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코 상황후/결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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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미치코 상황후

1. 친정 집안
2. 유년시절
3. 아키히토 황태자와의 만남
4. 험난한 약혼 과정
5. 황태자의 약혼녀, 그리고 밋치붐
6. 황태자비가 되다
7. 결혼 과정의 진실
8.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반발
8.1. 상세
8.2. 황실의 조력자



1. 친정 집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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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의 쇼다(正田) 가문
미치코 상황후의 친가인 쇼다 가문은 그 당시 아시아 최대의 제분 회사이자 일본 재계 20위 안에 꼽히는 닛신제분(日清製粉)을 사업체로 운영하던 굴지의 재벌이었으며,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하급 사무라이의 후손으로 신분이 많이 낮긴 했지만 백작 가문인 옛 화족이다.

미치코의 할아버지인 닛신제분의 창업주인 쇼다 데이이치로(正田貞一郞)는 귀족원 칙선의원을 지냈고, 닛신제분 계열뿐만 아니라 현재의 도부 철도 경영에도 참여하여 사장을 역임했다. 아버지는 닛신제분의 사장이던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郞), 어머니는 소에지마 백작가의 영애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1] 형제로는 오빠 이와오(巌), 여동생 에미코(恵美子), 남동생 오사무(修)가 있었다.

재벌가의 자녀들이자 황후를 형제로 둔 만큼 이들도 대단한 혼사를 치렀는데, 이와오는 제27대 일본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의 손녀와, 에미코는 일본 체육협회 회장이자 쇼와 전공주식회사의 전무이사를 역임한 안자이 타카유키(安西孝之)[2]와, 오사무는 일본 5대 정밀화학기업 중 하나인 쿠라레(Kuraray)의 차녀이자 旧 후작의 손녀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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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오빠 이와오, 여동생 에미코, 남동생 오사무와 함께.
쇼다 가문이 경영하는 닛신제분은 아버지 히데사부로를 거쳐 현재 남동생 오사무가 맡고 있다. 안도 모모후쿠가 설립한 라면회사 닛신식품(日淸食品)과는 이름만 같은 별개 기업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에 공장을 뒀으나 8.15 광복 후 1953년 조선제분(현 사조동아원)에 불하됐다가 1958년 신설회사 대선제분으로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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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기간이던 1959년, 친정가족들과 함께

2. 유년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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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어머니 후미코와 함께.
1934년 10월 20일,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에서 닛신제분(日清製粉) 사장 쇼다 히데사부로와 부인 후미코의 2남 2녀 중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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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아버지 히데사부로, 어머니 후미코, 오빠 이와오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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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이시키 해변에서 사촌과 함께 놀고 있는 미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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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만 6세의 미치코. 이 사진은 미치코의 어린시절 사진 중 가장 대표적인 사진으로, 2번째 사진은 모교인 덴엔쵸후 후타바(田園調布雙葉) 여학원의 교장실에 걸려 있다.

어린 시절의 미치코는 미국 유명의 아역배우 셜리 템플처럼 곱슬머리였기 때문에 “템플쨩(テンプルちゃん)”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1930년대 중반에 태어나 1950년대 말 일본 황실로 시집가기 전까지, 미치코는 그야말로 부유한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최고만을 경험하며 자랐다. 1940년대의 일본은 도쿄만 해도 빈민들이 들끓었으나, 미치코는 당시 상황과는 전혀 무관하게 부모님과 가정의 보호 아래에서 안온한 생활을 누렸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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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고산을 맞이해 후리소데를 입은 미치코.
젊은 시절 독일 유학을 다녀온 아버지 히데사부로는 그 옛날에 벽난로피아노 등을 갖춘 서양식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쇼다 일족은 골프, 스키, 테니스 등의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고, 가족들의 모습을 담은 홈 비디오를 찍었으며, 미국유럽으로 해외여행도 다녔다. 다시 말하지만 1930~1940년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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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후타바 여학원 유치부 시절의 미치코.
쇼다 가문이 가톨릭 집안이었기 때문에 미치코는 가톨릭계 미션스쿨이자 생 모르 수녀회[4]에서 운영하는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 유치원에 입학했다. 치요다구에 위치한 후타바 여학원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는 중고일관교로, 미치코의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을 다니다가 미국으로 가서 현지 고등학교에 편입했고, 마사코의 친정어머니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 역시 후타바 여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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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교사 노하라 이쿠코에게 지도를 받고 있는 미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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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후타바 여학원 유치부 졸업식에서.
유치원을 졸업한 미치코는 후타바 여학원 초등학교에 진학했다. 초등부 시절 급우들에게는 ‘밋쨩(ミッちゃん)’, ‘쇼다 밋쨩(正田のミッちゃん)’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달리기 등의 스포츠를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담임교사였던 노하라 이쿠코는 미치코에 대해 "성실하고 활발했지만 지기 싫어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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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후타바 여학원 초등부 1학년 시절의 미치코.
미치코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으며, 전쟁이 고조되던 1944년에 쇼다 일가 모두 피난을 가 카나가와현 쇼닌백합학원, 군마현 다테바야시 미나미초등학교, 카루이자와 제1초등학교로 전학을 몇번씩 다니며 초등학교 5학년 여름에 카루이자와에서 패전을 맞았다고 한다. 이후 다시 후타바 여학원 수험을 치를 때 분쿄구 야마토항에 잠시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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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후타바 여학원 초등부 졸업식에서. 뒷줄 맨 가운데가 미치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후타바 여학원이 시나가와구의 집에서 너무 멀다는 할머니 쇼다 키누(正田きぬ)의 뜻으로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세이신 여학원 중등과에 입학한다. 참고로 세이신 여학원 부지엔 옛 구니노미야(久邇宮) 저택이 보존되어 있는데, 시어머니 고준 황후(나가코)의 친정집 옆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 이 이야기만 들으면 '고부 간의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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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세이신 여학원 고등부 1학년 시절의 미치코(가운데). 운동회에서 급우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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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수학여행을 간 고등부 2학년 시절의 미치코(맨 오른쪽). 카와구치 호수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
중고등학교 시절의 미치코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으며, 피아노회화, 요리, 다도 등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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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세이신 여학원 고등부 졸업식에서.
세이신 여학원 고등부를 졸업한 뒤 동(同) 학원의 세이신여자대학 영어영문학과입학했다.

미치코는 양장기모노 둘 다 완벽하게 어울리는 얼굴과 큰 키(161cm)를 가진 미인으로 유명했다. 피아노하프 등 다양한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뤘으며, 칸다헌책방 거리를 드나들며 책을 보는 것이 취미였다고. 또한 세이신여대의 학생회장까지 역임하며 주변인들의 동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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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월 1일, 새해 첫날쇼가쓰를 맞이해 친구의 집에서 카루타를 하고 있는 미치코.
이처럼 결혼상대의 폭이 무궁무진하게 넓고 각광받던 미치코는 내로라하는 부유층 자제들과 맞선을 봤는데, 그중에는 미시마 유키오도 있었다고 한다.[5] 알다시피 결혼까지 이어지지는 못했고, 몇년 뒤 유키오는 일본화가 스기야마 야스시(衫山寧)의 장녀인 요코(瑤子)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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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가루이자와 테니스 코트에서의 미치코.
1957년 3월에는 세이신여자대학 영어영문학과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졸업식에서는 졸업생 대표로 연설도 했다.

졸업 후 미치코는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뜻에 따라 신부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여 직업을 가지는 일이 흔치 않았으며, 부유한 남성을 만나 결혼해 주부로서 가정에 머무르며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6] 그리고 대학 졸업 당시 미치코는 만 22세로, 당시로서는 혼기가 꽉 찬 나이였다.

3. 아키히토 황태자와의 만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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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신여자대학을 졸업한 해인 1957년 8월 19일, 쇼다 미치코는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 참가했다가 아키히토 황태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혼성복식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아키히토 황태자 팀이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미치코는 같은 팀의 선수에게 힘내자며 의욕을 북돋아주며 점차 점수를 내갔고, 경기는 아키히토 황태자 팀의 패배로 끝났다. 아키히토 황태자의 친구이자 황태자와 같은 팀을 이루었던 오다 카즈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폐하께서 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렇게 정확하고 끈덕지게 되받아치니, 못 당하겠어. 대단해.”라고요. 그 표정엔 아쉬움은 조금도 없고, 따가운 여름 햇살 아래 오히려 시원시원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오다 카즈오

이후 아키히토 황태자는 쇼다 미치코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점차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아키히토는 미치코의 사진을 <여자친구>라는 제목으로 궁내청의 문화제에 출품했지만,[7] 그 누구도 미치코를 황태자비 후보라고 생각지 않았다. 미치코가 재벌가의 영애이긴 했어도 그동안 황실은 신붓감을 황족 내지는 화족에서만 뽑았다. 특히 미래의 황후인 황태자비가 될 여성은 황족이나 화족 중에서도 오직 5개의 공작 가문(고셋케)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1958년 6월, 아키히토 황태자는 대신들에게 “나는 쇼다 미치코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다.”라고 의중을 밝혔고, 같은 달 21일에 미치코를 황태자비 후보로 삼는것에 대해 궁내청 전원이 찬성한다. 이후 아키히토의 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최종 허가만 기다리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이 사실은 대신들에 의해서 쇼다 가문의 카루이자와 별장에 은밀하게 전해진다.[8]

4. 험난한 약혼 과정[편집]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전언에 쇼다 가문은 비상이 걸렸다. 히데사부로와 후미코 부부는 ‘뜻밖의 일로 놀라, 이 일은 고사하겠다(事の意外に驚き, これを固辞)’라는 뜻을 밝힌 후, 큰딸 미치코를 테니스 코트장에 보내지 않다가 때마침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이신 여학원 총동창회[9]에 일본대표로 뽑혀 참가한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출국시킨다. 사실상 도피 여행으로, 거절의 의미였던 것이다. 출국 직전 궁내청 관계자가 쇼다 가를 방문해 부부를 설득했으나, 두 사람은 ‘이미 결정된 일이다’라며 차갑게 대응했다.

그렇게 9월 3일 출국한 미치코는 벨기에를 시작으로 54일간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을 여행한다. 1958년 10월 20일, 마지막 여행지인 미국에서 만 24세의 생일을 맞이한 미치코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압박이 두려운 나머지[10]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며 "여기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11]

미치코가 귀국한 후, 아키히토 황태자는 전화를 통해 미치코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아키히토 황태자는 미치코와 통화한 날이면 통화에 대한 내용을 일기처럼 노트에 기록했다고 하며, 미치코가 피곤하거나 몸이 좋지 않은 이유로 전화를 받지 못한 날에는 상심했다고 한다.[12] 11월에 들어서면서 아키히토 황태자는 전화로 "나와 혼인해줄 수 있겠느냐"라고 묻고, 미치코는 이를 승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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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11월 27일, 황실회의에서 쇼다 미치코를 황태자비로 내정하는 것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이 사실은 일본 전역에 대서특필된다.

이때 자택에 있던 미치코는 내정 통보를 접하자마자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 미리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은 후, 기자회견을 위해 부모님과 함께 황궁궁내청을 방문한다. 위 사진은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아버지 히데사부로, 어머니 후미코와 함께 자택을 나서는 모습이다. 현관에서 미치코를 바라보는 인물들은 그녀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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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견장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의 매력에 대해 질문받자, 미치코는 "매우 성실하고, 멋져서, 마음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바칠 만한 분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이 발언은 유행어가 되었다. 또 첫인상에 대해서는 "청결한 분"이라고 했다.

기자회견 영상[13]


5. 황태자의 약혼녀, 그리고 밋치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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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교육(お妃教育)을 받으러 가는 미치코.
미치코는 몇 달 동안 황태자비 수업[14]을 받았다. 그리고 "결혼 비용을 여행하는 데 전부 써버렸어요. 가방 하나만 들고 가더라도 저를 받아주실 수 있다면…"이라는 미치코의 말에 아키히토 황태자가 "OK"라고 한 것과 달리, 쇼다 가문은 황실로 시집가는 큰딸을 위해 6톤 트럭 3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혼수를 준비했다.[15] 당시 금액으로 약 3,000만 엔이며 현재 시세로는 약 3억 엔. 만약 쇼다 가문이 재벌가가 아니었다면 기둥 뿌리를 뽑아도 모자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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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받으러 가던 중 시민과 인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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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어머니 후미코 여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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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월 14일, 노사이 의식(納采の儀)[16]을 치른 후, 부모님과 함께 황실에 인사를 드리러 황궁을 방문한 미치코.[17]

일본의 대스타, 영화배우라도 그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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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코트 위의 로맨스"라고 불리는 미치코와 황태자의 러브스토리는 당시 대다수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미래의 황후로 선택된 미치코가 평민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했다. 이를 계기로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과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해 텔레비전 판매량이 2배나 급증하는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경제, 패션, 미디어 등등 일본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청초하고 지적인 미치코의 미모가 절대적인 인기를 모아, 여성들이 미치코를 동경하고 따라하는 유행이 생겼다. 이로 인해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와 처음 만난 테니스 코트에서 입고 있던 V넥 스웨터, 헤어밴드, 11월 15일 기자회견 당시 입고 있던 흰 드레스, 스톨, 긴 흰색 장갑 등 소위 밋치 스타일(ミッチーㆍスタイル)이라는 패션이 대유행했다.

미치코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헤어밴드는 일명 밋치 밴드(ミッチーㆍバンド)라고 명명되었으며,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 종이인형과 기자회견 당시 모습을 본딴 인형이 불티나게 팔렸다. 기자회견 패션은 미치코의 트레이드 패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 국민들이 미치코라 하면 바로 떠올리는 패션이었을 정도. 이 패션은 특히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6. 황태자비가 되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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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는 날 아침, 친정을 떠나는 미치코. 좌측부터 오빠 이와오, 여동생 에미코, 남동생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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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4월 10일, 마침내 전 일본 국민의 환호와 축복 속에 치요다구황궁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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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시부야에 있던 동궁 임시거처까지 마차가 달리는 퍼레이드가 열리던 길가에는 무려 53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NHK, 아사히 TV 등의 거물급 방송사 취재진이 꼭두새벽부터 진을 치고 앉아 기다렸다.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조화 등으로 장식한 황태자 부부의 사진을 내걸고 만세를 부르는 등, '세기의 성혼'이라 칭해지며 일본 역사상 이런 결혼식은 없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체감하고 싶다면 아래 영상 참조.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 영상.
결혼식이 모두 끝난 직후 동궁에서의 황태자 부부 모습과, 결혼 첫날밤 불이 꺼진 동궁어소 아래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수많은 인파가 모인 국립경기장에서 봉화를 피우고, 마치 서양의 궁정 무도회를 연상시키는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결혼식의 열기는 밤늦도록 가라앉을 줄 몰랐다. 또한 당시 컬러 텔레비전도 함께 보급되던 시기라, 컬러버전에 소리도 녹음되었다.

미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 관련영상

7. 결혼 과정의 진실[편집]


세간에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가 그저 '우연히' 테니스 코트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그저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이기만 한 것처럼 알려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 과정에는 좀 더 복잡한 사정과 치밀한 계획이 뒷이야기로 숨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은 많은 변화와 혼란을 겪었고, 이는 일본 황실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수많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으로 전락했고, 신으로 숭배되며 아라히토가미라고 불리던 천황 일가는 인간선언을 했으며, 황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잃고 새로 채택된 일본국 헌법 상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따라서 황실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야만 했다.

실제로 패전과 신적강하 이후로, 쇼와 덴노는 일본의 민심을 잡기 위해 꾸준히 지방순회를 했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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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이전에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로 거론되던 기타시라카와 하츠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어 왔다.

하츠코의 아버지는 방계 황족 기타시라카와노미야 나가히사(北白川宮永久) 왕[19], 어머니는 화족 출신인 도쿠가와 사치코(德川祥子), 할머니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인 카네노미야 후사코(周宮房子) 내친왕[20]이다. 즉 하츠코는 철저하게 황족&화족의 혈통으로 태어나 전통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구시대적인 규수였다. 새롭게 바뀌어야 할 황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개혁파 인사들은 일류 여자대학교의 우등생들을 중심으로, 하츠코와 반대되는 유형의 규수들을 은밀하게 물색했다. 그 가운데 쇼다 미치코도 있었던 것이다. 개혁파 인사들은 부유한 평민 가문 출신이며, 서구적이고 현대적이며, 아름답고 총명한 미치코를 새로운 시대의 황태자비에 적합한 인물로 꼽았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여 극비리에 황실 휴양지인 가루이자와의 테니스 코트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가 만나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21] 이후 이어진 두 사람의 연애결혼과, 황실 입성 후 미치코가 보여 준 파격적인 면모들을 생각하면, 개혁파 인사들의 작전은 대성공한 셈이다.

여담으로 황태자비 후보에서 탈락한 하츠코는 고준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또한 하츠코와 동갑이며 고준 황후의 막내(5녀)인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도, 1960년에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다.

8.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반발[편집]


일본 황실에서 특정한 출신에 따라 황태자비를 결정하는 일은 케이타이 천황 이래 1500년이나 되는 전통이었다. 막부 정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헤이안 시대에 황실이 직접 통치를 하는 대신 후지와라 씨가 권력을 독점하고 나라를 통치했다. 1300년 동안 황후는 후지와라 씨 출신의 여성이 독점하였다.

이후 황후의 자격은 후지와라 씨의 후손인 5개 가문(고셋케)이나 황족 출신 여성으로 굳어졌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고셋케는 화족으로 편입되어 공작 가문이 되었다. 그래서 방계 황족의 신붓감은 같은 황족이거나 화족이기만 해도 조건을 충족했지만, 미래의 황후인 황태자비는 천 년 동안 이어진 전통에 따라 황족이거나 화족 중에서도 고셋케 출신이어야 했다.[22] 그러나 앞서 서술된 이유 때문에 최초의 평민 출신 황태자비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8.1. 상세[편집]


밋치 붐(ミッチーㆍブーム)이라고 불리며 세간의 화제가 되고 많은 일본 국민들이 그녀에게 열광한 것과는 달리, 평민 출신 황태자비에 대한 대한 황족화족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수년간 아키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후보를 관리하던 고준 황후와 여러 황족, 화족 부인들은 개혁세력의 적극 추천으로 인해 황태자비가 되면서 자신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미치코를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단순히 그녀가 평민이여서 뿐만이 아니었는데, 18세기 영국 몰락 귀족들과 미국 신흥 부자들의 결혼이 열풍했던 것과 같이, 당시 신적강하로 인해 신분제가 무너진 일본 사회에서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평민으로 전락한 방계 황족과 화족 여성들이 살 길은 부유한 가문과의 혼사였다. 하지만 상류층의 최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황실의 미래 안주인으로 선택된 여성이 평민이라는 것은, 그녀들이 설 자리와 명분을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

쇼와 덴노는 "이제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며 고준 황후를 위로했으나, 황후는 미치코를 몹시 미워하여 두 아랫동서 지치부노미야 세츠코 비,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와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다. 또한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뱌쿠렌,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23] 이츠코의 여동생이자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24] 등등, 구 황족과 화족 여성들이 똘똘 뭉쳐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미치코는 무사히 황실로 시집왔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집요한 학대를 가하였다. 하츠코는 결국 미치코에게 밀려 황태자비가 되지 못했지만, 고준 황후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25]를 자신의 시녀장(侍女長)으로 두었다. 다케코의 후임은 하츠코의 어머니 사치코였다. 고준 황후가 누구를 자신의 며느리로 두고 싶었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의 시녀장은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였는데, 스미코는 미치코 황태자비를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섰던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스미코가 어떤 인물이었을지는 뻔하다.


8.2. 황실의 조력자[편집]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올케인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게코는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온 지 2년 뒤인 1961년, 불과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어린 3남 2녀를 두고서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때 시게코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은 것을 두고도,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1] 결혼 전의 이름은 소에지마 후미코(副島富美子).[2] 안자이 가문은 일본의 3대 재벌 중 하나인 스미토모 일족, 그리고 사토 에이사쿠 가문, 미키 다케오 가문, 하토야마 가문과도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다.[3] 이 시대를 다룬 미디어와 작품들에서도 힘든 생활을 하는 국민들의 모습이 태반으로 나온다. 영화 반딧불이의 묘의 말미에는 상류층으로 보이는 소녀 무리가 전쟁 중에 아예 멀리 피난갔다가 돌아와 ‘역시 집이 최고야’라며 즐거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군인의 자식들로 유복하게 살긴 했으나 아버지는 전사하고 폭격으로 어머니까지 잃자 몸을 의탁하던 친척집을 나와 비참하게 굶어죽은 주인공 남매와 더 대비됐다. 미치코의 포지션은 이 소녀들의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4] 아기예수의 애덕교육수녀회. 아직 한국에는 진출하지 않은 수도회이다.[5] 당시 미치코는 대학교 2학년이던 21살이었다.[6] 사실 그 시대에는 대학은커녕 여자가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것도 엄청난 고학력이었다.[7] 연인을 칭할 때 쓰는 ‘여자친구’의 의미가 아닌, 여사친을 이르는 말이였다고 한다.[8] 궁내청이 찬성하고 황실의 큰어른인 쇼와 덴노의 허락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에서 쇼다 가문의 의사는 오로지 명목성으로, 이미 판을 다 짜놓았다는 것이였다.[9] 성심수녀회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세계 모든 성심학교 관계자들이 모여 동창회를 개최한 것이다.[10] 영국다이애나 왕세자비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첫아이 윌리엄 왕세손임신했을 당시 온 세상이 본인만 감시하고 있다고 느껴져 극도의 불안상태에 시달렸기 때문에, 유도분만으로 예정일보다 1주일이나 빨리 출산했을 정도.[11] 자살은 여러 원인이 존재하지만 미래의 황후인 황태자비가 되어서 개인이 말살된다는 극단적인 스트레스 내지는 공황장애 역시 원인 중 하나가 된다.[12] 황태자의 연락을 이렇게 회피하는 경험 자체가, 아키히토에겐 처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3] 영상을 보면 목소리가 정말 곱고 예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4] 일명 오비교육(お妃教育). 일본 황실에 시집오는 여성들이 받는 교육으로, 역대 신붓감들 중에서 이 교육을 제일 어려워한 사람은 마사코 황후였다. 오랜 서양에서 성장한 마사코 황후는 신토 등 일본의 전통을 잘 이해하지 못해 영어로 된 책으로 수업을 받기도 했다. 교육과정 및 과목은 이전보다 훨씬 단축된 것이었는데, 1993년 당시로서는 만 29세로 노처녀였던 마사코 황후를 한시라도 빨리 결혼시켜 후손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한다.[15] 여기엔 미치코 상황후가 결혼생활 초기인 60년대에 입던 양장과 드레스, 구두, 엑세서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6] 이른바 납채. 일본 황실에선 이 의식을 치르기 전까지 결혼할 상대의 신분을 혼약자가 아닌 ‘혼약 예정자’로 규정한다. 노사이 의식을 치름으로써 비로소 정식 약혼자가 되는 것.[17] 미치코의 키는 161cm로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굉장히 큰 키였으나, 부모인 히데사부로와 후미코의 키가 더 컸음을 알 수 있다.[18] 이는 일본 만화 맨발의 겐에서도 다뤄지는 장면이다. 주인공 나카오카 겐은 "천황이 왔다!!"며 감탄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나라 꼴이 이 모양이 됐는데, 천황이 오는 게 무슨 소용이야?!"라며 울분을 터뜨린다. 이와 같이 그 당시 천황의 지방순회를 아니꼽게 보는 일본인들도 상당했을 것이다.[19]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아들과 손자까지는 친왕, 증손자부터는 왕이라 한다. 단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친왕, 5대손부터를 왕이라 했다.[20]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단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 5대손부터를 여왕이라 했다.[21] "황태자 전하, 이쪽은 이번에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 졸업한 쇼다 미치코 양입니다. 미치코 양, 이분은 황태자 전하이신데 아직 나이에 맞는 여자친구가 없으시니 가끔 함께 테니스라도 쳐 주세요."라는 식으로 말이다.[22] 고메이 덴노의 정실 에이쇼 황후,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는 모두 고셋케 출신이었고, 쇼와 덴노의 아내 고준 황후는 방계 황족 구니노미야 가문 출신이었다.[23]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24]이방자 비에게는 이모가 된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으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진짜 이유는 평민이 황후가 된다는 위기감도 물론 있었겠지만, 쇼다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 가문이 무진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25]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北白川宮能久) 친왕의 3녀. 오빠인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恒久) 왕은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6녀인 츠네노미야 마사코(常宮昌子) 내친왕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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