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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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관료로 명성왕후의 아버지이자, 현종 말기부터 숙종 초기까지 한당을 이끈 관리이다.
2. 생애[편집]
1619년 경기도 가평군 잠곡 출생으로 아버지는 김육이다.
인조 20년인 1642년, 진사가 되었으며 7년 뒤엔 강릉 참봉과 세자익위사 세마(洗馬)로 관직을 시작했다. 1651년에 딸인 명성왕후가 당시 세자였던 현종의 빈으로 간택이 됐고, 그 뒤 부솔, 공조좌랑를 지내다 우부승지, 가주서로 승진했다. 평시서령(平市署令), 공조좌랑, 공조정랑, 장악원 첨정(僉正), 부평부사(富平府使),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예빈시정(禮賓寺正)과 제용감정(濟用監正) 등을 지냈다. 김육이 죽자 삼년상을 마친 뒤, 한당의 영수가 되었다.
2.1. 산당과의 갈등[편집]
현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에 책봉과 동시에 당연 겸직인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제수되었다. 의원(尙衣院), 사도시(司導寺), 장악원(掌樂院), 빙고(氷庫)의 도제조직과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과 호위대장(扈衛大將)도 겸임했다.
산당과 한당의 관계만큼 영수였던 송시열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1674년에 대부복상문제(代父服喪問題)[3] 가 부상하고 남인과 서인의 대립 때 허적의 의견에 동조해 외서내남(外西內南)이라는 평을 불러왔다.
사실, 송시열의 스승인 김집은 자신의 아버지를 대표하는 키워드인 대동법을 반대해 김육과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김육의 장례식 때 국왕만 쓸 수 있는 수도(隧道) 사용에 대해 지적하자, 민유중이 탄핵을 했다. 이 사건들을 거치며 김우명의 반송시열, 반산림 이념은 강해졌다. 그 뒤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다시 제수됐고, 예송논쟁 때 남인 측을 지지하며 탁남인 허적과 협력하여 송시열과 산당을 공격했다.[4]
2.2. 숙종 즉위 후[편집]
숙종 즉위 후, 숙종은 아버지 현종과 비슷한 산당에 대한 접근법을 가지고 있어 외척이자 외조부인 김우명을 포함한 청풍 김씨는 신뢰를 받았다.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과 복선군, 복평군(이른바 삼복)은 그와 그의 가문만큼이나 신뢰를 받았으나, 그의 딸이자 대비인 명성왕후는 역시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아버지인 그에게[5] 부탁을 한다. 그해 2월 삼복 중 복창군과 복평군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으나, 관련자들이 모두 부인해 어영부영 넘어갔다. 이를 홍수의 변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허적과 윤휴와 갈등이 생긴다.
결국 김우명은 종친들을 무고한 사람이 되어 남인으로부터 지속적인 탄핵을 받았다. 모든 관직을 사임한 뒤 홧김에 술만 마시다 2개월 뒤 사망했다. 무덤은 당시 춘성군, 현 춘천시 서면 안보1리 산25-1에 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 충익이 추서되었다. 숙종이 내린 시호 증시 교지는 후일 청풍부원군김우명상여(중요민속자료 120호)와 김우명영정과 함께 그의 12세손 김성구가 국립춘천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의 후손 중에서는 명성왕후 외에도 정조비 효의왕후가 또 한번 배출되었는데, 효의왕후의 친정아버지 김시묵은 그의 아들 김석연의 4대손이었다. 그의 또다른 후손들 중 일부는 몰락하여 강원도 춘성에 정착했는데 후일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
3. 가족 관계[편집]
* 정부인 :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德恩府夫人 恩津 宋氏) - 송국태(宋國澤)의 딸
- 장남 : 김만주(金萬周, 1639 ~ 1657)
- 며느리 : 숙부인 여흥 민씨(淑夫人 驪興 閔氏) - 좌랑 민임(佐郞 閔恁)의 딸
- 손자 : 김도제(金道濟) - 3남 김석연(金錫衍)의 장남
- 장녀 :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 ~ 1684)
- 차남 : 김석익(金錫翼)
- 며느리 : 정부인 파평 윤씨(貞夫人 坡平 尹氏) - 윤협(尹埉)의 딸
- 손자 : 김도영(金道泳) - 3남 김석연(金錫衍)의 3남, 효의왕후의 증조부
- 손녀 : 홍중행(洪重行)의 처
- 3남 : 숭록대부 김석연(崇祿大夫 金錫衍)
- 며느리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정한(李挺漢)의 딸
- 며느리 : 함종 어씨(咸從 魚氏) - 군수 어상준(郡守 魚尙儁)의 딸
- 4남 : 김석달(金錫達)
- 며느리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인평대군의 손녀이자, 복녕군의 딸
- 손자 : 김도협(金道浹) - 3남 김석연(金錫衍)의 4남, 박문수의 장인
- 차녀 : 권익흥(權益興)에게 출가
- 첩부인 : 홍씨 - 예영[7] 의 언니
- 서장남 : 김석구(金錫耉)
- 첩부인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필달[8] (李必達)의 딸
- 서차남 : 김석제(金錫悌)
- 서3남 : 김석순(金錫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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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는나이 57세.[2] 적자녀 4남 2녀+서자녀 5남 2녀[3] 아버지가 실성했을 때 그 아들이 상주가 되자 문제가 생겼다. 지금와선 예송논쟁과 비슷하게 보여 굉장히 쓸데없게 보이지만, 그땐 성리학의 교조화가 진행되었기에 유자들은 이런 것에 목숨을 걸었다.[4] 여기선 숨겨진 사정이 있다. 송시열은 한당 계열이면서 능력 있고, 왕의 신임도 받는 그의 형 김좌명과 손잡으려 했으나, 때맞춰 그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실현하지 못했다.[5] 그 역시 송시열을 밀어내는데 앞장섰지만, 종친들이 권력을 가지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6] 윤두수의 장남 윤방(尹昉)의 4대손[7] 허견의 처[8] 효령대군의 3남 보성군 이합(寶城君 李㝓)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