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가해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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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2.2. 해골부대
2.2.4. 국가보안본부
2.2.5. 기타 기관
2.3.1. 교육과 명령
2.3.2. 사상적 근원
2.3.3. 부대별 사례
2.3.3.1. 비밀 야전 경찰
2.3.3.2. 남부집단군
2.3.3.3. 중부집단군
2.3.3.4. 북부집단군
2.3.3.5. 12군과 F집단군
2.3.3.6. 기타 인물 및 부대
2.3.4. 장병들의 인식
2.3.5. 결론
2.4.3.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
2.4.5. 독일 토양 및 석재 유한공사(DEST)
2.4.6. 기타 기업
3. 독일 외 추축국 및 부역자



1. 개요[편집]


홀로코스트의 가해 주체는 다양하다. 나치 독일의 정부 산하 조직들과 나치당을 중심으로, 다수의 기업과 부역자들이 포괄적으로 얽혀 있다.


2. 나치 독일[편집]



2.1. 독일 정부나치당[편집]


파일:Goring Authorization Letter.jpg

1941년 7월 31일, 베를린

제국원수(Der Reichmarschall des Großdeutschen Reiches)

4개년계획부 전권 장관(Beauftragter für den Vierjahresplan)

국방위원회 의장(Vorsitzender des Ministerrats für die Reichsverteidigung)

공안경찰(Sicherheitspolizei) 및 보안대(SD) 최고책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중장(SS-Gruppenführer) 귀하

베를린

1939년 1월 24일 최적의 수단을 동원해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추방하라는 귀하의 의무에 더해,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유럽에서의 유대인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는 조직적이고 기술적이며 실제적인 문제에 관련된 모든 필수적 사항들을 준비할 책임을 귀하에게 부여한다.

정부의 다른 부처가 관련될 경우 그들은 언제든 귀하에게 협조해야 한다.

나는 귀하에게 우리가 바라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적, 기술적, 실제적 수단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계획을 가까운 시일 내에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괴링(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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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제국원수 괴링이 보낸 서한. 이 명령을 받은 하이드리히는 베를린 교외 반제의 한 별장에 독일 정부의 각 부서 요인들을 초대하여 유대인 문제 해결법에 대한 회의를 비밀리에 열었다. 이 회의가 그 유명한 반제 회의다.



2.2. 친위대[편집]



2.2.1. 무장친위대[편집]



2.2.2. 해골부대[편집]



2.2.3. 질서경찰[편집]



2.2.4. 국가보안본부[편집]



2.2.4.1. 보안대[편집]


2.2.4.2. 비밀경찰[편집]


2.2.4.3. 친위특무대[편집]

파일:Men_with_an_unidentified_unit_execute_a_group_of_Soviet_civilians_kneeling_by_the_side_of_a_mass_grave.jpg
▲ 민간인들을 총살하는 특무대원들. 프리드리히 예켈른이 개발한 '정어리 통조림' 방식으로 사람들을 처형하고 있다. 1941년, 일자 불명.

...예를 들면 라트비아의 다우가프필스에서 유대인 집단 학살이 있었어요. 친위대와 보안대가 수행했지요. (중략) 일요일 이른 아침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일제사격 소리가 두 번 나고 그다음 소총을 쏘는 소리가 들렸어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와 말했죠. "왜 총을 쏜 거야?" 참모부 배속 장교가 말했죠. "대령님, 가 보셔야겠습니다.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 근처까지만 갔지만 그래도 볼 건 다 봤어요. 다우가프필스에서 끌고 온 300명이 구덩이를 하나 파 놓았지요. (중략) 한 사람이 명령을 하면 스무 명의 인간이 마치 과녁처럼 넘어지면서 구덩이로 떨어졌지요. 그다음에 제일 끔찍한 일이 벌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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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트비아 메스켐프에서 특무대가 벌인 학살에 대한, 독일 육군 하인리히 키텔 중장의 증언. 키텔 중장은 영국군에 포로로 잡혀 트렌트파크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도중 동료 수감자[1]

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해당 증언을 구술했다. 위 대화는 1944년 12월 28일 영국 정보부의 포로 감시 부서인 MI19에 의해 도청되어 독일 장성 특별보고서(SRGG)에 기록되었다.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68p에서 발췌.


최초로 집단 총살을 시작했으며, 가장 열성적으로 수행한 이들이자 가스 밴을 최초로 사용한 이들은 바로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다. 번역하여 특무부대, 특무대 또는 특수작전집단이라 불리며, 나치당 친위대 소속의 보안대와 보안경찰(게슈타포)이 주축이 된 부대였다. 일부 무장친위대질서경찰 전투대대들도 배속되었다. 나치당이 지정한 사상적, 인종적 적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오직 살인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설립자는 국가보안본부 총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대장이었다.

이들은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체코슬로바키아 병합 당시 최초로 결성되어 독일의 병합에 저항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두 국가의 병합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우생학적 장애인 학살인 T-4 프로그램에 투입되어 장애인들을 살해하였다. 1939년 폴란드 침공부터는 본격적으로 재조직되어 폴란드인들을 노예화하는 목표의 사전 작업으로서 폴란드 지식인들을 집중적으로 총살하였는데, 이들이 육군의 진격로를 따라가며 진행한 학살은 훗날 독일군 전체가 수행할 인종 전쟁의 청사진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의 개시와 함께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특무대는 북부, 중부, 남부집단군에 분속되어 본격적인 살해작전을 벌인다.

우선 특무대 A(Einsatzgruppen A)의 경우 프란츠 발터 슈타흘레커 SS소장의 지시를 받았으며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이끄는 북부집단군의 소속이 되어 발트 3국 지역을 맡았다. 이들은 넷 중 특히 가장 열성적으로 유대인들을 살해한 집단으로, 1942년 초 반제 회의가 열리기 전 약 8개월 만에 발트 3국 유대인들의 씨를 거의 다 말렸다. 아이히만이 반제 회의에서 에스토니아 유대인들이 없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한편 아르투어 네베 SS중장이 이끄는 특무대 B(Einsatzgruppen B)는 페도어 폰 보크 원수의 중부집단군 소속으로서 벨라루스와 중서부 러시아를 휩쓸었다. 이들은 후술할 파르티잔 토벌전에 가장 큰 중역이 된다.

특무대 C(Einsatzgruppen C)는 오토 라슈 SS소장의 지휘를 받으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남부집단군 소속이 되었으며, 북부 우크라이나를 파괴했다. 키이우 일대에서 벌어진 바빈야르 학살이 바로 이들의 소행이다.

마지막으로 오토 올렌도르프 SS중장의 특무대 D(Einsatzgruppen D)는 남부집단군 중에서도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상급대장, 그리고 그 후임자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상급대장의 11군 소속으로 남부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 및 크림 반도 등 흑해 연안 지역의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2.2.5. 기타 기관[편집]





2.3. 독일 국방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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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7월 9일, 불타는 유대교 회당을 구경하는 북부집단군 병사들과 리투아니아인 주민들.

"그들은 수백만의 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에게 안겨준 불행과 고통에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명예로운 직업인 군인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군사적인 지침 이외에도 히틀러와 나치 동료들의 호전적인 야심은 탁상공론이고 무익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군인의 맹세를 조롱했습니다. 자신들의 방어에 적합할 때는 복종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히틀러의 잔혹한 범죄에 직면했을 때는 불복종했다고 말합니다. 진실은 그들이 이 모든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거나, 침묵하고 묵인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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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연합국 재판관이었던 제1대 오크시 남작 제프리 로렌스(Geoffrey Lawrence, 1st Baron Oaksey) 경이 독일군 피고인들에 대해 남긴 평가. 팀 리플리의 《독일 국방군: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472p에서 발췌.


독일 정부의 정규군인 국방군의 홀로코스트 참여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부분이 알려지지 않았다. 냉전 기간 동안 그들은 거짓 신화에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대다수의 국방군 장병들과 장성들은 자신이 홀로코스트와 무관하며 학살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전범 재판에서도 다수의 장병들과 장성들은 무죄방면되었고, 징역에 처해진 이들 또한 몇 년 지나지 않아 감형받고 풀려났다. 국방군은 나치의 인종주의와는 거리를 두었으며, 프로이센 왕국군독일 제국군의 후신으로서 국가방위 임무만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것이 그간의 통념이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당과 히틀러의 사병인 친위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수용소 경비대인 해골부대나 보안대, 게슈타포 그리고 특무대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현재도 일각에서는 국방군의 학살을 부정한다. 또는 영미연합군이나 소련군의 학살과 같은, 전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부수적인 피해라고 강변하며 홀로코스트와의 연관성을 회피한다. 이는 실제로 1990년대에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독일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국방군 범죄 전시회'를 관람하곤 분개하던 노병들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국방군 또한 나치즘에 강하게 물들어 휘하 장병들에게 인종 청소를 강요했으며, 그게 아니라도 홀로코스트와 전쟁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


2.3.1. 교육과 명령[편집]


"우리는 해독한 기생충을 제거하듯 세계 유대인들을 제거한다. 우리가 그들을 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적을 격퇴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다. 유대인을 제거하는 투쟁은 신이 원하는 종족의 순수함과 건강함을 위한 도덕적 투쟁이다. 그리고 새롭고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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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년의 국방군 정훈교육 교재(Schulungshefte) 제5권에 실린 C.A. 호베르크 박사의 논문, '독일사 속의 유대인'의 마지막 문단.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22p에서 발췌.


"전쟁 목적은 모스크바의 통치자로 대변되는 하등 인간 빨갱이 족속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인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 앞에 서 있다. 세상은 이 사명이 어떻게 완수되는지 목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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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군 선전국 소식지인 "부대 소식(Mitteilungen für die Truppe)"의 기사 중 하나. 소련 침공 직후인 1941년 6월 발간된 J 12호에 수록된 문구이다.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38p에서 발췌.


당장 전쟁이 시작된 1939년에 국방군 지도부, 즉 육군 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나치당 이념을 장병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내부적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가르치기 위한 정훈교육 교재를 제작해 일선 장병과 소부대 지휘관들에게 배포했다. 상단에 있는 인용문이 바로 해당 교재에 수록된 논문을 발췌한 것으로,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며 장병들에게 주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나치즘은 독일 국방군의 공식적인 이념이 되었다. 동 시기, 국방군 선전국(Wehrmachtpropaganda) 또한 설립되어 독일 장병들에게 인종주의를 주입했다.

학살 가담에 있어서도 국방군은 홀로코스트와 깊게 연관되었다. 그들 자신이 직접 저지른 학살 행위 또한 상당했으며, 간접적인 조력은 더욱 심각했다. 미국 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D. Snyder)는 저서 《블랙 어스》에서 국방군, 친위대, 보안대, 친위특무대와 질서경찰 등등은 모두 서로 얽혀 있었으므로 이들의 책임을 무 자르듯이 나누어 국방군 전투부대만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가령 국방군이 친위대를 지휘하거나 친위대가 국방군에 협조 요청을 보내는 경우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특무대는 다 합쳐 봐야 3000명 규모였고, 이 때문에 그들의 학살에는 현지인, 국방군, 다른 친위대 부대들, 질서경찰 등의 조력자들이 항상 따라붙었다. 특무대의 학살은 그들을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유대인 학살과 비유대인 학살, 포로 학살, 빨치산 진압 또한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녔기에 역시 쉽게 분리될 수 없다. 집단 총살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였으며, 가스실 희생자들의 경우에도 비유대인들과 포로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전방 부대들은 즉흥적인 포로 학대 및 학살 사건의 큰 축을 담당했다. 전방의 병사들에게 있어 포로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고, 때문에 그냥 살해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가한 포로 학대 소식들이 들려오면서 독일군 병사들의 이런 학살 행위는 '열등인종' 적들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서 정당화되었다. 가령 1941년 10월 7일 북부집단군 소속 독일 제61보병사단장 지크프리트 헤니케[2]는 휘하 병사들이 소련군에게 살해당한 독일군의 시신 세 구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수감 중이던 소련군 포로 93명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대다수의 국방군 장교단과 병사들은 치안 안정화를 담당하는 협조 요청이 들어오면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보통 아주 순순히 협조했다. 상술한 것처럼 특무대들의 경우 집단군 및 그 산하 야전군들에 배속된 존재들이었으므로 국방군 지휘관 다수는 특무대의 행동을 직접 보고받았다. 본인들이 치안전쟁에 직접적으로 투입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다.

그리고 후방에서 벌어진 파르티잔 토벌전의 경우에는 실제로는 군사 작전이라기보다 인종 청소에 가까웠다. 주로 국방군 육군 집단군들의 후방 지역(Rückwärtiges Armeegebiet)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들은 3개의 국방군 보안사단들과 수 개의 국방군 비밀 야전 경찰 제대들을 거느리고 지역 안정을 담당한 제대였다. 후방지역은 북, 중앙, 남부 집단군별로 하나씩 해서 총 세 곳이 존재했다. 후방지역 세 곳의 활동을 중앙에서 감독하던 인물은 국방군 병참감이자 후방사령부(Befehlshaber des rückwärtigen Heeresgebietes) 사령관 에두아르트 바그너 대장으로, 그는 국가보안본부 총수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장과 함께 국방군과 친위대의 협력의 기본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1941년 4월 28일 두 사람은 "육군 내 보안경찰과 보안대의 특수 임무 규정"을 설정했고 이는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원수의 명의로 예하부대에 하달되었다.

이 규정은 국방군과 친위대, 그리고 경찰이 공조하여 '토벌'을 벌이는 기초적인 협력 지침으로 기능했다. 바그너와 하이드리히의 지침으로 인해 후방지역은 같은 지역들의 친위대 및 질서경찰 사령부의 조력을 받아 국방군, 친위대, 질서경찰들을 전부 지휘할 수 있었다. "독일국방군"의 번역자인 경상대학교 사학과의 김승렬 교수에 따르면 세부적인 협력 체계는 다음과 같다: 친위대 보안대(SD)는 육군최고사령부와 협력하며, 그 산하의 친위특무대(Einsatzgruppen)는 후방사령부(Befehlshaber des rückwärtigen Heeresgebietes)와 협력한다. 실제 학살을 수행하는 특공대(Einsatzkommando/Sonderkommando)는 각 집단군과 야전군에 배속된다. 또한 국방군 집단군 사령부들은 각자의 후방 지역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무대는 생활과 보급, 이동에 관해서는 소속된 국방군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곳도 제재를 가한 곳은 없었다.

독일 국방군은 본격적인 최종 해결책(Endlösung)의 수립에도 관여되어 있다. 1942년 국방군 공군의 총사령관이자 제국원수였던 헤르만 괴링은, 국가보안본부장으로서 친위대 보안대와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이드리히가 괴링의 명령에 따라 여타 나치 인사들을 모아 연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반제 회의다. 이곳에서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절멸(Vernichtung)로 확정됨에 따라 곳곳에 절멸수용소가 세워지고 학살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3.2. 사상적 근원[편집]


"모든 장교는 유대인들이 첫째 독일인의 삶의 터전에 대한 권리와 세계에서의 독일인 위상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둘째 우리 민족을 부추겨 세계의 적들과 싸우게 하며 가장 훌륭한 우리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교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고귀한'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 사이에 근본적 차이란 없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의 위협을 감지하기 이전에 맺은 관계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정리되어야 한다. 국제적인 유대 볼셰비즘에 대한 우리의 단호한 투쟁을 통해 유대인의 진면목이 분명히 드러났다. 모든 장교는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고 유대인과의 어떤 관계도 거부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시 그 장교는 '장교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육군에서 퇴출될 것이다. 귀하의 부하 장교들이 이 지침을 숙지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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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육군 인사부장 루돌프 슈문트 대장[3]

의 명령.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79 ~ 180p에서 발췌.


국방군이 홀로코스트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던 심리적, 사상적인 이유는, 그들의 관점에서 의심스러운 민간인은 곧 빨치산이자 볼셰비키이며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시점에서 보면 이는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지만, 적어도 당대 전선의 독일군에게 이 명제는 참이었다. 나치 독일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은 유럽의 문화를 좀먹고 독일 제국의 등에 칼을 꽂아, 이길 수 있던 1차 세계대전을 패전으로 몰아넣은[4] 존재였다. 1차 대전 말기 피폐한 생활에 고통받던 국민들은 사회주의에 물들고 전쟁을 보이콧하였는데, 전후 반유대주의자들은 시위대와 사회주의자들이 유대인 배후세력의 영향이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로서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는 점차적으로 동일시되었으며 나치 독일이 들어선 이후 이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소련은 그러한 사회주의의 총 본산이었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도 했으므로 유대인과 볼셰비키들 역시 쉽게 동일시되었다.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 역시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 편견은 전장에서의 생존 위협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파르티잔 유격대, 그리고 그들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갖다 주는 민간인 또한 유대인과 동일시했다. 실제 민족적, 혈통적으로 그들이 유대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격대는 곧 유대 빨갱이였고 유대 빨갱이는 곧 유격대' 였다. 다시 말해, 유대인은 독일의 을 의미했다. 소련군 정치장교가 잡히는 대로 살해할 것을 주문한 1941년 6월 6일의 '정치장교 명령' 또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동시에 소련과 그 모태가 되는 러시아와 동유럽 자체도 독일인들이 보았을 때 유럽이라기보다는 열등한 아시아에 가까웠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유럽과 아시아는 인위적으로 분리된 대립되는 관계였다. 유럽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아시아'에[5] 대응하는 과정에서 서쪽으로 확산되었다. 그렇기에 그 중간에 놓인 러시아와 동유럽과 슬라브족의 경우, 때에 따라서는 아시아 국가로 취급되었다. 러시아를 '몽골' 내지는 '훈족'이라고 칭하거나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들이 '아시아는 란트슈트라세에서 시작한다(Asien beginnt an der Landstraße)'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논리를 반영한다.[6] 독일인들도 이런 논리를 가졌으며, 스스로를 아시아와 접한 유럽 세계의 최전선으로 생각했다. 반대로 소련은 유대 볼셰비즘이 지배하는 아시아 국가로 간주되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열등 민족인 적을 제거하는 것만이 국방군이 유럽과, 특히 독일을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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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육군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1941년 11월 17일 내린 '동부에서의 독일군의 행동 강령'. 호트 상급대장은 당시 남부집단군 소속의 17군 사령관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작전 중이었다. 《히틀러의 장군들 1: 만슈타인 평전》 338p에서 재인용


때문에 사상적, 역사적인 관점에서 독일과 소련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의 질서를 교란하는 소련과 그 열등한 아시아적 유대-볼셰비키들은 반드시 파괴되어야 했으며, 그 땅은 독일 민족의 정당한 레벤스라움으로 개발되어야 했다. 리보니아를 지배하던 독일계 기사단의 사례, 러시아 곳곳의 농지를 개발한 독일계 러시아인, 갈리치아와 발칸 반도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 등은 독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사례가 되었다. 폴란드의 경우에도 독일의 당연한 영토였으며, 열등인종인 폴란드인들은 계도되어야 했다. 과거 폴란드 분할을 통한 지배 경험은 독일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공감하던 바였으며 국방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방군은 나치 정부에 의해 찬란한 유럽 문명의 질서와 도덕을 보전한 우등민족의 수호자로 선전되었다.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말한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가 바로 이런 비약적으로 발전한 독일의 인종주의 논리를 잘 보여주며, 국방군 또한 히틀러의 인종주의 논리와 너무나도 유사한 생각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상으로 무장한 군대가 동진한 결과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인종 청소 행위로 나타났다.

'바르바로사 계획'은 처음부터 두 가지 차원에서의 섬멸전쟁을 지향했다. 작전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의 원칙에 따라 적군을 신속하게 섬멸하고자 했다. 여기서 섬멸은 군사적 관점에서 물리적인 말살이 아닌 전투수단인 지상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작전적 원칙들이 세계정복을 지행하는 전쟁 속에서 유명무실화되거나 도구화되고 말았다. 군부는 1941년 3월 30일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매우 의미심장한 어투로 이날 장군들에게, 향후의 전쟁이 서부와 북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통상적인 전쟁'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과거 나폴레옹이 시도했듯 유럽에서 러시아의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영국에게서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소련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소련의 주민들을 말살 또는 노예화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 목표는 앞으로 다가올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전쟁 목표, 즉 사상적인 '불구대천의 원수', 볼셰비즘과 유대교를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언급했다. 휘르터Hürter의 말처럼, 바야흐로 '적군의 섬멸을 지향하던 군사적 개념이 한 국가와 사상의 소멸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에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유럽에서의 전쟁수행에 있어서 지금까지 적용된 전통적인 준칙과 규칙들을 폐기하라고 지시했다. 장군들은 곧 벌어질 전쟁이 인종적, 사상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히틀러의 요구가 지나친 것이었음을 인지했다. 할더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번 전쟁의 양상은 서부 전역과 매우 다를 것이다. 동부 전역은 매우 혹독할 것이며 미래를 위해 이를 참고 견뎌내야 한다." 물론 히틀러가 자신의 계획을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점령정책을 시행했던 친위대의 행동을 목격한 이들은 당시 생활권 확보를 위한 히틀러의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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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연방군 게하르트 P. 그로스 대령의《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329p ~ 330p에서 발췌


그렇다면 상술한 인종주의 논리가 독일군의 행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현대 독일 연방군 군사사 연구소의 게하르트 P. 그로스(Gerhard P. Groß) 대령이 설명한다. 그는 당시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와 독일군의 전통적인 작전술적 사고가 결합했다고 파악한다. 독일식 작전술의 핵심은 기동전인데, 이는 단순한 기동뿐만 아니라 기동을 통해 적의 주력을 포위하고, 갇힌 적을 물리적으로 '섬멸(Zerstören)'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후방에서는 그 '적'이 정규군이 아닌 파르티잔이었던 것이다. 딱히 전선이랄 것이 없는 비정규전을 수행하는데다 자생적이기까지 했던 파르티잔의 특성상, 정규군 제대와 같이 뭉쳐 있는 '주력'이라 할 것이 불분명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방군은 나치즘과 아주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국방군 지휘부는 제거해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파르티잔의 힘의 근원을 찾아 나섰고 이에 대한 답을 준 것은 상술한 히틀러의 인종주의였다. 결국 국방군은 파르티잔의 섬멸을 위해서는 인근 마을, 더 나아가 주민들, 그리고 이민족 전체에 대한 섬멸이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렇듯 여러 종류의 인종적, 사상적 적대감과 급진적인 민족주의 논리가 단계적으로 누적되고, 최종적으로 군사 논리와 결합하여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독재 체제에 결합한 관료제와 전시 상황, 그리고 전선의 불확실성 속에서 하에서 급진적으로 실행된 것이 바로 독소전쟁이라는 파괴적인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이었다.

독일군은 절멸전쟁을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자의 위치에 있었고,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다. 다시 말해 동부전선과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주민들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집단 학살 행위는 유대인 대학살과 상당한 부분을 공유하며, 때문에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국방군 역시 홀로코스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1990년대에 국방군 전시회를 주최했던 독일 사학자 한네스 헤어(Hannes Heer)는 이에 대해 "파르티잔 없는 파르티잔 소탕전(Partisanenkampf ohne Partisanen)이라는 기이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에리히 만슈타인, 헤르만 호트, 발터 모델 등, 유명한 독일 장군들 대다수가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부분이 전후 재판정에서 자신은 비정치적 군인일 뿐이며 학살을 몰랐다고 강변했으나, 실상은 그들 또한 히틀러의 절멸전쟁이 무엇인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2.3.3. 부대별 사례[편집]



2.3.3.1. 비밀 야전 경찰[편집]

친위대 보안대가 협력한 대상은 정확히는 국방군최고사령부 방첩국 소속의 비밀 야전 경찰(Geheime Feldpolizei, GFP)로, 국방군의 게슈타포라는 평가를 받는 조직이다. 1939년 국방군최고사령부장 빌헬름 카이텔 원수[7]의 명으로 세워졌으며, 나치 독일에 반대하는 정치범, 즉 공산주의자나 유대인, 독일 점령지의 거수자들을 검거하여 고문하거나 살해했다.

프랑스의 독일군 점령지들에서 벌인 색출 작업이 가장 유명하나, 이들은 발칸과 소련 및 폴란드에서도 같은 작업을 벌이면서 주민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장교 명령을 집행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방첩국장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대장은 최고사령부로부터 받은 해당 명령을 휘하 GFP에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반나치 인사였던 카나리스마저도, 개인적인 성향과 뒤에서의 쿠데타 기도와는 별개로 방첩국장이라는 직책 상 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업무가 겹치는 친위대 보안대와는 바그너와 하이드리히가 협력 규정을 제정한 1941년부터 협업에 들어갔다. 후방사령부 산하에서 GFP가 친위대 및 질서경찰 사령관의 지휘를 받거나 반대로 SD가 국방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기도 하는 등, 둘 간의 차이는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사라져갔다. 실제로 이들은 1944년부터는 아예 친위대가 주도하는 국가보안본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된다.

2.3.3.2. 남부집단군[편집]

"유대-볼셰비즘 체제에 맞서 싸우는 야전군의 근본적 목표는 유럽 문화에 스며든 아시아의 영향을 제거하고 그 힘을 뿌리 뽑는 것이다. 이것은 장병들이 전통적인 군사 의무 이상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유럽에서 우리 장병은 전쟁의 규칙에 따른 전투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또한 철저한 종족 이념을 전달하는 자로서 우리와 종족적으로 연관된 사람들 및 우리에게 가해진 야만적 행위를 가차 없이 응징해야 할 것이다."

- 1941년 10월 10일 하달된 라이헤나우 원수의 강조 명령.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의 경우, 전쟁 직전 키이우 방면의 소련군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가 만반의 대비를 해 놓은 덕에 진격 속도가 매우 느렸다. 바꾸어 말하자면 남부집단군 최전선 부대가 어느 한 지역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으며, 때문에 학살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 그리고 남부집단군 산하의 제6군 사령관이자 룬트슈테트의 뒤를 이어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오르는 라이헤나우는 "강조 명령"으로 알려진 인종청소 장려 공문을 국방군 전체에 배포했다. 집단군사령관 룬트슈테트와 제17군 사령관 호트는 이에 동조했으며 만슈타인은 학살을 방임했다. 거기다 정치장교 명령까지 더해지자 남부집단군 구역에서는 전후방 가리지 않고 파괴 행위가 남발되었다.

그 유명한 바빈야르 학살이 바로 남부집단군이 가담한 사건으로, 국방군의 유대 볼셰비즘 논리가 홀로코스트에 있어 어떻게 동작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키예프 전투 당시 소련군 남서전선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닥뜨렸던 독일 남부집단군 소속 제6군은, 도시를 점령한 이후 소련 정치장교들과 NKVD 잔당들이 도시 곳곳에 숨겨 놓고 기폭시키는 폭발물들에 시달렸다. 결국 9월 24일 독일군 사령부 근처에서까지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이 사상당하자 독일군들은 키예프의 유대인들을 볼셰비키로 간주하여 전부 살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틀 뒤인 9월 26일의 회의에서 라이헤나우와 제6군 참모부는 프리드리히 예켈른 SS대장의 특무대 C를 불러 대처 방안을 마련하기를 지시했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바로 바빈야르 학살이다. 총살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은 특무대 C와 우크라이나인 협력자들이 맡았으나 이를 계획한 것은 제6군이었던 것이다. 장병들 역시 키예프 유대인들을 이송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유대 볼셰비즘 논리에 따라, 정치장교와 NKVD와는 아무 상관이 없던[8] 우크라이나 유대인 3만명이 바빈야르 골짜기에서 무더기로 살해당했다.


2.3.3.3. 중부집단군[편집]

"한 마을에서 고의적인 파괴 및 방해 행위가 발생했다면, 해당 마을에 사는 유대인 전체를 몰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사태를 일으킨 이들, 아니 적어도 그들의 배후 세력만큼은 확실히 척결할 수 있다."

- 독일 육군 구스타프 폰 마우헨하임 게난트 베흐톨샤임 소장이 밝힌 대파르티잔 작전 방침. 베흐톨샤임 소장은 1941년에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에 소속된 제707보병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그는 707사단 외에도 질서경찰 부대 및 리투아니아인 보조부대까지 거느렸으며, 1943년까지 벨라루스의 대파르티잔 작전을 수행하면서 대량 학살과 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 421p에서 발췌.


중부집단군의 경우, 작전 시작 이후 얼마간은 파괴 행위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티머시 스나이더에 따르면 이는 역사적으로 딱히 정치적 실체를 가져본 적 없던 벨라루스의 특성 상, 독일이 이용할 만한 현지 정치권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르투어 네베가 이끌던 해당 지역의 특무대 B는 자신들의 학살에 조력할 협력자들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현지 협력자들의 빈자리를 중부집단군 부대들과 친위대 및 질서경찰들로 채워넣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 중에서도 프리퍄티 습지는 독일 점령 지역 중 가장 파괴 행위가 심각한 지역으로 탈바꿈한다.

페도어 폰 보크, 귄터 폰 클루게에른스트 부슈, 발터 모델과 같은 중부집단군 사령관들은 벨라루스 파르티잔 토벌전을 제지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부집단군은 반 히틀러 성향이 가장 강한 부대로, 나치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훗날 히틀러 암살 시도에 중핵을 맡는 이들이 다수 분포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모델이나 클루게같은 인물들은 히틀러에게조차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 또한 파르티잔 토벌전에 있어서는 질서경찰과 친위대의 학살을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가령 1941년 9월 24일에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 열린 모길료프[9] 회의에서, 중부집단군 후방지역 사령관 막스 폰 솅켄도르프 대장은 휘하 사단장들과 함께 친위대원들의 '학살 특강'을 들었다. 당시 참석한 친위대 측 인원은 특무대 B의 아르투어 네베, 하인리히 힘러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여한 벨라루스 지역 고위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그리고 무장친위대 기병여단[10] 사령관 헤르만 페겔라인 등이었다. 그들은 국방군 장교들에게 유대인 및 파르티잔 학살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그 방식에 대해서도 강의했고, 시범까지 보여 주었다. 다음 날 인근의 크냐지치(Княжицы) 마을로 이동한 그들은 질서경찰 322대대가 실제로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색출하는 모습을 참관했다. 해당 마을에서는 거수자나 파르티잔 가담 여부가 의심되는 사람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으나, 그들은 32명의 민간인들을 처형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자였다.

이후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은 적극적으로 학살에 가담한다. 1942년 3월 26일부터 동년 4월 6일까지 이어진 밤베르크 작전(Unternehmen Bamberg)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당시 중부집단군 후방지역의 제707보병사단은 슬로바키아군, 그리고 질서경찰 제315전투대대와 함께 파르티잔 진압 작전을 개시하여 약 4400명 가량의 '파르티잔'을 제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확인된 사망자만 4396명이며 학계에서는 실종자 등 집계에 잡히지 않은 경우까지 감안하면 희생자가 6000명 이상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막상 수거한 무기는 47정의 소화기 뿐이었고, 독일군은 다 합쳐서 7명의 인명피해밖에 입지 않았다. 이는 매우 비정상적인 수치로, 이는 그들이 살해한 4400명의 '파르티잔' 중 절대 다수가 실제로는 비무장 상태인 민간인이었음을 의미한다.

1943년 3월에 있었던 들소 작전(Unternehmen Büffel)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제프 전투의 일부였던 해당 작전을 통해, 발터 모델의 제9군 30만 명은 소련군의 포위를 떨쳐내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탈출을 위한 퇴각로 정리 과정에서 그들은 약 3000명 가량의 '파르티잔'들을 사살하였는데, 막상 수거한 무기는 277정의 소총과 41정의 권총, 61정의 기관총 등 극히 소수였다. 역시 이는 9군이 살해한 이들 중 절대 다수가 실제로는 비무장 민간인이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모델은 퇴각 과정에서 일대의 모든 남성들을 강제이주시켰으며, 빠져나온 마을들에는 방화를 지시했다. 이는 민간인 피해를 고려하지 않는 전형적인 나치 독일식 빨치산 토벌전이었다.

이러한 진압 작전들은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벨라루스가 해방될 때까지 이어졌다.


2.3.3.4. 북부집단군[편집]

"모든 전투 행위는 적을 가차 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절멸하려는 확고한 의지로 수행되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 러시아 볼셰비즘 체제를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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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5월,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의 연설. 당시 그는 북부집단군 휘하 제4기갑군 사령관이었다.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35p에서 발췌.


한편 가장 진격 속도가 빨랐던 북부집단군의 경우 전방 부대들이 집단토벌에 연관된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학살에 무관하다는 소리는 전혀 아니다. 발트 3국 지역 주민들 중에서는 친위특무대와 협력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국방군 장병들이 동원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다.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자신 휘하 후방 지역의 학살을 방임했으며 그 휘하의 에리히 회프너와 레프의 후임 사령관인 게오르크 폰 퀴힐러는 아예 절멸전쟁을 긍정했다. 그들이 휘하 병력들에게 내린 지침들은 라이헤나우 명령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특히 회프너의 경우 무장친위대 제3기갑사단 "토텐코프"가 벌이는 학살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인물이었으나 정작 그 역시 인종주의적인 명령을 내림으로써 휘하 장병들의 학살을 조장했다. 특무대 A는 전혀 제지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상부에는 북부집단군이 잘 협조한다는 보고까지 올렸을 지경이었다. 가령 1941년의 리예파야 학살 당시 북부집단군 장병들은 시내에서 벌어진 집단 총살에 깊게 관여되어 있다. 그리고 리예파야에 주둔한 독일 해군 병력들은 친위특무대와 라트비아인 보조인력들이 해변 사구에서 벌이는 학살을 '관람'했다. 이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독일 해군 중사 라인하르트 비너에 의해 촬영되어, 영상으로도 남아 있다.


2.3.3.5. 12군과 F집단군[편집]

또 다른 치안전쟁이 벌어지던 발칸 반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르비아에 있던 12군사령관 빌헬름 리스트프란츠 뵈메의 경우 별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휘하 사단들을 동원해 세르비아 유대인들을 거의 쓸어버린 인물들이다. 1941년 10월 15일에서 같은 달 20일까지 벌어진 크랄례보 학살(Kraljevo massacre)이 대표적 예시다. 당시 티토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가 독일군에 저항 중이었고, 독일군은 이들을 박멸하기를 원했다. 역시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독일은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민주주의자를 싸잡아서 타겟으로 지목했고, 리스트 원수 휘하의 독일군은 다수 지역에서 우스타샤독일 공군 Ju 87 급강하폭격기대의 협조를 얻어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크랄례보 학살도 그 중 하나였다. 제342보병사단과 뵈메 대장이 이끄는 제18산악군단이 주도하였는데 제18군단 대부분은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출신자들이었고, 때문에 그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뵈메 대장은 크랄례보 학살을 앞두고 이는 세르비아인들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천명했을 정도였다. 거기다 그들은 당대 오스트리아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도 가지고 있었다. 크랄례보 학살에서만 3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1943년 이후 F 집단군이 형성되고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가 부임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2.3.3.6. 기타 인물 및 부대[편집]

에르빈 롬멜의 경우에는 서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싸웠기에 이런 '절멸전쟁에 대한 책임'은 다른 장군들과 비교해 아주 적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롬멜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몰랐다는 롬멜 신화의 주장 역시 매우 설득력이 적다. 홀로코스트 백과사전에서는 롬멜에 대해 확고한 나치즘 신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으나, 다른 국방군 장성들처럼 나치와 공통의 목적을 공유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그의 아프리카 군단에도 '친위특무대 이집트'가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고작 24명밖에 되지 않았던데다 대부분의 특무대원들은 그리스를 떠난 적이 없으나, 당장 자신의 부대에 특무대가 명목상으로나마 배치된 마당에 롬멜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장 특무대 이집트의 사령관은 1941년에 동부전선에서 가스 밴 계획을 최초로 제안했던 사람이기도 했던 발터 라우프 SS대령이었다. 만일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제2차 엘 알라마인 전투에서 롬멜을 격파하지 않았으면 친위특무대 이집트는 준비를 바치고 실제로 중동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 외 하인츠 구데리안의 경우에도 홀로코스트 참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그 역시 전후 자서전에서 극구 부정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육군참모총장으로서 학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 외 실제 병력을 지휘하는 병과대장급 이하 장교단은 보다 직접적으로 토벌에 관여된 경우가 많다. 상술한 바그너와 쉥켄도르프 같은 후방지역 사령관들이 그 예시다.


2.3.4. 장병들의 인식[편집]


...그러나 도청 기록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 기록들을 보면, 대다수 군인들이 유대인 학살 과정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오늘날까지 연구자들이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측면들까지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내용과 자신의 행동을 전혀 결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국방군 부대들이 허다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점령지에서 유대인의 조직적 처형에 여러 방식으로 관여했음을 대다수 군인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이미 알고 있었다. 즉 국방군 군인은 처형을 직접 수행하거나, 참관하거나, 공범이나 보조 인력이나 소문의 전달자로 거기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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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죙케 나이첼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65p에서 발췌.


학살에 대한 대다수의 국방군 장병들의 인식 역시 깨끗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포츠담 대학의 군사사학자 죙케 나이첼(Sönke Neitzel)과 플렌스부르크 대학의 사회학자 하랄트 벨처(Harald Welzer)가 영국군의 도청 자료를 바탕으로 진행한 연구가 잘 설명해 준다. 그들의 저서 《나치의 병사들》에 따르면, 다수의 국방군 장병들은 후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하여 아주 잘 알았다. 목격자들의 대다수는 학살을 방관하거나 구경하였으며, 가담하기도 했다. 실제로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이들 또한 소문을 통해 학살 소식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심심풀이 땅콩마냥 동료들과의 잡담 주제로 써먹었다.

다만 이것이 본인의 나치즘 사상을 표출하며 학살을 수행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이들이 절대 다수였다는 것은 아니다.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런 반유대주의 확신범도 있었으나 '끔찍하다'와 같이 학살과 토벌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리고 다수는 학살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얼핏 이는 국방군 장병들이 나치 이념과 정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조금 다르다.

나이첼과 벨처는 이에 대해, 국방군 병사들이 자신이 관여하거나 보고 들은 학살에 대해 제3자의 입장, 다시 말해 목격자나 소식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모호하게 남겨두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자신은 이러한 사건의 목격자일 뿐, 주도적 행위자가 아니었음을 강조하며 책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목격하거나 참여한 학살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조차, 실제로 그 자신이 그 현장에서 학살을 막기 위해 무언가를 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친위대의 학살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간접적으로 조력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동시에 다수의 장병들은 '아시아와 볼셰비키의 위협'에 맞서 싸운 국방군의 노고가 비판을 받을 경우에는 불쾌한 반응을 보이거나 항변하면서 비판을 차단하고는 했다. 이는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국방군 장병들이 나치당과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주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치즘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의 '파르티잔 토벌'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모순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벌인 학살을 비무장 인원에 대한 학살이 아닌 정당한 '군사 작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었다.


2.3.5. 결론[편집]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방군은 홀로코스트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나치 이념과 반유대주의, 그리고 슬라브인과 볼셰비키에 대한 적개심은 독일 사회 뿐만 아니라 국방군에도 고루 퍼져 있었다. 국방군 수뇌부는 이러한 적개심과 인종주의에 기반한 교육과 학살 명령을 휘하 장병들에게 지시했다. 주요 학살 사건에서 국방군 부대들과 지휘관들은 필요하다면 친위대나 경찰, 그리고 지역민들과 협조하였다. 그리고 유대인 학살은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확신범에 의해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므로 설사 나치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직간접적으로 홀로코스트와 학살에 관여되었다. 여기에는 전쟁 속에서 급진화되는 국가와 군대라는 위계 질서, 그리고 불확실성이 짙게 깔린 전장에서의 군사 논리 등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유들이 작용했다.

물론 징병된 1700만명의 국방군 장병들의 인식과 학살 가담 스펙트럼을 완전히 일반화할 수는 없다. 라이헤나우 원수의 강조 명령을 폐기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처럼 학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존재했고, 위조 신분증을 발급해 유대인들을 구해내다 걸려 처형당한 안톤 슈미트 중사처럼 학살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도 있으며, 유대인들을 지키기 위해 친위대원들과 충돌까지 불사했던 막스 리트케 소령과 알베르트 바텔 중위 같은 극소수의 저항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양심을 지킨 소수의 위대한 반례가 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국방군의 혐의를 뒤집을 수는 없다. 독일 연방군 군사사연구소와 프라이부르크 대학 소속 군사사학자 볼프람 베테(Wolfram Wette)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국방군 복무자 1700만명 중 구조적으로 저항한 사례는 단 100건 뿐이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장병들의 반발과 저항은 대부분 학살 소식을 전하며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그런 그들조차 방관자로서의 책임까지 벗을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국방군과 다수의 장병들 역시 홀로코스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2.4. 전범기업[편집]



2.4.1. 독일국영철도[편집]



2.4.2. 이게파르벤[편집]



2.4.3.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편집]



2.4.4. 크루프[편집]



2.4.5. 독일 토양 및 석재 유한공사(DEST)[편집]



2.4.6. 기타 기업[편집]




3. 독일 외 추축국 및 부역자[편집]


독일군 외에도 독일의 동맹국이나 괴뢰국, 점령지역 주민들이나 기업들 또한 학살에서 유의미한 비중을 차지했다.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는 독일에서 특히 급진적이기는 했으나, 상술한 것처럼 나치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독일은 점령 지역 주민들을 탄압하였으나, 동시에 그들이 가진 행정력과 반유대주의, 민족적 적개심을 이용했다. 그리고 많은 수의 점령 지역 부역자들 및 독일의 동맹국들은 각자의 이유로 독일의 힘에 편승했다.

유고슬라비아 지역의 경우, 독일군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와 협력하고 보슈냐크인들로 구성된 무장친위대 부대인 한트샤르를 동원하며 유대인과 세르비아인들을 살해했다. 그 중 우스타샤의 경우 자체적인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이온 안토네스쿠루마니아군은 독소전쟁 당시 루마니아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반유대주의를 매우 격심하게 표출하며 남부 우크라이나에서 대량 학살을 저질렀으며, 필리프 페탱 원수의 비시 프랑스는 딱히 파시즘 체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자발적으로 독일에 협조하여 유대인들을 체포했다.[11] 친독 매국노 비드쿤 크비슬링이 이끄는 노르웨이 국민정부 또한 독일에 적극 부역하며 노르웨이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슬로바키아 인민당과 그 사병인 흘린카 근위대도 친위대 특무대와 협력했다.

덴마크의 경우 독일의 간섭을 매우 약하게 받았던데다 자체적인 반유대주의도 약한 국가였다. 덴마크 유대인들은 크리스티안 10세의 비호로 다윗의 별을 달거나 시민권을 잃지도 않았으며,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심지어는 독일에 잡혀간 이들도 덴마크 정부의 요청으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덴마크 정부 또한 피난 온 외국 유대인들까지 보호해 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덴마크 정부와 독일군에 의해 체포되어 독일로 전부 보내졌고, 폴란드에서 살해당했다. 또한 6000명 가량의 덴마크인들과 일부 노르웨이인, 그리고 일부 핀란드인들은 무장친위대 제5기갑사단 "비킹"에 자원하여 복무했으며, 동유럽에서 대량 학살을 벌였다. 당장 1943년의 수확제 작전 당시 루블린에서 여타 독일군 부대들과 함께 4만 2천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한 이들이 바로 무장친위대 5기갑사단이다.

헝가리 왕국의 경우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944년까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안전한 국가였다. 헝가리는 자체적인 반유대주의가 매우 격심한 국가였음에도 왕국정부는 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1944년 초 독일군이 진주하고 최고지도자 살러시 페렌츠와 그의 화살십자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헝가리 정부는 독일에 적극적으로 부역했고, 그들은 자국 국민인 헝가리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겨주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왕국의 경우에는 반유대주의가 상당히 약한 국가였고, 파시스트 정부 또한 유대인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마저도 이탈리아 군대에 의해 보호받았다. 그러나 1943년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독일이 베니토 무솔리니를 내세워 북부에 괴뢰국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세우면서부터 이탈리아의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탈리아 괴뢰군은 독일군에 협조하여 받아 빨치산 토벌전을 벌이거나 유대인 색출에 가담했다. 그 외 불가리아 왕국의 경우에도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추축국 가입 초기부터 페타르 가브로프스키와 같은 반유대 인사들의 입김 때문에 1943년까지는 유대인들을 살해했다. 오히려 알렉산더르 찬코프같은 친독 히틀러빠 인사들이 유태인 학살에 반대하는 서명에 동참하기도 할 정도였다.

독일에 맞선 '대조국전쟁' 프레임이 강력하게 지배하는 동유럽 또한 부역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는 주로 러시아와 소련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거기다 절멸전쟁이라는 동부전선의 성격 때문에 점령 지역에서 이용할 행정력이 사실상 박멸된 관계로 양상이 서유럽과는 많이 달랐고, 보다 더 과격했다.

우선 과거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폴란드인들은 제국 멸망 이후 독립하여, 2차 대전 바로 직전까지도 독립국을 가지고 있었으나 나치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소련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다시 나라를 잃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탄압하고 다시 집어삼킨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에 매우 불만이 많았다. 그 중 폴란드는 독일의 폭압적인 지배 또한 여러 차례 받았기에 독일에 대한 부역 행위가 그나마 적었으나, 그런 경험이 없던 발트 3국은 러시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바라며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 발트 3국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는 리투아니아인들과 라트비아인들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다.

동슬라브에 속하는 벨라루스인들과 러시아인들의 경우 소련에 대부분 충성했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소련 정부와 대립하거나 집단농장 등 소련 체제의 행태에 불만이 많던 사람들은 독일군의 진격에 편승하기도 했으며, 사상에는 딱히 관심이 없지만 소련군 파르티잔들의 활동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주민들이 독일군에 협력해 파르티잔들을 쓸어버리려고 하기도 했다. 한편 우크라이나인들의 학살 가담은 좀 더 복합적인 이유였다. 그들 역시 러시아와 공통점이 많았기에 소련과 그 맹주 러시아에 충성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은 동시에 독립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기도 했으며, 실제로 러시아 제국의 붕괴 이후 잠깐이나마 독립을 이루기도 했다. 30년대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까지 겪고 집단농장으로 농촌 공동체가 강제로 해체되자, 민족주의적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 체제에 대한 반감이 불타올라 독일에 협조했다.

그리고 이 동유럽 주민들 대부분은 공통적으로 주변 유대인들에 대해서 뿌리깊은 반감을 가졌다. 특히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은 농노였던 자신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마름이나 상인 또는 귀족으로서 그들을 착취했다고 생각했다. 상술한 기독교적 이유도 있었다. 때문에 독일 부역자뿐만 아니라 독일에 반감을 가진 주민들 중에서도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유대인들 중에서도 게토 평의회와 유대인 경찰은 같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동부전선의 현지 부역자들은 주로 질서경찰 보조경찰부대(Hilfspolizei)를 구성하거나, 역시 무장친위대 외인부대에 소속되었다. 무장친위대의 경우 러시아인 및 벨라루스인 부역자들이 주가 된 카민스키 여단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들 대부분은 상술한 국방군 보안사단들 또는 친위특무대, 질서경찰과 함께 파르티잔 토벌전에 투입된다. 또는 일반친위대 소속의 수용소 경비대(SS-Totenkopfverbände) 소속의 보조병들이 되어, 절멸수용소 등지에서 경계 업무를 맡거나 처형 임무, 시신 처리 업무같이 '더러운' 일들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분노에 찬 마을 사람들이 농기구나 냉병기를 들고 나와 다른 민족이 지배적인 옆 마을을 파괴하는 겅우도 비일비재했다.

한편 프랑스 국철, 벨기에 국철, 체코슬로바키아 국철과 같은 점령지 국가들의 철도들의 경우 독일군에 징발당하거나 이용되어 유대인 이송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우선 자국에 위치한 게토에서 유대인들을 수송해 독일 또는 그 인근에 위치한 집결수용소들로 옮겼다. 그러면 거기서부터는 독일국영철도가 이들을 수송하여 각지의 수용소들로 이송했다. 또는 이들 점령지 철도업체들의 열차가 직접 그대로 아우슈비츠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독일국영철도의 홀로코스트 열차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화물열차에 사람들을 과적하여 수송하였다. 이 때문에 이들 현지 철도업체들 또한 전후에 배상금을 내야만 했다.

이 현지인들의 학살 참여는 홀로코스트의 위계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리는 일등공신이다. 다른 민족들 또한 나치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나치와 협력한 가해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동유럽과 동남유럽 발칸 반도의 경우 다수의 민족들이 같은 공간 속에서 함께 섞여 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중층적으로 존재하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역사적이고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보다 직접적으로 얽혀 있었기에 때로는 독일군보다도 더 극심한 인종적 증오를 서로에게 표출했다. 이들 또한 전후에 법적으로 처벌받았으나, 다수의 참여자들은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가장 큰 원죄를 짊어진 독일에 간편하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까지도 이 앙금은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가령 지난 2016년 폴란드의 집권 여당인 법과 정의당은 홀로코스트법을 제정해 '독일에 협력한 폴란드'를 묘사하면 벌금형이나 징역형에 처하면서 폴란드 나치 부역자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한편 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진영 중 극단적인 일부는 여전히 제20 무장친위대 척탄병사단이나 스테판 반데라 같은 독일 부역자들을 찬양한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극우와 네오 나치들은 이들 친독 부역자들의 행동을 긍정하며 이민족을 차별한다. 최악의 경우는 크로아티아였는데, 그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에 맞서며 우스타샤를 부활시키고 다시 한 번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1] 펠베르트라는 인물로, 트렌트파크 수용소에 수감된 포로 중 영국의 정보부와 협력하며 정보를 빼내던 인물이다.[2] 최종 계급 보병대장. 1943년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봉기 진압작전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후 소련 NKVD에 잡혀 옥중에서 사망했다.[3] 슈문트 대장은 국방군 내에서 나치즘 사상에 취해 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1944년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폭탄 바로 앞에 있었고,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4] 1917년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망한 후, 독일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유럽 러시아의 절반 가량을 점령한다. 이 영역은 1941년 국방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점령한 영역만큼이나 거대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독일 제국은 패하는 그날까지 자국 국경 내에 적군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독일 국민들 중에서는 서부전선이 멀쩡하고 동부에서는 이기기까지 했는데 왜 자신들이 패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물론 그런 외연적 팽창과 달리 내부적으로 독일 제국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으므로, 협상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전후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쉽게 망각되었다.[5] 여기서 아시아라는 개념은 시대별로 다르다. 고대 그리스 시기에는 아나톨리아만을 의미하였으나 점차 종교적, 문화적인 속성을 띄면서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근현대에 와서는 '동쪽, 비기독교, 비과학적, 감정적' 등의 다양한 수식어들이 종합된, '비유럽적'인 유라시아 대륙 국가들을 싸잡는 개념으로 정착한다.[6] 란트슈트라세는 시의 제3구를 지칭한다. 벨베데레 궁전이 있는 등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2차례의 빈 공방전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 동쪽이 아시아라는 표현은 빈이야말로 유럽의 최전선이며, 그 너머의 헝가리, 그리고 오스만의 영향을 받은 발칸 반도는 유럽도 아니라고 비하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7] 당시 상급대장[8] 오히려 키예프 유대인들은 독일 침공 전 대숙청 시기에는 부농, 폴란드인들과 함께 NKVD의 주된 탄압 대상이었다.[9] 현 벨라루스 마힐료우. 당시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10] 무장친위대 8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전신.[11] 프랑스에는 홀로코스트 시행을 위한 인프라(?)가 제3공화국 시절부터 얼추 갖춰져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패주한 공화파 및 국제여단 패잔병들이 프랑스로 도망쳐와 외국인 혁명가들이 급증하자 프랑스는 이 골치아픈 세계혁명 투사들을 대거 검거하여 수용소에 집어넣었는데, 나치와 협력한 비시 프랑스에서는 이들 시설과 체제를 유지하며 유대인 검거 및 강제수용에도 써먹었고 심지어 원래 수감되어있던 유대인 수감자들을 조금씩 아우슈비츠 등 나치 독일 절멸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자 이들 망명객들은 레지스탕스와 자유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비시 정부와 나치에 맞서기 시작했고, 그 덕에 종전 이후에도 프랑스 사회에서 일정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프랑스를 기반으로 反프랑코 전선의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후 프랑스에서도 이들을 파시스트에 함께 맞선 동지로 대접하며 오늘날에도 관련 행사에서 스페인 공화파의 삼색기가 게양되는등 영웅으로 대우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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