우기 위해서 모인 것뿐일까?」

가족이 뭘까?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오빠나 동생이 있고⋯⋯.

그림책에서 본 적은 있지만, 모르겠어.

키이쨩은 가족에게 응석부리면 안 되는 거야?

어른이 되어서, 그냥 싸우기만 집중해야 되는 거야?

그러면 장하다고 칭찬해줘?

⋯⋯가족을 원해.

가족이라면 분명 키이쨩 말을 들어줄 거야.

혹시 컨덕터랑 계약하면 컨덕터는 가족이 되어줄까?

상냥한 아빠 컨덕터?

멋진 엄마 컨덕터?

아니면 귀여운 동생 컨덕터나 멋있는 오빠 컨덕터!

상상했더니 즐거워지는 것 같아⋯⋯.

그러자, 군복을 입은 어른들이 어딘가의 누군가와 통신하면서 키이쨩 옆을 분주하게 지나갔다.

「──금일 오스트리아로 출격하는 무지카트는 『볼레로』, 『호두까기 인형』, 그리고『박쥐』 세 명. 동행하는 컨덕터는 최종 확인 중. 반복한다──」

그래⋯⋯ 그랬지.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이동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다들 준비에 바빴던 거야.

그래서, 키이쨩의 얘길 천천히 들어주지 않았던 거야.

특히 박쥐는 자기가 싸움 최전선으로 향하는 날이었고⋯⋯.

「오? 뭐냐, 그거. 귀엽네.」

「⋯⋯응?」

문득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 있었던 건 『목성』이었다.

목성은 키이쨩이 들고 있던 유리 별님을 여러 각도로 보면서 즐거운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유리로 만든 별? 그런 걸 어디서 찾았냐? 좀 보여주라.」

「~~⋯⋯!!」

그래서, 키이쨩은 굉장히 기뻐졌어.

「목성~~!」

「잠깐, 뭐야! 갑자기 붙지마! 아까까지 트레이닝해서 땀범벅이라고!」

「그런 건 됐어! 목성~~!」

「으이구 진짜! 머리 처박지 말란 말이야!」

그러고보면 목성이랑 키이쨩은 비슷한 시기에 무지카트로서 눈떴었지.

그래서 제일 같이 있던 시간이 긴 무지카트.

「시무룩해 있지마. 오늘처럼 바쁜 날도 있지. 게다가 늘 모두 작은 별을 신경쓰고 있거든.」

「늘 키이쨩을⋯⋯?」

「그래.」

그렇구나⋯⋯ 혹시⋯⋯. 키이쨩, 생각났어.

모두 바빠서 이야기는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지만 「오늘은 원정일이니까」라고 말하지는 않았어.

그건, 키이쨩이 걱정하지 않도록 말하지 않아준 거야.

다들⋯⋯ 키이쨩을 생각해준 거야!

왜냐면, “가족”이니까!

「목성 사랑해! 다들 사랑해~~!」

「뭐, 뭐야, 갑자기. 그런 말 들으면 쑥스럽잖냐.」

역시 무지카트는, 키이쨩에게 있어서 가족이고, 심포니카는 키이쨩의 집이야!

「이거, 목성에게 줄게! 유리 별님!」

「어, 괜찮은 거야? 소중한 거지? 전에도 부적 받았는데⋯⋯.」

「괜찮아! 대신 더 멋진 별님을 같이 찾아줘!」

별님을 더더 많이 찾아서, 심포니카 가득 별로 꾸미자.

새로운 가족── 컨덕터가 와주었을 때 이곳을 집이라고 생각해주도록.

키이쨩을 멋진 가족이라고 생각해주도록.

그리고 같이, 멋진 노래를 부르자!

─『Ah ! vous dirai-je, maman(아, 내 말을 들어봐요, 엄마)』

(『Twinkle, twinkle little star(반짝반짝 작은 별)』 원곡)

Ah ! vous dirai-je, maman

(아, 내 말을 들어봐요, 엄마)

Ce qui cause mon tourment

(내가 고민하는 이유를)

Papa veut que je raisonne

(아빠는 내가 멋진 어른이 되길 바란대요)

Comme une grande personne

(어디 사는 위인처럼)

Moi je sais que les bonbons

(하지만 난 그런 것보다)

Valent mieux que la raison.

(캔디가 더 중요해요)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코요이 미츠키)


1.5.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5: 발퀴레 <고고한 처녀 전사(孤高の戦乙女)>[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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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란,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말이다.

따뜻한 집에서 마음을 허락한 가족이나 친구와 주고 받는, 깊은 인연을 전제로 한 말.

그러니, 분명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베를린의 겨울 하늘은 낮고, 무겁다.

오늘은 특히나 습도가 높아 당장이라도 내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황폐해진 베를린 시가지.

이렇게 지상에 서있으면 인류가 D2에 의해 얼마나 해결할 방도가 없는 싸움을 강요당해 왔는지 알 듯싶다.

만족스럽게 운영하고 있는 가게는 없고, 기껏해야 너덜너덜한 천으로 지붕을 대신한 노점이. 엎어진 차량이 길을 막아서고 쓰러진 민가 정원에는 다 타버린 유모차가 굴러다니고 있다.

본래의 베를린이라면 지금쯤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엄청난 소란이었을 터이다.

길은 사람으로 가득하고 육즙이 흐르는 부르스트를 베어물고 경쟁하듯 맥주잔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인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피부에 달라붙는 듯한 불쾌한 바람이 불어올 뿐.

나는 이렇게 정기적으로 지상에 올라와 이 참상을 눈에 새기고는 한다.

평화가 유린당하는 슬픔이나 사람들의 괴로움을 잊지 않도록.

그리고 그 분노를 힘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럴 때에는 혼자인 게 좋다.

강한 힘은 고독을 데려온다.

진정한 강한 힘은 끊어진 절벽에 밖에 없으므로, 그곳에는 혼자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조직적인 힘은 필요하다. 상대도 무리지어 쳐들어오기에. 계략을 짜고 연계를 갈고 닦아 최대 효율로 칠 필요가 있다.

전투 기술을 늘리기 위해서, 예를 들면 『목성』 같은 경우 훈련 상대를 찾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개인의 힘으로 결정된다.

그러한 국면에서 지지않기 위해서 나는 홀로, 심신을 갈고 닦는 것이다.

눈을 감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적의 낌새는 없다.

요 근래, 베를린 근처 D2의 움직임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쳐선 안 된다.

D2의 발생원이라고 하는 흑야운철이 발견된 이후 4반세는 족히 지났다.

그 이후, 인류는 철퇴전을 강요당해왔다.

전세계 주요 도시가 파괴당하고 사람들은 살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에게 더 힘이 있었다면⋯⋯.」

홀로 중얼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나는 『발퀴레의 기행』의 무지카트.

무지카트는 D2에 대한 유일한 대항 수단. 그런 나에게 힘만 있었다면 이렇게 비참한 모습은 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을 괴롭게 할 일도 없었다.

내가 『발퀴레』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분에 넘친다고 느낀다.

발퀴레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반은 인간, 반은 신의 성질을 가진 여신으로 “전장에서 죽을 사람을 고르는 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전장에서 “사는 사람”과 “죽을 사람”을 선별하는 것이다.

그것은 “승리의 여신”인가. “사신”인가.

사람에 따라서 어느 쪽으로도 보이겠지.

나도 그렇다.

나에게 힘이 있다면 전국(戰局)을 바꾸는 “승리의 여신”이 되리라.

그러나 반대로 무력하다면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피의 대상인 “사신”이다.

그렇다면, 힘없는 지금의 나는, 사람들에게⋯⋯.

「강해져야── 강해져야만 한다──.」

자갈을 밟으며 정처없이 천천히 걸었다.

무지카트의 전투력을 증대시키는 컨덕터가 생기고, 벌써 30년이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아직 컨덕터와의 관계를 어찌 쌓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컨덕터와 연계를 못하고 져버린 싸움도 있다.

화가 치밀어오르지만, 혼자서 도망쳐버린 컨덕터도 있다.

떠오르는 것은, 눈앞에서 사라져간 무지카트들의 모습.

어째서냐.

어째서, 나는 자신만의 힘으로 사람들을 구하지 못하는가.

무엇이 무지카트냐.

무엇이 “처녀 전사”냐.

나는, 무엇을 위해 무지카트로서의 인생을 고른 것이냐.

그러자── 바람을 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욱 걸음을 옮기자 이 황폐해진 베를린 거리에서 포기하지 않고 생업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야 니들, 어디 목재 남은 거 없나?」

「우리 걸로 괜찮으면 줄게!」

「있지, 크리스마스에 뭐 먹을래?」

「뭐든 좋아! 엄마가 주는 거면!」

어디선가 요리 냄새가 났다. 분명 토란과 양배추를 삶은 것이다.

어느 부서진 처마에는 주목(株木)으로 엮은 소박한 리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이란 강한 존재라고, 새삼스레 깨달았다.

과거의 떠들썩함은 없지만 그럼에도 소소하게 연례행사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끊이지 않는다.

무지카트에게 주어진 임무는 심포니카를 지키는 것.

그러나 나는, 심포니카 밖에 있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할 수 없다.

감사를 하든 하지 않든, 그런 건 상관없다.

발밑에 떨어진 주목 가지를 살포시 가슴에 장식하고 나는 다시 거리를 걸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여어, 처녀 전사. 메리 크리스마스.」

「누님, 저녁 쯤엔 내린다나봅니다! 이 우산 쓰십쇼!」

「앗, 그 가지 나랑 똑같다! 저도 봐요, 주목 가지!」

긴장으로 굳어있던 내 얼굴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팽팽해져있던 마음의 실이 풀어진다.

고독은, 강한 힘의 필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충분 조건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강한 이들 중에는 고독하지 않은 자가 이렇게나 있으니.

나는, 마지막 하나가 되어서도 끝까지 싸우리라.

설령 컨덕터가 없더라도 그곳에 지켜야할 사람이 있는 한.

나는 곧 인류 최후의 요새.

사람들을 평화로 이끄는 “승리의 여신”.

나는, 그들에게 입에 익지 않은 인사를 건네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내일도 평안히.」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와타)


1.6.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6: 호두까기 인형 <정렬! 호두까기 소대!(整列!くるみ割り小隊!)>[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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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까기 인형 - 정렬! 호두까기 소대!

「호두까기 소대! 정렬입니다!」

이곳은 베를린 심포니카에 있는 음악당.

음악당이란, 저희 무지카트나 컨덕터가 사는 거점에 있는 음악홀을 말합니다.

크리스마스까지 머지 않았습니다.

들뜬 기분으로 음악당을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보았더니 문득 떠올라, 자랑스러운 호두까기 인형들을 무대 중앙에 올려 호령하던 중이지 말입니다.

총합 20~30대 정도 된다고 봅니다.

그들은 세계 각국에서 전전(轉戰)하던 중에 사모은 엄선된 정예들.

「이 아이는 런던, 이 아이는 벨기에. 이 아이는 로마. 이 아이는 뉴욕에서 우리 소대에 초청한 것입니다! 」

장관인 풍경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마는 저였습니다.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이나 금색 등 다양한 색조들의 군복. 원통형 샤코 모자. 곱슬머리와 세련된 콧수염.

모두가 예리하고 긴장된 정한(精悍)한 얼굴을 하고 있어, 상관인 저조차도 자랑이 느껴지는 기분입니다!

이어서, 임무 확인.

척, 하고 소중한 소대에게 손가락을 가리킵니다.

「너희의 사명은 이 베를린 심포니카의 동료들을 놀래고 즐기게 하며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연출하는 것이다!」

이 베를린 심포니카에는 이름 드높은 명곡의 악보 몸에 깃들인 무지카트가 많지만, 크리스마스의 주역이 저, 호두까기 인형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자는 없을 겁니다!

크리스마스하면 호두까기 인형.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발레 음악으로서의 『호두까기 인형』도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한 이야기.

그야말로 겨울의 주역입니다!

「흠, 흐흐흐흠, 흠, 흠흠흐~음♪」

호령이 끝난 것에 만족하여 다시금 음악당 꾸미기를 시작합니다.

저는 평소에 근면, 충실한 병사라 자부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제가 연중 가장 고대하는 것이 크리스마스.

꾸미는 것에 힘을 쏟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이 화려하고 하이 센스의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을 보면 모두의 사기(士氣)가 오를 것임에 틀림없지 말입니다!」

크흐흐흐⋯⋯.

자꾸만 콧김이 뿜어져 나오는 듯 합니다.

「『운명』 공은 깜짝 놀라 쓰러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발퀴레』 공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카르멘』 공은 저에게 착하다 착하다 해주실 겁니다!」

크흐흐흐⋯⋯. 역시나 크리스마스는 최고이지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작업하던 손을 멈추고 데코레이션을 하던 전나무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무언가가 부족하다⋯⋯.

데코레이션한 전나무에 무언가가 부족해 보이는 것입니다.

솜으로 된 눈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반짝이가?

어느 쪽도 아닌 듯 싶습니다⋯⋯.

문득, 무대 위에 있는 제 호두까기 소대를 바라봅니다.

「그들을 전나무에 달아보는 것은 어떨지⋯⋯?」

우리 자랑스러운 소대라면 이 궁지를 넘어서게 해줄지도 모릅니다.

세계 각국에서 활약한 긍지높은 그들이라면 어떻게든 해주리라, 일말의 희망을 봅니다.

그렇게 생각한 참에 제 배후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출발 준비는 끝났어?」

「이거야⋯⋯ 『볼레로』 공.」

『볼레로』 공은 베를린 심포니카 소속의 무지카트.

연약해 보이는 몸이지만 움직임은 준민하며 두뇌는 명석. 겉보기에도 늠름하여 굉장히 믿음직한 무지카트입니다.

평소와 같은 담백한 말투로 그녀는 말을 잇습니다.

「날씨 때문에 출발 시간이 빨라졌대.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출발 시간──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볼레로』 공은 D2와의 싸움 최전선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비교적 정세가 안정되어 있는 이곳 베를린에서, 전화열렬한 오스트리아로.

「아, 알겠습니다!」

경례하며 그리 대답했지만, 아직 장식이 덜된 음악당을 곁눈질로 보는 저는 분명 미련이 뚝뚝 떨어져 보였겠지요.

『볼레로』가 말했습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분명.」

그녀는 그다지 감정을 겉으로 내보이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러나 차가운 성격도 아니거니와 정에 둔한 것도 아닙니다.

저의 표정 변화를 읽고 위로해줄 수 있을 정도로는.

「크리스마스까지는⋯⋯ 입니까.」

크리스마스까지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들을, 저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고참병인 저는 다른 무지카트들보다 조금 더 많은 싸움을 경험해왔습니다.

이번 원정에는 저희 무지카트 몇몇과 컨덕터 외에 아직 젊은 수습 컨덕터 두 사람이 포함된다고 들었습니다.

병사에게 전력은 연령입니다.

아무리 힘이 강해도, 실연령을 쌓았어도, 경험이 부족한 병사는 갓난 아기와 같습니다.

혹시나 그들이 전장에서 불행히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된다고 하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꾸욱, 주먹에 힘이 들어갑니다.

「『볼레로』 공⋯⋯. 저는 이 크리스마스 장식을 그들에게, 젊은 수습 컨덕터에게 보여주고자 합니다⋯⋯.」

적어도 여기까지 장식한 음악당을 그들에게 보여주면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맛보는 것은 가능할 터입니다.

미완성인 것은 아쉽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보지 못 하는 것보다는.

그러자 그녀는 무언가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습니다.

「볼 수 있잖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마치 연막과 흙이 가로막는 전장에서, 하늘에서 한줄기 빛이 내리쬐는 듯한.

저는 어찌 이리도 비관적이었던 것인가요.

정작 그녀는 이런 약한 저의 생각까지 읽어내서 말할 생각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옳습니다.

오스트리아에 원정하여 D2를 전부 섬멸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전원, 다 같이.

경험이 얕은 수습 컨덕터가 있다면 경험이 있는 무지카트인 제가 지켜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까지 이 장식을 완성하여 다 같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면 그걸로 만만세이지 말입니다!

「그럼, 갈게. 늦지 마.」

「⋯⋯옙! 저도 곧 가겠습니다!」

『볼레로』 공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음악당을 나섰습니다.

저는 그 등을 향해 그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경례를 유지했습니다.

오른손을 내리고, 무대 위 호두까기 소대를 보았습니다.

「한심한 꼴을 보였습니다. 이런 것이 상관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이번엔 호두까기 소대를 향해 경례!

양발을 모으고 등을 곧게 폅니다!

이런 상태로는 정예들뿐인 호두까기 소대가 떠나버릴지도 모릅니다.

저는 크게 숨을 들이키고 낭랑하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맡겨진 임무는 크게 둘!

하나! 오스트리아에서 완전승리를 거둘 것!

둘! 다시 이곳에 돌아와 모두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성대하게 축하할 것!」

D2의 두려움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간단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는 기적이 따라오는 법.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그 밤의 주역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즐겁고도 즐거운 크리스마스의 주역, 『호두까기 인형』입니다!」

다같이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그 광경을 떠올리자니, 어쩐지 얼굴이 풀어집니다.

무대 위의 호두까기 소대를 바라보니 저와 똑같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osa)


1.7.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7: 박쥐 <굉장한 장난감(素敵なおもちゃ)>[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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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 굉장한 장난감

「아야야야야⋯⋯.」

달칵달칵, 방 안에 쌓여있는 잡동사니와 폐부품의 산을 헤치고 겨우 얼굴 내미는 것에 성공.

제 방은 주로 지상의 쓰레기장에서 모은 잡동사니들이 천장에 닿을 듯한 산을 두 개 만들고 있고 그것들이 대부분의 용량을 차지하고 있는지라.

그 중 하나가 무너진 탓에 다른 하나도 연쇄로 눈사태를 일으켜 기름 냄새나는 정크품의 바다를 만들었다, 라는 거죠.

「이것 참, 소녀의 분노란 무서운 거군요⋯⋯.」

그것도 이것도, 아브릴을 화나게 한 탓입니다.

아브릴이란── 기승스러움과 자만이 특징인 수습 컨덕터 소녀.

이번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짝이 된 사람입니다.

계기는 빨리 정식 컨덕터가 되고 싶은 아브릴이 저에게 “계약”을 요청해온 것.

“계약”이란 무지카트에게 있어서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악보를 컨덕터에게 맡기는 행위입니다.

무지카트와 컨덕터의 연계가 깊어지고 무지카트의 전투 능력도 큰폭으로 향상합니다.

다시 말해 계약한 무지카트가 있다는 것은 정식 컨덕터의 증거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통상적으로 “계약”이란 건 무지카트가 컨덕터에게 청하는 것.

게다가 양측에 깊은 인연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인데.

그런 것을 그 프라이드 높은 아브릴 측이 요청해와서, 그것도 꽤 필사적인 얼굴을 하니 참 요상해서, 자기도 모르게 놀려버렸습니다.

──이, 바보 『박쥐』! 맨날 사람 놀리기나 하고! 그냥 마음대로 하시지?!

결과적으로 그녀는 저에게 마음에도 없는 노성을 내지르고 전생에 삶은 문어였나 싶을 정도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발소리를 내면서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맡겨 닫아버린 문이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려진 잡동사니의 산을 무너뜨리고── 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경위.

뭘까요~, 이거. 커플 싸움도 아니고.

「무지카트가 좀 놀렸다고 삐져서는 훌륭한 컨덕터는 될 수 없다구요~?」

저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방을 덮은 잡동사니를 구석에 밀어넣고 걸을 만큼의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컨덕터의 “역 프러포즈”라니 젊디 젊은 숙녀가 할 일은 아니고요?」

어이쿠야.

이런 말을 해대니 화낸 거였죠.

하지만 그 얼굴⋯⋯ 푸크크크큭.

언제나 기승스럽고 여유부리는 주제에 그렇게 평정을 잃은 모습이라니, 복숭아처럼 붉어진 뺨을 서둘러 가리면서 다가오는 걸 보면⋯⋯ 역시⋯⋯ 푸크크큭.

「하아⋯⋯ 그녀 덕에 면역 세포가 활성화됐어요.」

저는 혼자 웃은 뒤에 한 수습 컨덕터 소녀에게 받은 유희와 건강에 감사했습니다.

이어서 어질러진 방을 쭉 살펴보며 이건 오늘 안에 못 치운다는 걸 깨닫고 털썩 주저앉습니다.

「뭐, 정리는 언제 해도 되겠죠.」

애당초 저는 어질러진 것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완전히 파악하고 있구요.

정리 따위 다른 이에 대한 서비스에 불과해요.

나 이외의 누군가를 위해, 알기 쉽게 정리하고 동선을 확보하여 기분 좋은 배치를 하는 겁니다.

저에게는 필요없어요.

저에게 중요한 건 그것이 유쾌한가 아닌가.

굉장히 심플한 폴리시랍니다.

즐길 수 있다면 정리도 알아서 할는지~.

생각해보면 무지카트로서 제2의 삶을 받은 뒤로 어느 정도 지났을까요.

뭐, 10년 정도 아닐까요.

솔직히 지루하다구요. 같은 일을 반복하기만 하고.

기술의 진보나 기계 만지기는 물론 흥미로워요.

하지만 그것도 이전만큼 두근거리게 해주진 않습니다.

무리도 아니죠.

왜냐하면 지금의 인간 사회에는 기술을 발전시킬 만한 여력이 없으니까요.

그런 중에 유쾌한 건 사람을 놀리는 것 정도.

인간이란 건 신기하게도 한 사람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일정 경향이란 건 있지만 화내는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람을 장난감 삼는 게 제일.

그것이 긴 듯 짧은 듯, 역시 긴 듯한 무지카트 인생에서 제가 배운 것입니다.

다만 슬프게도 지내온 시간이 긴 사람일 수록 저에게 다가와 주지 않는다는 사실.

뭐, 놀림받는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다가올 괴짜는 없겠죠.

그런데 그 귀여운 아브릴은 달라요.

그녀는 아직 저를 별로 알지 못하는 것인지 먼저 다가오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놀리고 놀려도, 굴하지 않는다.

생각하보면 「방 정도는 깨끗하게 해」라고 말한 것도 그녀였습니다.

그녀가 말한 대로 했다면 잡동사니에 깔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르죠.

「역시 그녀만한 귀중한 인재를 잃는 건 안 되죠~.」

그래봤자 고집불통 아브릴.

아직 덜 화낸 탓에 방문 너머에라도 있는 거죠?

후후후, 그런 점이 성장하지 않는단 말이죠~.

「기다려 주세요~ 아브릴 컨덕터~.」

저는 일부러 약한 목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리고 방을 나갔습니다──만.

「얼렐레?」

이미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복도 좌우, 저 너머까지 살펴보아도 꼬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면. 이거야, 저 모르게 성장해버린 건가요?」

덤으로 저에게 정이 뚝 떨어져버려서 다른 무지카트를 찾으러 간 것일까요.

언제든지 살아가는 무지카트와는 달리 인간이란 바로 성장해버리는 존재.

그리고 바로 나이를 먹고, 바로 죽어버린다.

다들, 그랬죠.

멋진 장난감은 언제나, 눈 깜짝할 새에 고장나버리는 겁니다.

⋯⋯.

저는 어질러진 방 안을 돌아봤습니다.

굴러다니는 무수한 정크품 중에서 어느 양철제 장난감을 발견.

높이 20cm 정도의 피에로 형태를 한 태엽으로 움직이는 장난감.

그것은 기억하고 있는 한 이 안에서 가장 낡은 잡동사니였습니다.

화려한 서커스 의상. 티어 드롭 화장.

그 피에로가 바닥에 넘어진 채로 슬픈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얼굴로 이쪽을 보지 말아주시겠어요~?」

피에로란 언제나 익살을 떨며 사람을 웃기는 어릿광대.

그런 그이기에 보여주는 눈물이 인상적인 것이죠.

다시 말해── 그것은 아브릴과 같다.

──저, 저기, 『박쥐』! 나랑 “계약”하도록 허락해줄게!

그 고집 센 아브릴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저에게 “계약을” 요청해온 것입니다.

뺨을 붉히고, 용기를 내서. 강철의 프라이드를 꺾어가며.

그 말을 입에 담을 때낀지 며칠을 갈등했을는지.

말할까. 말까. 침대에서 그 길고 예쁜 머리칼을 말아가며 고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자.

또각──.

바로 앞 복도를 꺾은 쪽.

그곳에서 작은 소리가 나서 인영이 움직인 것을 눈치챕니다.

오늘 아브릴은 분명 딱딱한 힐을 신었죠.

바닥을 걸으면 딱 저런 소리가 나는 구두를.

「⋯⋯후우. 저도 조금은 다가가야만 할까요~.」

저는 방 안으로 돌인가 기계유로 더러워진 작업용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꽃다발 같은 것을 꺼내들었습니다.

겨우살이 스웨그.

스웨그란 벽 장식을 뜻합니다.

크리스마스의 스웨그로 자주 쓰이는 것이 겨우살이이고 겨우살이에는 마력이 있어서 부적으로도 곧잘 쓰이죠.

이것은 전에 이유를 덧붙여 『목성』에게서 받아낸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분삼아 주려고 책상 서랍에 넣어둔 채였던 것.

다음으로 저는 양철 피에로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 겨우살이 스웨그를 들렸습니다.

이 피에로는 주웠을 때는 고장나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만 끈기있게 수리와 개조를 하자 다시 걷게 된 것입니다.

끼익끼익. 끼익끼익.

태엽을 꽈악 감아서 복도에 세웁니다.

그러자 피에로는 아까 인영이 움직인 복도쪽으로 한걸음씩 서투르게 걷기 시작합니다.

찰칵찰칵.

찰칵찰칵, 하고.

아직 커브 쪽에 인영이 조금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딱히 별 거 아닙니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나간 그 아이에게 주는 화해의 의미라니, 전혀 완전 진짜 요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가혹한 전장에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웃어줬으면 한다니,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저 그 피에로랑 똑같이 멋진 것은 잃기 싫다는, 제 고집이에요.

찰칵찰칵.

찰칵찰칵.

찰칵.

피에로가 커브길에 도착하자 그림자 속에서 하얗고 가는 손이 머뭇거리며 뻗어와서 겨우살이 스웨그를 들어올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잘 된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이걸로 그녀도 화를 풀어주겠죠.

즐거움은 여기부터입니다.

그 피에로, 앞으로 3초 뒤에 목이 떨어져서 당신을 향해 불꽃이 튈 테니까요.


1.8.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8: 볼레로 <두 개의 선율(二つの旋律)>[편집]


파일:Illust.Novel_Bolero.webp

볼레로 - 두 개의 선율

저벅, 저벅, 저벅──.

일정한 리듬으로 발소리 하나가 울린다.

무엇도 방해받지 않는 기분 좋은 소리다.

여긴 베를린 심포니카. 음악당 안에 있는 컨덕터 거주구의 복도.

발소리의 주인은 나── 『볼레로』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만든 발레곡 『볼레로』의 스코어를 깃들인 무지카트.

문득, 그 조율된 발소리를 지우듯 복도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서두르는 듯한 컨덕트들이었다. 각자 큰 짐들을 들고 있다.

「어이쿠, 미안하다. 『볼레로』! 서두르고 있어서 말이지!」

「너는 준비 다 했니? 『볼레로』! 저쪽은 잘 부탁한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시선만을 나누며 내 양쪽으로 달려가는 컨덕터들을 등 너머로 배웅했다.

그래.

오늘은 몇몇 컨덕터가 D2 활동이 활발해진 오스트리아 전선으로 떠나는 날이다.

안 그래도 출발전은 어수선한데 악천후로 갑자기 출발 시간이 빨라졌으니 음악당은 허둥지둥하는 모양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걸 보고 나서, 나는 다시 일정 리듬을 새기며 걸었다.

오스트리아는 나 자신도 동행하게 되어있다.

준비는 이미 끝냈다. 싸우러 가는 데 그리 많이 필요하지도 않다. 최악에 경우 몸 하나만 챙겨도 된다.

저벅, 저벅, 저벅──.

조금 걷다보니 문이 열려있는 방이 있었다.

안을 보면 몸집이 작은 소년이 한 명.

그는 책과 일용품, 여행용 백 등으로 어질러진 바닥에 주저앉아 「으아아⋯⋯」라고도, 「으으⋯⋯」라고도, 때때로 고심의 목소리를 내며 골판지에 그것들을 넣고는 >>다시 빼고 봉했다가 다시 열고──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것은 척척 준비를 진행하는 역전의 컨덕터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일반적인 컨덕터라면 다소 예정 변경되는 젓도로는 당황하지 않는다.

나는 그 새파란 소년의 얼굴을 보고 납득했다.

그렇군. 그는 수습 컨덕터인──.

「니콜라 카발리에.」

「에, 예, 넵?!」

최근 겨우 귀에 익은 이름을 문득 입에 올리자 그는 등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튀어올라 등을 쭉 펴고 이쪽을 보았다.

「바, 바,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기다려주⋯⋯! ⋯⋯아⋯⋯ 『볼레로』네⋯⋯.」

한 번, 개구리처럼 고개를 넙죽 숙이고, 다시 얼굴을 들어서 나를 확인하자 하아⋯⋯하고 크게 한숨을 쉬어 온몸으로 안도를 표하는 소년.

니콜라 카발리에. 17세.

선이 얇고 동안에 소동물과 같은 자신감 없는 눈.

프랑스계 패밀리 네임이니 아무래도 그쪽 계열 출신인가. 자세히는 모른다.

「선배 컨덕터인 줄 알았다구⋯⋯ 하하⋯⋯.」

니콜라는 목소리의 주인이 나라는 것에 안심한 건지 어깨의 힘을 빼고 조금 한심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성격은 기가 약함. 의지도 박약함. 상냥하다고 하면 듣기엔 좋을지 몰라도 패기가 없다.

다소 예정 변경이 된 정도로 이렇게나 공황 상태에 빠지다니 앞으로가 걱정된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다.

이번 원정은 말하자면 시험. 오스트리아에서 전적이 인정 받는다면 수습에서 정식 컨덕터로 승진할 가능성도 있다.

지금도 배어나오는 저 식은땀의 원인은 그런 압박감이리라.

나는 멈춰서서 생각했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이대로는 제대로 준비하기 힘들다.

안 그래도 기민한 타입이 아닌데, 싸움을 앞둔 중압감이 그의 손을 느리게 한다.

나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었디ㅡ.

──아니, 아무 말 않는 게 좋겠어.

왜냐하면 내가 말을 거는 걸로 니콜라의 페이스를 어지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다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다. 살아가는 리듬이 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타인이 내 리듬을 어지럽히는 것이 싫었다.

심장의 고동도 호흡도 발소리도, 언제나 일정하길 바란다.

이 리듬이 흐트러지면 최적의 퍼포먼스는 결코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언제든 나의 내면에 귀를 기울인다.

이기기 위하여.

언제나 조용히, 언제나 혼자서, 생사가 걸린 무대에 서있어 왔다.

무희는 고독한 열에 들떠서 처음으로 높이 날아오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갑자기 주위의 어지러움이 거슬려져서 주머니에 있는 워크맨을 꺼냈다.

마음에 드는, 오래된 음악 재생기.

그 이어폰을 귀에 꽂기 전에 니콜라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미, 미안한데 볼레로! 전투식량이랑 보존용 건빵, 어느 쪽을 가져가야 할까?!」

「전투식량이랑 보존용 건빵?」

「그래! 백도 골판지도 다 차서, 둘 중 하나만 들어가⋯⋯!」

그런 걸, 울먹이면서까지 물어볼 얘기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둘 다 현지에서 지급받으니까 안 가져가도 돼.」

「그런 거야?! 난 그런 걸 잘 몰라서⋯⋯. 아브릴한테 물어봐도 바보 취급 받기만 하고⋯⋯.」

아브릴이란, 니콜라와 똑같은 컨덕터 수습생.

성격은 니콜라와 정반대로 기가 세고 자신감 넘치는 타입.

둘은 마치 남매와 같은 관계여서, 무슨 일이 있으면 니콜라는 아브릴에게 매달리곤 했다.

나는 질문했다.

「알겠는데, 왜 나한테 물어?」

「엉?」

물어본다면 따로 적임자가 있을 텐데.

이곳은 컨덕터 거주구. 경험이 있는 컨덕터 선배가 몰려 있다.

니콜라는 대답했다.

「그야, 볼레로는 상냥하잖아.」

나도 모르게 멍하니 있었다.

내가⋯⋯ 상냥해?

언제나 마이페이스에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고 동료들에게도 차갑다는 말을 듣는데, 상냥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 내가?

꾹 다물고 있는 나를 보고 니콜라가 당황하며 말했다.

「미, 미안해! 나, 뭔가 이상하게 말했어?! 아, 저, 그리고 볼레로한테 물은 건, 오스트리아에서 짝을 지어서 싸우라고 했으니까, 그런 것도 있고⋯⋯!」

양손을 휘저으며 변명하듯.

확실히 그의 말대로 원정에서는 당분간 니콜라와 행동하게 되어있다.

내가 수습 컨덕터를 돌보는 일에 맞는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지만⋯⋯.

──안 되겠어.

상냥하다는, 예상 밖의 말을 들어서 페이스가 흐트러졌다.

이런, 아직 반푼이인 컨덕터에 의해.

그는 미숙하다. 미숙하니까 자신이 바라는 상냥함을 파트너인 나에게 투영해버린 것이다.

그뿐이다.

나는 나. 그의 주관은 상관없다.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뭐라도 도와줄까?」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상냥한 사람을 원하는 그의 기대에 맞추기 위함이 아니다.

내 페이스를 되돌리고, 그저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면 사무적인 요청.

이대로 준비가 늦어서 그가 원정에 늦으면 작전 전체에 영향이 간다.

그쪽이 더 나에게 나쁜 일이다.

하지만 니콜라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하다.

「볼레로⋯⋯! 역시 볼레로는 상냥해⋯⋯!」

또 울먹이기 시작한다.

한심하게도 코를 훌쩍이며 감동받은 얼굴을 한다.

그걸 보고 나는 자신의 감정이 또 술렁거리는 걸 느꼈다.

무지카트와 컨덕터.

컨덕터와의 관계를 깊게 하는 것으로 전투 퍼포먼스도 올라간다고 주장하는 무지카트는 많다.

그렇지만 나는 그걸 믿지 않는다.

왜냐면 관계가 깊어진다는 건 내 페이스를 흐트러뜨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영역 침범이다.

타인과 마음을 통한다니 아름다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그런 비참함도 더 없다.

나에게 있어서는 디메리트밖에 없다.

──게다가.

──전장에서 파트너를 잃는 괴로움은 더 맛보기 싫어.

「역시 됐어.」

「어?! 왜?!」

내가 요청을 철회하자 니콜라는 눈을 둥글게 뜨고 슬프다는 듯이 얇은 눈썹은 찌그러뜨렸딘.

나는 이어서 말했다.

「너, 이번 원정에서 전과(戰果)를 올릴 거지? 짐싸기도 제대로 못하면 안 되잖아.」

「아⋯⋯. 그, 그건⋯⋯ 그렇지⋯⋯.」

푸욱, 어깨를 떨어뜨리며 바닥을 보는 니콜라.

그리고 다시 짐싸기를 시작했다.

한숨을 섞어가며.

나는 그걸 그저 바라본다.

나는 항상 같이 싸우는 자에게는 나와 같이 고독함을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고독에 이겨낼 수 있는 사람만이 연주할 수 있는 음색이 있고, 나는 그런 소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침 『볼레로』라는 곡을 구성하는 두 개의 선율.

『볼레로』라는 곡은 일정한 리듬에 얹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두 개의 선율이 반복된다.

두 개의 선율은 서로 방해하지 않고, 다가가지도 않는다.

어디까지나 교대로, 겹치지 않고, 스스로를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굳게 엮여 주위를 말려들게 하는 열광을 낳는다.

언젠가 나와 닮은 고독을 짊어진 사람과 만난다면.

그 때에는 같이 연주하자. 고고하며 뜨거운 고고(孤高)의 심포니를.

지금은 아직 그 때가 아니다.

저벅, 저벅, 저벅──.

니콜라의 방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복도를 걸었다.

어지러움을 피하려고 워크맨의 이어폰을 귀에 꽂아넣었다..

옅은 음량으로 『볼레로』의 멜로디가 들려온다.

조용히, 하지만 뜨겁게,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선율이 가슴을 떨리게 한다.

저벅, 저벅, 저벅──.

일정한 리듬으로 발소리 하나가 울린다.

나만의 발소리다.

그건 무엇도 방해받지 않는 기분 좋은 소리── 일 텐데.

문득 신경쓰여서 한쪽 이어폰을 빼고 그 발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미완성인 소리가 난다, 그렇게 생각했다.

저벅, 저벅, 저벅──.

나의 발소리가, 하나.

그건 어쩐지 다른 하나의 발소리를 찾아 헤매이고 있는 것처럼도 들렸다.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uni)


1.9.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9: 시바의 여왕 벨키스 <저에게 어울리는 사람(私に相応しい人)>[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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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의 여왕 벨키스 - 저에게 어울리는 사람

저는 사령부 텐트의 군용식량을 짜증스럽게 손으로 집어 평소보다 높은 발소리를 내며 무지카트 전용 병사까지 걸어갑니다.

「하아⋯⋯. 저에게 설교 따위를 하다니. 그분은 신이라도 될 셈인가요?」

이곳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이탈리아 국경과 가까운, 티롤 지방의 고도입니다. 제1차 원정대인 저희들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노르트케테 연봉의 산악지대에 주류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 저는 현지 사령관에게 호출 받아 직접 잔소리를 들은 참이죠.

이유인 즉슨 저와 파트너를 짠 컨덕터가 심로로 인해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부대를 떠나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심로의 이유란, 밤낮을 가리지 않은 저의 “교육”에 심신이 갈려, 밤에도 자지 못한 탓에 마른 가지처럼 초췌해졌다고.

저는 그저 일상의 일거수일투족, 포크를 집는 것까지 “제 컨덕터에 어울리는 언행”을 교육해드렸을 뿐이건만.

──히이이이익! 더이상 저 녀석이 나한테 못 오게 해줘!

──저 녀석 미친 거 아냐?!

──『벨키스』는 인격 파탄자야!

최후에는 그런 말을 외쳤다는군요.

누가 인격 파탄자라는 겁니까.

저만한 인격 완벽자도 없을 터이거늘.

방금 전의 현지 사령관도 평소의 엄격한 얼굴을 괴로운듯 일그러뜨리며 「특기인 컨덕터 갈아넣기는 이제 그만해주지 않을래?」라며.

컨덕터 갈아넣기라니 무슨 말일까요? 틀리는 것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저는 교육해드렸을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지.

확실히 컨덕터는 쓰고 버릴 만큼 넘쳐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건 잘 이해하고 있는 바입니다.

하나 제 교육이 얼마나 이 부대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얄팍하며 무지몽매하기 그지없는 그들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교육을 직접 보여드리고자 하여──

──사령관 된 자, 타인에게 무언가 말하고자 한다면 좀 더 말투에 신경쓰시는 게 어떠한지?

──몸가짐도 주의하셔야죠. 부대의 톱이 한심한 꼴을 보여서야.

──거기에 앞으로 여섯가지, 지적사항이 있⋯⋯ 으읍! 으브브읍?!

굴강한 측근 둘에 의해 입을 막히고 양팔을 붙잡혔습니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요.

이야기 도중에, 그대로 강제로 등을 떠밀려 사령부 텐트에서 쫓겨났답니다.

「정말이지, 무례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요!」

불만을 내뱉으며 지면을 밟고, 더욱이 발소리를 크게 내보입니다.

어째서 몰라주는 거죠?

저는 이 정도로 이 부대를 좋게 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그러자 진행 방향으로 휴식중인 병사가 열 몇. 즐겁게 이야기하며 전투식량을 먹는 모습이 보입니다.

마침 좋은 기회입니다.

제 “교육”의 성과라는 것을 확인해 보도록 하죠.

「실례하겠습니다.」

휴식 중인 병사들 사이를 우아하게 양손을 펼치며 지나갑니다.

그러자 병사들이 차례로 음식을 가져와 주죠.

그들 사이를 다 지나갈 즈음에는 색색의 과자와 과일들로 양손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후후, 고마워요. 저의 귀여운 제자들.」

저는 뒤돌아보며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습니다.

보세요. 이것이 “교육”입니다.

이걸로 저는 배급받는 줄에 설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배급받는 양식 대부분은 화학 조미료와 합성식물의 극치이기에 질이 좋다고는 할 수 없어요.

저의 자랑스러운 제자들은 그것들을 피하고 귀중한 질좋은 것들만들 저를 위해 구해다 주는 거랍니다.

제가 다 먹지 못한 몫는 다시 다른 병사들에게 주면 되는 것.

그렇게 하면 더욱 저의 신봉자가 늘어납니다.

「이 어찌 좋은 팀입니까. 모두 잘 배워뒀군요.」

제가 중얼 거리자 어디선가 약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저, 저기이⋯⋯. 그건 그저, 벨키스 씨가 써먹기 좋은 사람을 기르고 있을 뿐인 게⋯⋯.」

「⋯⋯『다프니스와 클로에』.」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리스 라벨 작곡의 발레 음악. 그 악보를 몸에 깃들인 무지카트.

이름이 귀찮은지라 『다프클로』이라 줄여불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가 배급품인 전투식량을 씹으면서 오른쪽 대각선상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숨을 섞어 대답했습니다.

「잘 보십시오. 다들 저에게 공물을 바치며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나요.」

「그, 그 이상의 사람들이 벨키스 씨를 본 순간 도망친 것 같은데요⋯⋯.」

「⋯⋯.」

확실히 토끼마냥 도망쳐버린 범병이 몇 명 있었지만, 신경 쓸 일은 아니죠.

배울 의지가 없는 자는 살 의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런 자에게 저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습니다.

「『다프니스와 클로에』? 당신은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아, 아뇨⋯⋯.」

제가 눈을 얇게 뜨자 그녀는 바로 풀이 죽어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입을 다물 거라면 처음부터 아무 말 안 하면 될 텐데. 전부 이해가 느린 사람뿐이라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알겠나요? 저에게 있어서 어울리는 언행을 한다는 것은 세계에 있어서도 어울리는 언행이라는 뜻이어요.」

그렇게 해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병사와 컨덕터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저 또한 저에게 어울리는 자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웁니다.

다시 만해 저에게 어울리는 자가 늘면 늘 수록 상승무적의 부대가 가까운 거죠.

이런 단순한 사실을 어째서 몰라주는 걸까요?

저는 슬프게 고개를 저으며 받아든 아몬드 쿠키를 한입 베어물었습니다.

그렇게 맛있지는 않네요.

지금은 전시 중. 쓰이는 버터가 적은 쿠키는 입 안을 심하게 갈증나게 합니다.

「차.」

「네, 넵.」

제가 한 손을 내밀자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서둘러 자기 물통에서 차를 따라줍니다.

순순히 차가 든 머그컵을 내밀며, 그녀는 또 우물쭈물 말하기 시작합니다.

「저기이⋯⋯ 자꾸 이러시면, 언젠가 혼자가 되어버릴 거예요⋯⋯.」

분명 그녀는 방금 도망친 범병들 같은 걸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제 곁을 뜬 컨덕터도.

저는 조금 뜸을 들인 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대답합니다.

「이미 혼자인걸.」

다프클로』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대답한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개의치 않고 이어 말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원한 일이니까.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와 함께하는 고통에 비하면 훨씬 낫지.」

「잃는 고통에 비하면⋯⋯ 이겠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두려움보다 슬픔의 색이 짙었습니다.

뭡니까. 오늘은 묘하게 집착하는군요.

「뭔가요, 그건.」

「아, 아뇨⋯⋯. 시, 식사가 끝났으니 저는 가볼게요.」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뒤로 돌아 도망치듯 달려갔습니다.

「⋯⋯대체 뭐야.」

다 아는 듯이 말하지 마.

나는 그저 강한 자를 바랄 뿐이야.

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은 예의범절을 알고 눈치가 빠르고 “결코 죽지 않는 자”.

혹시나 내가 못 지켜준다고 해도.

그럼에도 제대로 살아남아주는 강한 사람.

그러고 보니, 내일은 베를린에서 새 무지카트와 컨덕터가 온다더군.

기대 따위 안 해.

나에게 어울리는 컨덕터 따위, 간단히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만약 찾는다면.

그땐 분명 액세서리처럼 몸에 지니고, 결코 놓치지 않아.

다시 아몬드 쿠키를 베어 문다.

두 번, 세 번 목에 넘기자 바로 목이 말라온다.

주위를 돌아보면 휴식 중이던 병사들도 이미 흩어진 후이고 아무도 없었다.

문득, 중얼거림이 흘러나온다.

「누가 좀⋯⋯ 저에게 차를 가져다주지 않겠어요?」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이노오카)


1.10.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10: 다프니스와 클로에 <내가 믿는 미래(私の信じる未来)>[편집]


파일:Illust.Novel_Daphnis.webp

다프니스와 클로에 - 내가 믿는 미래

어젯밤의 대규모 전투와는 정반대로 오늘은 평온하다.

완만한 산의 경사에 기대어 바람이 짧은 풀과 꽃들을 어루만지며 산맥을 건너는 것을 보고 있다.

「좋은 바람⋯⋯.」

건조한 바람이 내 허리까지 닿는 긴 땋은머리를 흔들리게 한다.

주위에 조금 피어있는, 가련한 알펜로제와 미나리아재비, 물망초 등 고산식물이 일제히 인사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린다.

이런 날에는 팬피리를 불며 양들을 몰고 싶어.

눈을 감으면, 평화로웠을 적의 광경이 눈꺼풀 뒤로 떠오른다.

풀을 먹는 어린 양들. 멀리서 들여오는 양치기의 피리 소리. 점심을 알리는 카우벨 소리가 나고 열려있는 작은 집 창문에서 빵과 치즈의 향기로운 냄새가 나.

「후후.」

상상하는 것만으로 굉장히 즐거워서 자연스레 웃음이 새어나온다.

하지만, 그건 환상.

숨을 들이쉬고 코가 맡는 건 빵이나 치즈 냄새 따위가 아니라 나무들의 탄내와 희미한 질연 냄새.

팬피리도 지금은 불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아름다운 음색이 D2를 불러오니까.

시야 밑으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촌이.

이곳에 오기 전에 조금 들러봤는데, 집집마다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나 벽걸이 스웨그가 그대로였지만 척 봐도 낡아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저 장식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수 있었을까?

다시 곧 돌아올 수 있다── 그렇게 믿고 장식을 그대로 두고 마을을 떠난 걸까?

그렇다면 그들이 저 장식에게 맡겨놓은 사소한 마음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채 벌써 몇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버린 것이 된다.

문득, 오른쪽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오른쪽의 붉은 눈은 울보였다.

나는 조금 걸으며 흘러가는 작은 강을 발견하고 강가에 자기 얼굴을 비췄다.

내 오른쪽 눈은 루비처럼 붉고 반대로 왼쪽 눈은 아쿠아마린처럼 맑은 파랑을 띠고 있었다.

오드아이, 라는 걸까.

처음 본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예쁘네」라든가 「특이하네」라고 한다.

오른쪽 붉은 눈이 또 조금 울먹인다.

이 붉은 눈동자는 언제나 슬픈 이야기만을 봐버린다.

나는 무리해서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에헤헤⋯⋯ 이런 모습을 『벨키스』 씨에게 들키면 또 혼날 거예요.」

『호두까기 인형』 씨에게 들킨다면 어느정도 걱정하시겠고, 『아리아』 씨에게 들킨다면 「내가 울고 싶은 기분인데⋯⋯」라면서 저 이상으로 울어버리시겠죠.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우스워져서, 오른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나는 괜찮아.

“비극”을 비추는 붉은 눈과는 다르게 내 왼쪽의 푸른 눈은 “희망”을 비추어낸다.

다들 믿어주지 않지만 나는 “미래”가 보일 때가 있다.

보인다, 라고 할 정도로 확실한 건 아니지만 희미하게 그림이 떠오른달까, 직감이나 번뜩임에 가까운 것.

분명 소심한 성격인 나를 위해 악보가 준 신기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붉은 눈이 “비극”만을 보여주는 때도 있었다.

오히려 그런 일 뿐이었다.

그리고 현실은 그대로 이뤄졌다.

예를 들면 D2와의 큰 전쟁이라든지⋯⋯.

차라리 이 눈동자를 파내버리면── 그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내 왼쪽 푸른 눈이 본 “희망”이란── 지휘봉을 쥔 아직 보지 못한 누군가의 그림자.

그 그림자는 이윽고 눈부신 빛을 뿜으며 이 눈물 젖은 세계를 비춘다.

그리고 우리를 평화로, 웃음 넘치는 세계로 이끌어준다.

나는 어제 새벽── 아침과 밤의 경계에 전투로 피로해진 의식 속에서 분명히 그 빛을 보았다.

분명 그 사람은 곧 눈뜨리라.

그런 예감이 든다.

수면에 비친 푸른 눈이 반짝 빛난 듯했다.

흘린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입꼬리가 풀어졌다.

이 얘기, 누군가에게 전하는 편이 좋을까?

또 이상한 소릴 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할까?

그래도 이번 예감은 특별해 보이는데⋯⋯.

음⋯⋯

으음⋯⋯⋯⋯

「정했어! 가자!」

왜냐면, 좋은 소식이니까 남에게 말하고 싶어!

「또 저 녀석이 이상한 말을 하잖아」라고 바보 취급을 당해도 돼!

나는 얼굴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긴 스커트를 흩날리며, 세 갈래로 땋아 묶은 두 머리칼을 흔들리며.

마른 풀을 밟고 튀어나온 돌멩이를 뛰어넘고 경사를 달려 내려간다.

하지만── 도중에 다리가 멈췄다.

어쩐지 오른쪽 뺨이 차가운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

오른뺨에 손을 대자, 그 손가락이 젖어들었다.

이건 비?

그렇게 생각하며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졌고 두꺼운 구름에 뒤덮였다.

곧장 눈이나 우박이라도 내릴 하늘이지만 아직 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뺨은 젖어있고── 곧 눈물이라고 이해했다.

어느샌가 붉은 눈이 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눈물은 뭐야⋯⋯?」

붉은 눈동자는 나에게 뭘 전하려는 거야?

「윽⋯⋯!」

그러자, 한 순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뇌리를 스쳤다.

수많은 이별, 아픔, 괴로움, 고난⋯⋯.

이런 이미지가 차례로 떠오르고는 사라졌다.

어째서?

내 푸른 눈동자는 “희망”을 보여줬는데.

그런데 그건 동시에 “비극”의 시작이라는 뜻이야?

그 지휘봉을 쥔 아직 보지 못한 누군가.

당신은 대체 누구야?

하늘은 더욱 어두워져서 바람도 습기를 띠기 시작했다.

기온이 내려간 탓인지 한기가 들었다.

「⋯⋯아니!」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다시 경사면을 박차고 나아갔다.

붉은 눈을 꼬옥 감았다.

푸른 눈으로 앞을 보았다.

나에게 “미래”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사실은 어찌돼도 좋았다.

본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아무래도 좋아.

나는 그저 올지 모르는 “미래”에게 번농당하기 싫었다.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는 그런 힘을 원했다.

나는 달리면서 기다리자.

강해지면서 기다리자.

아직 보지 못한 누군가의 지휘봉이 내가 믿는 미래를 정확히 가리켜줄 것을.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tef)


1.11.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11: G선상의 아리아 <슬픈 독주자(悲しい独奏者)>[편집]


파일:G선상의 아리아.jpg

G선상의 아리아 - 슬픈 독주자

『G선상의 아리아』라는 이름의 유래.

그것은 4개의 바이올린 현 중 하나의 현만으로 연주하는 것이 가능한 곡이기에.

G선이란 바이올린의 최저음역을 내는 현을 가리킨다.

다만 작곡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J. S. 바흐는 그런 걸 상정하고 있지 않았다.

원래 이름은 『관현악 조곡 제3번』이라고 한다.

하지만 곡이 쓰이고 바야흐로 100년. 아우구스트 빌헬미라는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그런 편곡을 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바이올린 독주곡 『G선상의 아리아』.

관중 입장에서는 굉장히 의미 깊은 악곡이었겠지.

바이올린 현 하나만으로 그렇게나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내는 것인데.

화제성은 충분. 빌헬미는 유능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째서 그런 잔혹한 짓을 했을까?

D2와의 전투가 연일 이어지는 오스트리아 산악지대.

완만한 산기슭에 세워진 무지카트용 텐트 안, 나는 접이식의 딱딱한 야전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으⋯⋯ 으음⋯⋯⋯⋯」

몸이 무거워서 죽을 것같다.

땀으로 축축하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이 납같은 몸에서 해방되어 편해질 텐데, 그런 생각이 든다.

「약⋯⋯ 먹어야지.」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 분명히 약효가 끊어져서다.

침대에 누운 채로 사이드 데스크에 있는 약통과 일어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자기 전에 미리 반정도 물을 담아놓은 유리잔에 힘없이 손을 뻗었다.

특별히 처방받은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약.

연일 이어진 전투 탓인지 또 듣지 않고 있다.

한 번에 3알 먹으라고 한 약을 손에 탈탈 털어 꺼나고 한꺼번에 입안에 넣었다.

물을 마시고 위에 약을 흘려넣고는 다시 침대에 쓰러진다.

「윽⋯⋯ 으으⋯⋯」

이불을 턱까지 덮은 순간, 눈물이 주륵주륵 흘렀다.

「외로워⋯⋯」

어째서 나는 이런 외톨이인 걸까.

무지카트로서 눈떴을 때부터 계속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외로워.

세상에 나 혼자.

호흡이 괴로워서, 마치 나를 위해서 공기마저 앗아간 것 같아.

우울하고, 비참한 기분.

아무도 나를 찾아주지 않아.

바이올린 독주곡 『G선상의 아리아』.

한 현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특수한 아리아.

알고 있어.

그래서 나는 혼자야.

그런 고독하고 외로운 악보(스코어)를 이 몸에 깃들이고 있으니까.

어째서 독주야?

어째서 현을 하나만 사용해?

그래서 나는 누구와도 함께 울리지 않아.

「흑⋯⋯ 으윽⋯⋯!」

슬퍼. 너무나 슬퍼.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생각할 수록 눈물이 나서 엎드린 채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안에는 일그러진 고독의 선율이 흐르고 있다.

설령 내가 긍정적으로 변한대도 불협화음이 울릴 뿐

나는 고독하게 살 운명이다.

있지.

모두가 사랑하는 “음악의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걸 바랐을까?

그러자, 괜히 커다란 발소리가 내 텐트에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내가 그 소리를 듣든지 말든지, 텐트 입구가 기세좋게 열렸다.

「『G선상의 아리아』! 언제까지 자고 있을 겁니까?! 저보다도 길게 자다니 교육이 부족한 것 같군요!」

이 목소리는 『시바의 여왕 벨키스』.

어째서 내가 있는 곳 따윌 찾은 거야?

어째서 이렇게 괴로워하는 나에게, 그런 고압적인 목소리를 들려주고, 눈이 따가운 아침해를 보여주는 거야?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우는 소리를 했다.

「괴로워⋯⋯. 괴롭다구. 나는 자는 것도 허락받지 못하는 거야. 너무해⋯⋯」

「충분히 잤잖습니까! 아침 배급에 늦을 테니까 일부러 부르러 온 것인데!」

「그러면 더 상냥하게 깨워주지⋯⋯. 다가와서,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고, 따뜻한 우유와 갓 구운 바움쿠헨을 준비해줬으면⋯⋯」

「당신 무슨 생각인 거예요?!」

그런 대화를 하고 있자니, 또 텐트 입구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벨키스와는 달리 조용하고 잔잔한 호수같은 기척이었다.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또 울고 있고. 배급 이미 끝났어. 아리아 몫을 조금 받아왔는데 필요해?」

목소리의 주인은 『월광』.

베토벤이 작곡한 환상적인 피아노 소나타를 몸에 깃들인 무지카트.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여서, 듣고 있으면 편안해진다.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종잡을 수 없는 애지만 그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감은 같이 있기에 편했다.

하지만⋯⋯.

「으으⋯⋯ 내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줘도 좋을 텐데. 역시 난 온 세계가 필요로 하지 않는 거야⋯⋯. 알았어⋯⋯ 이대로 아사해줄게⋯⋯.」

이불에서 조금만 얼굴을 내밀로 또 울기 시작한 나를 보고 월광은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위해 가져왔다는 배식용 프로틴바를 자기가 씹어먹기 시작한다.

괜찮은데⋯⋯ 필요없으니까 괜찮긴 한데⋯⋯. 어차피 무지카트는 아사도 못 하고⋯⋯.

그 옆에 있던 벨키스는 「못 어울려주겠군요.」라며 고개를 젓고 한숨을 남기며 떠났다.

그리고 벨키스와 엇갈려 또 다른 사람이 텐트에 들어왔다.

그건 『다프니스와 클로에』였다.

「저기⋯⋯ 아리아 씨? 오늘은 곧 눈이니까, 밖에 널어둔 세탁물을 가져왔는데⋯⋯ 괜찮죠?」

눈치 보듯, 수축된 모습.

소심하고 수축되어 있는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나에게 물어온다.

그녀는 아침부터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고 깨달은 듯이 이었다.

「배⋯⋯ 고프시죠? 저기⋯⋯ 제 거라도 좋으시면 드실래요?」

그리고 침대 옆에 와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내 얼굴 앞에 프로틴바를 내밀었다.

포장지를 조심히 뜯어서 먹기 쉽게 내 입으로 가져다 준다.

「밥은 제대로 먹는 게 좋아요. 자, 아~⋯⋯」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그녀가 그런 걸 하니까 나는 또 울음이 터졌다.

「흑⋯⋯ 으으⋯⋯」

「왜, 왜 우시는 거예요⋯⋯? 이렇게 먹여주는 건 역시 실례였을까요⋯⋯?!」

주르륵 주르륵.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당황하는 그녀를 두고 나는 말했다.

「다들⋯⋯ 상냥해서⋯⋯」

어째서 모두 계속해서 나를 찾아오는 거야?

나를 돌봐주기 위해서.

이런 한심한 나를 위해서.

그러자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안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다행이다⋯⋯ 진정되기 시작했네요. 약이 들기 시작한 걸까요? 따로 원하는 건 있나요?」

「⋯⋯다프클로가 상냥해⋯⋯. 있지, 나랑 결혼해줘.」

「후엑?! 그, 그런! 저 따위 아리아 씨한테 안 어울려요~!」

당황하며, 고개와 양손을 동시에 젓는 다프클.

그 조금 뒤편에서 월광이 「애초에 결혼이 안 될 것 같은데」라며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한편, 나는 다프클로의 태도를 보고 눈동자를 어둡게 했다.

「거절하다니⋯⋯ 역시 내가 싫은 거야⋯⋯ 당장이라도 없어졌으면 하는 거야⋯⋯」

그만큼 상냥하게 해놓고, 나를 혼자서는 못 살도록 해놓고 버리듯이 또 혼자로 만드는 거야⋯⋯.

「아, 아, 아녜요! 그런 생각 안 했어요?!」

「거짓말! 분명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나 따위는, 나 따위는~!」

「으아아아⋯⋯. 그, 그래요! 아리아 씨! 좋은 소식이 있어요! 저, 방금 미래를 봤거든요! 희망의 빛이 깨어난다고! 그리고 그 빛이 우리를 이끌어준다고!」

「희망의 빛⋯⋯?」

「네, 네! 아직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그 사람이 아리아 씨의 아군이 되어줄 거예요!」

내 아군이 되어줄 사람⋯⋯?

이 슬픈 독주자(나)에게, 드디어 반주자가 나타난다는 거?

아니⋯⋯ 아니야.

분명 그 사람은 이 어두운 세계에서 나를 꺼내줄 컨덕터⋯⋯!

갇혀진 어두운 함 안에 빛이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아까까지 무거웠던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진다.

나는 기세좋게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 위에 일어나 양손을 꼬옥 쥐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 사람을 평생 지켜내겠어! 달링!」

「꺅,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약효가 심한 거 아닌가요?!」

「자, 일어나자! 오늘은 베를린에서 응급 부대가 온다고! 핫! 혹시나 그 중에 내 달링이 있을지도?!」

월광이 텐트 기둥에 기대며「어차피 또 약을 두 배 정도 먹었겠지?」라고 말했다.

유감! 5~6배였습니다!

덕분에 기운이 펄펄!

「그래! 텐트도 크리스마스 기분으로 장식하자! 역시 크리스마스는 다같이 축하해야지! 나, 재료 찾아올게!」

「기, 기다려주세요! 완전히 흥분 상태라구요?! 아리아 씨~!」

나는 텐트를 뛰쳐나갔다.

굉장히 발이 가벼워!

분명 운명의 상대가 나를 부르고 있는 거야!

혹시 전생의 인연⋯⋯? 우후후, 기대돼서 어쩔 수가 없네!

텐트를 뛰쳐나온 내 등을 마중하며 다프클 짱과 월광이 대화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런더, 아리아 씨, 저렇게 약을 먹어버려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 저거 그냥 포도당이니까. 라무네.」

「뭐?」

뭐라고 하는지 멀어서 안 들리지만.

그런 것보다. 나는 멈출 수 없다.

왜냐면, 운명의 상대가 기다리니까!

그렇지? 기다려줘, 마이 달링!

(원안: 타카하 아야/소설: 이시하라 소라/일러스트: ainezu)



1.12. 일러스트레이션 노블 #12: 월광 『달빛(月の光)』[편집]


파일:월광일러스트.jpg

──어렸을 때, 어디까지 가도 쫓아오는 달빛이 무서워서 밤새도록 도망다닌 적이 있어요.

예전에 한 컨덕터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직 20대의 젊은 나이였지만 경험은 중견에 가까웠고 지휘봉 하나를 무기로, 수많은 수라장을 거쳐온 청년이었다.

달빛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전승에 곧잘 나오는 늑대인간이나 흡혈귀처럼.

달빛을 길게 받아버린 인간은 광기에 싸이게 된다고 한다.

“달빛이 무섭다”.

그 감각은 나도 조금 이해되었다.

──그럼 나도 무섭니?

나는 『월광』.

베토벤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월광』믜 악보를 몸에 깃들인 무지카트.

나는 애교가 없고 무기질적이어서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는다.

사람어 따라선 기분 나쁘다고도 생각하겠지.

싸움에 집중하고 있으면 주위를 휘말리게 하여 다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달빛에 매료당한 것처럼, 나는 싸움에 몰입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뇨. 전혀요.

한쪽 폐가 찢어진 탓에 호흡도 고르지 못하고, 목에서 새액새액 괴로운 소리를 내며.

가슴에 수복 불가능한 구멍이 나, 검붉은 피가 그의 전신을 물들였다.

예상치 못한 D2의 습격으로 어린 아이들이 많이 사는 난민 캠프를 지키기 위해 무리했다.

나는 그를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에 당신과 싸워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밤의 숲. 얼어붙을 듯한 추위. 하얀 숨결.

달의 빛에 비쳐서, 음악의 적인 괴물이 귀에 거슬리는 단말마를 외치고 있다.

여전히 심각한 불협화음이다.

「이걸로 끝.」

내가 빙글 돌아선 앞에 몸길이 4~5미터는 되는 대형의 D2가 2체, 3체하고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정적.

코로 천천히 숨을 내뱉자, 다리부터 목까지 오싹오싹한 쾌감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역시나 『월광』. 밤의 여왕은 당신이로군요.」

「⋯⋯『벨키스』.」

등뒤로, 하는 말에 비해 기고만장한 목소리.

어느샌가 내 등뒤에는 나와 같은 무지카트인 『시바의 여왕 벨키스』가 있었다.

어쩌면 단독으로 3체의 대형 D2를 상대하던 나를 엄호해주려고 온 걸지도 모른다.

그녀를 돌아보기 전에 손가락으로 입가를 만져 유열의 흔적을 지웠다.

이런 차가운 전장에서 유열을 느껴버리는 것은 나쁜 버릇이라는 것정도는 알고 있었다.

「벨키스. 잡담할 여유가 있다면 하나라도 더 적을 치우는 게 어때?」

「어머? 저에게는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유롭다고 하는 것이 맞답니다.」

「⋯⋯억지 부리긴.」

벨키스는 “여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에 걸맞게 언제나 오만하고 자존심 높은 포즈를 취한다.

팔짱을 끼고 가슴을 펴고, 턱 끝을 척 올리는 그런 자세로 여유만만하게 말한다.

속으론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됐으니까 『아리아』를 봐줘. 그 애, 오늘은 어쩐지 흥분해있으니까.」

「⋯⋯쳐졌다가 흥분했다가 바쁜 아이로군요.」

벨키스는 한숨을 쉬더니,

「약한 자를 지키는 것 또한 여왕의 일이지요.」

그렇게 말하고 만족스럽게 웃고는 하늘 높이 도약하여 숲의 나무들을 건드리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벨키스는 굉장히 알기 쉬운 무지카트라고 생각한다.

좀 더 말해보자면, 다루기 쉽다.

나처럼 「정체를 모르겠다」라든지 「숲의 유령」이라든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게 꼭 루체른 호수의 안개」라는 말을 듣는 무지카트와는 다르>다.

딱히 신경쓰고 있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조금 떨어진 지면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큭⋯⋯. 으으⋯⋯.」

「아, 정신이 들어?」

나는 그 소리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가까이 갔다.

「괜찮니?」

「죄송해요⋯⋯. 저, 아무것도 못하고⋯⋯.」

「됐어. 무사하니까.」

그곳에는 다친 상태의 젊은 컨덕터가 하늘을 보고 누워있었다.

아직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그 얼울은 20세를 채우지 못한 듯했다.

당연히 경험도 얼마 되지 않겠지.

안 그래도 어두운 숲에서의 전투는 난도가 높은데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 나와 급조 페어를 짜기에는 힘이 부친다.

당연히 나와 D2의 싸움에 휘말려 지휘봉 드는 팔을 다치고 말았다.

「이딴 상처⋯⋯ 바로 나아서 당신과 싸우겠습니다!」

「아냐. 넌 충분히 했어.」

「하지만 아직 D2가⋯⋯.」

「걱정 마. 지금 구급팀을 부를게. 나머진 우리한테 맡겨. 다행이네.」

「뭐가 다행인 건가요?」

「이걸로 넌 크리스마스까지는 심포니카에 돌아갈 수 있어.」

「⋯⋯!」

젊은 컨덕터 군은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열의는 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데다가 부상을 입은 자신이 이 이상 무리를 해도 분명 내 발목을 잡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총명한 아이다.

그는 「죄송합니다」라며, 얼굴을 지면으로 향했다.

분한 눈물을 숨기는 것이 느껴졌다.

「속상해할 필요는 없어. 이런 암야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럼 어떻게 당신은 이런 어둠 속에서 자유롭게 싸울 수 있었던 겁니까?」

「그건⋯⋯ 내 눈이 항상 어둠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부터 계속.

과거의 싸움으로, 나는 쌓여가는 어둠을 봤다.

동료들 시체의 산. 민간인 시체의 산.

어르신도 젊은이도 아이도 어른도, 판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검붉은 산.

그것은 실체를 가진 거대한 “어둠”이었다.

그 후로 계속 내 눈은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이젠 암야에 너무 익숙해졌다.

빛을 등지고 네가 봐야 할 것은 이 “어둠”이라고, 스스로 타이르고 있다.

나에게는 이 달의 빛마저 눈부시다.

그건 때로 공포스러울 정도로.

문득, 옛날에 들은 그 말을 떠올린다.

──어렸을 때, 어디까지 가도 쫓아오는 달빛이 무서워서 밤새도록 도망다닌 적이 있어요.

태고적부터 달은 망자들의 나라라고 불리운다.

그러니 달빛은 망자를 부르는 소리다. 또는 망자가 내밷는 비탄의 소리.

달을 보니,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쪽을 원망을 담아 노려보고 있는 듯해서, 너도 얼른 이쪽으로 오라고 속삭이고 있는 듯해서, 무서>운 걸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밤새도록 도망다니지는 않겠지만.

정신을 차리고보니 젊은 컨덕터 군이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지면에 누워있는 그의 시점으로 보면, 그를 위에서 내려다 보는 내 얼굴 뒤에 마침 달이 있어서, 나는 달의 빛을 등진 모양새로 보일 것이다.

그는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몸이 떨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내가 무섭니?」

하지만 그는 「전혀」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온몸으로 부정하는 것 같다.

「그럴 리가요! 빤히 보고 있던 건 그⋯⋯ 달의 빛을 등진 당신이 너무나 예뻐서⋯⋯ 시선을 빼앗겨서.」

「뭐?」

「아, 죄, 죄송합니다, 뭔가 뜬금없이! 하지만 무섭다니요! 당신은 아름답고 강해요. 지금도 다친 절 휘말리지 않게 떨어져서 싸워주셨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겨우 그런 것.

석연치 않은 내 모습을 보고, 그는 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이었다.

「당신 같은 무지카트가 지켜주기에 저희는 싸우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당신은 이름 그대로, 월광 그 자체.」

「⋯⋯월광 그 자체?」

「네. 어둠을 비춰주는 구원의 빛이요. 언제나 저희에게 용기를 주죠. 떠나버린 동료들도 분명 그리 생각할 거예요.」

⋯⋯.

그의 말이 머리 속에서 몇 번이고 울려서, 나는 잠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어둠이 아니라, 빛.

다시 떠올린다.

내 앞에서 죽어간, 달을 무서워한 그 청년 컨덕터.

어째서 그가 나에게 「마지막에 당신과 싸워서 다행이에요」라고 말한 것인지,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과 만나서, 달이 무섭지 않게 되었거든요.

그때 그 사람도, 지금 이 사람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저 지키거나, 지키지 못해거나 할 뿐.

하지만 그들은 나를 “빛”이라 불러주었다.

나는 발을 돌려, 어디까지고 이어지는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얼리서 D2의 거슬리는 울음 소리와 전투음이 들려왔다.

등뒤에 누워있는 젊은 컨덕터에게 말했다.

「그럼 구급팀이 올 때까지 그대로 안정하고 있어.」

「⋯⋯네. 무사하십시오.」

「고마워. 너도.」

어깨 너머로 돌아보며, 미소지어주고는 나는 어두운 숲 속으로 달려갔다.

어둠이 걷히고 달의 빛이 아까보다도 환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쫓아오는 달빛이, 지금은 나를 지켜봐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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