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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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기록
3. 위치


1. 개요[편집]


東牟山

발해의 첫 수도. 약 30년(698년 ~ 730년대) 기간 동안 발해의 수도였다.


2. 기록[편집]


...때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突厥)에 항복해서 도로가 막히게 되어 측천무후가 토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조영이 자기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의 계루부가 있던 땅을 차지하여 동모산(東牟山)을 근거지로 삼아 성을 쌓고 그곳에 살게 되었다.

屬契丹及奚盡降突厥, 道路阻絕, 則天不能討, 祚榮遂率其眾東保桂婁之故地, 據東牟山, 築城以居之.

『구당서』 북적열전 발해말갈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姓大氏。高麗滅,率衆保挹婁之東牟山,地直營州東二千里,南比新羅,以泥河爲境,東窮海,西契丹。築城郭以居,高麗逋殘稍歸之。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高麗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씨(大氏)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으며, 동쪽은 먼 바다, 서쪽은 거란(契丹)이었다. 성곽을 쌓아 그곳에 살게 되자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신당서』 북적열전 발해


武后時,契丹攻北邊,高麗別種大乞乞仲象與靺鞨酋長乞四比羽走遼東,分王高麗故地,武后遣將擊殺乞四比羽,而乞乞仲象亦病死。仲象子祚榮立,因并有比羽之眾,其眾四十萬人,據挹婁,臣于唐。

측천무후(武后) 때에 거란이 북쪽 변방을 공격하자(이진충의 난), 고구려의 별종인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이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요동으로 달아나 고구려의 옛 땅을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하니, 무후가 장수를 파견하여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죽였고, 걸걸중상은 병들어 죽었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이 즉위하여 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였는데, 그 무리는 40만 명으로서 읍루(挹婁)에 웅거하며 당의 신하가 되었다.

『신오대사』 발해


조영은 마침내 무리를 거느리고 동모산에 근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祚榮遂帥其衆東據東牟山, 築城居之.

『자치통감』 개원원년(開元元年:713년) 기사



3. 위치[편집]


지린성 돈화시 서남쪽에 위치한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이 유력하지만, 2021년 도문시 마반촌산성이 후보지로 떠오른 상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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