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공주(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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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낙랑왕의 후비
신란궁부인 | 神鸞宮夫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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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의 왕녀
낙랑공주 | 樂浪公主


생몰년
미상
재위기간
고려 제후왕비
935년 12월 20일 ~ 미상
본관
개성 왕씨
부왕
태조
모후
신명순성왕후
배우자
낙랑왕(신라 경순왕)
자녀
2녀(추정)[ 펼치기 · 접기 ]
장녀 : 경주 김씨[1]
차녀 : 헌숙왕후

봉호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
→ 낙랑공주(樂浪公主)
→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

1. 개요
2. 가족관계
3. 자녀 등장
3.1. 《김은열 묘지명》
3.2.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3.2.1. 《묘지명》 내용의 진위 여부
3.3. 《신라경순왕전비》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로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다.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1] 혼인 후에 낙랑공주(樂浪公主)라고 불려졌고 또한 신란공주(신란궁부인)[2]라고도 불려졌다. 고려 제3대 정종, 제4대 광종과는 친남매 사이다.

935년 11월 신라 경순왕고려에 귀순하고 이어서 12월 20일 낙랑공주와 혼인하였다. 이후 경순왕은 고려 태조와 성무부인 박씨[3] 소생의 아홉째 딸인 부인 왕씨와도 혼인을 하였다. 둘은 이복자매 지간이다.

낙랑공주 왕씨는 경순왕이 아직 신라왕이던 935년 11월 그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잠시나마 신라 왕비였다. 부인 왕씨가 경순왕에게 출가한 때는 기록이 없다. 935년 12월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고 경순왕도 고려 정승(政丞)으로 격하되었지만 낙랑공주 왕씨는 신라의 왕비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신라경순왕전비》[4]는 신라 경순왕의 왕후였던 죽방부인을 전비(前妃)로, 신라 멸망 이후 경순왕과 혼인한 낙랑공주를 후비(後妃)[5]로 적었다.

자명고 전설에 나오는 고구려호동왕자최씨낙랑국낙랑공주와는 훨씬 후대의 별개 인물이다. 낙랑(樂浪)이라는 호칭도 낙랑군을 뜻하는 것이 아닌 신라의 별칭으로 쓰인 것이다.


2. 가족관계[편집]


《신라경순왕전비》나 경주 김씨 대동보에는 경순왕의 세 딸들 중 장녀는 헌숙왕후이고, 차녀는 고려 삼한공신 이금서(李金書)[A]에게 출가한 딸이며, 3녀는 신라 시중 황경(黃瓊)[B]에게 출가한 딸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세 딸의 순서는, 897년생으로 추정되는 경순왕의 나이 및 955년생인 경종의 나이, 경종과 헌숙왕후가 혼인한 해가 975년이라는 점, 황경이 신라가 멸망한 935년 이전에 신라의 시중이었다는 점, 이금서가 고려가 건국한 918년 이후에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한 점[6] 등을 감안할 때 연대상 문제가 있다. 경순왕의 세 사위의 혼인 순서는 황경(935년 이전?)[7], 이금서(951년 이후?)[8], 경종(975년) 순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헌숙왕후의 경우 경종의 왕비라는 점을 고려하여 딸들 중 가장 먼저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경주 이씨 대동보에는 이금서의 배위가 경순왕의 3녀라고 했고, 연대상 세 딸들의 나이차가 꽤 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경순왕의 딸들이 3명 이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척 김씨 태사공파보에는 전비 소생이 3남 1녀, 후비 소생이 5남 2녀로, 장녀는 황경에게 출가한 딸, 차녀는 헌승왕후(*삼국유사), 3녀는 이금서에게 출가한 딸로 기록되어 있어 연대상 전비 소생의 딸이 황경에게 출가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뒷받침해준다.[9]

  • 신라 경순왕(고려 정승 김부)[10]
  • 전비 : 죽방부인
    • 장녀 : 신라 시중 황경[B]에게 출가
  • 후비 : 낙랑공주 왕씨
    • 차녀 : 고려 삼한공신 이금서[A]에게 출가
    • 3녀 : 헌숙왕후 김씨[11], 고려 경종에게 출가

3. 자녀 등장[편집]


경순왕의 자녀 중 낙랑공주 왕씨와 관련된 경우만 서술했다.


3.1. 《김은열 묘지명》[편집]


1784년(정조 8) 성북(城北) 십리(十里) 밖 어느 종암(鍾巖) 아래 오룡산(五龍山)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명》을 김노규(金魯奎)가 근기(謹記)하였는데,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 후 슬하에 8남을 더 두었다고 한다. 이들의 이름은 일(鎰), 굉(鍠), 명(鳴), 은열(殷說),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鐘)이라 한다. 또 차남 '굉(鍠)'과 4남 '은열(殷說)'은 국구(國舅, 고려 현종의 장인)의 아들(낙랑공주 소생)로 평장사를 지내고 공(功)이 있는 신하여서 특별히 장지(葬地)를 하사해 주었다고 한다.

  • 장남: 일(鎰)
  • 차남: 굉(鍠) - 낙랑공주 왕씨 소생, 고려 평장사
  • 3남: 명(鳴)
  • 4남: 은열(殷說) - 낙랑공주 왕씨 소생, 고려 평장사
  • 5남: 중석(重錫)
  • 6남: 건(鍵)
  • 7남: 선(鐥)
  • 8남: 종(鐘)


3.2.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편집]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墓

新羅敬順王金傅第四子侍中侍郞有高麗平章事殷說卒于戊辰三月初四日己丑葬于城北十里鍾岩下五龍山南麓雙龍合金壬坐之原兄則鎰次鍠次鳴鍾弟曰重錫曰鍵曰鐥曰鍾子江陵君泰華

고려 평장사 보국대안군 김공 은열 묘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넷째 아들로 시중시랑이고 고려 평장사인 은열(殷說)이 무진년 3월 초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 아래 오룡산 남쪽 기슭 쌍룡합금의 언덕에 북쪽을 등지고 장사 지냈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굉(鍠)[12]

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다.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1785년(정조 9) 경주 김씨 김사목(金思穆)이 족보를 수보(修普)하면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을 추기(追記) 하였는데, 차남 '굉(鍠)'을 '황(湟)'으로, 3남 '명(鳴)'을 '명종(鳴鐘)'으로 개명하고, 4남 '김은열(金殷說)'의 시호를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이라 작호(作號) 하였다. 또 차남 '황(湟)'과 4남 '은열(殷說)'을 국생(國甥. 고려 태조의 사위)의 아들(낙랑공주 소생)이라 변경하는 등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였다. 이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 경순왕 8자들의 이름 및 서차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 장남: 일(鎰)
  • 차남: 황(湟. 개명) - 낙랑공주 왕씨 소생, 고려 평장사
  • 3남: 명종(鳴鍾. 개명)
  • 4남: 은열(殷說) -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 낙랑공주 왕씨 소생, 고려 평장사
  • 5남: 중석(重錫)
  • 6남: 건(鍵)
  • 7남: 선(鐥)
  • 8남: 종(鐘)


3.2.1. 《묘지명》 내용의 진위 여부[편집]


《김은열 묘지명》은 그 형태에 있어 누가 기록하였는지 찬(撰)한 자도 없고, 배위(配位) 및 생애 등이 누락되어 있다. 단지 형제 서차만 기술했을 뿐 상세한 내용은 없다. 아들들의 이름 또한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자녀 이름을 개명(改名)하고, 시호를 작호(作號)하는 등 내용을 변조(變造)하고 가필(加筆)을 심하게 하여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3.3. 《신라경순왕전비》[편집]


1784년(정조 8) 발견된 《김은열 묘지명》을 바탕으로 1814년(순조 14)에 후손 강릉 김씨 김계락(金啓洛)이 찬하고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는 전비 죽방부인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태자(太子), 차자(次子), 영분공(永芬公)이라 하며, 딸(경순왕의 장녀)은 고려 경종에게 출가하였다고 적혀 있다. 장녀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의 내용을 참고한 듯하다. 또한 후비 낙랑공주는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4남은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며, 장녀(경순왕의 차녀)는 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차녀(경순왕의 3녀)는 장수 황씨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고 한다. 딸 2명[13]에 대한 기록은 《김은열 묘지명》에는 없는 내용으로 《이제현 묘지명》, 경주 이씨 족보 및 장수 황씨 족보의 내용을 반영한 듯하다.

장수 황씨 족보에는 시조 황경(黃瓊)이 신라 시중(侍中)을 지냈고 배위가 경순왕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이씨 족보에는 고려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배위가 경순왕의 3녀로 기록되어 있다. 이금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했기 때문에 《신라경순왕전비》와는 다르게 경순왕의 차녀는 황경에게, 3녀는 이금서에게 출가한 것이 맞을 듯싶다. 한편 《이제현 묘지명》에서는 경순왕이 고려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고 그 딸이 이금서에게 출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현 묘지명》은 1375년 고려의 대학자 이색이 찬한 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가장 앞선 족보인 안동 권씨 성화보(1476)는 물론이고 고려사(1451)보다도 기록 연대가 앞서는 것이다. 게다가 2007년 묘지석이 실제로 발굴되기까지 했다.# 따라서 경순왕에게 헌숙왕후 외에 딸 2명이 더 있고 각각 황경과 이금서에게 출가한 부분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신라경순왕전비》에서는 《김은열 묘지명》에 등장하는 장남 '일(鎰)', 차남 '굉(鍠)(또는 황(湟))', 3남 '명(鳴)(또는 명종(鳴鍾))'을 모두 배척하고, 3남에 '영분공(永芬公)'을 추가하고, 4남 '중석(重錫)'을 '석(錫)'으로, 8남 '종(鐘)'을 '추(錘)'로 개명하는 등 가필(加筆)이 심하다. 또한 장녀 헌숙왕후 김씨가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헌숙왕후 김씨도 낙랑공주 소생이라는 것이 정설에 가깝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역사서에는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한 후 헌숙왕후를 경종에게 출가시키자 975년(경종 즉위년) 경종이 이를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인 상보(尙父)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고 한다.

  • 전비 박씨 소생 (3남 1녀)
  • 후비 왕씨 소생 (5남 2녀)
    • 장남: 은열(殷說)
    • 차남: 석(錫. 개명)
    • 3남: 건(鍵)
    • 4남: 선(鐥)
    • 5남: 추(錘. 개명)
    • 장녀: 이금서(李金書)[A]에게 출가
    • 차녀: 황경(黃瓊)[B]에게 출가

경주 김씨 대동보에서는 헌숙왕후 김씨를 후비 왕씨 소생의 장녀로 하여 5남 추(錘) 다음에 적고 있다.

4. 대중매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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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후궁의 품계 숙의(淑儀)와는 전혀 관련이 없으며 한자도 다르다.[2] 신란궁은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받은 궁전의 이름이다.[3] 호족 박지윤(朴智胤)의 딸[4] 1814년(조선 순조 14년)에 경주 김씨 가문에서 세운 비석이다.[5] 왕의 둘째 정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차비(次妃) 문서 참고.[A] A B C 경주 이씨. 고려조 문하시중 이제현(李齊賢)의 14대조, 조선조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22대조. 아버지는 신라 병부령 이금현(李金現), 조부는 신라 소판 이거명(李居明). 이금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했다고 하므로 신라에서 이미 벼슬이 시중에 이른 황경과 나이차가 꽤 날 듯하다.[B] A B C 장수 황씨 시조. 조선조 영의정 황희(黃喜)의 선조.[6] 이금서는 신라 병부령(兵部令) 이금현(李金現)의 아들이다. 이금현은 신라 경순왕의 측근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935년 경순왕과 함께 고려에 귀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금서가 고려에서 벼슬을 시작한 때도 918년 이후가 아니라 935년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7] 장수 황씨 족보에 의하면 황경의 배위가 경순왕의 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기록되어어 있지 않다. 황경이 신라(935년 멸망)에서 시중을 지냈다고 하므로 그때 나이가 최소 40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순왕의 후비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딸의 출생은 빨라야 936년이기 때문에 황경의 배위가 낙랑공주 소생이라면 15세에 혼인했다고 하더라도 황경의 나이가 최소 55세가 되므로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장수 황씨 족보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황경의 배위는 경순왕의 전비 죽방부인 소생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8] 《이제현 묘지명》 및 경주 이씨 대동보에 따르면 경순왕과 낙랑공주 왕씨 소생의 딸과 혼인했다고 하므로, 935년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혼인으로 바로 태어난 딸이 15세에 혼인했다고 가정하더라도 951년은 되어야 한다.[9] 삼척 김씨 세보는 전비 소생이 3남 1녀, 후비 소생이 5남 2녀라고 하면서, 장녀가 헌숙왕후, 차녀가 이금서에게 출가한 딸, 3녀가황경에게 출가한 딸이라고 적고 있다.[10] 935년 10월 경순왕이 고려에 입조할 뜻을 알렸고, 동년 11월 개성에 입성한 직후 고려 태조의 장녀 낙랑공주와 혼인했으며, 동년 12월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었다. 즉 낙랑공주는 신라왕(新羅王)과 혼인한 것이다. 이후 신라가 고려에 합병되면서 경순왕(敬順王)도 고려의 정승(政丞) 김부(金傅)로 격하된 것이다. 다만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에 봉해졌다. 975년 김부의 딸(헌숙왕후)이 경종에게 출가하면서 경종은 김부에게 상보 도성령(尙父 都省令)의 호를 더하고 추충순의숭덕수절공신(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의 호를 주었다.[11] 어머니가 누구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조선조 말 1814년 경주 김씨 일문들이 세운 《신라경순왕전비》에는 전비 죽방부인 소생이라 적혀있는데, 역사학계에선 후비 낙랑공주 소생으로 추정하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897년생으로 추정되는 경순왕과 955년생인 경종의 나이 및 경종과 헌숙왕후가 결혼한 해가 975년이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헌숙왕후가 전비 소생이 되려면 전비가 40~50대의 노산이 되어아 한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쉬운 일도 아니다.[12] 원래 황(湟)이었던 것인데 또 수정이 가해진 것인지 오기인지 확인 필요.[13]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에 그와 혼인하여 금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또 다른 딸인 덕주공주가 나오지만 경순왕의 후손과 관련된 기록에선 나오지 않아 진짜 경순왕의 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