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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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상훈 연도결정일수여일이름직책국적비고
1949년8월 15일이승만대통령대한민국
1960년8월 13일윤보선대통령대한민국
1963년12월 5일12월 17일박정희대통령대한민국
1967년6월 23일육영수영부인대한민국
1979년12월 7일최규하대통령대한민국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12월 7일홍기영부인대한민국
1980년8월 29일8월 29일전두환대통령대한민국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8월 29일8월 29일이순자영부인대한민국
1988년2월 24일2월 25일노태우대통령대한민국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2월 24일2월 25일김옥숙영부인대한민국
1993년2월 11일2월 23일김영삼대통령대한민국
1993년2월 11일2월 23일손명순영부인대한민국
1998년2월 17일2월 25일김대중대통령대한민국
1998년2월 17일2월 25일이희호영부인대한민국
2008년1월 28일노무현대통령대한민국
2008년1월 28일권양숙영부인대한민국
2013년2월 12일이명박대통령대한민국
2013년2월 12일김윤옥영부인대한민국
2013년2월 19일박근혜대통령대한민국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상훈 연도결정일수여일이름직책국적비고
1964년12월 3일12월 8일하인리히 뤼프케대통령독일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12월 3일12월 8일빌헬미네 뤼브케영부인독일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2월 1일2월 7일이스마일 나시루딘국왕말레이시아
1966년2월 1일2월 7일틍쿠 인탄 자하라왕비말레이시아
1966년2월 1일2월 10일푸미폰 아둔야뎃국왕태국
1966년2월 1일2월 10일시리낏 끼띠야콘왕비태국
1966년2월 1일2월 15일장제스총통중화민국
1968년5월 10일5월 18일하일레 셀라시에황제에티오피아
1969년5월 23일5월 27일응우옌반티에우총통남베트남
1969년5월 23일5월 27일응우옌티마이아인제1부인남베트남
1969년10월 28일10월 28일하마니 디오리대통령니제르
1969년10월 28일10월 28일아이샤 디오리영부인니제르
1970년9월 25일9월 28일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대통령엘살바도르
1970년9월 25일9월 28일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영부인엘살바도르
1975년6월 27일7월 5일오마르 봉고대통령가봉
1975년6월 27일7월 5일조세핀 봉고영부인가봉
1979년4월 17일4월 23일레오폴 세다르 상고르대통령세네갈
1979년4월 17일4월 23일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영부인세네갈
1980년5월 11일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국왕사우디아라비아
1980년5월 14일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국왕쿠웨이트
1981년6월 25일수하르토대통령인도네시아
1981년6월 25일시티 하티나영부인인도네시아
1981년6월 29일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국왕말레이시아
1981년6월 29일틍쿠 아프잔왕비말레이시아
1981년7월 6일페르디난드 마르코스대통령필리핀
1981년7월 6일이멜다 마르코스영부인필리핀
1981년10월 13일로드리고 카라소대통령코스타리카
1981년10월 13일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영부인코스타리카
1982년5월 10일사무엘 도국가원수라이베리아
1982년6월 7일모부투 세세 세코대통령자이르
1982년6월 7일보비 라다와영부인자이르
1982년8월 25일압두 디우프대통령세네갈
1982년12월 21일케난 에브렌대통령터키
1983년3월 10일3월 15일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대통령수단
1983년3월 10일3월 15일부띠나 칼릴 압불핫산영부인수단
1983년9월 10일후세인 1세국왕요르단
1983년9월 10일누르왕비요르단
1984년4월 9일하사날 볼키아국왕브루나이
1984년4월 21일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국왕카타르
1984년8월 30일9월 13일다우다 자와라대통령감비아
1984년8월 30일9월 13일치렐 자와라영부인감비아
1985년5월 17일무함마드 지아울하크대통령파키스탄
1985년5월 20일루이스 알베르토 몽헤대통령코스타리카
1986년9월 4일4월 10일엘리자베스 2세국왕영국
1986년9월 4일4월 16일보두앵국왕벨기에
1987년4월 7일아메드 압달라대통령코모로
1988년11월 3일이스칸다르국왕말레이시아
1988년11월 3일자나리아왕비말레이시아
1989년11월 3일11월 20일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대통령서독
1989년11월 3일11월 30일프랑수아 미테랑대통령프랑스
1989년11월 3일11월 30일다니엘 미테랑영부인프랑스
1990년6월 21일안드레스 로드리게스대통령파라과이
1990년11월 5일괸츠 아르파드대통령헝가리
1991년9월 13일아즐란 샤국왕말레이시아
1991년9월 13일투안쿠 바이눈왕비말레이시아
1991년9월 25일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대통령멕시코
1992년8월 13일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대통령과테말라
1993년5월 20일5월 25일피델 발데즈 라모스대통령필리핀
1993년5월 20일5월 25일이멜리타 마르띠네즈 라모스영부인필리핀
1994년11월 7일11월 21일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대통령칠레
1994년12월 5일12월 9일레흐 바웬사대통령폴란드
1995년2월 7일2월 16일이슬람 카리모프대통령우즈베키스탄
1995년2월 21일3월 6일로만 헤어초크대통령독일
1995년3월 28일4월 3일젤류 미테프 젤레프대통령불가리아
1995년6월 26일7월 7일넬슨 만델라대통령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9월 26일9월 29일카를로스 메넴대통령아르헨티나
1996년7월 23일9월 4일알바로 아르수대통령과테말라
1996년7월 23일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대통령브라질
1996년10월 8일10월 20일후안 카를로스 1세국왕스페인
1996년10월 8일10월 20일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왕비스페인
1996년11월 26일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국왕말레이시아
1996년12월 10일12월 15일레오니드 쿠치마대통령우크라이나
2000년2월 22일3월 3일카를로 아첼리오 참피대통령이탈리아
2000년2월 22일3월 6일자크 시라크대통령프랑스
2006년3월 12일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대통령알제리
2007년3월 26일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국왕쿠웨이트
2007년3월 28일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국왕카타르
2009년5월 13일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대통령카자흐스탄
2009년11월 12일알란 가르시아대통령페루
2012년5월 30일칼 16세 구스타프국왕스웨덴
2012년11월 21일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대통령아랍에미리트
2018년10월 8일에마뉘엘 마크롱대통령프랑스
2019년하랄 5세국왕노르웨이
2021년6월 14일알렉산더 판데어벨렌대통령오스트리아
2021년6월 16일펠리페 6세국왕스페인
2021년6월 16일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왕비스페인
2021년8월 25일이반 두케대통령콜롬비아
2021년9월 21일보루트 파호르대통령슬로베니아



파일:EmvOiQ5XUAE2WSr.jpg

1. 개요
2. 생애
3. 일화



1. 개요[편집]


الحسين بن طلال (후세인 빈 탈랄)

1935년 11월 14일 ~ 1999년 2월 7일 64세 (재위기간 : 1952년 8월 11일 ~ 1999년 2월 7일)

요르단 왕국의 전 국왕. 압둘라 1세의 손자이다. 1935년 11월 14일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요르단의 2대 군주, 전임 국왕인 탈랄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2. 생애[편집]


파일:EhJZyYGXYAEak8K.png
▲ 리비아의 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와 함께

이후 한 사람은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 자신의 정권이 붕괴/전복되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여 반군과 나토 공군의 공격을 받아 피범벅이 되어 얻어맞아 죽었고, 또 한 사람은 오랫동안 왕위를 지키며 천수를 누리다 1999년 노환으로 승하했으니 이를 미루어보아 인생지사 새옹지마가 아닐 수 없다.

아랍 최고의 명문가인 하심 가문 출신이다. 고향 암만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뒤 알렉산드리아의 빅토리아 칼리지에서 중등과정을 공부했고, 그 다음에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 해로우 스쿨을 졸업한 후 샌드허스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1951년 7월 20일, 압둘라 1세와 함께 예루살렘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드리던 중 팔레스타인 과격분자에게 총격을 받았다. 당시 15살이던 후세인은 살아남았지만 할아버지 압둘라 국왕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후세인이 살아남은 과정도 알고 보면 기적인데, 할아버지의 사망을 본 후세인은 바로 할아버지를 암살한 암살자를 목격했고, 이에 암살자가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천만다행으로 할아버지가 수여한 훈장 때문에 탄환이 튕겨져 구사일생으로 생존했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아버지 탈랄이 즉위했으나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바람에 얼마 안 가 1952년 퇴위하여, 뒤를 이어 후세인이 왕위에 올랐다. 덧붙여 탈랄은 상왕 자리에 머물러있다가 1972년에 사망했다.

후세인 국왕은 국왕으로 재임기간 동안 요르단의 인적자본을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덕분에 요르단은 중동국가 중에서 가장 발전된 교육시설과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다.

석유없는 국가의 비애[1][2]인 셈이지만, 그 대신 아랍에서 기후론 사람 살만한 곳이 꽤 되어서 아랍 왕족들이나 부유층들이 피서지를 많이 만들고, 더불어 고대 유적지들을 세계적으로 홍보하면서 요르단을 관광대국으로 발전시켰다. 더불어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가능한 합리적으로 유지하면서 평화협상을 하는 등 중동의 평화를 발전시키는데도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후세인 1세의 행적은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요르단은 국가의 출발부터가 영국의 외교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나라다. 인구의 구성 또한 60%가 팔레스타인인이고 40% 미만이 본토인인 베두인이며 대략 2% 정도가 체르케스인체첸인[3]이다.[4] 즉 민족국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다 하심 가문 등 국가를 지배하는 왕실 지배층들은 요르단 출신이 아닌 아라비아 반도 출신이다.[5]

그래서 후세인 1세는 즉위 이후부터 이러한 자국내 정치적 불안정을 극복하고자 '민주주의 도입'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였다.[6]

그리고 1980년대 후세인 1세의 통치 후반기 경제위기가 찾아와 국내의 여론이 후세인 1세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재차 '민주주의 확대'라는 도구로 그 위기를 극복했다. 한편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다수당이 후세인 1세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댈 것 같으면 가차없이 의회를 해산하며 전제정과 민주주의를 병행하며 통치했다. 현재 요르단이 아랍국가 중 민주주의가 그나마 정착됐다고[7] 평가받는데에는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외교적으로도 요르단 국내에 반미정서가 들끓어 친미정책 추진시 자신의 권좌가 위태로울 것 같으면 미국과의 관계도 끊어버렸으며, 반면에 국내에 반미감정이 없고 미국과의 관계가 자신의 권좌유지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친미를 했다. 즉 후세인 1세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데 매우 훌륭한 명군이었다.

게다가 검은 9월 사건은 내부 치안의 유지라는 면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국내에서 무장한 채 국경을 넘어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요르단 영내에서 로켓을 발사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해 이스라엘의 침공을 불러왔고, 조직을 결성하여 요르단 경찰과 군대의 통제를 거부하는 한편 요르단인들에 대한 폭력적 행동까지 벌였다.

그가 사망한 뒤에 아들 압둘라 2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압둘라 2세가 덕업일치의 밀덕후로 유명하지만 실은 후세인 1세부터 그랬는데, 후세인 1세의 취미가 사격, 복싱, 카레이싱, 서핑이었다. 심지어 보잉 747 조종 자격까지 갖고 있어 해외 순방시 전용기를 직접 조종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무선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중동 사람과 교신을 나누고 좋아했다가 나중에 귀한 요르단 우표가 잔뜩 붙은 후세인 1세의 QSL 카드[8]를 받고 기절초풍했다는 에피소드를 무선인들 사이에서 간혹 들을 수 있다.


3. 일화[편집]


  • 인디아나 존스 3편 촬영을 적극 후원하면서 촬영지인 페트라를 관광단지로 키우는데 크게 공헌했다.
  • 1980년대 중후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요르단을 순방했을 때 그의 아내 엘레나가 뜬금포로 후세인 1세에게 "요트 내놔" 드립을 시전했다. 그런데 하필 그 요트가 이미 딸에게 준 선물인지라 후세인은 엘레나를 잘 달래서 그 요트와 비슷하게 생긴 다른 요트를 선물로 줬다. 후세인 1세는 친히 그 요트에 우정이라고 이름을 지어줬건만 엘레나는 그걸 갖고 루마니아로 귀국하자마자 그 요트의 이름을 지도자로 바꿔버렸다.
  • 그는 일부다처제이슬람 국가에선 특이하게도 4명의 아내를 둔 게 아니라 아내를 딱 하나씩 두었다. 첫번째와 두번째 결혼[9]은 이혼으로 끝났고, 3번째 결혼상대인 알리아 왕비는 1977년 헬기추락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 이후 1978년 시리아-레바논계 미국인인 리사 할라비 (훗날 누르 알 후세인 왕비로 개명)와 4번째로 결혼했다. 아랍에선 이런 왕이 희귀한 편이라고 한다.[10] 게다가 그는 일부다처제를 금지시키고 여성들의 사회활동도 허가하는 등 꽤나 개방적인 세속적 정책을 취하여 여성 정치인과, 교수, 성직자까지 나왔다. 인권 등의 측면에 있어 아랍에서는 보기 드문 개혁적인 국왕. 게다가 1952년엔 입헌군주제를 선포해 현재 요르단은 입헌군주제 국가다. 그래서인지 아랍에 가서 여러 나라 군주들을 대놓고 씹고 욕하는 배짱을 보이던 이탈리아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가 유일하게 멋진 군주라고 칭했다.
  • 1983년 대한민국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한 적이 있었다.당시 대한뉴스 이때 후세인 1세를 정말로 성대하게 맞아들이고 방송국에서도 대대적으로 중계를 했는데, 이계진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책에 따르면 이게 알고보니 얼마 뒤의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 방한을 대비한 연습중계였다고. 해당 서적에는 J국의 국왕이라고 나왔지만 이 시기에 한국을 방한한 '국왕'이 이 분밖에 안 계신다.
파일:attachment/요르단 디나르/jordan02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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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요르단 사막 지역 영토 일부를 사우디아라비아와 교환했는데 그 사막에서 석유가 나왔다. 하지만 요르단 국민들이나 하심 왕실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 대신 간절히 원하던 항구(아카바)와 바다가 통하는 땅(해안선길이는 20여Km정도)을 얻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요르단은 관광대국으로 두둑히 돈을 벌기에 석유가 꼭 아쉬운 것도 아니다.[2] 자원의 저주라는 말도 있을 만큼 천연자원 위주로 경제가 운영되는 나라들은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내부적으로는 썩어 있는 경우가 많다. 호주 같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영기업이나 왕족들이 죄다 해쳐먹고, 사회적 인프라 미비나 초중등 교육이 엉망인 경우가 대부분.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항구를 얻은 게 오히려 백 번 나은 결정이다. 요르단은 석유가 없었기 때문에 서비스업과 관광업이 발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석유가 안 나오는 빈국인 단점은 여전히 국가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는지라 요르단은 국가경제에 돌릴 석유를 이라크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주변 아랍 산유국들로부터 대거 수입하고 있다.[3] 캅카스에 살던 사람들이 요르단에 다수 거주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1859년 러시아가 겨우 겨우 이맘 샤밀을 제압하며 체첸을 합병한 뒤 러시아는 체첸인들의 메카 순례를 권장, 지원해주었다. 문제는 끊어주는 출국 티켓이 편도. 그러니까 순례 끝난 뒤에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추방인 셈. 왜 이렇게 했냐면 러시아는 체첸을 병합한다고 하도 고생했던터라 체첸인들의 수를 체첸에서 줄여보려고 순례를 권장한 것. 결국 순례를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된 체첸인들은 추방당하였고 주로 요르단에 정착하게 되었다.[4] 최근에는 시리아인들과 이라크인들이 내전을 피해서 많이 살고 있다. 현재는 다소 정세가 안정되자 시리아, 이라크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5] 상술한 후세인 1세의 할아버지 압둘라 1세메카 출신이다.[6] 당장에 동쪽과 서쪽의 옆나라인 이라크와 이집트에서는 자신의 6촌형 파이살 2세(동갑인데 파이살 2세가 5월생, 후세인 1세가 11월생)와 먼 친척인 파루크 1세가 1958년과 1952년에 군부 쿠데타로 총살당하거나 국외 망명 길을 떠나고, 이집트의 건너편 나라인 리비아에선 국왕이 해외에 나와있는 사이 카다피의 쿠데타로 권좌를 빼앗기고, 이라크의 건너편 국가인 이란에선 팔라비 왕조가 이란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몰락하는 일들을 보면서 자신의 지지층을 확보하거나 왕권을 영구히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민주주의 제도를 허용하는 등 왕권 통치를 조금씩 유연화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반면 남쪽의 사우디아라비아오만은 강력한 국왕중심의 통치력과 모든 고급장교단들과 고위 공직자들 대부분이 국왕의 최측근이나 왕족들로만 구성되어 있는데다 민심에 신경을 쓰며 빈틈이 없을 정도로 내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나 이집트, 리비아, 이란처럼 쿠데타나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붕괴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다. 당장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우드 왕가가 철권통치를 유지하는 이유가 국민들에 대한 경제지원과 족벌정치 때문이다.[7] 사실 그래봤자 민주주의지수가 118위로 권위주의로 평가받는다. 즉 무늬만 민주주의라는 얘기, 애초에 후세인 1세부터가 진짜 민주주의 군주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를 왔다갔다하는데 말이 필요없다.[8] 아마추어 무선인들끼리 교신을 나눈 뒤 서로 감사를 표하기 위해 교환하는 엽서. 이게 모이면 무선인들의 경력을 나타내는 귀한 컬렉션의 의미를 갖는다.[9] 현재 국왕인 압둘라 2세가 영국계인 두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10]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만 해도 20번 넘게 결혼한 왕도 있다! 아내를 4명까지만 두기에 그 수를 넘으면 이전 여자는 이혼하고서 새로 결혼한다든지 그랬다고 한다. 하지만 서류상으로만 이혼할 뿐 대우는 이혼 전과 동일하며 같이 데리고 살며 이혼한 아내는 호적상의 아내와 대우가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