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업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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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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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업의 난
李敬業之亂
시기
684년
장소
당나라 양주(揚州)
원인
고종 사후 측천무후의 정치 개입에 대한 반발
교전세력
진압군
(측천무후 파벌)



반란군
(이경업 파벌)



주요인물
지휘관

측천무후(황태후)
예종(황제)
이효일
흑치상지
지휘관

이경업
이경유
결과
이경업의 패배
영향
무주혁명에 영향

1. 개요
2. 배경
3. 반란의 시작
4. 반란 진압을 위한 움직임
5. 평가



1. 개요[편집]


684년 양주(揚州)[1]에서 이경업이 일으킨 반란으로 측천무후에게 위기감을 주었던 사건이다.


2. 배경[편집]


반란이 벌어진 배경은 6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83년, 제3대 황제 고종이 34년의 재위 끝에 사망하고 고종의 뒤를 이어 태자 이현(李顯)이 즉위하니 이가 제4대 황제인 중종이었다. 중종이 즉위한 뒤 중종의 모후인 측천무후는 황태후의 자격으로 섭정을 실시했다. 684년 2월, 중종이 위황후의 부탁으로 중종의 장인인 위현정을 시중에 내정하려고 했는데, 이와 같은 행태에 배염을 비롯한 대신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짐이 천하를 전부 위현정에게 준다고 해도 안된다 할 것인가? 시중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아까운가?


중종은 위의 발언으로 대신들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대신들은 이 발언을 참고 넘길 수 없었고 결국 황태후인 측천무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군사들을 이끌고 중종의 앞에 나타났다. 다음은 중종이 폐위된 날에 중종과 측천무후가 나눈 대화이다.

중종: 제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측천무후: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고 한 것이 어찌 죄가 되지 않겠는가!


그 자리에서 중종을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시킨 뒤 방주(房州)에 유폐하였으며, 중종의 동생인 상왕 이단을 제위에 앉혔다. 상왕 이단이 바로 제5대 황제인 예종이었다. 측천무후는 예종을 내세운 뒤 무씨 일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3. 반란의 시작[편집]


이때 양주에서는 당지기(唐之奇), 낙빈왕(駱賓王), 두구인(杜求仁), 위사온(魏思溫), 이경업, 이경유를 비롯한 인물들이 양주에 모여 있었다. 먼저 당지기는 급사중(給事中)을 지냈으나 괄창현령(括蒼縣令)으로 좌천되었고, 장안현(長安縣)의 주부(主簿)였던 낙빈왕은 임해현승(臨海縣丞)으로 좌천되었고, 첨사사직(詹事司直)이었던 두구인은 유현승(黝縣丞)으로 각각 좌천되었다. 이경업은 미주자사(眉州刺史)로 있었다가 공사에 연루되어 유주사마(柳州司馬)로 좌천되었고 이경업의 동생인 주비현령(盩啡縣令) 이경유 또한 공사에 연루되어서 각각 좌천되었다. 주질현(盩厔縣)의 현위였던 위사온도 일찍이 어사를 지냈지만 주질현으로 좌천되었다. 이들은 자신이 좌천된 것과 더불어 측천무후의 정치 개입에 대한 불만 때문에 양주에 모였으며, 중종의 복위와 측천무후의 토벌을 명분으로 거사를 준비했다.

우선 위사온은 감찰어사(監察御史) 설중장(薛仲璋)을 강도(江都)로 파견하고 옹주(韋超) 사람인 위초(韋超)에게는 설중장에게 가도록 명했다. 위초는 설중장에게 다음의 내용을 알렸다.

양주장사(揚州長史) 진경지(陳敬之)가 모반했습니다.


이경업은 진경지를 하옥했으며, 스스로 양주사마를 칭한 뒤 다음의 내용을 선포했다.

고주(高州)의 추장 풍자유(馮子猷)가 모반했으니 밀지를 받들어 군대를 일으켜 풍자유를 토벌하겠다.


뒤이어 이경업은 진경지를 살해하고 진경지의 처형에 반대한 녹사참군 손처행(孫處行) 또한 살해하여 효수하였다. 그리고 양주 일대에서 거병한 뒤 광복부(匡復府), 영공부(英公府), 양주대도독부(揚州大都督府)를 열었으며, 자신은 광복부상장(匡復府上將) 겸 양주대도독을 칭하였다. 또한 각 군현에는 낙빈왕이 작성한 격문을 돌렸으며, 장회태자 이현과 생김새가 닮은 사람을 찾아서 그를 장회태자로 꾸민 뒤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날조했다. 이경업의 반란에 초주사마(楚州司馬) 이숭복(李崇福)이 3개의 현을 바치며 항복했는데, 우이(盱眙)의 유행거(劉行舉)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항거하였다.


4. 반란 진압을 위한 움직임[편집]


측천무후는 이경업의 반란 소식에 분노하여 이경업을 막았던 유행거를 유격장군(游擊將軍)으로 삼았다. 한편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 이효일(李孝逸)을 대총관으로 삼아 이경업을 토벌하도록 명했으며, 이경업의 할아버지 이세적과 아버지 이진의 관작을 삭탈하고 그들의 관을 부쉈다. 이경업은 이세적이 수말당초에 공을 세워서 국성을 하사받았지만 이 반란으로 국성을 빼앗겨서 서씨가 되었다.

측천무후는 반란 소식을 접한 뒤 내사 배염에게 방책을 물었는데 배염은 측천무후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금의 황제 폐하께서는 성인이 되셨지만 친정을 하지 못하셔서 교활한 소인배가 반란을 일으킬 구실을 만들었습니다. 만약 태후께서 정권을 황제 폐하께 돌려주신다면 반란군은 토벌되지 않고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자 배염의 말을 들은 최찰은 측천무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염이 20여 년 동안 조정에 충성하며 반란이 토벌되지 않았는데 태후에게 정권을 황제 폐하께 돌려달라고 청하는 것은 필시 두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찰의 말을 들은 측천무후는 좌숙정대부(左肅政大夫) 건미도(騫味道)와 시어사(侍御史) 어승엽(魚承曄)에게 배염에 대한 국문을 명했다.


5. 평가[편집]


진악(陳岳)이라는 당나라 말의 학자는 《당통기(唐統紀)》에서 이경업의 난을 이렇게 평했다.

이경업이 적어도 위사온의 계책을 따라 하락(河洛)으로 똑바로 향하고 오로지 복위에만 전념했다면 군사들을 풀어놓고 패배하여 죽더라도 역시 충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릉에 있는 왕의 기운을 망령되게 믿은 것은 진실로 반역이니 패배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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