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용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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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위치
3.1. 북한 학계의 주장



1. 개요[편집]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발해 5경(京) 중 하나.


2. 역사[편집]


3대 문왕의 시대에[1] 상경에서 동경으로 옮겼고, 성왕이 즉위해 다시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책성부(柵城府)라고도 불렸고, 삼국사기에 고구려 태조대왕이 동쪽으로 책성을 순시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신당서에는 예맥의 땅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3. 위치[편집]


조선 국학자들은 동경용원부의 위치를 찾기 위해 당나라의 가탐이라는 사람이 쓴 <고금군국현도사이술>이라는 기록에서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 4부는 모두 고구려 옛 땅인데,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까지는 무릇 39역이다"[2]라고 했던 기록에 주목했다. 정약용이나 류득공은 이 기록에 따라 신라 측의 국경도시인 천정군 즉 함경도 덕원군(현 함경남도 원산시) 기준으로 39역(1,170리) 되는 거리에 위치한 육진종성군 또는 회령군이 발해의 동경용원부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현재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 훈춘시(琿春市)의 반라성(半拉城) 혹은 팔련성(八連城)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팔련성설도 설득력을 잃고 있는데, 동경용원부는 고구려의 책성이었다는 기록이 복수의 사서에 분명히 남아있기 때문에, 이곳이 동경용원부라면 책성이었던 고구려 시기의 유적이 확인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팔련성에서는 고구려 유적이 확인된 바가 없으므로 해당 문제를 지적받고 있다.


3.1. 북한 학계의 주장[편집]


북한 학자들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부거리의 토성을 발굴한 후 여기를 발해 동경용원부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북한 학계에서 팔련성을 동경용원부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해당 주장은 북한의 채태동, 장국종에 의해 제기되었으며, 연변대학교 서일범 교수에 의해 1998년 한국에 소개되었다. ##

  • 요사 지리지에는 동경용원부가 "둘레 20리에 달하는 석성이었다"고 하였는데, 팔련성은 토성일 뿐 아니라 둘레도 7리 밖에 되지 않는다.
  • 신당서 발해전에는 동경용원부가 "용원은 동남으로 바다에 면하였는데 일본도(日本道)이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팔련성은 바다로부터 200여 리나 떨어져 있는 지점에 있다.[3]
  • 삼국사기 지리지에 "발해의 책성부와 신라 천정군 사이에 39개의 역참이 있다"고 하는데, 역과 역사이의 거리가 70, 80, 90리 되는 것도 있기에 덕원에서 팔련성까지 39개 역이 있다고 해서 그 거리를 일관되게 '1,170리'라고 계산할 수는 없다.
  • 발해와 일본의 교섭 기록을 보면 겨울철에도 사신이 오갔는데, 팔련성에서 가까운 항구인 모구위(毛口威)[4]는 겨울철에 어는 항구이므로[5] 이곳을 통해 사신을 파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부거리 토성이 동경용원부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부거리성은 발해의 성으로 확인된 석성이다.[6]
  • 부거리성은 동남쪽으로 바다에 곧장 닿아 있다.
  • 부거리성이 위치한 지역은 인근에 부동항인 용제항과 여진항을 끼고 있다.
  • 조선 시대의 역참제도로 미루어 볼 때, 이곳은 강릉에서부터 39개 역의 거리에 있다.

하지만 북한 정권 특성상 외부 학계와 교류가 적다보니[7] 신뢰성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기 힘들다. 또한 북한측이 주장한 근거에 대해서도 반박이 나와 있는데,

  • 북한이 팔련성을 동경용원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제시한 요사 지리지의 원문은 정확히 다음과 같다.

開州 鎭國軍節度本濊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有宮殿 都督慶鹽穆賀四州事 故縣六 曰龍原 永安烏山壁谷熊山白楊皆廢 壘石爲城 周圍二十里

개주(開州)는 진국군의 절도를 받는다. 본래 예맥의 땅이다. 고려에서 경주(慶州)를 설치하였고, 발해에서 동경용원부로 삼았다. 궁전이 있으며, 경, 염, 목, 가 4주를 도독하였다. 예전에는 현이 여섯 개였다. 용원, 영안, 오산, 벽곡, 웅산, 백양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돌로 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0리이다.


이 요사 기록에서 개주는 지린 지역의 개주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랴오닝 성 지역의 개주, 즉 지금의 봉황성을 가리킨다.[8]

  • 팔련성이 2,800m 정도의 작은 성이라고는 하지만, 발해 평지성 가운데 상경성을 제외하면 이 정도 규모의 큰 성을 찾기도 어렵다.[9] 또한 부거리 석성에서는 팔련성과는 달리 궁궐의 터가 확인되지 않았다.[10]

  • 『신당서』 발해전에서 “동남쪽으로 바다와 면해 있고 일본도이다”고 적었기는 하지만, 바닷가에 면해 있다면 굳이 동남쪽이라는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없으며, 용원이 바닷가와 일정한 거리가 있었기에 그 구체적인 방위를 제시한 것이고 ‘일본도’에 대해 적은 것은 일본도에서 바다로 나가는 부두를 가리켜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신당서』 직관지에 의하면 30리가 한 개 역이 되는데 이것은 보편적인 거리를 말한 것이며, 개별적으로 역과 역 사이의 거리가 30리가 아닌 것을 예로 들면서 39개 역 1,170리와 가까운 노정에 위치한 팔련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 확실히 모구위는 제일 추운 12월 이후면 얼지만, 발해에서 일본으로 배가 떠난 시기는 알 수 없고 일본에 도착한 시간을 일본측의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는데 겨울에 일본에 도착한 차수는 채태형의 통계에 의해도 몇 번이 안된다.[11] 어쩔 수 없는 사정에 의해 겨울에 일본으로 떠나야 할 때 라진항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마저도 팔련성이 동경용원부가 아니라고 부정될 결정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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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당서에는 당덕종 정원(貞元) 연간이라고 했는데, 이는 785년 정월부터 805년 8월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2] 渤海國南海ㆍ鴨綠ㆍ扶餘ㆍ柵城四府,幷是高句麗舊地也。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凡三十九驛[3] 이건 발해 당시의 해안선과 지금의 해안선이 달랐을 여지도 없지 않다.[4] 지금의 러시아 포시예트 만[5] 함경북도 선봉군 그 이북으로는 겨울철에도 바닷물이 얼기 때문에 배가 다닐 수 없다. 바닷물이 얼지 않는 라진항 이남지역에서만 겨울철에 배가 떠날 수 있다.[6] 부거리의 발해 성은 평지에 돌로 쌓은 성과 산에 의지해 쌓은 토성 이렇게 두 개가 존재한다.[7] 의외로 중국 고고학계와도 그다지 교류가 없다고 한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북한 고고학자는 애초에 중국 입국비자를 안 내줘서, 만주지역 답사는 오히려 남한 학자가 더 자유롭다고 한다. 물론 남한 학자가 발해유적지를 둘러보러 오는 것을 중국 측이 방해한다는 증언도 많지만, 일단 남한 사람들은 특별케이스가 아니면 중국 비자가 거의 그냥 나온다.[8]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뒤에 그 유민들 가운데 일부를 요동 지역으로 강제이주시켰는데, 그 와중에 지금의 지린성 일대에 해당하는 발해 지명들이 요동 지역으로 옮겨진 것들이 좀 된다.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이 이미 요사의 이러한 오류점을 지적한 바 있다.[9] 물론 이 점은 부거리 석성에도 해당되는 것이기는 하다.[10] 사실 부거리 성은 이미 20세기에 굉장히 황폐화되어 성벽의 기단부가 드러나 있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기는 했다.[11] 중국의 학자 왕협(王俠)은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떠난 것은 바다가 얼기 전인 가을이었을 것으로 지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