닐 키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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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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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풋
닐 키녹
존 스미스
마거릿 베킷
제15대
제16대
대행
제17대
대행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해리엇 하먼
에드 밀리밴드
해리엇 하먼
제18대
제19대
제러미 코빈
키어 스타머
*표시는 대수를 건너뛰어 중임한 횟수를 의미한다.

보수당 대표 · 노동당 대표 · 자유민주당 대표 · 스코틀랜드 국민당 대표





영국 귀족원 의원
키녹 경
Rt Hon. The Lord Kinnock

파일:Joop_den_Uyl_and_Neil_Kinnock,_1984_(cropped).jpg
본명
Neil Gordon Kinnock
닐 고든 키녹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출생
1942년 3월 28일 (82세)
[[웨일스|
웨일스
display: none; display: 웨일스"
행정구
]]
트레데가
재임기간
제10대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1999년 9월 16일 ~ 2004년 11월 21일
학력
카디프 대학교 (역사학 / 학사)
직업
정치인
정당


종교
무종교
경력
서민원 의원
노동당 대표
EU 집행위원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귀족원 의원
서명
파일:Neil_Kinnock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4. 기타



1. 개요[편집]


노동당 소속의 영국 정치인이다.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 존 메이저 정부 시절 쇠퇴해가던 제1야당 노동당의 지휘봉을 9년간 맡았던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웨일스의 Tredegar라는 조그마한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들의 각각 전직 석탄 광부와 지역의 간호사였다. 키녹은 카디프 대학교에 진학해 그곳에서 산업과 역사에 관한 학위를 획득했다. 이듬해 교육 대학원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1967년 배우자를 만나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1970년 베드 웰티 지역구에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다. 1978년 키녹은 웨일스의 자치의회를 만들자는 법을 발의, 영국 의회에서 통과되었지만 정작 웨일스에서 약 80% 가량의 반대표가 나오며 무산된다.[1]

1979년 당시 제1야당 당수였던 마이클 풋그림자 내각 교육기술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1983년 총선에서 베드 웰티 지역구가 통폐합됨에 따라, 신설된 이슬윈 지역구에 출마해 5선에 성공한다. 허나,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처 내각에 대한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노동당보수당에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참패를 거뒀다.[2][3]

총선 이후 마이클 풋 대표가 사퇴함에 따라, 닐 키녹 의원은 1983년 노동당 대표 경선에 출마해 당선된다.

대표직 취임 후 키녹은 풋 대표 시기를 거치면서 좌측으로 다소 옮겨간 당의 이념 성향을 좀 더 중도적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이런 면에서도 볼때 후일 대표가 되는 토니 블레어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의 시작은 닐 키녹 대표였던 셈이다.

1987년 총선을 앞두고 노동당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는데 자유민주당-사회민주당[4] 연합에 의해 제2야당으로 추락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온 것. 이후 노동당의 목표는 '제1야당 굳히기'로 수정되었지만, 마거릿 대처 내각의 장기화와 여러 정책의 부작용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창의적인 선거 캠페인으로 인해 이전 총선보다 20석을 더 차지해 229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에 성공한다.

1988년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경쟁자였던 토니 벤 후보에게 승리함으로써 키녹은 대표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당 내에서도 절대적인 입지를 지니게 되었다. 때마침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인두세 도입과 유럽 통합 논란으로 서서히 지지를 잃고 있었으며, 1990년 사퇴하게 된다. 그리고 존 메이저 총리의 보수당이 내분으로 인해 반사이익을 보며 보수당에게 경합우세인 여론조사를 1989년부터 3년동안 유지하며 13년이라는 길고 길었던 야당 생활을 끝맺을것 처럼 보였다.[5]

하지만 이길줄만 알았던 1992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유는 노동당의 계속된 정책 변경으로 인한 전통적 지지층 이탈과 보수당의 대처 색깔 탈색을 통한 중산층의 지지 확보였다.

정작 다 잡은 쉬운 선거에서 패배한 키녹 대표는 총선 후 사퇴했으며, 그 자리는 존 스미스 의원이 이어받게 된다.

이후 유럽연합에서 주로 활동하며, 영국 정치계와는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탈리아의 로마노 프로디 전 총리가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자 집행위 부위원장으로 참여해 행정 개혁과 감사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2004년을 마지막으로 집행위원회에서 물러난 이후 영국 정계로 복귀했는데 2005년 1월 28일, 일대귀족 남작으로 서임되면서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귀족원에서 보수당의 힘을 빼려는 토니 블레어 총리의 의도에 따른 것인데[6], 원래 키녹 전 대표가 귀족원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작가 겸 저널리스트인 윌 셀프로부터 위선자라고 저격당하기도 했다.

2018년에는 브렉시트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표출하면서 노동당 제러미 코빈 대표에게도 브렉시트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라고 압박했다.

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70
1970년 영국 총선
베드웰티


28,078 (74.6%)
당선(1위)
초선
1974.2
1974년 2월 영국 총선
26,664 (67.06%)
재선
1974.10
1974년 10월 영국 총선
27,418 (70.88%)
3선
1979
1979년 영국 총선
28,794 (71.35%)
4선
1983
1983년 영국 총선
이슬윈
23,183 (59.4%)
5선
1987
1987년 영국 총선
28,901 (71.3%)
6선
1992
1992년 영국 총선
30,908 (74.3%)
7선

4. 기타[편집]


  • 그의 아들 스티븐 키녹은 1970년생으로 닐과 마찬가지로 웨일스 출신이며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브뤼셀 유럽대학교를 졸업한 뒤 EU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1996년 덴마크 사회민주당 정치인인 헬레 토르닝-슈미트와 결혼했고 배우자인 헬레는 2011년부터 4년간 덴마크 총리로 일했다. 스티븐은 제56회 영국 총선에서 웨일스의 Aberavon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2019년 기준 하원 3선 의원이다.
  •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모처럼만에 미국 정계에 키녹의 이름이 회자되었는데, 키녹 본인이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니고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가 과거 키녹의 연설을 표절했다가 낙마했던 이력이 회자되면서 다시 이름을 올리게 됐다.
  • 노엘 갤러거가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정치인으로도 알려져있다. 80년대 노동당 전당대회도 따라다녔었고, 블레어 이후에는 "사실 총리는 키녹이 되었어야 했어"라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언젠가 노엘 갤러거가 닐 키녹의 부인을 만나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부군께서 연설하실 때 정말 뿅 갔어요."라고 극찬을 했는데, 키녹 부인은 "그 이는 저를 침대에서 뿅가게 했지요."(...)라고 화답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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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인 1998년, 웨일스 정부법을 제정하며 자치의회를 만들게 하고 대부분의 분야에서 입법 가능을 가능하게 해 준다.[2] 단 209석만을 얻으며 몰락했다.[3] 훗날 이 기록은 제58회 영국 총선에서 제러미 코빈 대표가 이어받는다.[4] 이후 자유민주당에 병합된다.[5] 물론 중간에 존 메이저 총리의 취임, 허니문 효과로 잠깐 우세를 내주었다가 반년만에 다시 경합우세를 유지한다.[6] 키녹의 귀족원 등원으로 상원에서 노동당과 보수당의 의원 수가 동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