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룡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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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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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룡정변
景龍政變

시기
707년
장소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
원인
위황후와 무삼사의 권력 장악
교전세력
무삼사 파벌
상왕 파벌
지휘관
황제 이현
황후 위씨
안락공주
무삼사
무숭훈
양사욱
태자 이중준
독고의지†
이천리†
이승황†
이다조
사타충의
위원충
결과
이중준의 정변 실패
영향
위황후의 정치 간섭과 권력욕 심화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1. 개요[편집]


707년 당나라에서 일어난 궁중 쿠데타이다. 중종의 태자였던 이중준이 정변을 일으켜 당시 권신이었던 무삼사무숭훈 형제를 처형하였지만 위황후안락공주를 제거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 배경[편집]


705년 측천무후환언범, 장간지, 경휘, 원서기, 최현위 등 신료들이 일으킨 궁중 쿠데타로 인해 퇴위하면서 측천무후의 치세는 막을 내린다. 신룡정변의 공신들은 측천무후의 태자인 이현을 복위시켰고 당나라를 다시 부흥시켰다. 한편 무삼사는 환언범 일파의 집권을 두려워하여 측근들을 동원하고 위황후와 합작하여 이들을 모함하였고, 706년에 신룡정변의 공신들을 제거하였다.

신룡정변의 공신들이 조정에서 제거된 이후, 무삼사는 무숭훈, 위황후, 안락공주와 함께 중종의 귀를 가리는 정치공작을 벌인다. 한편으로는 중종의 태자였던 이중준을 모함하여 태자 자리에서 쫓아내려고도 했다. 이중준은 중종의 태자였지만 위황후의 소생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시기를 받았고 노비놈으로 매도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위황후는 안락공주를 황태녀로 삼으려는 생각도 했기 때문에 이중준의 지위는 더욱 위태로워진다.


3. 전개[편집]


이중준은 위황후 일파의 시기를 견디다 못해 결국 707년에 이다조, 사타충의, 독고의지, 위원충, 이천리, 이승황 등 자신과 뜻이 맞는 이들과 우림군을 동원하여 거사를 준비한다. 이중준은 조서를 위조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무삼사, 무숭훈 부자와 더불어 무삼사의 측근들을 제거하였다. 이중준은 이천리에게 궁문의 수비를 맡기고 자신은 위황후와 안락공주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다. 위황후는 이중준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현무문으로 급히 당도하여 좌우림장군(左羽林將軍) 유인경(劉仁景)에게 현무문의 수비를 명하였다. 이중준의 쿠데타는 여기서 안 좋은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다조는 현무문으로 침입하려고 했으나 유인경에게 저지되어 진입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양사욱과 유인경 등이 이들을 진압하고 중종이 항복하도록 설득하자, 이다조의 부하였던 왕환희(王歡喜) 등은 결국 항복하고 이다조 등을 살해하였다. 결국 이다조 등이 살해당하면서 이중준의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4. 결과[편집]


이중준은 쿠데타에 실패하여 결국 종남산으로 도망쳤다가 주위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중준의 시신에는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지만 영화현승(永和縣丞) 영가욱(甯嘉勖)이 옷을 벗어 이중준의 목을 덮고 곡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종초객 등은 영가욱을 탄핵하였고, 결국 영가욱은 쫓겨난다.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이중준의 목을 무삼사와 무숭훈의 사당에 바쳐 제사를 올렸고 장안에 이중준의 목을 효수하였다.

한편 정변에 참여했던 위원충은 정변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아들인 위승이 죽었지만, 중종은 아들인 위승이 죽은 일에 연루되지 않았고 옛날의 공적을 감안하여 위원충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쳤다. 하지만 종초객과 기처눌, 양재사 등은 위원충을 탄핵하여 위원충은 결국 모함을 당해 죽었다.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이중준이 죽은 뒤에 무시무시한 권력욕을 드러냈다. 안락공주는 황태녀가 되고 위황후는 제2의 측천무후가 되려고 했지만 중종의 반대로 인해 실패하였고, 결국 중종을 독살하여 이중무를 제위에 앉힌다. 위황후는 수렴청정을 하면서 중종의 아우인 상왕 이단(당예종)과 태평공주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이를 사전에 눈치챈 예종의 아들 임치왕 이융기가 태평공주와 함께 궁중 쿠데타을 일으켰고 도리어 자신들이 이융기의 손에 죽게 되었다.

예종은 즉위한 뒤 궁중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들을 모두 추증하고 이중준에게는 절민태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편 이중준에게 살해되었던 무삼사, 무숭훈 부자는 사후에 시호가 추증되었으나 예종이 복위하면서 시호가 삭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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